|
http://www.zoglo.net/blog/read/jingli/361605/0/0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3.29.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1장 : 촛불의 과거
*불꽃이 현자들을 사색하게 했던 그 아득한 지식의 시대에 촛불은 ‘은유=사유’를 나타냈던 것. 고독한 철학자에게 수많은 꿈을 주었고, 철학자의 책상 위에는 자신들의 형태에 갇힌 사물들이나 서서히 가르침을 주는 책들 옆에 촛불의 불꽃이 무제한의 사유를 촉발시켰고 한없는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던 것. 그 때 불꽃은 다양한 세계들을 꿈꾸는 몽상가에겐 세계의 한 현상이었다. (촛불은 어떤 사유의 시발점을 안내하는 물체)
*꿈-우리가 우리의 꿈속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지닌 꿈의 소통에서 단순성의 뿌리와 다시 만날 때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의 불꽃 앞에서 우리는 세계와 정신적으로 소통한다. 물론 명상하는 철학자의 몽상에 끼어드는 낯선 사유가 그렇듯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그것은 방해를 받는다.그러나 고요의 시간이 진정으로 울려 위대한 고독이 진정으로 지배하게 되면, 몽상가의 마음과 불꽃의 중심에 동일한 평화가 자리 잡고,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간직하며, 확고한 사유처럼 수직성의 자기 운명으로 곧장 달려간다. (평화로운 몽상, 우아한 연속성, 평온이야말로 촛불이 주는 생의 이미지임.)
*세계에 대한 몽상가는 자신의 희미한 등불로부터 하늘의 거대한 별들까지 손쉽게 이동하는 과정의 독서를 하며 그런 지적 행위를 통해 열광한다. 특별한 이미지가 우주적인 가치를 지닐 때, 그것은 현기증나는 사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예: “불꽃은 축축한 불이다.” (불과 물의 결합에 대한 사유)-불타는 액체-하늘을 향해 수직적인 냇물처럼 흘러가는 것-몽상하는 글 속에서 초월적 사유가 나타남.)
*불꽃은 작가가 되고 싶게 만드는 유혹이다. 주베르(프랑스의 모랄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가 우리를 이끌어가는 진지한 몽상 속에는 세계의 현상 하나가 표현되고 따라서 지배된다. 이 현상은 그것의 현실을 넘어선 어떤 피안에서 표현된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인간적 현실로 바꾼다.
*불꽃 앞에서 밤샘하는 자—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불꽃은 꺼지기 쉬우면서도 꿋꿋하다. 한번만 바람이 불어도 이 불빛은 꺼져 버린다. 불씨 하나가 그것을 다시 살린다. 불꽃은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는다. 삶과 죽음—단순한 논리의 톤으로 존재와 부의 변증법들을 전개하는 철학자들의 사유 놀이는 태어나고 죽는 불빛 앞에서 극적으로 구체적이 된다. -촛불의 몽상가, 작은 불꽃의 모든 몽상가는 이 점을 알고 있다. 사물들의 삶과 우주의 삶에서 모든 것은 극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촛불을 동반하고 몽상할 때 두 번 몽상한다. 불꽃 앞에서 명상은 “두 세계에 대한 찬미이다.” -파라셀스 (스위스의 연금술사. 점성가. 의사, 정신신체의학의 선구자)
*불꽃 속에서 철학자는 인간화의 사례인 하나의 사례-현상, 우주의 한 현상을 만난다. -‘우리의 부정한 것들을 태우는 현상’- 불꽃은 정화되고 정화시키는 사물이다. 두 눈과 영혼을 통해 두 번 몽상가를 비춘다. 여기서 은유들은 현실들이고, 현실은 관조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우리는 현실을 은유화하면서 그것을 관조한다.
*이러한 몽상 속에서 세계는 그것의 모든 사물들에게서 인간의 어떤 운명을 띤다. 그런데 세계는 그것의 내밀한 신비 속에서 정화의 운명을 원한다. 인간이 보다 나은 인간의 씨앗이고, 노랗고 무거운 불꽃이 희고 가벼운 불꽃의 씨앗인 것처럼 세계는 보다 나은 세계의 씨앗이다. 불꽃은 그것의 흰빛을 통해서 흰빛의 활력 있는 정복을 통해서 그것의 본연적 장소와 합류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현상들을 주재하는 모든 가치들보다 더 큰 가치가 정복된다. (삶의 두려움이나 부정적인 어떤 것들은 불꽃이라는 몽상을 통해서 흰 불꽃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실제로 그 과정을 통해 삶은 정화된다.)
*불꽃은 더 이상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대상이 된 것이다. 그때 모든 게 가능하다.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자신이 연소되는 한 세계의 증인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에게 불꽃은 어떤 생성변전으로 향한 하나의 세계이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고, 시간은 출렁인다. 빛이 떨릴 때 모든 것이 떨린다. 불의 생성변전은 생성변전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불 속에서 상상하면 빠르게 흘러간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 모든 것을-폭력과 평화까지- 꿈꿀 수 있다. (촛불인 불꽃을 통해 인간은 사물의 가장 철학적 생성변전을 맛볼 수 있다는 것. 태어나고 죽고 변화하고 그리고 흘러가는 불꽃의 변화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사유하는 이미지의 최대치가 아닐까...하는 비평적 논리. 그것이 평화로운 삶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시와 몽상의 씨앗)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4.5.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촛불의 몽상가의 고독
*촛불의 몽상과 기억의 몽상으로부터 우리는 고독의 몽상 속으로 들어간다. 고독한 불꽃은 그 자체만으로 몽상가의 고독을 가중시키는데,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 켜진 촛불 앞에서는 보다 덜 고독을 느끼는데....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환적 개성이 있다. 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상가에게는 자신의 생성변전에 의해 마음이 빼앗긴 존재의 상징이다. 불꽃은 생성변전의 존재이고, 존재의 생성변전이다.자신을 고독하고 완전한 불꽃으로 느끼고, 생선변전의 존재의 드라마 자체 속에 있는 불꽃으로 느끼는 것,이것이 한 위대한 시인의 이미지들 아래서 나타나는 사유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불꽃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보쉐르)
“나의 사상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게 했던/외피를 불속에서 상실했다./그것은 내가 원인이자 쏘시개 된/화재 속에서 타버렸다./그러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나는 불꽃의 내부이고 중심축이다. ...............
