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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 ~ 1763)
자는 자신(自新)이다. 성호(星湖)라는 호와 《성호사설》이라는 백과전서적 저술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평생 은둔하며 제자를 양성했는데, 성호의 학풍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조선 실학의 중추가 되었다
팔대조 계손(繼孫)은 성종 때에 벼슬이 병조판서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여주 이씨로서 가통이 서게 되었다. 증조부 상의(尙毅)는 의정부좌찬성, 할아버지 지안(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지냈고, 아버지 하진(夏鎭)은 사헌부 대사헌에서 사간원 대사간으로 옮겼다가, 1680년 경신대출척 때 진주목사로 좌천되었고, 다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1681년 10월 18일에 아버지 하진과 그의 후부인 권씨(權氏) 사이에 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682년 6월에 전부인 이씨(李氏) 사이의 3남 2녀와 후부인 권씨 사이의 2남 2녀를 남긴 채 55세를 일기로 유배지 운산에서 죽었다. 아버지를 여읜 뒤에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와 어머니 권씨 슬하에서 자랐다. 첨성리는 행정적으로 경기도 광주부에 속하여 광주 첨성리로 일컬어졌으나, 이른바 비래지(飛來地)로서 광주, 과천, 금천을 걸쳐 있었다. 그래서 흔히 안산의 첨성리로 불려졌다.
10세가 되어서도 글을 배울 수 없으리만큼 병약하였으나, 더 자라서는 둘째형 잠(潛)에게 글을 배웠다. 25세 되던 1705년 증광시에 응하였으나, 시험장소에서 신상명세를 기록하는 것이 규정양식에 어긋났던 탓으로 응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바로 그 다음해 9월에 둘째형 잠은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린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고, 47세를 일기로 옥사하게 되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의 가문은 서울의 정동(貞洞)이 기반이던 남인 명가였으나 정작 그의 출생지는 평안도 벽동군(碧潼郡), 부친 이하진(李夏鎭)의 유배지였다. 출생 한 해 전에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1680)이 일어나면서 부친이 유배된 것이다. 대사간을 역임한 부친은 이익을 낳은 이듬해(1682) 배소(配所)에서 5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실록> 8년(1682)조는 이하진이 ‘분한 마음에 가슴 답답해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갓난 이익에게 당쟁은 운명이었다.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둘째형 이잠(李潛)이 숙종 32년(1706)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옹호하며 집권당 노론을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익은 다시 당쟁에 휘말린다.
헤아릴 수 없이 형장을 맞다 죽어간 형
“춘궁(春宮·세자)을 보호하는 자는 귀양 보내어 내치고 김춘택(金春澤)에게 편드는 자는 벼슬로 상주니, 어찌 전하께서 춘궁을 사랑하는 것이 난적을 사랑하는 것만 못하시어 그렇겠습니까? 권세 있는 척신(戚臣)이 일을 농간한 것입니다.”(<숙종실록> 32년 9월17일) 이 상소에 격분한 숙종은 일개 유학(幼學)에 지나지 않는 이잠을 친국(親鞫)하면서 분개했다.
“죄인이 지극히 방자하다. 내 앞에서도 도리어 이러하니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이러한 놈은 내가 참으로 처음 보았다. 각별히 엄하게 형신(刑訊)하라.”(<숙종실록> 32년 9월17일)
숙종은 이잠을 ‘반드시 죽여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나장(羅將)이 신장(訊杖)을 가볍게 친다는 이유로 가두라고 명할 정도였다. 이잠은 묶은 것을 풀어주면 실토하겠다고 청했지만 거부당한 채 형장(刑杖)만 열여덟 차례 맞다 장사(杖死)했다. 한 번 형신에 약 30대씩이니 이잠이 맞은 대수는 세기도 어려웠다.
