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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여불위(呂不韋). 일기일회 기화가거(一期一會 奇貨可居) [심상훈의 부자팔자]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470 15.05.06 13: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심상훈의 부자팔자]

천금(千金)을 들여 횡재 아닌 왕재(王才)를 얻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여(呂)씨가 불위에게①

 

일기일회 기화가거(一期一會 奇貨可居)

- 평생 한 번 오는 기회, 진귀한 보배(사람)는 마땅히 사둘만하다(<사기>)

 

[한자 풀이] 一 한 일, 期 기약할(일평생) 기, 會 기회 회, 奇 진귀할 기, 貨 재물 화, 可 마땅할 가, 居 살 거

 

------------------------------------------------------------------------------------------------

살다 보면 어떤 일은 내 능력 밖이라는 것을 절로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능력 밖, 즉 부족함이 누군가와 기막힌 만남으로 한순간에 채워지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스승이나 군주(주인), 선배 혹은 친구일 수 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성장한다.

누구를 만나지 않고서는 부족함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러한 만남은 ‘평생에 한 번 오는 기회(一期一會)’ 일지도 모른다. 또한 상대는 내게 ‘진귀한 보배(奇貨可居)’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

 

여(呂)씨는 불위(不韋, ?~BC 235)의 아버지를 말한다. 이름을 알 수 없다. 기록에 없기 때문이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인 신분이었다는 정도다. 그러니까 불위는 대를 이어서 상인의 길을 걸은 셈인데 아버지 여씨보다도 더 큰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사기열전>에 등장하는 ‘여불위열전’의 첫 문장이다.

 

呂不韋者 陽翟大賈人也 往來販賤賣貴 家累千金

(여불위자 양책대고인야 왕래판천매귀 가루천금)

 

“여불위는 양책의 큰 상인이었다. (제후국들)을 왕래하면서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집안에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라는 뜻이다.

 

양책(陽翟)은 중국 제후국 중 하나인 한(韓)나라의 도시 이름이다. 이곳에 여불위가 사업의 터전을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는 전국(戰國)시대의 말기로 전국 7웅인 한(韓)·위(魏)·조(趙)·제(齊)·주(秦)·초(楚)·연(燕)이 천하 패권을 놓고 자주 전쟁을 벌이던 때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 보자면 중앙에는 한·위·조 세 나라가 서로 이웃하고 있었고, 동쪽엔 제, 서쪽엔 진, 남쪽엔 초, 북쪽엔 연이 제후국이 되어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서·남·북의 변방도시보다는 아무래도 중앙에 위치한 한·위·조의 도시들이 좀 더 번화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은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한단성은 웅장했으며 그 구조 또한 빈틈없었다. 당시 각국의 왕궁에는 왕성(王城)과 동서 양편의 성들을 연결하면서 몇 대의 마차가 동시에 다닐 만한 큰 도로가 없었는데, 한단에는 그러한 길이 몇 개나 되었다. 길가에는 점포들과 여관, 주막이 빽빽하게 들어섰고, 행상과 노점상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단성 안에는 마차와 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빼어난 미모의 여인들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다른 도시 여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소박하고 검소한 면은 찾아볼 수 없었고, 매우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듯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그야말로 부귀와 향락이었다.

(장옥빈·이붕 지음, 백은경·이진 옮김, <재기>, 고수 펴냄)

 

여씨 부자, 전 재산 털어 볼모 자초를 사다

 

처음 한단을 방문한 여불위에게 한단은 쓸모와 매력이 넘치는 도시였고 반드시 거래를 터야만 하는 요지였다. 하지만 대상인의 예리한 안목으로 여러 물건을 살피고 저울질해보았지만 큰 이문을 남길 만한 것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몹시 어려웠다. 현실적으로 계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상품의 물건이 도시에 차고 넘쳐났으나 그만큼 값도 최고로 비쌌다.

 

이러한 까닭에 여씨 상가(商家)의 원칙인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에 합당한 상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신규 거래처를 틀 수 없었다. 괜스레 발품만 판 꼴이 된 여불위의 한단행(行) 시장조사는 말짱 도루묵이 될 판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진나라의 왕자 중에 ‘자초(子楚)’가 조나라의 볼모가 되어 지금 한단에서 살고 있다는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기에 이른다. 매우 기쁜 나머지 여불위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진귀한 물건(보배)이다. 마땅히 사두는 것이 좋으리라(此奇貨可居也).”

 

한달음에 한단에서 양책으로 돌아온 여불위는 아버지를 찾아가 물었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기 위해 봄에 씨앗을 뿌려 밭에 나가 일하면 몇 배의 이문을 남길 수 있을까요?”

“아마 10배쯤은 되겠지.”

 

“진주나 옥과 같이 귀한 물건들을 팔면 몇 배의 이문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100배는 될 게다.”

