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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다시 쓰는 고대사①신라 태종무열대왕. ②김춘추의 두 모습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106 15.05.02 10: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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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도화선은 김춘추 맏딸 고타소의 죽음

 

다시 쓰는 고대사 ① 신라 태종무열대왕

 

 

신라 태종무열대왕 김춘추가 삼국통일에 관한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그림. 사서에는 딸 고타소의 죽음이 그를 통일로 몰아가는 동인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사진 민족기록화]

 

 

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일까?

필자는 한국·한국인을 만든 삼한통합(소위 삼국통일)을 꼽는다. 신라의 삼한통합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던 한국사를 하나의 방향으로 결정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리즈를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시작하는 이유다. 삼한통합은 생각지도 않은 사건에서 시작됐다.

서기 642년 8월 김춘추(金春秋)의 딸 김 고타소(古陀炤)의 죽음이 그것이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제위 계승자인 페르디난트(Ferdinand) 대공 부처의 피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불꽃이 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삼국사기』 47, 『죽죽(竹竹)』전이 그 장면을 보여준다.

 

“선덕여왕(善德女王) 11년, 임인(642년)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했다. 이에 앞서 도독 품석(대야성 성주, 춘추의 사위)이 막객(幕客)인 금일의 아내가 얼굴이 아름다움을 보고 이를 빼앗으므로 금일이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제와 내응하여 창고를 불태웠다. 그로 인해 성을 굳게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위기에 처하자 품석의 보좌관인 서천이 성 위에 올라가 ‘성민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항복하겠다’고 했다. 윤충은 ‘그대들과 잘 지내지 않는다면 밝은 해가 내려다볼 것’이라 했다. 그때 품석을 보좌하던 또 다른 관리인 죽죽(竹竹)이 ‘백제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는데, 윤충의 말이 달콤하니 반드시 속이려는 것이기에 용감하게 싸워 죽는 것만 같지 않다’고 했다.

 

품석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사졸들이 먼저 나가니, 백제에서는 복병을 내어 모조리 죽여버렸다. 품석은 나가려 하다가 장수와 병사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때 품석이 죽인 자기 아내가 춘추의 딸 고타소다. 『삼국사기』 41, 『김유신』전에 “백제가 대량주를 깨뜨리니 춘추공의 딸인 고타소 아가씨가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원통히 여겼다”고 나온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장녀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전해 들은 김춘추는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에 잠겼을 것이다.

 

『삼국사기』 5, 선덕여왕 11년(642) 조의 기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고타소의 죽음을 들은 춘추는 기둥에 기대 서서 종일토록 눈도 깜짝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앞을 지나쳐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얼마 후 말했다.

‘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그는 곧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신은 원컨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해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를 갈며 백제를 멸망시키기로 다짐한 춘추는 그해 겨울 신라를 끈질기게 침범해 들어오던 백제에 이은 또 다른 적국 고구려에까지 손을 내밀었다. 길을 떠나기 전 춘추가 유신에게 말했다.

 

“‘나와 공은 일심동체로서 나라의 기둥이오.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공이 무심할 수 있겠소?’ 유신이 대답하였다. ‘공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왕의 궁정을 짓밟을 것이오. 이렇게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을 대하겠소?’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였다.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이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그들은 작별하였다.”(『삼국사기』 41, 『김유신』)

 

고구려에 간 김춘추는 보장왕(寶藏王)을 만났다. 그는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내세운 왕이다. 김춘추는 연개소문도 만났다. 그런데 복수심에만 불타 있던 김춘추는 준비도 없이 ‘덜컥’ 청병을 했지만 고구려 왕은 과거 장수왕이 정복했던 마목현과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였다. 결국 거짓으로 “신라에 돌아가 왕에게 청해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것으로 춘추의 청병외교는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어떤 이가 고구려 왕에게 “춘추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 죽여서 뒷날의 걱정을 없애라”고 했다. 춘추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유신은 약속을 지켰다. 『삼국사기』 41, 『김유신』전에 따르면 60일이 지나도 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용사 3000명을 뽑아 고구려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기세가 무서웠다. 첩자가 이 사실을 알리자 고구려 왕은 춘추가 이미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유신의 각오가 대단하니 춘추를 더 잡아둘 수 없다고 생각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비롯된 딸의 죽음에 대한 춘추의 사적(私的) 복수심은 이렇게 백제·신라·고구려를 사생결단의 공적(公的) 관계로 몰아간 것이다. 18년 뒤 신라는 백제를 정복했고, 26년 뒤 고구려를 정복했다. 신라인들은 숙망(宿望)인 삼한통합(소위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었고 춘추 일가는 원한을 갚았다.