하지만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장 드 보쉐르, [어두운 자의 마지막 시편]
*생명의 영웅적 행위의 사례-‘외피를 찢어버리는’ 힘찬 불꽃!
*고독한 불꽃으로, 나는 홀로 있다. -트리스탕 차라 [늑대는 어디서 물을 마시는가]
홀로 타고 홀로 몽상한다는 것은 —위대한 상징이며 이해되지 못하는 이중적인 상징이다. 몽상가는 몽상의 우수, 그러니까 실질적인 추억과 몽상의 추억을 뒤섞어버리는 우수로 되돌아간다. 촛불의 몽상가는 이전의 삶(과거 추억)에 대한 위대한 몽상가들과 소통하고, 고독한 삶의 위대한 저장고와 교류한다.
*시인과 시인의 공감에 대하여 – 시인은 촛불이 꺼졌는데도 자기 고양이의 눈빛을 받아서 시를 계속 쓴다.촛불은 공통의 삶. 영감에 찬 삶, 영감을 받은 시인과 더불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영위했다. 책상 위에 있는`` 각각의 사물은 그 나름의 희미한 후광을 지니고 있었고, 고양이가 거기 시인의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비존재 아니라 약간의 존재, 자기 존재의 그림자를 부어 넣는다. 어둠 속에서 그 나름의 글을 쓴다. 시 자체는 그것의 끝에 도달하고자 하고, 시인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촛불이 꺼져 가는 순간에 고양이의 눈이 빛을 바치는 존재가 된다. ....고양이, 이 주의 깊은 동물은 천재성이 빛을 비추는 시인의 얼굴과 빛의 화합 속에서 밤샘을 계속 한다.
*빛의 드라마와 그 빛의 생명이 들려주는 소리—불꽃은 소리를 내고 신음한다. 음과 울림 현상, 한 언어의 소리 공간은 그것의 고유한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시인의 귀에는 ‘깜박거리다’라는 동사의 촛불이 지닌 의성어가 놀랍게 체험된다. 낱말의 몽상가인 시인은 이 울림들을 공감하며 그 떨림을 느낀다.
*촛불의 불꽃과 날개 타는 소리—생명의 불꽃 소리에 몽상가는 마음속에서 우지끈 찢어지는 것 같은 놀라움을 느낀다. (파리, 나방)
“나는 유충으로서의 나의 의식이 최초로 깨어날 때부터 너를 열망했다. 나는 번데기였을 때 너만을 꿈꾸었다. 수많은 나의 동료들이 너로부터 발산되는 약한 불빛을 향해 날아가다가 소멸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아직 한 시간이 남아있지만 그때 가면 나의 연약한 존재도 끝장이 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노력은 나의 최초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너의 영광에 접근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황홀한 순간 속에 너를 어렴풋이 바라본 후, 만족하여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한 번만은 나는 아름다움, 열기, 생명의 원천을 완벽한 찬란함 속에서 관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태양 속에서 죽기를 원하는 몽상녀의 상징인 나방의 노래; 칼 융의 여자 정신분열증 환자가 지은 시-
“오, 내게 날개가 있다면 땅에서 날아올라가/운행 중인 태양을 끊임없이 쫓아가련만!/나는 소리의 광휘 속에서 영원히 볼 수 있으련만/나의 발밑에 펼쳐진 침묵하는 세계를............/그러나 새로운 충동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구나./나는 태양의 영원한 빛에서 마시기 위해 언제나 더 멀리 비약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이미지의 확장]
“.....전략....../너는 매혹된 채 날아가면서 달린다,/그리고는 마침내 빛의 연인으로서/ 오, 너는 이제 연소된 나비가 되었구나.” -괴테
*나방은 촛불의 불꽃에 몸을 던진다. (적극적 굴광성) 죽음의 본능을 따르는 나방을 파우스트적 엠페도클레스 (4원소 설-불, 공기, 물, 대지)를 몽상하는 몽상가의 영혼을 상징한다. 몽상하는 영혼은 자신의 장식물을 태우고, 자신의 존재를 태우는 일을 끝없이 명상했다는 것.
*프랑스의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인 ‘피에르 장 주브’가 자신의 작품 [폴리나]에서 – 폴리나가 자신의 첫 무도회에 앞서 자신의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때, 그녀가 수녀처럼 순결한 존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모든 남자들을 유혹하고 싶을 때. 그녀가 환기시키는 것은 불꽃 속에서 죽어가는 나비이다.
“하지만 내 소중한 나비여, 불꽃을 조심하려무나. 아직도 한 마리 나비가 지난밤의 나비처럼 죽어가려 한다. 그것은 곧바로 죽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불속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불을 이해하지 못하며 날개의 반은 이미 타버렸다. 그것은 되돌아오고 다시 되돌아온다. 불행한 나비 같으니, 그건 불이야, 그건 불이라고!” -피에르 장 주브 [폴리나]
*주브의 소설 속의 두 본능- 생의 본능이자 죽음의 본능 (에로스와 타나토스 ; 사랑의 욕망과 죽고자 하는 욕망) 그 두 본능은 깊이와 원초성이 드러날 때 대립적인 게 아니라, 한 운명의 리듬 속에서 끊임없는 변혁들을 하나의 삶 속에 갖다 놓는 그 리듬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 무도회의 밤에 촛불에 타버린 나비의 이미지이다. (여성적 운명의 이미지의 근원적 이미지)
*고독과 영혼의 중심, 마음의 어떤 구석에서 정신의 어떤 모퉁이에서 위대한 고독한 자는 혼자이며, 과연 혼자인가? 갇혀있는가 아니면 위로 받고 있는가? 어떤 독방에서 피난처에서 시인은 진정으로 고독한가? -고독을 사랑하거나 물리치기 위해선, 또 조용히 있거나 용기를 내기 위해선, 그것을 상상해야 한다. -인상적 이미지- 이미지를 증식해야 하고 모든 이미지를 배가시켜야 한다. 고독한 인간은 자랑스럽게 혼자 있으면서 때때로 고독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마다 나름의 고독이 있는 법이다.
