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추기경님과의 ‘향수’ 듀엣 / 고영초
발행일2022-04-10 [제3289호, 22면]
고영초 교수(왼쪽)와 김수환 추기경이 1997년 2월 1일 전진상의원 봉사자 미사 봉헌 후 노래 ‘향수’를 함께 부르고 있다.고영초 교수 제공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후략)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이 시는 1927년에 발표되었으나, 대중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었다. 대중음악 작곡가였던 김희갑 선생님께서 30여 년 전 이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여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의 크로스오버 음악으로 나와 대단한 인기를 얻으면서 향수는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됐다.
나는 본과에 진입한 1973년부터 서울의대 가톨릭학생회 진료팀 일원으로 서울 변두리 지역 진료 봉사를 시작했다. 1974년에는 난곡동 사회사업가 김사라 선생님 댁에서 주말 진료를 했다. 의사가 된 1977년부터는 월 1~2회 전진상의원에서 진료 봉사를 시작해 오늘 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전진상의원은 약사와 간호사, 사회사업가로 구성된 국제 가톨릭 형제회 회원들이 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지원으로 1975년, 시흥2동 조그마한 주택에서 시작한 자선 의원이다.
나는 전진상의원에서 봉사를 시작하면서 매년 봉사자 미사를 통해 김 추기경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다. 추기경님께서는 매년 1월 말부터 2월 초, 우리 봉사자들과 가족을 위해 전진상의원에서 미사를 봉헌해 주셨는데, 강론을 통해 가난한 이웃에 대한 우리 봉사자들의 사랑의 행위에 자긍심을 심어 주셨고, 사기를 북돋아 주셨다.
내가 45년 동안 전진상의원에서 봉사를 지속할 수 있었던 힘도 추기경님의 말씀 덕이라 할 수 있다. 추기경님께서는 미사 후에 일일이 친필 사인을 하신 좋은 책을 나눠 주시고 봉사자들에게 세배도 받으시고, 봉사자들의 자녀들에게는 세뱃돈을 주시기도 했다.
식사 후 여흥 시간에는 우리 노래도 들으시고 박수로 청하면 기꺼이 추기경님께서도 등대지기, 애모, 사랑을 위하여 등을 부르셨다. 그런데 1997년 봉사자 미사 후 여흥 시간에 영광스럽게도 내가 이 ‘향수’라는 쉽지 않은 곡을 추기경님과 함께 듀엣으로 불렀다.
당시 추기경님의 비서 신부님께서 추기경님께서도 이 노래를 배우셨다고 하길래, 나는 감히 추기경님께 듀엣으로 함께하자고 부탁드렸다. 박인수 파트를 내가 부르고, 추기경님께서는 이동원 파트를 맡으셨는데, 당시 동영상을 촬영해 두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하지만 오래된 사진첩에서 추기경님과 노래를 부르던 사진을 찾을 수 있어 참 다행이다.
건국대병원 성심회 회원들과 추기경님 묘소를 참배했던 2012년 봄, 추기경님 묘소 앞에서 옛 기억을 되살려 솔로로 ‘향수’를 불렀다. 최근까지도 난 가곡 연주회에서 향수라는 곡을 연주할 때마다 25년 전 추기경님과 함께했던 그 ‘향수’를 기억하곤 한다.
고영초 가시미로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