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유서(遺書) 대필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던 강기훈(51)씨가 최근 24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강씨는 당시 분신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법원 판결을 24년 만에 '유죄→무죄'로 바꾼 결정적 근거는 필적(筆跡)이었다. 당시엔 강씨의 필적이 김씨 유서 필적과 같다고 판단했는데 다시 살펴보니 필적이 다르다고 한 것이다.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글씨 모양이나 솜씨'를 뜻하는 필적은 현대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재판에서 죄의 유무를 가르고 각종 계약서 등 경제 행위의 효력을 좌우하는 요소가 된다. 최근에는 필적으로 사람의 성격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기업이 사람을 채용할 때 기초 자료로 활용하거나 개인이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세상이 온통 디지털로 바뀌고 있는 이 시기에 손으로 쓰는 필적이란 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누구 글씨인지 밝혀라… 죄와 돈의 방향이 바뀐다
국내에 필적이 가장 널리 활용되는 곳은 '사법영역'이다. 필적 감정을 통해 글씨를 쓴 주인공이 누구냐를 밝혀내는 게 대부분이다.
필적 감정의 핵심은 ①글씨를 쓴 사람을 얼마나 정확히 가려내느냐 ②감정 결과를 확실한 증거로 볼 수 있느냐이다. 정확성의 경우 전문가들은 "자료만 충분하면 상당한 수준의 정확도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했다. 이중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디지털분석과장은 "현재 우리 연구원의 감정 일치율은 95%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감정 결과는 법적 증거로도 인정받는다. 특히 필적이 유일한 증거일 경우 가치는 더욱 빛난다. 이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김덕원 미래문서감정원장은 "현 법 체계에서 필적은 강력한 물증(物證)으로 대우받는다"며 "형사 사건에선 범인이 누군지, 민사에선 재산의 소유주가 누구이고 개인이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를 확인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필적이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건 글씨가 마치 지문이나 DNA처럼 사람마다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승희 승앤장문서감정연구원 대표는 "필적은 뇌의 작용이기 때문에 입이나 발로 써도 손으로 썼을 때의 특징이 드러난다. 그만큼 사람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필적은 통상 성인이 되면서 완성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붓글씨 등 꾸준한 연습으로 필적을 바꿀 수 있는 여지도 적지 않다. 노화나 병 때문에 필적이 바뀌기도 한다. 서한서 예일문서감정원장은 "노인이 되면 뇌와 팔 근육의 노화로 운동신경이 떨어져 어린아이 글씨와 비슷해진다. 치매 등 뇌 질환을 겪었을 경우에도 필적이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한 개인의 필적은 다른 사람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법체계에서 현대적 의미의 필적 감정이 등장한 것은 6·25 전쟁 이후다. 1955년 설립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초기부터 정부의 공식 필적 감정 기구로 활동했다.
글씨로 성격도, 학력도 알 수 있다
최근 민간에서 필적이 조명을 받는 건 개인 '성격'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이를 연구하는 '필적학'은 서구에서 15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는데 최근 서구에선 채용이나 인간관계에서 활용도가 커지고 있다.
미국에선 몇년 전 '필체 감정사'라는 직업이 등장했다. 주요 고객은 기업이다. 이력서 글씨체를 보고 직무와 지원자 성향이 맞는지 등을 분석한다. 개인의 경우엔 결혼 전 상대방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감정사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한국고용정보원은 필체 감정사를 '첨단의 미래를 짊어진 사람들'로 분류했다.
전문가들은 "획을 그을 때의 힘, 자음·모음·문장 사이의 간격, 글씨의 정렬 상태 등이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다"고 분석한다. 미국 필적학회 창립자 휴고 하겐 박사는 저서 '필적학'에서 "쾌활하고 태평하며 부드러운 대화 능력을 갖춘 사람은 둥근 글씨를 쓰고, 조용하고 완고하며 냉정한 사람이 각이 진 글씨를 쓴다"고 썼다.
국내에서도 필적으로 성격을 분석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있지만 아직 초기 단계다. 한글에서 필적이 잘 드러나는 것은 자음 'ㄹ' 'ㅂ' 'ㅌ' 'ㅎ', 이중모음 'ㅙ' 'ㅖ', 숫자 '5' '8' 같은 글자다. 쓰는 방법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큰 글씨는 적극적이고 성취 욕구가 강한 것을 나타내지만 현실감각이 약하거나 충동성이 강한 반면, 작은 글씨는 주의력과 경계심이 있지만 소극적이고 쩨쩨할 수 있다고 한다. 글씨 모양이 오른쪽으로 올라간 형태면 감정적이고 흥분하기 쉽고, 오른쪽으로 내려간 모양이면 비관적이고 반항적 성격일 확률이 있다.
미국필적학회(AHAF)·영국필적학자협회(BIG) 회원인 구본진 법무법인 케이씨엘 변호사는 "뒤 글자가 앞 글자 공간을 침범해 겹쳐 쓴 것처럼 보이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 입히는 것을 개의치 않는 성격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자(誤字)나 사용하는 문법에 따라 학력과 연령도 파악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필적으로 개인 특성을 파악하는 건 위험하다는 반론도 있다. 서한서 예일문서감정원장은 "글씨체를 통해 성격을 파악한다는 게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제멋대로인 글씨체를 난독증 병변(病變)의 하나로 본다. '우리아이 공부가 안되는 진짜 이유 난독증' 서경란 저자는 "'ㄱ'이 들어갈 자리에 'ㅇ'을 쓰는 등 획이 비슷한 글자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ㄹ'을 뒤집어 쓰는 식으로 글씨의 위·아래, 좌·우를 뒤집어 쓰면 난독증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댓글 글씨 잘 쓰고 싶어요.
필체 좋으신 분들 능력자로 대우하고 감탄과 칭찬을 듣는데 쓰다보면 앞장 뒷장이 똑같아서 한심합니다.
소리로만 듣고 '쩨쩨하다 '를 처음 보았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