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른 누구도 아닌 대통령 자신을 위한 거부권 행사
그냥 “싫어, 안 할래!”를 굳이 중언부언한 거부권 행사 이유
임기 말 여의도 찾는 ‘배신의 계절’ 모르는 ‘배신의 아이콘’
지뢰밭 피할 덜 부끄러운 해결책도 있으련만…
유시민 작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른바 ‘쌍특검법안’을 재의해 달라고 국회에 요구한 것이다. 쌍특검법안은 야당이 추천한 특별검사가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대장동 50억 클럽 사건을 수사하도록 한 법안이다. 국회가 의결하기도 전에 거부권 행사를 공언한 터라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야당 의석이 의원 정수의 2/3에 미치지 못하니,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양곡관리법‧간호법‧노란봉투법‧방송법처럼 ‘쌍특검법안’도 부결 폐기될 전망이다.
그냥 “싫어, 안 할래!”를 굳이 중언부언한 거부권 행사 이유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이 거부권 행사 이유를 설명했다. 조‧중‧동을 비롯한 ‘친윤언론’의 보도를 요약했으니 실제 한 말의 취지를 왜곡한 건 없으리라 생각한다.
1. 야당의 쌍특검법 제정 목적은 총선 여론 조작이다.
2. 50억 클럽 특검 법안의 목적은 이재명 방탄이다. 친야 성향 특검이 검찰의 이재명 수사 결과를 뒤집기 위해 진술 번복을 강요하고 망신주기 조사와 물타기 여론 공작을 할 것이 뻔하다.
3. 김건희 특검법은 결혼도 하기 전 일을, 더욱이 문재인 정부가 기소는커녕 소환조차 하지 못한 사건을, 이중으로 수사해 관련자들의 인권을 침해한다. 50억 클럽 특검법과 마찬가지로 정치 편향적인 특별검사가 허위 브리핑으로 여론을 조작할 것이다.
4. 둘 모두 민생과 무관한 일인데, 수백억 원의 혈세를 헛되이 낭비한다.
5. 이러한 법안에 대해 재의를 요구하는 것은 헌법 가치를 수호하고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할 책무를 가진 대통령의 의무이다.
대통령실의 주장이 사실에 근거를 두었는지, 사실에 근거를 두었더라도 논리의 규칙에 맞는 것인지 따져볼 수 있겠지만 일일이 논평하지 않겠다. 그럴 필요가 있을 정도로 복잡하거나 난해한 문제는 아니라서. “특검 싫어, 안 할래!”하면 그만인 것을 대통령실 사람들은 쓸데없이 중언부언한다.
5일 국회 본청 앞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진보당과 기본소득당 등 야 4당이 '김건희, 50억 클럽 특검 거부 규탄대회'를 하고 있다. 2024.1.5. 연합뉴스
다른 누구도 아닌 대통령 자신을 위한 거부권 행사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건 아니라 본다. 법안을 만드는 것은 국회의 권한이다. 입법부의 다수파인 야당이 그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재의 요구는 대통령의 권한이다. 대통령은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행사했다. 게다가 처음 보는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번 거부권 행사는 조금은 특별하다. 언론은 대통령이 ‘가족 관련 특검법’을 거부한 전례가 없다고 보도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쌍특검법안은 ‘가족 관련’ 법안일 뿐만 아니라 ‘대통령 관련’ 법안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하고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거부권을 행사했다. 나는 그렇게 본다.
먼저 김건희 특검법안이다. 김건희 여사가 12년 전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에 가담했다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다. 공범들의 재판에서 계좌 내역과 통화 녹취록을 포함한 물질적 증거가 충분할 정도로 나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특검의 조사대상이 되어야 할 ‘권력형 범죄’가 아니었다. 혼인하기 전 일이라 대통령과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김건희 여사가 처벌을 면한 것은 권력형 범죄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검찰이 주가조작 사건을 적발해 관련자들을 수사하고 기소한 것은 김건희 씨가 윤석열 검사와 혼인한 이후였다. 검찰은 윤석열이 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으로 재직한 시기에 진상 규명 요구가 빗발치는데도 서면 조사를 한 번 했을 뿐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문재인 정부 검찰이 탈탈 털었는데도 죄가 되지 않아 소환 조사도 하지 못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지만, 국민들은 윤석열 검사의 배우자이기 때문에 범죄 혐의가 뚜렷한데도 검찰이 수사를 하지 않은 게 아니었는지 의심한다. 지난 1년 반 동안 검찰이 수사를 하지도 않고 무혐의로 종결하지도 않으면서 국회에서 물으면 ‘수사하고 있다’는 말만 되뇐 것도 대통령의 영향력 때문이 아니었는지 의심한다. 그렇지 않다면 특검법 찬성 여론과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대한 반대 여론이 그토록 높을 리 없다.