*촛불, 책은 정신과 밤이라는 이중적 어둠에 대항한다. “나는 연구한다!” 책에서 눈을 뗄 때 “나는 꿈꾼다!”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들도 필요하다. 나는 작은 불빛 아래서 했던 내 작업을 추억하고, 나 역시 촛불의 몽상가였다는 것을 추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몽상이 필요하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12.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불꽃의 수직성
**불꽃의 몽상은 수직성이면서 높이의 몽상이다. 높이의 몽상은 수직성의 본능을 북돋우는데, 이 본능은 평범한 삶, 평평하게 수평적인 삶의 의무들에 의해 억압되어 있다. 수직화하는 몽상은 몽상들 가운데 가장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어떤 다른 곳을 꿈꾸는 것은 잘 몽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수직적인 사물의 천정에 살며 수직성의 몽상들을 축적하면서 우리는 존재의 어떤 초월을 경험한다. 수직성의 이미지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들의 지배 속에 들어가게 만든다.
*몽상의 대상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몽상은 더욱 위대하다. 불꽃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수직화하는 의지의 몽상가는 자신도 다시 일어서야 함을 배운다. 그는 높이 타오르고, 온 힘을 다해 열기의 절정에까지 도달하려는 의지를 다시 발견한다. 길게 늘어나면서 끝이 뾰족해지는 불꽃의 미묘한 생명력, 그리하여 삶과 꿈이라는 가치들은 결합되어 존재한다.
“한 줄기 불! 향기롭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될까?” -에드몽 자베
“촛불은 높이 타오르고 그것의 주홍빛은 발끈 일어선다.”--트라클
**가장 위대한 꿈이 있는 곳은 정상이다. 불꽃은 지극히 본질적으로 수직적이기 때문에 존재의 몽상가에게는 어떤 피안, 어떤 에테르적인 비존재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놓인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이여.“ --로제 아슬리로
**불을 만드는 것은 빛이다. 빛은 불의 과정에서 정수이다. 왜냐하면 빛의 우선권은 불에서 절대적 주체로서의 힘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꽃의 고통 속에서 불이 자신의 모든 물질성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것이 빛이 되는 과정이 마감될 때에만 그것은 자신으로서의 진정한 존재를 부여받는다.
**“정신의 운동은 불의 운동과 같다. 그것은 자신을 상승하는 존재로 만든다.”-클로드 드 생 마르탱 [새로운 인간]
**촛불의 불꽃에서는 대자연의 모든 힘이 활동적이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자체를 구성한다. 불꽃은 말하자면 적나라한 동물성이고, 과격한 동물의 방식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대식가이다. 따라서 각각의 생명계는 하나의 개별적인 불꽃 유형이다.
“나무는 꽃피는 불꽃밖에 될 수 없고, 인간은 말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으며. 동물은 방황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다.”--노발리스
“난로의 민첩한 불꽃에서 무형적인 것, 동물과 식물의 즙액이 생성된다.”
“하나의 특이한 대목을 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 불꽃의 분비물처럼 제시된다. 우리는 한 불타오르는 존재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괴테
**동물은 자신의 형태로 행위를 나타내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을 태우면서, 또 자신 안에 웅크린 불의 굶주림을 만족시키는 것을 획득하면서 이 형태를 유지한다. 불꽃은 여기서 창조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적 직관을 주어 세계의 타오르는 삶에 동참하도록 한다. 이때 불꽃은 살아 있는 실체이고, 시화(詩化)시키는 실체이다. 시인 철학자의 불붙이는 직관에 동참하다 보면 불꽃이 살아있는 존재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삶은 하나의 불이다. 그것의 본질을 경험하기 위해선 시인과 일체가 되어 타올라야 한다.
**그러나 불꽃의 명상은 일종의 초생명적인 비약, 다시 말해 삶을 상승시키고, 통상적인 질료의 모든 쇠퇴에도 불구하고 삶을 삶 너머로 연장시키는 그런 비약을 만나는 역동적인 이미지가 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뛰어오르는 기술은 어디에서나 가장 고귀한 행위이다. 그것은 삶의 기원점이고 삶의 생성이다. 불꽃은 이런 종류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철학하는 자가 스스로를 철학하는 지점, 다시 말해 자신의 소모하고 갱신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노발리스
“생명은 스스로 자신의 지고한 장애물을 창조하였다. 이제 그것은 자신의 사유 너머로 뛰어오른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붙여 번역한 시작품, 알베르
**동물화된 불꽃을 노발리스처럼 꿈꾸는 몽상가에게 불꽃은 날아오르기 때문에 한 마리 새가 된다.
“그대는 불꽃 속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그 새를 잡겠는가?” -피에르 가르니에
**빛이 잠들어 버리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빛이 깨어나도록 서둘러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은 사물들은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첨부파일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촛불의 미학).hwp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3.29.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1장 : 촛불의 과거
*불꽃이 현자들을 사색하게 했던 그 아득한 지식의 시대에 촛불은 ‘은유=사유’를 나타냈던 것. 고독한 철학자에게 수많은 꿈을 주었고, 철학자의 책상 위에는 자신들의 형태에 갇힌 사물들이나 서서히 가르침을 주는 책들 옆에 촛불의 불꽃이 무제한의 사유를 촉발시켰고 한없는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던 것. 그 때 불꽃은 다양한 세계들을 꿈꾸는 몽상가에겐 세계의 한 현상이었다. (촛불은 어떤 사유의 시발점을 안내하는 물체)
*꿈-우리가 우리의 꿈속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지닌 꿈의 소통에서 단순성의 뿌리와 다시 만날 때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의 불꽃 앞에서 우리는 세계와 정신적으로 소통한다. 물론 명상하는 철학자의 몽상에 끼어드는 낯선 사유가 그렇듯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그것은 방해를 받는다.그러나 고요의 시간이 진정으로 울려 위대한 고독이 진정으로 지배하게 되면, 몽상가의 마음과 불꽃의 중심에 동일한 평화가 자리 잡고,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간직하며, 확고한 사유처럼 수직성의 자기 운명으로 곧장 달려간다. (평화로운 몽상, 우아한 연속성, 평온이야말로 촛불이 주는 생의 이미지임.)