경종 때 소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보궐정오>는 이잠이 ‘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춘궁(春宮)을 위하여 죽는다는 뜻에 붙였는데, 그 어머니가 힘껏 말렸으나 그만두지 않고, 드디어 극형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잠은 노론이 세자(경종)를 내쫓으려고 한다고 주장하다가 사형당한 것인데, 이 주장은 훗날 경종독살설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기도 했다.
장희빈을 죽인 노론으로서는 그 아들까지 제거해야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저군(儲君)이라 불리는 세자의 지위를 흔드는 것도 반역이란 점에서 이잠의 상소는 남인 당론을 뛰어넘는 우국충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이 스스로 노론의 정견을 가지면서 세자의 충신이었던 이잠은 숙종의 역적이 되어 죽어갔다.
이잠의 상소 사건이 일어나자 ‘이잠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혹시 화가 미칠까 두려워 손을 흔들며 피했다’고 전하는데, 스물여섯이었던 이익은 그때 선영이 있는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주했다. 바다에 가까운 그 고장에는 성호(星湖)라는 호수가 있어서 그의 호도 여기에 연유된 것이며, 그 고장에 있던 그의 전장(田莊)도 성호장(星湖莊)이라 일컬어졌다.
그는 여기에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 사령(使令)과 기승(騎乘)을 이어가지고, 재야의 선비로서 일평생 은둔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셋째형 서와 사촌형 진과 종유(從遊)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35세 되던 1715년에 어머니 권씨마저 여의어 복상(服喪)을 마치고서는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로 돌려보냈으나, 형제 일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실제로는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47세 되던 해에 조정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의 집안은 기울어갔으며, 이익 부자의 오랜 병마와의 씨름은 명을 재촉하였다.64, 65세 때에는 이미 뒷잔등의 좌단(疸)이 악화되어 갔고, 70세가 넘어서는 일찍이 괴과(魁科)로 급제하여 예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지낸 외아들 맹휴(孟休)가 오랜 병고 끝에 죽었으며, 70세 후반기에 들어서는 반신불수가 되어 움직임마저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가산도 탕진되어 그의 만년에는 한 명의 노비 외에는 송곳을 꽂을 만한 전답도 없으리 만큼 영락되고 만 셈이었다.
83세 되던 1763년에 조정에서는 원로 우대의 관례에 따라 그에게 첨지중추부사로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어주었으나, 그해 12월 17일 오랜 병고 끝에 죽었다. 유해는 선영이 있는 첨성리(현재 안산시 이동)에 안장되었다.
첨성촌으로 이주한 그는 “화난(禍難)을 당해서 곤박(困迫)한 지경에 빠져 과거 공부에 뜻을 접었다”라고 과거 공부를 포기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집에 장서 수천 권이 있어서 때로 이를 보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게 되었다”라고 공부마저 포기하지는 않았음을 전한다. 게다가 벼슬길이 막힌 채 골방에 갇혀 책만 파는 머리만 큰 지식인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는 ‘성호 농장(星湖之莊)에서 몸소 경작(耕作)했다’는 기록처럼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와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士農)일치의 삶을 살았다.
그는 “사(士)가 때를 얻지 못하면 농(農)으로 돌아가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는 데 힘쓰고, 또 그 지식은 후생을 가르치면 족하다”(<향거요람서>(鄕居要覽序))라고 농사와 독서를 병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농포(農圃) 일무(一畝)를 가꾸어 내 손으로 남과(南瓜·호박)를 심어 누렇게 익는 것을 기다려 수장(收藏)했다가 겨울철에 지져서 돼지국을 만들어 반찬으로 먹으면 그 맛이 달다”라는 글도 남겼다.