 

“그럼 나라를 세우게 도와준 다음, 그 나라의 군주를 사 온다면 몇 배쯤 벌어들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아버지 여씨는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부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이문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평생 한 번 오는 기회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진귀한 물건은 마땅히 사둘 만한 것이다.”

 

여불위 아버지의 말을 여덟 글자(八字)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기일회 기화가거(一期一會 奇貨可居)’.

팔자의 뜻은 ‘평생 한 번 오는 기회, 진귀한 보배(사람)는 마땅히 사둘 만하다’로 풀이할 수 있다.

 

당시 여씨 부자의 재산은 ‘천금’이었다. ‘천금’은 큰 액수의 돈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1금은 10냥이고, 당시 금 한 냥은 16g이었다. 따라서 천금은 황금 160㎏을 말한다.

장사 밑천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천금’을 여씨 상가는 이제 어디에다 써야 할지, 긴 안목을 가지고서 결정한 것이다.

 

투자처가 결정됐다. 여불위는 천금을 가지고 다시 한단으로 향한다.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진나라 왕자 자초를 만나 약속을 받기 위해서다.

 

여불위, 자초에게 올인하다

 

자초는 진나라 소왕(昭王)의 손자였다. 소왕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安國君)의 20명 아들 중에 둘째였다. 소왕 40년, 진나라 태자가 죽었다. 2년 뒤인 42년, 안국군이 왕위 계승자가 되어 진나라 태자에 올랐다. 이 해에 여불위가 한단을 처음 방문했고 자초 소식을 접한 것이다.

 

자초가 인질이 된 시기는 소왕 37년이다. 37년에는 진나라와 조나라가 한판 전쟁을 치렀다. 결과는 조나라의 승리였다. 진나라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왕자 중에 한 명을 인질로 보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자초가 인질로 결정되고 조나라 수도 한단에 남게 된 것이다. 자초는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타국의 볼모가 된 처지라 생활이 넉넉지 않았다. 궁핍했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무런 기약도 없었기에 뜻을 잃고 하루하루 살 수밖에 없었다.

 

자초가 한단에 머문 지 6년째 되는 어느 날이었다. 여불위가 방문했다. 뜻밖에 찾아온 손님이었다. 할 수 없어 자초는 여불위를 만났다. 자초를 만난 여불위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가문을 크게 해줄 수 있습니다(吾能大子之門).”

 

그러자 자초는 웃으면서 말했다(子楚笑曰).

 

“먼저 그대의 가문을 크게 이루고 나서 내 가문을 크게 이루어주시오(且自大君之門, 而乃大吾門).”

 

여불위는 솔직히 말했다.

‘我’라고 쓰지 않고 ‘吾’라고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뜻을 잃은 볼모 왕자는 상대의 말이 얼토당토않고 터무니없이 들렸기에 그저 허허, 웃을 수밖에(笑) 없었다.

그런 다음에 여불위에게 바로 비꼬듯이 말(且自大君之門, 而乃大吾門)한 것이다. 그러자 여불위는 자초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인다. 되새김질해야 하는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이 그것이다.

 

자부지야(子不知也) 오문대자문이대(吾門待子門而大)

 

“그대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내 가문은 그대의 가문이 커짐에 따라서 커짐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자초는 곧 여불위의 말뜻을 알아차린다. 형식적인 말로 오갈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비밀한 말을 나누기 적당한 장소로 이내 손님을 안내한다.

이윽고 함께 좌정한다(子楚心知所謂, 乃引與坐).

다시 말해서 마루에서 서서 손님을 맞이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방(안방)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여(呂)씨가 불위에게 ②

 

..........................

가끔 서가에서 <사기열전>을 꺼내서 읽는다. 그러다 멋대로 “만약에~?”라는 질문을 ‘한 줄의 글’을 읽으면서도 묻곤 한다. 이를테면 ‘여불위열전’과 전국 사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만일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또한 3000명 식객을 거느렸다는 제후국의 사공자들(맹상군·신릉군·평원군·춘신군)이 동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과연 전국시대의 결말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결론은 이렇다.

사공자들이 없고 소왕이 더 오래 살았다면 중국 천하는 진시황제의 증조부가 되는 소왕이 통일을 했지 싶다.

........................

 

 

여불위가 먼저 입을 뗐다.

 

“진나라 왕은 이미 늙었고 안국군이 태자가 되었는데 듣기로는 안국군은 화양부인을 총애한다 합니다.