50억 클럽 특검도 다르지 않다. 특별검사로서 박근혜 대통령을 조사하고 기소해 유죄판결을 끌어냈던 박영수 씨가 50억 클럽 멤버다. 윤석열 검사는 박영수 특검이 발탁한 수사팀장이었다. 두 사람은 한때 보스와 참모 비슷한 관계였다. 그래서 부산저축은행 사건 의혹이 나왔다. 대검 중수부의 윤석열 주임검사가 대장동 ‘일당’이 불법으로 거액을 대출받은 사실을 알면서도 대출 브로커 조 아무개의 변호사 박영수 씨의 부탁을 받고 사건을 눈감아 주었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죄가 없으면 특검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어록을 남긴 바 있다. 쌍특검법에 따라 엄중하게 수사를 하면 검사 윤석열과 대통령 윤석열이 부당하고 위법한 방식으로 권한을 행사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의혹을 털어내고 결백을 증명할 기회다. 결백하다면 대통령으로서 쌍특검법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사실의 근거도 없고 논리의 규칙에도 어긋나는 말들을 내세우며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옛 보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조심하자! 내 주장이 아니다. 나는 검사 윤석열과 대통령 윤석열이 범죄를 저질렀는지 여부를 모른다. 대통령 후보 시절 윤석열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을 따름이다.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열린 촛불대행진에 참가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과 부인 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12.23. 연합뉴스
자기 생존만 도모하는 ‘도생(圖生)의 정치’ 택한 윤 대통령
쌍특검법을 둘러싸고 여야가 빚어내는 풍경이 구질구질하다. 국힘당이 빨리 재의결을 하자면서 총선 후보 공천을 늦추고 있다는 것이 그렇고, 민주당이 반란표를 기대하면서 여당의 공천탈락 국회의원이 여럿 생기는 시점까지 재의결을 늦추려고 한다는 말도 사실이라면 그렇다.
나는 정치와 선거가 ‘전쟁의 문명적 버전’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상대를 말살하려고 하는 전쟁에서는 승리가 곧 선이다. 매복과 기습에서 성동격서의 기만책동에 이르기까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치와 선거는 상대와 경쟁하며 공존하는 무한반복 게임이다. 기만과 살수(殺手)는 같은 형태의 대응을 유발한다. 게임은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보복의 악순환에 갇힌다.
윤석열 대통령은 총선을 석 달 앞둔 시점에서 쌍특검법을 거부함으로써 ‘도생의 정치’를 선택했다. ‘도생의 정치’는 사회적 선과 공동체의 번영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목표로 삼는 정치다. 이번 주 여론조사 결과를 봐야 하겠지만 쌍특검법을 거부했다고 해서 국정수행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일로 야박한 평가를 할 유권자라면 그동안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한다고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검법안 거부의 정치적 효과는 정부 여당의 정치적 외연을 없애는 형태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는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 상승이 더 어려워진다.
앞장서서 특검법 거부를 공언함으로써 대통령에게 충성한 여당도 다르지 않다. 정당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비평가들이 ‘스윙 보터(swing voter, 중도 또는 무당층)’라고 하는 유권자들한테 외면당할 위험이 커진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중도층은 이미 야당 쪽으로 제법 치우쳐 있다. ‘김건희’라는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해서 ‘김건희 특검법안’을 ‘도이치 특검법안’이라고 하는 여당 비대위원장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겠는가.