농경에 종사하면서 그 시대 사대부들이 천시하는 노동의 철학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노동의 철학 속에서 그는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변혁(變革)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는 통상적인 이치이다”라며 개혁을 시대의 요구라고 주장하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인재들만이 극심하게 편중된 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왕도정치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분배가 균등치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같지 않은데 어찌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면서 균전제를 주장했다. 그의 균전법(均田法)은 일종의 한전법(限田法)으로서 일정 규모 이상 농토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당쟁의 근원은 이해관계다”
이익은 집권 노론의 정치 보복으로 부친과 형을 잃었으나 남인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이익은 부친과 형의 정견을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남인들의 정견은 노론보다 객관적으로 시대정신에 부합했다. 그러나 이익은 남인의 자리라는 현상을 뛰어넘어 부친과 형을 죽인 당쟁의 본질에 천착했다. 당쟁의 본질에 천착하다 보니 정치의 본질에 대해서는 오히려 소박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맹자(孟子)가 왕도를 논한 것을 보면 ‘보민’(保民) 한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보민이라는 것은 바로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주고 모이게 하며, 싫어하는 것을 베풀지 않을 따름이요, 집에까지 가서 날마다 보태주는 것은 아니다.”(<유민환집>(流民還集))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생각이 실천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치는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인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가족사를 뛰어넘은 그의 정치 평론은 마치 현재의 정치 상황을 말하는 듯 생생하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지고, 이해가 오래될수록 당파는 굳어진다. …이제 열 사람이 모두 굶주리다가 한 사발 밥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말이 불손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말이 불손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태도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는… 밥 먹는 동작에 방해를 받는 자가 부르짖고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한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으나 끝은 크게 된다. 그 말할 때에 입에 거품을 물고 노하여 눈을 부릅뜨니, 어찌 그다지도 과격한가. …이로 보면 싸움이 밥 때문이지, 말이나 태도나 동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해(利害)의 연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그릇됨을 장차 구할 수가 없는 법이다.”(‘붕당론’, <성호집> 권25, 잡저)
‘말이 불손하다’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는 등의 여러 명분으로 포장하지만 당쟁의 연원은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주위의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하지만 싸움 끝의 이익은 정치인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대개 이(利)는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당이 둘이 되고, 이는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당이 넷이 되는’ 당쟁의 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 붕당(朋黨)의 화도 그 근원을 따지면 벼슬하려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혹 이로써 죄를 얻어 멀리 내쫓김을 당한다 할지라도 얼마 안 되어 그 거리의 원근을 따져서 높은 지위로 뽑아올리니, 마치 자벌레가 제 몸을 한 번 굽혀서 한 번 펴기를 구하는 것처럼 죽을 경우를 겪어도 꺼리지 않는 이가 있다.”(‘귀향’, <성호사설> 제23권)
당쟁이 치열하다 보니 최소한의 명분도 사라지고 오직 자당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만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비판은 격렬하다.
그의 타고난 성품은 기신(氣神)이 정랑(精朗)하고 성모(性貌)는 준결(峻潔)하며, 눈에는 정기가 넘쳐 흘러서 그 영채(英彩)가 사람을 쏘는 듯하고 조그마한 긍지도 가진 듯싶지 않으면서도 중정간중(中正簡重)하여 하나의 덕성을 갖추어, 집안에서는 법을 세워 예절을 엄준히 하고 사치한 생활을 엄히 금하였다.
그의 문인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인품에 대하여 강의독실(剛毅篤實) 이것은 선생의 뜻이요, 정대광명(正大光明) 이것은 선생의 덕이요, 선생의 학은 정심굉박(精深宏博)하고, 그 기상은 화풍경운(化風景雲)이요, 그 금회(襟懷)는 추월빙호(秋月氷壺)이다. 라고 술회하였다.
그의 학문은 그 일문에 이어져서 준재가 많이 배출되어 아들 맹휴는 《예론설경 禮論說經》, 《춘관지 春官志》,《접왜고 接倭考》등을 남기고,손자 구환(九煥)은 조업(祖業)을 계승하였다. 그 위에 종자(從子) 병휴(秉休)는 예학으로, 종손(從孫) 중환(重煥)은 인문지리로 이름을 남기고, 가환(家煥)은 정조의 은총을 받아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천주교를 신앙하여 1801년의 신유사옥 때에 옥사하였다.
