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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3년 12월 7일 목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1.24-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진정한 효자
나의 외할아버지는 대단한 한량이셨습니다. 총각 때, 어느 양반집 뒤뜰에 감이 참으로 탐스럽게 달려 있는 것을 보시고 집에 계신 할머니가 생각나서 올라가 홍시를 따셨답니다. 안채의 뒷문이 열리고 “누가 감을 따느냐?”고 안주인 마님이 힐난하는 말을 듣자 “집에 계신 할머니 생각이 나서 홍시 하나를 좀 땄기로서니 아녀자가 큰소리를 낸다.”고 오히려 야단을 치니 그 안주인 마님이 하인을 시켜 뉘댁 도령인지 알아보라고 해서 사위를 삼았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렇게 얻은 외할머니를 정말 무던히도 고생을 시키셨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느라고 그 많던 재산을 다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금하시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시다 감옥에 세 번이나 가시고, 집안이 모두 무지무지한 감시와 고통 중에 살게 하셨답니다. 그래서 내 외할머니께서는 속병이 나셔서 내 어머니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답니다. 그래서 나는 외할머니를 뵙지도 못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시느라고 가족이 가난하게 살고, 온갖 고생을 한 것을 평생 죄인처럼 사셨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께서는 나를 아주 귀여워 해 주시며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그중에서 박문수 암행어사가 임금님에게 암행어사의 제수를 받을 때 “세상에 다니면서 탐관오리도 적발하고, 잘못 사는 사람들도 찾아내야 하지만 효자, 효부도 찾아서 보고하시오.” 그래서 박 어사는 효부 효자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얘기 중 생각해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뜨거운 어느 여름날 어사가 어느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글 읽는 소리가 아주 낭랑하게 들려서 땀도 식힐 겸 그 서당을 찾아들어갔습니다. 모두들 정성을 다해 글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뜨거운 뙤약볕에서 무릎을 꿇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책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바라보니 여섯 살쯤 먹은 아이인데 저렇게 벌을 세우다니 훈장님이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여쭈니 훈장님 왈 “그 아이는 막무가내로 제가 스스로 저렇게 하는 것이라 내가 시킨 것이 아니니 직접 물어보십시오.”하고 그냥 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사가 그 아이 곁으로 가서 그 연유를 물으니 “제가 서당에 와서 공부할 때면 저희 아버지 어머니는 논매고 밭 매시면서 비지땀을 흘리고 고생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시원한 대청에서 편히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어사는 그 꼬마 아이의 말을 듣고 그만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부모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생각되어서 "얘야 네가 이렇게 공부하는 것을 부모님이 아시면 마음이 아프실 것이다.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 더 효자란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대청으로 올라와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사는 그 아이가 효자라고 생각하여 치부(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며칠 후에 어사는 참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였답니다. 어떤 어린애가 막대기를 들고 수염이 난 노인을 때리려고 쫓아가고, 노인은 매를 맞지 않으려고 도망가는데 그 어린애는 또한 여섯 살쯤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경만 하고 있는데 어사가 이를 궁금히 여겨 연유를 물으니 노인이 숨을 헐떡이면서 하는 말이 “저놈은 제 자식이랍니다. 환갑을 한참 지나서 겨우 생남을 하였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너무 귀엽고 예뻐서 걸음마를 아장아장 배울 때 내외가 앉아서 '엄마 좀 때려봐라!' 그러면, 엄마를 때리고, '아버지를 좀 때려봐라!' 그러면, 아버지를 때려서 지금은 그게 버릇이 되어가지고 막대기로 때려도 그게 너무 귀엽고 예뻐서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이제는 도망 다니기도 숨이 차고 힘들답니다.” 그래서 어사는 그 노인에게 ‘자식교육을 바르게 시켜야 한다.’고 얘기도 하고, 아이한테는 ‘낳고 길러준 부모님에게 그런 행동은 잘 못 된 것이라.’고 단단히 훈계를 하기도 하였답니다.
그리고 한 참이 지난 후에 다시 그 동네를 지나는데 도랑물에 놓여있는 징검다리 돌판 위에 어떤 어린아이가 손을 비비는데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이 보였답니다. 왜 손바닥을 갈고 있는지 걱정되어 그 아이 얼굴을 들어 올려 보니 마침 아버지를 막대기로 쫓아가며 때리던 그 아이인 것입니다. 깜짝 놀라 사연을 물으니 아이가 하는 말이 " 손으로 부모님 다리도 주물러 드려야 하고, 어깨도 주물러 드려야할 손으로 부모님께 매질을 하였으니 갈아버리고 싶습니다.” 엉엉 울면서 대답하는 아이를 보고 어사는 큰 감동을 받아서 “부모님이 네가 그렇게 상처를 내면 좋아하시겠느냐? 효경에 너의 손톱 발톱, 피부가 모두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감히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하면서 <오여 신체발부 수지부모 하니 불감훼상이 효지 시야라.(吾汝 身體髮膚 受之父母하니 不敢毁傷이 孝之始也라.)> 그러니 그렇게 네 몸을 다치면 안 된다.” 그랬더니 아이는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집으로 가더랍니다.
