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쳐야 하늘이 보인다
단골 목욕탕에 세신사가 새로 왔다.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삼십 대의 젊은이였다. 그도 벌이가 안된다며 떠난 이전 사람들처럼 얼마 못 가 봇짐을 싸지 않을까 싶어 소 닭 보듯 했다.
웬걸, 그 청년이 오고부터는 때를 미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연유는 내가 직접 때를 밀어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서툴렀지만, 정성을 다하는 자세가 이전 사람들과는 아주 달랐다. 때를 밀고 난 다음에도 목덜미와 어깨의 근육을 풀어 주고, 발뒤꿈치 굳은살까지 꼼꼼하게 벗겨 주었다. 본값보다 덤이 더 많으니 어찌 손님이 몰리지 않겠는가.
청년은 부지런할 뿐 아니라 곰살궂기까지 했다. 손님이 사용한 목욕 대야나 타월들을 재바르게 정리하고 바닥에 깔린 비누 거품도 바로바로 씻어 내곤 했다. 누구에게나 환히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몸이 불편한 분들은 부축해 주고 등도 거저 밀어주었다. 그가 오고 나서부터 목욕탕 분위기는 춘삼월 봄이었다.
이렇듯 성실한 젊은이가 어쩌다 삶의 막장이나 다름없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깍듯한 표준말에 몸가짐까지 바른 걸로 보아 배움이 모자라 보이지도 않는데…. 그도 여느 젊은이들처럼 바늘구멍처럼 좁다는 취업의 문턱에서 거푸거푸 고배를 마신 후에 저임금의 비정규직에 취업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걸로는 딸린 식구를 부양하기에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분식집 같은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망해 빚만 잔뜩 짊어지게 되지 않았을까.
곤경의 바다에 빠진 그가 체면이 밥 먹여주나 싶어 ‘때밀이’라는 험한 일에 발을 들여놓았을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저 청년처럼 한 번쯤 어려움에 빠졌던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중의 한 사람이지 않은가.
6.25 한국전쟁, 부산은 임시 수도인 동시에 나라 경제의 중심지였다. 사고파는 모든 물건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부산의 경기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활발했다. 나는 그때 국제시장 근방에다 비누, 성냥, 양초 같은 생필품을 도매하는 가게를 차렸다. 중학생 때부터 시작했던 행상과 노점의 경험 때문인지 가게는 날로 번창해 갔다. 물건을 공급해 주는 공장 사장님들로부터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 사업가’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이렇게 잘 나갔지만, 너도나도 서울로 가는 ‘환도 바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추수 끝난 들판처럼 휑한 분위기,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 아내와 두 아이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가슴을 치며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자신을 질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보다는 식구들을 먹여 살릴 길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고민 끝에 시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천 리 밖 먼 땅, 충남 광천 어느 농가의 단칸방을 얻어들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근방의 장마당을 돌아다니며 됫박 곡식을 사 모았다 되파는 장돌뱅이 노릇을 시작했다. 낯선 곳인데다 밑천마저 짧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죽기 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른 새벽 열차를 타고 홍성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태안 오일장으로 갔다. 사 모은 곡식은 다른 이들과 함께 장짐 트럭에 실었는데 졸때기 하주인 나는 노상 트럭 짐칸에 타야 했다. 늦가을 찬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트럭에서 밤하늘을 쳐다보면 쏟아질 듯 수많은 별도 오들오들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러구러 여덟 번째 새해를 맞게 되자 서울 을지로에 다시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전에 하던 업종과는 달랐지만 가게는 곧잘 되어 삼십여 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허우적거리며 기운을 뺄 게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 바닥을 쳐야 쉽게 떠오른다고 한다. 만일 내가 그때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 사업가’라는 허명에 얽매여, 바닥으로 내려가지 않고 위만 쳐다보고 허둥댔다면 어찌 되었을까.
구슬땀을 흘리며 때를 미는 저 청년도 지난날 장돌뱅이 노릇을 하던 나와 비슷한 처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곤경의 바다에서 바닥을 쳤으니 머지않아 물 위로 솟구쳐올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환히 웃는 청년의 얼굴, 그 위에 겹치는 또 하나의 얼굴, 곡식 자루를 둘러멘 장돌뱅이였다.
(2010. 2)
첫댓글 강철수 선생님 감동적인 수필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백남오 올림
오, 백남오 선생님,
댓글까지
주시다니요.
4월1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