그러나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누군가를 뒤를 잇도록 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화양부인의 마음 하나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 그대의 형제는 20여 명이나 되는데, 그대는 둘째 아들이며 또 그리 귀함을 받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다른 제후 나라에 볼모로 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돌아가시고 안국군이 즉위하게 되면 그대는 아무래도 그대의 형 또는 조석으로 안국군의 슬하에 있는 아우들과 태자의 자리를 놓고 싸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秦王老矣, 安國君得爲太子. 竊問安國君愛幸華陽夫人,

華陽夫人無子, 能立適嗣者獨華陽夫人耳.

今子兄弟二十餘人, 子又居中, 不甚見幸, 久質諸侯.

則大王薨, 安國君立爲王, 則子毋幾得與長子及諸子旦暮在前者爭爲太子矣.

(사마천 지음, 임동석 역주, <사기열전>, 동서문화사 펴냄)

 

날카로운 분석이다. 훔쳐 들었다(竊問)는 정보 치고는 말이다. 진나라 왕궁의 돌아가는 내부 사정을 장사꾼에 불과한 여불위가 정확히 꿰뚫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인질 왕자로 살아온 자초는 한편 놀라면서도 여불위의 식견에 신뢰를 보내며 경청해야 했다.

 

여불위의 말이 끝나자 자초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然). 이제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爲之奈何)?”

 

모든 사실을 자초가 스스럼없이 인정하자 여불위는 이어서 말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대는 가난하고 조나라에 볼모가 되어 있는 몸이어서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도, 빈객과 교제하는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비록 가난하지만 청컨대 천금을 던져 그대를 위해 서쪽 진나라로 가서 안국군과 화양부인에게 가까이하여 그대를 후사로 정하도록 주선하겠습니다.”

子貧, 客於此, 非有以奉獻於親及結賓客也. 不韋雖貧, 請以千金爲子西遊, 事安國君及華陽夫人, 立子爲適嗣.

(사마천 지음 <사기열전>)

 

‘미래 이익’ 위해 손잡다

 

참으로 놀라운 책략이다. 게다가 여불위로서는 가장 큰 투자인 셈이다.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천금을 자초로 하여금 적통을 잇는 것(適嗣)에 모두 쓰겠다고 하니 말이다. 여불위의 말처럼, 진왕이 늙었고, 안국군이 태자가 된 것은 사실이고 화양부인에게 아들이 없는 것 등이 모두 정확한 사실이지만 아직 진 소왕은 죽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자초가 꼭 적통을 잇는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이익을 위해서 과감하게 천금을 던지겠다고 하니 자초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절로 고개를 숙일밖에….

 

하여 자초는 여불위에게 머리를 숙인다(子楚乃頓首). 돈수(頓首)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하는 절’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왕자가 일개 상인에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는 얘기다.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랬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다. 이름도 없고 돈도 없이 외국 땅에서 볼모로 늙어 죽을 팔자가 하루아침에 조국에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기고 게다가 진왕이 될 수 있는 꿈도 꾸게 되었고 뜻도 펼치게 되었으니 오죽 좋았겠는가. 어떻게든 여불위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가. 자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필여군책(必如君策)

청득분진국여군공지(請得分秦國與君共之)

“당신(君)의 책략과 같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면, 당신과 함께 진나라를 나누는 것을 청하겠습니다.”

 

여불위가 약속을 받아내고 싶었던 말을 자초가 결국 약속을 하고 만 것이다. 서로의 미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한단에서 여불위와 자초가 처음 만나 약속을 하던 이때가 진나라 소왕 42년이고, 그로부터 14년 뒤에 진나라 소왕은 즉위 56년 만에 숨을 거뒀다. 곧바로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올라 효문왕(孝文王)이 되었다. 효문왕은 보위 1년 만에 죽었다.

 

드디어 자초가 진나라 왕으로 즉위하기에 이른다. 바로 장양왕(莊襄王)이다. 장양왕은 즉위하자마자 여불위를 승상에 앉혔다. 또한 문신후(文信侯)라 봉했다. 이뿐만 아니다. 전에 약속한 바와 같이, 하남 낙양에 10만 호를 여불위의 식읍으로 주었다. 이는 여불위가 처음 천금을 투자한 지 15년 뒤에나 거둔 결실이다.

여씨 상가로서는 최고의 거래가 된 셈이다. 가장 큰 이익을 남긴 거다. 굳이 이익을 따지자면, 천금의 1000배 이상 되는 부를 일궜다고 해야 맞는 얘기다.

 

하지만 지난 15년 동안, 천금을 쌓아두었다는 여씨 상가는 사라져버렸고, 절호의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적지 않게 여불위가 마음고생을 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내심을 가지고 때가 오길, 묵묵히 기다릴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이 여불위의 놀라운 상술이다. 보통의 상인처럼 당장의 이익을 창출하는 현재의 투자에만 골몰하지 않고 언제 회수하게 될지 잘 모르는 일이지만 미래를 위한 과감한 투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여불위는 대상인이다. 대상인의 능력과 마인드, 기질과 배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정말 남다른 투자였으리라.

