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가 없는 옷을 입으면 불안하다. 주머니 없는 옷에 지갑 하나만 들고 밖에 나갈 때면 초조하다. 그런 때엔 주머니가 없어 아쉬운 일이 꼭 생긴다.
나는 주머니가 달린 옷, 그것도 여러 개 달린 옷이 좋다. 수 년 전 건빵바지가 시장에 나왔을 때는 환호했다. 앞과 뒤는 물론이고 양쪽 허벅지에도 주머니가 달렸다. 주머니가 모두 여섯 개였다. 허벅지에 달린 건빵모양의 주머니는 사탕 한 봉지를 다 넣어도 될 만큼 깊고 큼직했다. 그 바지를 한 번에 석 장이나 샀다.
남달리 주머니에 넣을 물건이 많은 것은 아니다. 가끔 거스름으로 받은 동전 몇 닢을 그 안에서 달그락거리거나, 언제 넣었는지 모르는 영수증 조각이 구겨진 채 접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주머니가 많은 옷을 입으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가방을 사러 가도 큰 것에 우선 손이 간다. 그래서 내 가방들은 가로 길이가 대게 50센티다. 필수 소지품은 책 한 권, 안경 한 개, 휴지와 로션 따위가 든 파우치와 지갑. 그것만 담기엔 필요이상으로 큰 사이즈이나 불시에 담아갈 여유가 있어야 안심이 된다. 작은 가방을 들고 나오는 날은 불안하다. 불안한 예감대로 그런 날은 넣어야할 물건이 많이 생겨서 가방이 미어지도록 불룩해진다. 그 같은 상황이 닥치면 부아가 난다.
가방도 일종의 주머니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평생 주머니를 달고 살았다. 가방 없이 맨손으로 외출했던 기억이 있나? 철든 이후로는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손가방 하나 없는 외출은 생각만으로도 어색하다. 소지품을 보관할 데가 없어 곤란한 건 차치하고, 몸이 느끼는 허전함이 클 것이다. 신발을 신고 현관에 서면 어깨나 팔목에 거릴 가방을 고려해 몸은 저절로 균형을 잡았다. 수십 년 습관의 소산이었다. 그렇게 길들여진 자세에 가방을 걸어주지 않으면 외출 내내 얼마나 어색해할 몸일 텐가.
거울 속에 비친 가방 맨 모습을 바라본다. 어쩌면 나는 그 옛날 원시의 숲속을 돌아다니며 열매 채집을 하던 여자들의 습성을 물려받았는지 모른다. 채집의 유전자를 물림한 건 비단 나만이 아니다. 거리에 나온 다른 여자들도 하낙같이 가방을 갖고 있다. 허름한 비닐가방을 들었든, 명품 백을 들었든. 여자들은 그 하루 채집할 무언가를 기대하며 가방 하나씩을 꼭 쥐고 있다.
내게 유전자를 물려준 여자, 그이는 남달리 채집욕이 강하지 않았을까? 빅백을 좋아하는 성향뿐 아니라, 마트에 가면 카트가 넘치도록 물건을 채우고, 인터넷 쇼핑몰의 장바구니에도 이것저것 집어넣기 좋아하는 나이니까 말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고양이, 먹이를 물고 담장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고양이는 가방이 없다. 가방에 먹이를 담아 가면 쉬울 텐데도 그는 평생 가방 하나 없이 살아간다. 고양이뿐 아니다. 나무 그늘 아래 엎드린 사자들, 덤불 곁에 모여선 기린의 무리도 마찬가지다. 꿀벌만 해도 가방 한 개가 없어서 다리에다 꽃가루뭉치를 붙이고 다니지 않는가. 일생 소유하는 물건이라고는 집도 이불도 그릇 하나도 없는 무소유의 존재들. 사람으로 치면 극빈자다.
청빈을 염원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들도 평생을 한 벌 옷으로 사는 저들의 가난을 따라갈 순 없다. 수사들은 물질에의 욕망을 절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하지만, 동물들은 애초에 할 먹는 것 이상의 욕심이란 게 없다.
그들의 욕망은 한 끼니의 밥에서 결코 늘어나지 않는다. 미래를 대비해 많은 식량과 재산을 소유하고자 애쓰는 동물은 보지 못했다. 가방이 없는 까닭은 아마 그것일 것이다. 한 끼니의 욕심에는 무얼 잔뜩 넣어 다닐 가방이 필요치 않다. 주머니가 없는 옷을 입었다고 나처럼 초조해할 이유도 없다.
가진 것 없이 거리에 살러 나온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비루해진다. 역 대합실 구석에 모여 앉은 노숙자들에겐 궁기가 흐른다. 노숙자의 몸에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그것이 그의 삶속에서 방치된 욕망, 버리지도 못하고 껴안고 있다가 결국 산패(酸敗)된 욕망의 냄새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지하도 바닥에 신문지를 덮고 자도 인간의 욕망이란 머리카락처럼 자라나고, 부패한 욕망은 산발한 채 악취를 풍기며 그를 한층 비루하게 만든다.
그러나 동물들은 다르다. 똑같이 노숙을 하는데도 노숙의 티가 나지 않는다. 피복이 헤져있거나 땟국이 흐르지 않는다. 평생을 옷 한 벌로 버티지만 늘 깔끔한. 온수가 나오는 샤워기는 꿈도 꾸지 못하고, 혀로 대충 핥는 것이 목욕의 전부인데도 바디클린지로 북적북적 거품을 일으키며 씻은 것처럼 체모가 멀끔하다. 풍찬노숙이긴 마찬가진데도 동물들은 잘 치장하고 파티에 나온 신사숙녀처럼 귀태마저 풍긴다. 꿀벌의 식탁을 본적 있는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꽃들 그것이 바로 꿀벌의 식탁이다. 꿀벌보다 우아하게 식사하는 인간은 아직 보지 못했다.
동물은 몇 그램 되지 않는 가벼운 욕심 때문에 자유를 얻었다. 물질에 얽매이지 않아서 몸과 혼이 여유로워진 그들은 자신을 돌보는 데 남은 시간을 쓴다. 나무 그늘에 앉으면 항상 단벌 옷 손질이다. 털을 다듬어 용모를 말끔히 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다. 그들은 미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존재들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은 그들이 세상에 나올 때 입고 오는 옷의 색상과 디자인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멋있는 옷들에는 주머니가 없다. 꼭 갖고 싶었다면 진화를 통해 그것 하나쯤 장착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지만, 나중을 대비해 주머니에 무얼 넣고 다닐 욕심이 애초에 없었던 그들이다. 그래서 수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의 못엔 여전히 한 개의 주머니도 없다. 지금 내 옷에는 주머니가 너무 많다.
(성낙향 님의 수필중에서...,)
첫댓글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걷고 싶은 계절이 왔네요.
10월입니다.
이때,
주머니는 두 개만 있어도 됩니다.
양손을 지를 수있는 두개의 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