*세계에 대한 몽상가는 자신의 희미한 등불로부터 하늘의 거대한 별들까지 손쉽게 이동하는 과정의 독서를 하며 그런 지적 행위를 통해 열광한다. 특별한 이미지가 우주적인 가치를 지닐 때, 그것은 현기증나는 사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예: “불꽃은 축축한 불이다.” (불과 물의 결합에 대한 사유)-불타는 액체-하늘을 향해 수직적인 냇물처럼 흘러가는 것-몽상하는 글 속에서 초월적 사유가 나타남.)
*불꽃은 작가가 되고 싶게 만드는 유혹이다. 주베르(프랑스의 모랄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가 우리를 이끌어가는 진지한 몽상 속에는 세계의 현상 하나가 표현되고 따라서 지배된다. 이 현상은 그것의 현실을 넘어선 어떤 피안에서 표현된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인간적 현실로 바꾼다.
*불꽃 앞에서 밤샘하는 자—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불꽃은 꺼지기 쉬우면서도 꿋꿋하다. 한번만 바람이 불어도 이 불빛은 꺼져 버린다. 불씨 하나가 그것을 다시 살린다. 불꽃은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는다. 삶과 죽음—단순한 논리의 톤으로 존재와 부의 변증법들을 전개하는 철학자들의 사유 놀이는 태어나고 죽는 불빛 앞에서 극적으로 구체적이 된다. -촛불의 몽상가, 작은 불꽃의 모든 몽상가는 이 점을 알고 있다. 사물들의 삶과 우주의 삶에서 모든 것은 극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촛불을 동반하고 몽상할 때 두 번 몽상한다. 불꽃 앞에서 명상은 “두 세계에 대한 찬미이다.” -파라셀스 (스위스의 연금술사. 점성가. 의사, 정신신체의학의 선구자)
*불꽃 속에서 철학자는 인간화의 사례인 하나의 사례-현상, 우주의 한 현상을 만난다. -‘우리의 부정한 것들을 태우는 현상’- 불꽃은 정화되고 정화시키는 사물이다. 두 눈과 영혼을 통해 두 번 몽상가를 비춘다. 여기서 은유들은 현실들이고, 현실은 관조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우리는 현실을 은유화하면서 그것을 관조한다.
*이러한 몽상 속에서 세계는 그것의 모든 사물들에게서 인간의 어떤 운명을 띤다. 그런데 세계는 그것의 내밀한 신비 속에서 정화의 운명을 원한다. 인간이 보다 나은 인간의 씨앗이고, 노랗고 무거운 불꽃이 희고 가벼운 불꽃의 씨앗인 것처럼 세계는 보다 나은 세계의 씨앗이다. 불꽃은 그것의 흰빛을 통해서 흰빛의 활력 있는 정복을 통해서 그것의 본연적 장소와 합류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현상들을 주재하는 모든 가치들보다 더 큰 가치가 정복된다. (삶의 두려움이나 부정적인 어떤 것들은 불꽃이라는 몽상을 통해서 흰 불꽃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실제로 그 과정을 통해 삶은 정화된다.)
*불꽃은 더 이상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대상이 된 것이다. 그때 모든 게 가능하다.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자신이 연소되는 한 세계의 증인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에게 불꽃은 어떤 생성변전으로 향한 하나의 세계이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고, 시간은 출렁인다. 빛이 떨릴 때 모든 것이 떨린다. 불의 생성변전은 생성변전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불 속에서 상상하면 빠르게 흘러간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 모든 것을-폭력과 평화까지- 꿈꿀 수 있다. (촛불인 불꽃을 통해 인간은 사물의 가장 철학적 생성변전을 맛볼 수 있다는 것. 태어나고 죽고 변화하고 그리고 흘러가는 불꽃의 변화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사유하는 이미지의 최대치가 아닐까...하는 비평적 논리. 그것이 평화로운 삶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시와 몽상의 씨앗)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4.5.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촛불의 몽상가의 고독
*촛불의 몽상과 기억의 몽상으로부터 우리는 고독의 몽상 속으로 들어간다. 고독한 불꽃은 그 자체만으로 몽상가의 고독을 가중시키는데,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 켜진 촛불 앞에서는 보다 덜 고독을 느끼는데....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환적 개성이 있다. 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상가에게는 자신의 생성변전에 의해 마음이 빼앗긴 존재의 상징이다. 불꽃은 생성변전의 존재이고, 존재의 생성변전이다.자신을 고독하고 완전한 불꽃으로 느끼고, 생선변전의 존재의 드라마 자체 속에 있는 불꽃으로 느끼는 것,이것이 한 위대한 시인의 이미지들 아래서 나타나는 사유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불꽃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보쉐르)
“나의 사상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게 했던/외피를 불속에서 상실했다./그것은 내가 원인이자 쏘시개 된/화재 속에서 타버렸다./그러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나는 불꽃의 내부이고 중심축이다. ...............
하지만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장 드 보쉐르, [어두운 자의 마지막 시편]
*생명의 영웅적 행위의 사례-‘외피를 찢어버리는’ 힘찬 불꽃!
*고독한 불꽃으로, 나는 홀로 있다. -트리스탕 차라 [늑대는 어디서 물을 마시는가]
홀로 타고 홀로 몽상한다는 것은 —위대한 상징이며 이해되지 못하는 이중적인 상징이다. 몽상가는 몽상의 우수, 그러니까 실질적인 추억과 몽상의 추억을 뒤섞어버리는 우수로 되돌아간다. 촛불의 몽상가는 이전의 삶(과거 추억)에 대한 위대한 몽상가들과 소통하고, 고독한 삶의 위대한 저장고와 교류한다.