이익의 문인으로 두드러진 자로는 윤동규(尹東奎), 신후담(愼後聃), 안정복, 권철신(權哲身) 등이 있어 당대의 학맥을 이루어 그 흐름을 정약용에게까지 미쳤다.
증조부 상의는 일찍이 이수광(李光)과 더불어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온 일이 있었고, 이익의 딸이 이수광의 후손과 결혼 한 것으로 보아 이익, 이수광의 양가는 세교 집안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첨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하진이 1678년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에 청제(淸帝)의 궤사은(饋賜銀)으로 사가지고 돌아온 수천권의 서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현의 언행을 샅샅이 기억하고 일찍부터 시나 문을 잘 외었다. 《맹자》, 《대학》, 《소학》, 《논어》, 《중용》, 《근사록》 등을 읽고, 다시 《심경 心經》, 《역경》, 《서경》, 《시경》을 거쳐서 정주(程朱)와 이황(李滉)의 학문을 탐독하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익의 학문은 이렇듯 철저한 유교적 기반 위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여러 경서(經書)에 대한 질서(疾書)를 지어내고, 주자(朱子)의 《근사록》과도 같이 이황의 언행록인《이자수어 李子粹語》를 찬저(撰著)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허목(許穆), 윤휴(尹) 등의 뒤를 이어 주자에게로만 치우치는 폐풍에서 벗어나 수사학적(洙泗學的)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의 부흥을 기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부흥이 아니라 부흥이 바로 혁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이와 유형원의 학풍을 존숭하여 당시의 사회실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무(世務)에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재구(材具)의 준비가 있어야만 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사장(詞章)과 예론(禮論)에 치우치거나 주자의 집전(集傳)이나 장구(章句)에만 구애되는 풍조에서, 그리고 종래의 주자학적으로 경화된 신분관, 직업관에서 벗어나는 한편, 왜란·호란을 겪고 난 뒤의 사회변동과 당시의 세계관, 역사의식의 확대 및 심화에 따른 자기나라에 대한 재인식에서 일어난 조선 후기 실학의 기본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불씨(佛氏)의 이단(異端), 술가(術家)의 소기(小技)와 패관잡설(稗官雜說) 등 세가지 서(書)를 혐오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학(西學)에는 학문적인 관심을 기울여 천문, 역산, 지리학과 천주교서 등 한역 서학서를 널리 열람하고 만국전도, 시원경(視遠鏡), 서양화 등 서양문물에 직접 접하여 그의 세계관·역사의식을 확대,심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종래 중국중심의 화이관,성인관에서 탈피하여 보다 합리적이고 실증적인시야를 지닐 수 있게끔 한 것이다.그는 정통적인 유학자이면서도 노불(老佛)의 학이나 새로 전래된 천주교와 같은 이른바 이단에 대해서도 그 윤리면에 있어서는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었으나, 불교의 윤회설이나 천주교의 천당지옥설, 야소부활설(耶蘇復活說)과 같은 것은 황탄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익은 종래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도 사물의 존재원리로서의 이(理)는 인정하지만, 존재 자체는 기(氣)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현실적으로는 존재원리보다도 기로서의 인간존재를 보다 더 중요시한 셈이다.
그는 문학론(文學論)에 있어서도 경세실용적(經世實用的)인 면에서 교화와 풍간(諷諫)에 보다 더 많은 의의를 부여하고, 그의 화론(畵論)에 있어서와 같이 형(形)·신(神)의 일치로써 ‘사진(寫眞)’, 즉 전신사영(傳神寫影)의 원칙을 중시하였다. 그의 시에 있어서도 마치 두보나 이태백에서와 같이 색태(色態)를 돋보이게 하여 사실적이면서도 회화적인 묘사를 귀히 여기는 한편, 황새, 소리개, 지렁이, 개미와 같은 동물의 생태를빌린 우의적, 풍자적인 시작과 현실적인 좌절과 갈등에서 오는 은일적 (隱逸的)인 시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이단잡설과 훈고(訓誥), 사부(詞賦)는 물론, 이기(理氣)의 논의까지도 당시 사회의 현실문제에 비추어서는 아무런 실익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그러한 의미에서 예학이나 이기설 같은 것이 당시에는 긴요하고 절실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과 사상은 내외적으로 당시 조선이 처한 사회현실로 보아 경세실용이라는 면에 중점이 두어졌다.