윤석열 대통령은 과반 의석 획득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하는 국회의원 100명 당선을 4월 총선의 목표로 삼은 듯하다. 국힘당이 100석 이상을 얻고, 그들 중에서 배신자가 나오지 않으면, 대통령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모든 특검법안을 거부해 폐기할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정치적 법률적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 그래서 측근 중의 측근 한동훈 씨를 비대위원장으로 세웠다. 한동훈 씨는 검사 시절 보스의 배우자 김건희 씨와 수시로 카톡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여의도 사투리’로는 그런 관계에 있는 부하를 가신(家臣)이라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종반 소위 ‘당정분리’가 이루어진 이후 대통령이 여당의 대표를 지명한 일은 없었다.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국힘당이 1997년 이전 수준의 정당으로 퇴행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사실상 지명한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대통령실의 ‘여의도 출장소장’으로서 윤석열 대통령이 선택한 ‘도생의 정치’에 걸맞은 방식과 내용으로 총선 후보를 공천할 것이다. 대통령 의중대로 후보를 공천해 여당이 100석 넘게 얻으면 ‘윤석열의 총선’은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도생의 정치’를 완성할 수 있는 건 아니다.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이 통과되고 있다. 국민의힘은 표결 전 퇴장했다. 2023.12.28. 연합뉴스
임기 말 여의도 찾는 ‘배신의 계절’ 모르는 ‘배신의 아이콘’
윤석열 대통령은 독서를 거의 하지 않는 듯하다. 휴가 기간 읽은 책 목록 같은 게 나오지 않는다. 여러 ‘친윤신문’ 기자들의 칼럼에 따르면 남의 말을 거의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고 한다. 정정보도 요구나 명예훼손 고소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사실인 모양이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말 여의도에 ‘배신의 계절’이 찾아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책을 읽지 않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는 정치 초보 대통령은 그럴 수 있다. 그는 지금 지뢰밭을 걷고 있다. 지뢰밭인지도 모른 채.
첫 번째 지뢰는 공천파동이다. 최근 창원시에서 벌어진 일이 흥미롭다. 검찰은 수산시장 수조 물을 떠먹으면서까지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을 추종했던 5선 의원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쳐내는 중이다. 불출마 요구를 따르지 않고 버티다가 검찰의 칼을 받는 여당 국회의원이 얼마나 더 나올지 두고 볼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편법으로 ‘공천혁명’을 할 수는 없다. 한동훈 비대위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때처럼 불투명한 방식으로 경선을 관리하거나 무리하게 현역의원을 경선 배제함으로써 대통령의 요구를 충족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이럴 경우 보수 정치세력이 현재의 이준석 신당 수준에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분열에 빠져 대통령은 ‘도생의 정치’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
완전한 충성파로 100석을 채우는 데 성공한다 해도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년 총선에서 국회에 들어오는 의원들은 윤석열 대통령한테 다시는 공천을 받지 않아도 된다. 22대 총선은 2028년 4월인데 대통령 임기는 2027년 5월에 끝난다. 장관 자리를 받는다거나 지역구 특별교부세 예산을 따려고 대통령한테 충성하는 시늉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친윤’으로 알려지는 것이 다음 총선에 불리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배신자’가 나오는 것은 필연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직을 떠돌던 자신을 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으로 발탁한 문재인 대통령의 등을 칼로 찌르면서 보수진영의 정치적 대표성을 획득했다. 인간적인 면에서든 정치적인 면에서든 ‘배신의 아이콘’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공천을 주고 국회의원 배지를 선사했다고 해서 어떤 국회의원이 영원히 충성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압도적 다수 시민들이 싫어하는 임기 말의 대통령을 패대기쳐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통령의 임기 말은 정치적 배신의 계절이라는 사실을 윤석열 대통령은 알까? 모른다는 데 오백 원을 건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겸 대표 권한대행과 의원들이 28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특별검사 도입법과 대장동 50억 클럽 의혹 특검법, 이른바 '쌍특검법'이 상정되자 본회의장 밖으로 나와 피케팅을 하고 있다. 2023.12.28. 연합뉴스
지뢰밭 피할 덜 부끄러운 해결책도 있으련만…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특검을 피할 수는 있다. 그러나 특검이나 검찰의 수사를 영원히 피하지는 못한다. 공천파동으로 보수 분열을 일으켜 충성스러운 국회의원 100명을 확보하는 데 실패할 경우 22대 국회가 출범하기도 전에 퇴임을 앞둔 21대 국회가 새로운 특검법안을 의결할지 모른다. 그럴 경우 국회는 대통령이 거부해도 특검법안을 재의결할 것이다. 총선에서 ‘도생의 정치’에 필요한 의석을 얻는다 해도 임기 말 배신의 계절을 무사히 넘기기는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비우고 찾아보면 덜 고통스럽고 덜 부끄러운 해결책도 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국회 다수당 대표이자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가 자객의 칼에 목을 찔리는 무지와 반지성의 정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법으로 죽이려다 안 되니 칼로 죽이려 하고, 그마저 실패하자 펜으로 죽이려 드는 윤석열 정부와 그 추종자들과 ‘친윤언론’의 행태가 너무 끔찍해서 하는 말이다. 대통령실의 그 누구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것, 말해주지 않아도 안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글을 왜 쓰냐고? 나도 모르겠다. 독감이 오려나?
출처 : [유시민 칼럼] 대통령은 누구를 위해 거부권 행사했나 < 유시민 관찰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