*시인과 시인의 공감에 대하여 – 시인은 촛불이 꺼졌는데도 자기 고양이의 눈빛을 받아서 시를 계속 쓴다.촛불은 공통의 삶. 영감에 찬 삶, 영감을 받은 시인과 더불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영위했다. 책상 위에 있는`` 각각의 사물은 그 나름의 희미한 후광을 지니고 있었고, 고양이가 거기 시인의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비존재 아니라 약간의 존재, 자기 존재의 그림자를 부어 넣는다. 어둠 속에서 그 나름의 글을 쓴다. 시 자체는 그것의 끝에 도달하고자 하고, 시인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촛불이 꺼져 가는 순간에 고양이의 눈이 빛을 바치는 존재가 된다. ....고양이, 이 주의 깊은 동물은 천재성이 빛을 비추는 시인의 얼굴과 빛의 화합 속에서 밤샘을 계속 한다.
*빛의 드라마와 그 빛의 생명이 들려주는 소리—불꽃은 소리를 내고 신음한다. 음과 울림 현상, 한 언어의 소리 공간은 그것의 고유한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시인의 귀에는 ‘깜박거리다’라는 동사의 촛불이 지닌 의성어가 놀랍게 체험된다. 낱말의 몽상가인 시인은 이 울림들을 공감하며 그 떨림을 느낀다.
*촛불의 불꽃과 날개 타는 소리—생명의 불꽃 소리에 몽상가는 마음속에서 우지끈 찢어지는 것 같은 놀라움을 느낀다. (파리, 나방)
“나는 유충으로서의 나의 의식이 최초로 깨어날 때부터 너를 열망했다. 나는 번데기였을 때 너만을 꿈꾸었다. 수많은 나의 동료들이 너로부터 발산되는 약한 불빛을 향해 날아가다가 소멸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아직 한 시간이 남아있지만 그때 가면 나의 연약한 존재도 끝장이 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노력은 나의 최초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너의 영광에 접근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황홀한 순간 속에 너를 어렴풋이 바라본 후, 만족하여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한 번만은 나는 아름다움, 열기, 생명의 원천을 완벽한 찬란함 속에서 관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태양 속에서 죽기를 원하는 몽상녀의 상징인 나방의 노래; 칼 융의 여자 정신분열증 환자가 지은 시-
“오, 내게 날개가 있다면 땅에서 날아올라가/운행 중인 태양을 끊임없이 쫓아가련만!/나는 소리의 광휘 속에서 영원히 볼 수 있으련만/나의 발밑에 펼쳐진 침묵하는 세계를............/그러나 새로운 충동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구나./나는 태양의 영원한 빛에서 마시기 위해 언제나 더 멀리 비약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이미지의 확장]
“.....전략....../너는 매혹된 채 날아가면서 달린다,/그리고는 마침내 빛의 연인으로서/ 오, 너는 이제 연소된 나비가 되었구나.” -괴테
*나방은 촛불의 불꽃에 몸을 던진다. (적극적 굴광성) 죽음의 본능을 따르는 나방을 파우스트적 엠페도클레스 (4원소 설-불, 공기, 물, 대지)를 몽상하는 몽상가의 영혼을 상징한다. 몽상하는 영혼은 자신의 장식물을 태우고, 자신의 존재를 태우는 일을 끝없이 명상했다는 것.
*프랑스의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인 ‘피에르 장 주브’가 자신의 작품 [폴리나]에서 – 폴리나가 자신의 첫 무도회에 앞서 자신의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때, 그녀가 수녀처럼 순결한 존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모든 남자들을 유혹하고 싶을 때. 그녀가 환기시키는 것은 불꽃 속에서 죽어가는 나비이다.
“하지만 내 소중한 나비여, 불꽃을 조심하려무나. 아직도 한 마리 나비가 지난밤의 나비처럼 죽어가려 한다. 그것은 곧바로 죽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불속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불을 이해하지 못하며 날개의 반은 이미 타버렸다. 그것은 되돌아오고 다시 되돌아온다. 불행한 나비 같으니, 그건 불이야, 그건 불이라고!” -피에르 장 주브 [폴리나]
*주브의 소설 속의 두 본능- 생의 본능이자 죽음의 본능 (에로스와 타나토스 ; 사랑의 욕망과 죽고자 하는 욕망) 그 두 본능은 깊이와 원초성이 드러날 때 대립적인 게 아니라, 한 운명의 리듬 속에서 끊임없는 변혁들을 하나의 삶 속에 갖다 놓는 그 리듬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 무도회의 밤에 촛불에 타버린 나비의 이미지이다. (여성적 운명의 이미지의 근원적 이미지)
*고독과 영혼의 중심, 마음의 어떤 구석에서 정신의 어떤 모퉁이에서 위대한 고독한 자는 혼자이며, 과연 혼자인가? 갇혀있는가 아니면 위로 받고 있는가? 어떤 독방에서 피난처에서 시인은 진정으로 고독한가? -고독을 사랑하거나 물리치기 위해선, 또 조용히 있거나 용기를 내기 위해선, 그것을 상상해야 한다. -인상적 이미지- 이미지를 증식해야 하고 모든 이미지를 배가시켜야 한다. 고독한 인간은 자랑스럽게 혼자 있으면서 때때로 고독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마다 나름의 고독이 있는 법이다.
*촛불, 책은 정신과 밤이라는 이중적 어둠에 대항한다. “나는 연구한다!” 책에서 눈을 뗄 때 “나는 꿈꾼다!”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들도 필요하다. 나는 작은 불빛 아래서 했던 내 작업을 추억하고, 나 역시 촛불의 몽상가였다는 것을 추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몽상이 필요하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12.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불꽃의 수직성
**불꽃의 몽상은 수직성이면서 높이의 몽상이다. 높이의 몽상은 수직성의 본능을 북돋우는데, 이 본능은 평범한 삶, 평평하게 수평적인 삶의 의무들에 의해 억압되어 있다. 수직화하는 몽상은 몽상들 가운데 가장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어떤 다른 곳을 꿈꾸는 것은 잘 몽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수직적인 사물의 천정에 살며 수직성의 몽상들을 축적하면서 우리는 존재의 어떤 초월을 경험한다. 수직성의 이미지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들의 지배 속에 들어가게 만든다.