◆ 저술에 담긴 개혁의지 이익의 학문사상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탈주자학적인 수사학적 수기치인의 학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학에로의 복귀 내지 부흥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사회 현실에 입각한 사회개편을 주장한 개혁사상을 의미한다. 그의 학문의 본바탕은 어디까지나 경학에 두어졌음에도 사회 현실에 비추어 보다 더 긴요하고 절실한 것은 경세치용의 학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당시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학의 수용으로 세계관과 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켜 갔고, 보다 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방식을 체득할 수가 있었다. 그의 여러 ‘이단(異端)’에 대한 자세를 볼 때 윤리면에 대해서는 너그러움을 보였으나, 신앙 자체에 대해서는 거부적인 견해를 취하여 그 점에서는 새로 전래, 유포되던 천주교에 대해서도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유학자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그의 이교배척, 폐전론(廢錢論), 억말책(抑末策)의 제의, 남녀관에서 정통 유학자로서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사민평등의 인간관·신분관·직업관에서 근대적인 사회에로 한걸음 다가섰음을 엿볼 수 있다. 저서로는 《성호사설》, 《곽우록 藿憂錄》, 《성호선생문집》, 《이선생예설 李先生禮說》, 《사칠신편 四七新編》, 《상위전후록 喪威前後錄》, 《사서삼경》 《근사록》 《심경》 등의 질서, 《이자수어》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고 서학도 수용
“당파의 폐습이 고질화되면서 굳이 자기 당이면 어리석고 못난 자도 관중(管仲)이나 제갈량(諸葛亮)처럼 여기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자도 공수·황패(?遂·黃覇·중국 한나라 때 명 목민관들)처럼 여기지만 자기의 당이 아니면 모두 이와 반대로 한다.”(‘당습소란’(黨習召亂), <성호사설> 제8권)
당쟁의 구조를 간파한 이익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편당심이다. 이익은 ‘편당 속에서 성장하면 비단 남에게 밝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밝은 지혜에다 결단성을 지니지 않으면 이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당론’(黨論))며 편당심을 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쟁의 문제점에 대한 이익의 해결책은 신선하다. ‘이(利)가 나올 구멍을 막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벼슬아치의 사익을 창출하는 정치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이를 탐해 ‘벼슬을 하려는 자가 적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 들어서 시대의 요구와는 거꾸로 소수 벌열에게 권력이 집중되는데, 이익은 이런 왜곡된 정치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오늘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종당(宗黨·친척당)과 사돈붙이가 아님이 없어서… 서로 결탁하여 대를 이어가면서 벼슬을 독차지’하는 직업 정치인들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공경(公卿)들에게 미천한 사람들의 농사일을 알게 하려면 반드시 벌열이란 칼자루 하나를 깨뜨려 없애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가려 높여서 등용해야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농사꾼 중에 인재를 발탁하자’(薦拔?畝), <성호사설> 제10권)
이익은 사대부만이 아니라 서얼·농민, 나아가 노비까지도 등용하자는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는다. 세습적 직업 정치가인 소수 벌열에게 집중된 정치구조를 깨트리고, 노동의 어려움을 아는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이익은 천거제를 주장한다. ‘전형(銓衡·인사)을 맡은 자로서 시골 인재를 추천하지 않은 자는 벌을 주자’고까지 주장한 것이다.