 

 

2008년 춘분 때 태종무열왕릉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 [사진 이종옥 교수]

 

 

양신(良臣) 거느린 김춘추, 충신 만든 의자왕

 

삼국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고구려나 백제보다 군사력이 강한 것도 아니었고, 토지나 백성이 많은 것도 아니었던 신라가 삼한통합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군주다운 군주, 신하다운 신하를 가졌는가에 그 답이 있다.

 

성군(聖君)에게는 충신(忠臣)이, 폭군(暴君) 밑에는 간신(奸臣)이 있게 마련이다.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직언보다 세 치 혀를 이용해 나라를 어지럽히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면 군주다운 군주와 신하다운 신하란 어떤 것일까?

 

한국인에게 고구려를 침략했다 안시성 싸움에서 한쪽 눈을 잃은 황제로 알려진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중국 역사상 선정(善政)과 태평성대를 이룬 이상적인 왕으로 평가된다. 당 태종과 그의 신하 위징(魏徵)은 충신과 양신을 구분하는 말을 남겼다.

 

위징이 제(帝·당 태종)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신을 양신(良臣)이 되게 해주시고 충신(忠臣)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제가 물었다. “충(忠)과 양(良)은 무엇이 다른가?”

 

위징이 말하기를

“… 양신은 (신하인) 자신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 군주는 성군의 칭호를 갖도록 하고 자손에게는 대를 이어 복을 받고 관직을 갖게 하고,

충신은 (신하인) 자신은 주살되고 군주는 대악에 빠지고, 집안과 국가는 모두 사라져 이름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 차이가 아주 큽니다” 했다.

(『구당서(舊唐書)』 권71, 『위징열전(魏徵列傳)』)

 

한국사에도 양신과 충신은 많다. 그 예를 보겠다. 특히 신라 태종무열대왕(춘추)은 양신을, 백제 의자왕은 충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 태종은 양신을 거느렸던 대표적 군주다. 그는 칠성우(七星友)라는 양신을 거느렸다. 『화랑세기』에는 612년부터 유신이 춘추를 “삼한의 주인(三韓之主)입니다”라며 받든 것으로 나온다. 그 이후 유신에 의해 결성된 칠성우는 춘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수행한 결사체였다.

 

그 장기 프로젝트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비담의 난을 진압한 것이 그 한 예다. 『삼국사기』 5, 선덕여왕 16년(647) 조와 진덕여왕 원년(647) 조를 보자.

 

646년 11월 상대등(上大等, 지금의 국무총리)에 임명된 비담은 647년 1월 초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女主不能善理)’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1월 17일 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들이 비담 등 30명을 죽여 비담의 반란은 끝이 났다. 이 난을 계기로 칠성우들이 신라의 왕정을 장악했다. 그 와중인 647년 1월 8일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2월 칠성우 중 나이가 많았던 알천(閼川)은 상대등이, 춘추는 진덕여왕의 뒤를 이을 동궁(東宮)이 됐다. 『삼국사기』 41, 『김유신』전에는 “유신이 재상인 알천과 의논해 이찬 춘추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나온다. 태종대왕은 칠성우를 양신으로 만들었다.

 

『삼국유사』 『김유신』전에 “유신은 칠요(七曜, 즉 태양·달·수성·화성·목성·금성·토성)의 정기를 타고난 까닭에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고 신이함이 많았다. 칠성우에는 알천공·임종공·술종공·호림공·염장공·보종공·유신공이 속했다. 알천공은 나이가 많고 완력이 대단해 윗자리에 앉았으나 모든 공들이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했다”고 한다.

 

칠성우는 군사(알천공·임종공)·행정(술종공)·재정(염장공)·불교(호림공)·선도(仙道·보종공) 등에 전문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칠성우는 아들 대에 이르기까지 능력을 달리하며 춘추를 모신 삼한통합의 주역들이다. 칠성우들은 높은 관직에 올랐고 태종은 성군의 칭호를 가지게 되었으며, 자손들은 대를 이어 복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인의 다수가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씨족들로 자처하는 것은 삼한통합으로 이룬 신라 중흥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태종무열대왕릉에서는 김씨 후손들의 제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백제의 충신은 누가 있을까. 의자왕, 그는 충신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충신이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으니 그 어찌 역설의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당과 ‘麗·濟 분할 밀약’으로 신라 구했지만 중국화 길 터

 

다시 쓰는 고대사 ② 김춘추의 두 모습

 

 

당(唐)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성의 한 성문(城門). 1371년 전 김춘추가 청병(請兵)외교를 위해 당으로 갔을 때 이 문 안의 성에 머물렀을 것이다. [사진 권태균]

 

 

서기 642년 8월 춘추의 딸 고타소의 죽음은 동아시아에 유례없는 대형 국제전쟁을 불렀고 결국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끝났다. 그 중심에 태종무열대왕(김춘추)이 있었다. 장녀의 죽음에 절치부심한 춘추는 그해 말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다. 평양성에서 오히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던 춘추에게 고구려는 멸망시켜야 할 또 다른 적국이 됐다. 위와 옆에서 압박하는 적국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처했다. 비상수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당나라에 대한 청병(請兵)외교였다.