*몽상의 대상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몽상은 더욱 위대하다. 불꽃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수직화하는 의지의 몽상가는 자신도 다시 일어서야 함을 배운다. 그는 높이 타오르고, 온 힘을 다해 열기의 절정에까지 도달하려는 의지를 다시 발견한다. 길게 늘어나면서 끝이 뾰족해지는 불꽃의 미묘한 생명력, 그리하여 삶과 꿈이라는 가치들은 결합되어 존재한다.
“한 줄기 불! 향기롭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될까?” -에드몽 자베
“촛불은 높이 타오르고 그것의 주홍빛은 발끈 일어선다.”--트라클
**가장 위대한 꿈이 있는 곳은 정상이다. 불꽃은 지극히 본질적으로 수직적이기 때문에 존재의 몽상가에게는 어떤 피안, 어떤 에테르적인 비존재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놓인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이여.“ --로제 아슬리로
**불을 만드는 것은 빛이다. 빛은 불의 과정에서 정수이다. 왜냐하면 빛의 우선권은 불에서 절대적 주체로서의 힘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꽃의 고통 속에서 불이 자신의 모든 물질성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것이 빛이 되는 과정이 마감될 때에만 그것은 자신으로서의 진정한 존재를 부여받는다.
**“정신의 운동은 불의 운동과 같다. 그것은 자신을 상승하는 존재로 만든다.”-클로드 드 생 마르탱 [새로운 인간]
**촛불의 불꽃에서는 대자연의 모든 힘이 활동적이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자체를 구성한다. 불꽃은 말하자면 적나라한 동물성이고, 과격한 동물의 방식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대식가이다. 따라서 각각의 생명계는 하나의 개별적인 불꽃 유형이다.
“나무는 꽃피는 불꽃밖에 될 수 없고, 인간은 말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으며. 동물은 방황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다.”--노발리스
“난로의 민첩한 불꽃에서 무형적인 것, 동물과 식물의 즙액이 생성된다.”
“하나의 특이한 대목을 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 불꽃의 분비물처럼 제시된다. 우리는 한 불타오르는 존재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괴테
**동물은 자신의 형태로 행위를 나타내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을 태우면서, 또 자신 안에 웅크린 불의 굶주림을 만족시키는 것을 획득하면서 이 형태를 유지한다. 불꽃은 여기서 창조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적 직관을 주어 세계의 타오르는 삶에 동참하도록 한다. 이때 불꽃은 살아 있는 실체이고, 시화(詩化)시키는 실체이다. 시인 철학자의 불붙이는 직관에 동참하다 보면 불꽃이 살아있는 존재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삶은 하나의 불이다. 그것의 본질을 경험하기 위해선 시인과 일체가 되어 타올라야 한다.
**그러나 불꽃의 명상은 일종의 초생명적인 비약, 다시 말해 삶을 상승시키고, 통상적인 질료의 모든 쇠퇴에도 불구하고 삶을 삶 너머로 연장시키는 그런 비약을 만나는 역동적인 이미지가 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뛰어오르는 기술은 어디에서나 가장 고귀한 행위이다. 그것은 삶의 기원점이고 삶의 생성이다. 불꽃은 이런 종류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철학하는 자가 스스로를 철학하는 지점, 다시 말해 자신의 소모하고 갱신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노발리스
“생명은 스스로 자신의 지고한 장애물을 창조하였다. 이제 그것은 자신의 사유 너머로 뛰어오른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붙여 번역한 시작품, 알베르
**동물화된 불꽃을 노발리스처럼 꿈꾸는 몽상가에게 불꽃은 날아오르기 때문에 한 마리 새가 된다.
“그대는 불꽃 속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그 새를 잡겠는가?” -피에르 가르니에
**빛이 잠들어 버리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빛이 깨어나도록 서둘러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은 사물들은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19.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4장 : 식물적 삶에서 촛불의 시적 이미지
**각각의 사물이 하나의 형태를 유지하는 힘들에 대해 몽상할 때—하나의 수직적 불꽃이 모든 수직적 존재를 지배하고 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빗살, 우리도 그런가?) 특히 불꽃은 똑바른 삶의 역동적 요소이다.
**“나무는 꽃피는 불꽃에 다름 아니다” -노발리스
**불꽃의 이미지가 식물적 세계의 어떤 진리를 말하기 위해 시인에게 위용을 드러낼 때, 이미지는 하나의 문장에 담아져야 한다. 상상력은 새로운 이미지를 통해 세계의 어떤 진실을 매우 확실하게 붙들기 때문에 상상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논쟁은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다. (식물적 삶의 불꽃에 대해 신선한 문장들을 다시 말하고 끝없이 말하고....)
**모든 시는 시작이다. (결정적인 이미지들과 시적인 결정들의 지배가 시작될 때) -우리는 새로운 표현의 의지가 풍부한 이 문장-이미지를 시적 센텐스라 부른다.
**“모든 식물은 하나의 램프이다. 향기는 빛이다.” -빅토르 위고
**“모든 향기는 공기와 빛의 결합물이다.” -발자크
**“어떤 나무들은 무지개가 닿을 때 더욱 향기를 뿜어낸다.” -라 샹브르 공
-일종의 보들레르적인 상응이 위쪽을 통해, 정점을 통해 활발하게 나타난다. 마치 정상의 가치들이 바닥의 가치들을 자극하러 오듯이. 그리하여 향기와 빛의 상응을 두 방향으로 체험하는 몽상가는 부드러운 빛에 가치를 부여한다. (식물-램프-향기-빛)
**나무의 내밀함 속에서 타고 있는 하나의 불꽃에 대한 증언 – 불타오르는 삶의 온전한 하나의 약속-에 대하여, 루이 기욤은 [늙은 참나무]라는 시에서 위대한 나무를 칭송하기 위해 ‘수액의 장작더미’라고 말한다. (참나무에게 위대한 운명을 예언함. 장작더미의 불꽃 속에서 자기 존재의 신경을 기울여 자신의 찬란한 피날레를 준비하는 식물적인 헤라클레스다. 시적 언어만이 드러낼 수 있는 과감성,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의 영역. 세 마디로 불과 물을 결합시킨 루이 기욤)
**단 하나의 이미지로 고독한 물의 분수, 정원의 모든 나무들보다 더 곧게 솟아오르는 존재에 불꽃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 활기찬 물의 불꽃이고, 자신의 수직적인 행동의 끝에서 최대한 높이에서 물을 튀기는 불.