이익의 이런 주장들이 그 시대의 상식을 뛰어넘은 것처럼 그의 사상 역시 주자학을 뛰어넘었다. 다산 정약용은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이익)의 힘입니다.”(‘둘째형님께 답합니다’(答仲氏))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또 이익의 옛집을 방문하고, ‘(이익이) 추구하는 바가 공자·맹자에 접근했으며, 주석은 마융·정현을 헤아렸다’라는 시구를 남겨 이익이 주희를 거치지 않고 공맹에게 직접 다가가고, 주희 이전 고대 한(漢)나라 학자들의 주석으로 유학을 해석했다고 평가했다.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던 이익은 사신들을 통해 들어온 서학(西學)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다.
만년에 흉년 계속되며 어려움에 처해
그는 이탈리아 신부 로드리게즈(중국명·陸若漢)가 정두원(鄭斗源)에게 준 각종 과학서적과 망원경 등을 예로 들면서 “그가 우리에게 준 물건들은 모두 없앨 수 없는 것들이다. 나도 천문(天問)과 직방(職方)은 읽어보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서양 학문에 개방적이었다. 밖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 속에서 안으로는 우리 것을 찾자고 주장했다. 이익은 안정복(安鼎福)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인(東人·조선인)이 동사(東史·조선사)를 읽지 않고, 거친 상태로 내버려두어 자고(自古)로 이에 유의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동국(東國)은 다름 아닌 동국이다. 그 규제(規制)와 체세(體勢)는 스스로 중국사와는 다르다”라고 말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두 버리고 중국인이 되기 위해 광분하던 소중화 시대에 ‘동국은 다름 아닌 동국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상의 주체성은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한때 열심히 농사지어 다소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기도 했지만 만년에 흉년이 계속되면서 “1년 중 친척 중에 20세가 된 자로 죽은 사람이 열두 명인데, 그 태반이 기병(飢病·굶주림)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게다가 외아들 맹휴(孟休)의 와병 때, “늙은 몸으로 일찍부터 밤까지 간호하여 근력도 다하고 가산도 탕진”할 정도로 노력했으나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영조 39년(1763) 83살의 고령이 된 이익에게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의 직이 내려졌으나 그해 12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세웠던 사상체계는 조선 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
◆ 성호 이익 선생 묘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40호 , 소재지 : 안산시 일동 555번지, 시대 : 조선중기 ● 유래 실학의 대가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은 평안도 운산에서 1681년(숙종 7년) 부친 이하진(李夏鎭)이 유배길에 운산에 와 있을때 태어났다. 이익 선생은 그가 평생토록 떠나지 않고 거주하며 학문의 커다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경기도 광주군 첨성리(瞻星里:지금은 안산시 성포동)라는 지명에서 '성(星)'자를 따서 그의 호를 지었다. 이익 선생은 1705년(숙종 31년) 증광문과(增光文科)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형 잠(潛)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 瞻星村(지금의 안산시 성포동)에 머물며 일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中祖)가 되었으며 그의 학풍은 그후 안정복,이가환,이중환,정약용 등에게 계승되었다. 이익 선생은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데에만 몰두하여 천문, 지리, 의학, 재정, 지방제도, 과거제도, 학제, 병제, 관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비판과 이상 및 사상을 널리 써놓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한 곽우록(藿憂錄), 성호문집(星湖文集)을 남겼으며 조정에서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이조판서에 추서하였다. 선생은 1763년(영조 39년)에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 위치 및 구조 그의 묘소는 수원~인천간 산업도로가 바라보위치하고 있는데 묘소의 석물로는 묘비(墓碑)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住石)이 있다. 봉분의 규모는 600X550X220cm이다. 묘비의 재질은 오석(烏石)이다. 비석은 공이 사후 204년이 되는 1967년에 건립되었으며 규모는 옥개석이 90X60X50cm이다. 상석(床石)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규모는 121X83X58cm이며 향로석은 39X28X39cm이다. 망주석의 높이는 165cm이다. 두향(頭向)은 북향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묘소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덤앞에 안내판이 있다. 묘소 우측에는 성호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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