 

신라는 643년 9월 사신을 당 태종에게 보냈다. 『삼국사기』 5, 선덕여왕 13년(643)조엔 “당 태종을 만난 신라 사신이 고구려와 백제가 이번 9월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 하므로 하국(下國, 신라)의 사직은 틀림없이 보전되지 못할 것이므로 삼가 배신(陪臣, 제후의 신하)을 보내 대국에 말씀드려 일부 군사를 빌려 구원받기를 원하는 바입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 태종이 “신라는 어떤 기이한 꾀를 써서 망하는 것을 면하고자 하는가”라고 묻자 사신은 “저희 임금은 사세가 궁하고 계책이 전혀 없으므로 오직 급함을 대국(大國, 당나라)에 알려 사직(社稷)을 보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당 태종은 세 계책을 말하며 어느 것을 따르겠는가 하니, 사신은 “예”라 할 뿐 대답이 없어 황제는 그가 용렬해 군사를 청하고 급함을 알릴 만한 재간이 아닌 것을 탄식했다고 나온다. 당시 당은 세계를 지배한 글로벌 파워. 그러니 제국의 정점인 태종 앞에서 모든 이는 주눅 들어 꼼짝을 못한 것이다.

 

사실 당군을 끌어들여 고구려·백제를 정복한다는 구상은 실현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칠성우(1회 참조)들이 왕정을 장악한 진덕여왕 2년(648), 비상한 일이 벌어졌다. 왕위계승권자인 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는 사신이 된 것이다. 그만큼 절박했다.

 

 

시안 근교의 당태종 무덤 소릉. 산 중간에 구멍을 뚫어 시신을 안치했다. [사진 권태균]

 

 

김춘추, 아들과 함께 對唐 청병외교 나서

 

당의 수도 장안(長安, 현재의 시안)에 간 춘추는 보통 사신과는 달리 당당했다. 여느 사신들처럼 태종 앞에서 “예, 예”만 하지 않았다. 춘추는 603년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용수의 아들. 왕궁에서 태어나 612년까지 살며 왕자(王者, 왕과 그 일족)의 생활을 익혔고, 언제인가 용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 태종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게다가 고구려 외교의 실패를 반추한 춘추는 준비를 했다. 당도 신라와의 동맹이 필요했을 것이란 계산도 했을 것이다. 고구려 원정 실패로 절치부심할 테니까.

 

‘준비된 대당(對唐)외교’에 나선 춘추의 모습이 『삼국사기』 5, 진덕여왕 2년(648)조에 그려진다. 태종은 셋째 아들 문왕(文王)을 포함한 사절단과 함께 온 춘추를 광록경 유형을 보내 교외에서 맞는다. 당 태종은 춘추의 영특하고 훌륭한 모습을 보고 후하게 대우했다. 춘추가 왕위계승권자라는 점을 파악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춘추는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 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큰 제사)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했다. 당 태종은 허락하면서 손수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줬다. 왜 춘추는 ‘느긋하게’ 움직였을까.

 

당나라 성세(盛世)를 창시했다고 하는 당 태종의 흠 중 하나가 3년 전인 645년 고구려 정벌이었다. 당 태종은 직간(直諫)을 잘하던 위징(魏徵)을 기리며 “살아 있었다면 고구려 정벌이 잘못된 일이라 했을 것”이라며 한탄했다.(『당서』 97, 『위징』) 춘추는 당시 그런 태종의 심리와, 고구려를 협공하기 위해 신라의 협조가 필요한 당의 사정을 면밀히 분석했을 것이다. 그런 초조함을 읽고 춘추는 당 태종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을까. 그런 계산이 먹힌 듯 당 태종은 춘추를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가.” 춘추는 무릎 꿇고 말했다.

 

“신의 본국은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데도 엎드려 천자의 조정을 섬겨오기를 여러 해 동안 해왔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해 여러 차례 제 나라를 침탈했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대거 깊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해 당에 조공하는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대를 빌려 주시어 흉악을 잘라버리지 않는다면, 저의 나라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다 건너 직공(職貢)을 바치는 일을 다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 태종은 출병을 허락했다.

 

그때 태종이 춘추에게 한 약속이 『삼국사기』 진덕여왕 2년조에는 안 나오고 671년 7월 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의 첫머리에 나온다.