“석양의 돌 틈에서
고독한 분수가 불타오르는
정원들이 있다.“ ” -코베르의 분수
--네 원소의 차이들을 초월하는 시-물이 불타는 것이며 차갑지만 강하며, 그것은 일종의 자연적인 초현실주의 속에서 상상적 불의 미덕을 받아들이는 것, 불꽃-분수의 이 적극적인 초현실주의에서는 아무것도 원해진 게 없고 아무것도 제작된 게 없다. 이미지의 초현실주의를 단 하나의 낱말에 응축시킴. 불타오른다는 낱말은 탈현실화, 초현실화 시키는 말. 그리하여 획득된 이미지는 ‘창조적 우수’를 나타낸다.
**사물들의 이러한 종합, 분수와 불꽃, 나무와 불꽃의 융합과 같은 상이한 형태들 속에 갇힌 사물들의 융합은 산문의 언어로는 거의 표현될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시가 필요하고, 시의 유연성이 필요하며, 시적인 변모가 필요하다.
**“불의 포플러이자 분수이다.” -옥타비오 파스
(나무의 불꽃과 분수의 매우 수직적인 불꽃을 결합해야 하는 시적 센텐스! 이러한 시들은 급격한 시, 다시 말해 장황하지 않지만 언제나 근원적인 말로 체험하기를 원하는 시의 세계로 들어간다. 시는 말의 차원에서, 말 속에서, 말에 의해서 경이로움이 된다.)
**“한그루 나무는 한 그루 나무 훨씬 그 이상이다.” -질베르 소카르
**“새들이 빛나는 눈을 지닌 것은 그것들이 먹는 반짝이는 붉은 장과(漿果) 때문이다.”-디킨스
“샘으로서의 나무, 솟아오름으로서의 나무, 불의 아치.” -옥타비오 파스
**노발리스적 몽상가라면...즉, 꽃에 대한 몽상가는 이와 같은 불꽃 되기를 느끼고, 자신이 보는 대상의 초월처럼, 현실의 초월처럼,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시인 몽상가는 모든 아름다움의 후광 속에서, 비현실의 현실 속에서 산다. 색깔을 통한 창조자인 화가의 특권이 없는 시인은 회화의 마력과 경쟁해보았자 아무 소득이 없다. 그는 꽃을 말하고 꽃을 이야기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말의 불꽃을 통해 꽃의 불꽃에 활기를 불어넣음으로써만 꽃을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철학적 관조에서 예감했던 그 빛 되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문제는 현실을 비현실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명/암 속에서 살면서, 현실에 희미한 빛이나 미광을 가져다주고 —매번 자신의 표현에 예기치 않은 뉘앙스를 부여한다.
“하늘은 저물고 마로니에들은 불탄다.” -장 부르데예트
“달리아는 태양의 잉걸불을 지켜왔다.” --나무 그리고 꽃 사이에서 어떤 불의 통일성을 구현하고 있다. 시적 표현이 세계에 부여하는 작용의 통일성.
“이 오월의
열기 속에서 비틀린
청동 튤립이여
불의 튤립이여.“ -장 부르데예트
“조용한 램프처럼
푸른 부채꽃이 타고 있었다.“-장 부르데예트
**모든 꽃 중에서 장미는 식물적 불꽃의 상상력을 위한 이미지들의 중심원이다. 불과 장미가 하나가 되는 시간을 꿈꾸는 한 시인의 다음과 같은 단 한 줄의 시구에서 그 강도를 느낄 수 있다.
“불과 장미는 일체가 될 것이다.” -엘리엇
“방 안의 램프는 한 송이 흰 장미이다.-로덴바흐
“거울 속에 수련을 피게 하는
램프.“ (수직적 연못을 창조했을 정도로 우주생성적이다. 시인은 자기 방의 벽을 수련의 그림들로 뒤덮는다. 모든 빛 속에서 꽃을 보는 상상하는 존재를 멈추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이 붉은 장미들 좀 봐!
-불타고 있네. 화관 속에 불이 붙은 석탄이 있는 것 같아. 정말 불타고 있어.“ -다눈치오
(하나의 꽃 이름을 부르는 것은 녹은 유리이며, 이는 하나의 이중 이미지가 지닌 두 축의 상호작용에 대한 새로운 증거이다.) --색깔은 불의 현현이고, 꽃은 빛의 존재 현현이다.
**각각의 꽃은 그 자신의 빛을 지니고 있다. 저마다의 꽃은 하나의 서광이다. 하늘에 대한 몽상가는 각각의 꽃에서 어떤 하늘의 색깔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바라는 것이 정상에서의 생의 의지 차원에서 초보들레르적인 상응을 모든 사물에 작동시키는 몽상이다.
