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의 최대 화약고로 떠오른 크림반도는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결정한 곳으로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는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원수(당시 63세), 프랭클린 루스벨트(66)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71) 영국 총리가 얄타회담을 한 곳이다.
이 회담은 동유럽과 한반도 운명이 강대국의 의도대로 좌우된 회담이다.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여기서 결정된 것이다. 이 때문에 크림반도는 낯설지만 얄타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다. 크림반도는 바로 얄타가 있는 곳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이곳이 70년만에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왔다.
크림반도는 불과 며칠전 끝난 동계올림픽 개최지 소치처럼 흑해(黑海) 연안에 있다. 크림(Крым·영어로 크리미아·Crimea)반도는 인구 200만명중 58.5% 가 러시아인이다. 우크라이나인은 24.4%, 타타르인이 12.1% 이다. 우크라이나 행정 구역상 크림주(州)로 분리돼 있지만 러시아인들이 많은데다 러시아 정서가 워낙 강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로 통한다. 우크라이나 정부도 이를 감안해 유일한 자치공화국 지위를 부여했다. 면적 2만 5600㎢이며 심페로폴이 주도(州都)다. 흑해함대 모항이 있는 세바스토폴과 얄타가 주요 도시다.
이 회담은 동유럽과 한반도 운명이 강대국의 의도대로 좌우된 회담이다.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여기서 결정된 것이다. 이 때문에 크림반도는 낯설지만 얄타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다. 크림반도는 바로 얄타가 있는 곳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이곳이 70년만에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왔다.
크림반도는 불과 며칠전 끝난 동계올림픽 개최지 소치처럼 흑해(黑海) 연안에 있다. 크림(Крым·영어로 크리미아·Crimea)반도는 인구 200만명중 58.5% 가 러시아인이다. 우크라이나인은 24.4%, 타타르인이 12.1% 이다. 우크라이나 행정 구역상 크림주(州)로 분리돼 있지만 러시아인들이 많은데다 러시아 정서가 워낙 강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로 통한다. 우크라이나 정부도 이를 감안해 유일한 자치공화국 지위를 부여했다. 면적 2만 5600㎢이며 심페로폴이 주도(州都)다. 흑해함대 모항이 있는 세바스토폴과 얄타가 주요 도시다.
- 일촉측발 크림반도 개황
역사적으로 크림반도의 주인은 자주 바뀌었다. 15세기 전반 크림 한국(Крымское ханство)이 킵차크 한국에서 떨어져 나왔으며, 15세기말 오스만 투르크가 크림 한국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이곳에서 65만여명의 타타르족은 18세기까지 ‘타타르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살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위협했다. 하지만 1783년 제정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 타타르족 운명도 갈렸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자치공화국이 됐다.
하지만 제2차대전 당시 타타르인들은 독일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후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추방되면서 지금은 7만3000명 정도만 남아있다. 마치 한인들이 일본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소련과 현 러시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 지금도 러시아로의 귀속을 외치는 일부 친러시아계의 주장에 극력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는 냉전시절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견제를 위해 흑해함대라는 강력한 해군기지를 유지했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서 크림이 우크라이나령이 됐지만 러시아는 함대 유지를 위해 세바스토폴을 우크라이나로부터 임차해 쓰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번 러시아 군대 이동과 크림내 군사활동도 깜짝할 새 이뤄진 것이다.
크림반도 남단에 위치한 얄타는 인구 9만명이 소도시다. 얄타회담 장소였던 리바디아 궁전(Livadia Palace)은 아직도 건재하다. 네오 르네상스식 흰색 2층(탑은 3층) 건물인 이곳은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여름휴가를 보내던 곳이다. 흑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이곳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나라 운명을 결정한 역사의 현장이다.
- 얄타회담 장소 리비디야 궁전. 현장 취재중인 필자.
스탈린은 회담 동안 루스벨트에게 딸 앤과 더불어 이 궁전에서 지내도록 했다. 루스벨트에게 궁전 1층에 있는 니콜라이 2세 서재를 침실로 내준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처칠과 얄타 근교의 다른 숙소에 머물며 매일 회담장인 리바디야 궁전을 오갔던 일화는 유명하다.
- 1945년 2차대전 후 리바디야궁전에서 열린 얄타회담 참석자들. 왼쪽부타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소련의 미국 대통령에 대한 접대가 대단했는지 이 회담에서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양보를 받아냈다. 동유럽의 지배권과 사할린 섬의 귀속 등을 약속 받아 얄타회담 최대 수혜자가 된 것이다.
또 회담기간 동안 저녁 만찬 때 ‘차르(황제)의 와인’이라는 얄타의 명포도주 마산드라가 등장했다. 처칠은 크림의 온화한 기후 화강암 토질에서 자란 100% 카베르네 쇼비뇽으로 제조한 와인의 감미롭고 매끄러운 맛에 반했다. 처칠은 런던으로 돌아간 뒤에도 마산드라 맛을 잊지 못해 스탈린에게 이 와인을 요청해 마셨을 정도였다. 마산드라는 아직도 러시아인들이 가장 즐겨마시는 와인중 하나다.
- 얄타에서 생산되는 마산드라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