 

“선왕(춘추)께서 정관 22년(648)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 문황제(文皇帝)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는데 ‘짐이 지금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여 매번 침략을 당해 편안할 때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고 옥백(玉帛)과 자녀들은 내게도 충분하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신라에 주어 영원히 평안하게 하겠다’ 하시고 계책을 가르쳐주고 군사의 기일을 정해 주셨다…”(『삼국사기』 7, 문무왕 11년)

 

춘추와 당 태종의 밀약은 태종이 죽은 후 태자 치(治) 즉 고종(高宗) 대에도 작동했다. 이 약속은 한국사의 방향을 결정한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이었다.

 

문무왕, 당과 9년전쟁으로 영토 확장

 

춘추는 당 태종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여러 조치를 했다. 당 태종은 춘추가 신성한 사람이라며 곁에서 숙위(군주를 호위하며 지킴)하라고 했지만 춘추는 이를 사양하는 대신 “신에겐 일곱 아들이 있는데 원컨대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하게 해 달라” 했다. 당 태종은 문왕과 대감 1인을 숙위토록 했다.(『삼국유사』 1, 『태종춘추공』조) 태종은 춘추를 특진(特進, 제후 중 공적 있는 자에게 주는 명예칭호)으로 삼았다. 귀국 때는 3품 이상 신료들에게 송별 잔치를 베풀었다.

 

춘추는 그때 동시에 중국문명과의 고속도로를 뚫는다. 춘추는 신라인의 장복(章服, 옷)을 중국의 제도에 따르겠다고 했다. 당 태종은 진귀한 옷을 춘추와 그의 일행에게 주었다. 649년 정월 신라의 신료들은 중국 조정의 의관을 입었다. 664년 정월에는 문무왕의 명으로 여자들도 중국의 의복을 입는다. 중국 옷을 입는 것은 신라의 의식과 문화를 바꾸는 작업이었다. 이후 한국인의 겉모습은 확 달라졌다. 대신라(소위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들은 당나라 사람의 옷을 입고 있다.

 

춘추는 당의 유학(儒學)이 문화의 정통이라는 것도 파악했다. 오자마자 국학에 나아가 석전과 유교경전 강론을 참관하겠다고 요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신라의 국학은 682년 설치되었지만, 그 안의 대사(大舍)라는 관직은 651년 설치되었다.(『삼국사기』 38, 『직관』 상) 한국식 유교 국가의 길은 춘추가 연 것이다. 650년엔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채택했다. 이런 중국화 정책을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당을 안심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칠성우를 양신(良臣)으로 거느린 춘추의 리더십이 작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병과 문물 수용이 자주를 포기한 종속과는 엄연히 다른 것.

 

신라는 통일 이후 당군을 몰아낸다. 668년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고구려를 정복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이 신라가 군사 기일을 어겼으므로 계책을 써서 다스린다거나, 또 왜국(倭國)을 친다고 핑계를 대면서 실은 신라를 칠 것이라는 것이었다.(『삼국사기』 7, 문무왕 11년)

 

그러나 문무왕은 668~676년 당과 9년 전쟁을 치르며 신라의 토지를 패강(浿江, 청천강)까지로 넓혔다. 필자는 그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것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양제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나, 안시성 성주와 성민들이 단합해 당 태종의 공격을 물리친 것보다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본다.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지만 신라의 국력도 당에 비교할 상대가 안 됐기 때문이다.

 

태종무열대왕(춘추)과 문무왕은 대당 청병외교로 국가의 최우선 과제인 생존을 실현했고 당나라의 신라 지배 야욕을 물리쳤다. 나아가 중국화 정책으로 정치·사회·문화 등 다양한 면에서 신라 왕국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신라의 현명한 두 국왕의 냉정한 판단이 나라를 살려내고 삼한통합을 이뤄 한국사의 물줄기를 고구려나 백제가 아니라 신라 중심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6·25전쟁 이후 정전(停戰) 상태가 계속되는 지금, 춘추의 청병외교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켰다고만 비난할 것인가.

오히려 남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켜내고 왕국을 국제화로 거듭나게 한 춘추의 판단에서 위기 관리의 역사적 교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

 

 

 

 

 

 

 

과거 고구려가 망할때와 지금의 북한이 비슷하고

융성했던 통일 신라와 당나라가 망할 때가 지금의 남한이 비슷하다.

 

고구려는 권력싸움에 백성은 안중에 없고 내분으로 스스로 망했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당나라와 신라는 고위층의 부패와 사치,문화만 숭상하고 스스로 나라를 지키는 국방력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신라 화랑의 패기는 없어지고, 귀족자제의 병역기피와 평화주의자가 득세하여 외세에 힘입어 나라를 지키려 햇다는 점이다.

 

누가 먼저 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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