**불, 공기, 빛 등 위로 올라가는 모든 것은 또한 신적인 것을 지니고 있다. 전개된 모든 꿈은 꽃의 존재를 이루는 구성요소이다. 꽃 피는 존재가 지닌 생명의 불꽃은 순수한 빛의 세계를 향한 긴장이다. 이 모든 생성은 완만함의 행복한 생성이다. 인간의 정원에 있는 꽃들과 합일한 하늘의 정원에 있는 횃불은 확실한 불꽃이고, 완만한 불꽃이다. 하늘과 꽃은 명상하는 자에게 완만한 명상, 기도하는 명상을 가르치는 데 일치하고 있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에게 고유한 기도 및 찬미의 방식을 알고 있다. -에라노스 연보
----------------------------------------------------------------------------
**모든 사물에서 상승하는 불꽃의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언어의 마술사, 시인이란, 현실의 비현실화, 현실의 초현실화, 이미지의 탈이미지화와 같은 나무의 너머, 꽃의 너머, 생명의 너머에서 황홀한 불꽃을 몽상하는 사람이다. 그 몽상의 행위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꽃이 있다. 나무가 있다. --나의 시와 내 생명을 불꽃으로 피우기를 원하는 어느 날의 몽상.....[이민숙]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26.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5장 : 램프의 빛
**나의 수줍은 램프가 담대해지도록 광대한 밤은 모든 별들에 불을 켠다. -타고르, <반딧불>
**삶과 사물-그 안의 몽상, “우리네 삶은 ‘설명할 수 없어서(choisir=choose)’ 또는 선택할 수 없는 삶이어서 그 안에서 우리가 좋아했던 사물들의 그 비좁은 박물관 속에 간직된 물건들은 몽상의 부적들이다.”라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우리는 그런 만큼 그 이름들, 그 해묵은 이름들이 대상을 바꾼다거나, 오랜 신비한 삶의 해묵은 좋은 물건과 전혀 다른 사물과 결부된다면 꽤나 재앙적인 몽상이 될 것이다....왜 그럴까? (각자 몽상 후에 이야기하기)
**램프!....전구....우리의 물건들과 함께 지내온 그 시절의 언어가 갑자기 모양을 바꾸었음에 대하여....오늘 저녁의 심지는 어제의 심지와 꼭 같은 게 아니다! 우리는 친근한 물건들에 이것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주의 깊은 우정을 줄 때 언제나 얻는 게 있다. (추억은 아름다워??)
**우리가 덧없는 행동들에 인간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이런 순간의 다발을 경험하는 것---시인들이 그들의 사물들에 대해 지니는 우정들....(이 무의미의 의미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낮의 사물들-이 어떤 유용성을 잃을 뻔한 밤—날이 어두워지고, 벽을 따라 더듬으며 도는 것만이 허용되는 그 미광이 침투한 고독한 집에서 방황할 때, 당신이 찾아보지만 더 이상 찾아내지 못 하다가 그것이 있었던 망각된 장소를 발견할 때-그것이 시인들이 경험하는 마음, 안도감이다. (‘도구’는 분명한 지식으로서 추억의 몽상 따위는 필요 없지만, ‘추억’은 시인들에게 충실한 물건들과 함께 하는 그 ‘동반관계’를 깊게 해 준다.)
**사물들에 특질들을 부여하고 활동적인 존재들에 정당한 힘을 마음속으로부터 부여해 보라. 그러면 우주는 찬란하게 빛난다. 좋은 램프, 좋은 심지, 좋은 기름이 있으면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빛이 나타난다.아름다운 불꽃을 좋아하는 자는 좋은 기름을 좋아한다. 그는 세계의 개별 사물이 세계의 싹이 되는 모든 우주생성론적 몽상들의 비탈을 따라간다. 노발리스와 같은 시인에게 기름은 빛의 질료 자체이고, 아름다운 노란 기름은 응축된 빛, 팽창되고 싶어하는 응축된 빛이다. 가벼운 불꽃으로 인간은 물질 속에 갇혀 있는 빛의 힘을 해방시키러 온다. (꿈과 어두운 물질에 빛나는 생명을 부여하는 램프-오래된 램프일수록 더욱 확실한 몽상!)
**“ ---이 주의 깊은 램프와 저녁은 서로 상의한다.---” -레옹 폴 파르그(말라르메의 제자)
말줄임표~~의 의미. 빛과 어둠, 그것에 대해 말하라!고 시인은 명령한다.
**“램프는 조가비 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노래를 한다.” -레옹 폴 파르그
**“석유 램프의 미광, 논지를 전개하고 훈계하며 자기 자신과 의논하는 미광, 그것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에게 말한다.” -옥타비오 파스
**“소금같이 스미는 침묵이 램프들을 땡그랑거리게 하고 있었다.” -로제 브뤼쉐
**“방은 지속하는 이 행복에 놀라워한다.”-조르주 로덴바흐
**눈 덮인 평원에서 “나는 거기 있는 램프를 보곤 했다. 나를 붙잡곤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것을 은밀한 애정을 가지고 주시하곤 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그것에 불을 켰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램프인 것이다. 그렇게 늦은 밤에 훈훈한 빛 아래서 밤샘하는 그 남자를 나는 나와 같은 사람으로 상상하기에 이르렀더. 때때로 이와 같은 닮음을 넘어 그 이상으로 휩쓸려 감으로써 나는 바로 내 자신이 어떤 명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나에게 이 명상은 침투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앙리 보스코, <히아신스>
*<히아신스>를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결코 동일한 독서를 한 적이 없다....우리는 얼마나 시원찮은 문학교수가 되었을 것인가! 우리는 읽으면서 너무 많이 몽상한다. 우리는 또한 너무 많이 추억한다. 매번 읽을 때마다 우리는 돌발적인 개인적 몽상, 돌발적인 추억을 만난다. 하나의 낱말, 하나의 몸짓이 나의 독서를 정지시킨다. 보스코의 화자가 자신의 빛을 감추기 위해 덧문을 내리면, 나는 내가 옛날의 집에서 같은 동작을 했던 저녁들을 추억한다.....덧문들 한가운데 두 개의 하트 모양을 그려 놓았다. 그리하여 저녁에 그리고 밤늦게 덧문에 난 두 개의 구멍을 통해 램프, 우리의 램프는 잠든 시골들판에 두 개의 황금색 하트 모양의 빛을 던지고 있었다......그 빛! (우리는 어디에서 그런 빛을 보았는가? 이야기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