그래서 어사는 두 사람을 효자로 기록하고 왕께 보고하였답니다. 임금님은 가만히 듣고 있더니 “둘 다 불효자로다. 어떻게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사람을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다만 뉘우치고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돌아 온 것을 칭찬할 만하다.” 하시고 상을 내리셨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만 믿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교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살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여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효성은 효성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무리 주님을 불러도 주님의 뜻을 따라 실행하지 않으면 결국 하느님께서 외면한 길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뿌리가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고 공중누각(空中樓閣)이며 사상누각(沙上樓閣)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께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하며, 아버지의 뜻을 실행으로 적극적으로 옮기는 삶이어야 합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6,1-6
1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2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3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4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5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6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축일12월 7일 성 암브로시오 (Ambrose)
신분 : 주교, 교부, 교회학자
활동 지역 : 밀라노(Milano)
활동 연도 : 339-397년
같은 이름 : 암브로시우스, 앰브로스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또는 암브로시오)는 갈리아(Gallia)의 지방 장관으로 재직한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339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사망 후 로마(Roma)에서 인문 교육을 받아 수사학과 법학 외에 그리스어에도 능통하였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는 국가 관리의 길을 택해 뛰어난 실력과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빨리 출세하였다.
시르미움(Sirmium, 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미트로비카)의 지방 법원에서 잠시 근무를 하다가 지방 장관 프로부스(Probus)의 고문이 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370년에 에밀리아 리구리아(Aemilia-Liguria)의 수도인 밀라노의 집정관이 되었다. 암브로시우스가 그 지방을 다스리던 때 밀라노에는 서방 교회 아리우스주의(Arianism)의 대표자인 아욱센티우스(Auxentius)가 주교로 있었다. 아욱센티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도움으로 교회에서 파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밀라노의 주교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자 후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집정관인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의 질서 회복을 위해 이 문제에 개입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을 중재하면서 암브로시우스는 성당에 모여 있던 신자들에게 평화적 방법과 대화를 통해 화해를 추구하자고 연설을 하였다.
이때 뜻밖에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암브로시우스가 주교로 선출되었고 그는 할 수 없이 수락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암브로시우스는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니케아(Nicaea)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주교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은 뒤, 8일 후인 373년 12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주교직은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지위이다. 그리고 밀라노는 로마제국 서부 지역의 행정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에 주교 역시 불가피하게 정치에 개입되어 있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개종자들, 수없이 많은 이교도들 그리고 아리우스 이단에 동조하는 그리스도인들 등 모든 문제를 새 주교인 암브로시우스가 해결해야만 했다.
주교가 된 후 성 암브로시우스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희사하고, 수도자와 같이 청빈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신학, 성서 등을 연구하였다. 그에게 신학을 가르쳐 준 사람은 훗날 그의 후계자가 된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 신부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고,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서방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성 암브로시우스가 주교품을 받은 지 약 1년 만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그라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의 고문관이 된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를 설득하여 니케아 신앙 고백을 따르도록 하고 서방에서 아리우스파를 축출하는 법안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제가 전투에서 막시무스에게 살해되자 암브로시우스는 또 다시 막시무스를 설득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의 원로원 회의실에 승리의 여신상과 제단을 재건하려는 로마 시 집정관 심마쿠스(Symmachus) 일파의 시도를 분쇄하는데 성공하였으며, 385년에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어머니로 아리우스주의 추종자인 황후 유스티나에 의해 일단의 무리들에게 밀라노의 성당들을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내주라고 명한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성공적으로 저항하였다.
390년 테살로니카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로마 총독을 살해하자 그에 대한 징벌로써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군인들에게 진압을 명령했을 때, 군인들의 무차별 진압으로 7,000명이 살해당하였다. 이에 성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에게 범죄의 중대함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암브로시우스는 참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공식 참회 행위로 보속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이에 순순히 응해 성탄 때 제복을 벗고 참회복으로 갈아입고 통회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항상 다음과 같은 원칙 밑에서 행동하였다. “황제는 교회 안에 있다. 그는 교회 위에 있을 수 없다.”
393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갈리아에서 아르보가스투스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는데, 그들의 대표자 에우게니우스는 우상 숭배를 재건하려고 시도하는 무리들이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그들의 살인과 공격을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마침내 제국 내에서 우상 숭배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수개월 후에 죽게 되자, 성 암브로시우스가 그의 장례 때 기도하고 설교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도 그 후 2년 뒤에 밀라노에서 운명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며,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가던 서방 세계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부흥을 새로운 단계에 돌입시킨 분이시다. 또한 세속의 권위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자주성을 옹호했던 행정가이면서도 성서, 신학, 신비신학 등 설교를 중심으로 설파한 그의 지식 또한 괄목할만하였다. 그는 설교를 통해 이단에 빠져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를 이끌어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도록 했으며, 387년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사건은 그 당시의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성 암브로시우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와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받는다. 또한 그의 저서 중에 “신비에 대해서”란 책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세례, 견진 그리고 성체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시편을 대중적인 찬미의 기도로 활용하도록 가르친 첫 번째 인물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성직자들의 직무론”(De Officiis Ministrorum), “동정녀”(De Virginibus), “신앙론”(De Fide) 등이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암브로시오 (Ambrose)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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