 

여불위의 선견지명 책략

 

여불위는 자초에게 500금을 주었다. 빈객과의 교제비용과 곤궁한 살림에 보태라는 뜻에서였다. 나머지 500금을 가지고 여불위는 서쪽 진나라로 향했다. 진나라에 도착한 여불위는 먼저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났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준비한 진기한 물건과 노리개를 선물로 바쳤다. 화양부인의 언니를 통해서 왕궁에 있는 화양부인을 만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많은 재물을 쓴 덕분에 화양부인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어느 정도 허물이 없어지자 여불위는 화양부인에게 자초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예를 들면, 자초가 어질고 지혜롭다는 이야기와 함께 태자(안국군)와 화양부인을 하늘처럼 우러러 받들고 있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화양부인의 언니를 설득해 화양부인의 약점을 파고들게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여자는 젊음이 시들고 매력도 시들면,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합니다(色衰而愛弛).”

 

이 말에 화양부인은 마음이 흔들렸다. 맞는 얘기가 아니던가. 그렇지 않아도 아들을 낳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늘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가 찾아와서 기름에 불을 붙이는 꼴로 아픈 곳을 찌르며 말하니 흔들리고 마음이 불안해지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효성이 깊은 왕자 중에 한 사람을 골라 양자로 들여야만 남편이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설사 죽은 뒤에도 양자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으므로 차후에도 탄탄한 앞날이 보장될 수 있다는 말에 설득되고 말았다. 그 말이 화양부인은 옳다 싶었다.

 

문제는 20여 명의 왕자 중에 누구를 골라 양자로 삼느냐였다. 여불위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자초를 추천했다. 비록 자초의 생모가 살아있지만 일찍이 총애를 잃어 화양부인과 다투지 못한다는 점과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점이 태자를 설득해 자초를 양자로 삼기에는 제법 그럴듯하다 싶었다.

화양부인은 기회를 엿보아 안국군을 설득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긴다. 실행의 가닥은 자식이 없는 소첩이 한 가지 소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즉, 자초를 양자로 삼아 소첩의 장래를 의탁할 수 있도록 윤허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안국군은 자식이 없는 화양부인의 양자 입적 소원을 허락했다. 여불위의 책략이 그대로 먹힌 것이다. 그 증표로 옥부가 새겨졌다. 또한 안국군과 화양부인이 자초에게 내리는 옥부와 후한 선물이 조나라 한단에도 전해졌다. 이 심부름을 여불위가 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리하여 자초는 조나라와 제후국에서 명성이 높아졌다. 더불어 조나라 사람들의 대우도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여불위는 자초와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한단에 머물기 시작했다. 자초의 뒤를 돌봐주기 위해서였다.

여불위는 한단에 있는 여러 무희 가운데 용모도 뛰어나고 춤도 잘 추는 여자를 첩으로 들여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자초가 여불위의 집을 방문했다. 자초는 여불위의 첩을 보고 그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러고는 거리낌도 없이 첩을 주었으면 했다. 여불위는 화가 났다. 하지만 자초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어 첩을 자초에게 바쳤다.

자초는 첩을 부인으로 맞았다. 첩은 여불위와 동거하며 임신한 사실을 숨겼다. 이를 여불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래를 위해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한단 무희가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을 정(政)이라고 지었다.

정(政)이 누군가. 바로 훗날에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진시황제(秦始皇帝)다.

 

 

 

여불위처럼 '사람'에 투자해 거상(巨商)이 된 호설암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여(呂)씨가 불위에게 ③

 

...............................

‘사(士)’라는 한자는 ‘도끼 모양을 본 딴’ 글자이다. 이로 짐작할 수 있듯이 전쟁의 도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士는 ‘남자로 구성된 군대’를 상징했다. 씨족의 우두머리인 대부(大夫) 밑에 있었다.

하지만 천자의 나라 주(周)가 약해지고, 제후국과 대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士는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해야 했다. 하나는 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무사(武士)이고, 또 하나는 행정을 담당하는 문사(文士)가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무(文武), 두 가지를 고루 갖추지 않으면 진정한 ‘士’라고 할 수 없었다.

............................

 

진(秦)나라 소왕 50년(기원전 245년), 자초와 여불위가 심각한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을 진나라 군대가 포위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나라에서는 자초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자초는 여불위와 의논하고 금 600근으로 감시하는 관리를 매수하여 진나라 진영으로 도망하여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초의 부인과 어린 아들 정(政)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조나라의 인질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6년 뒤 진나라 소왕이 죽었다. 안국군이 진나라 왕이 되었다. 화양부인은 왕후가 되고,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그제야 조나라는 자초의 부인과 아들 정을 정중히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당장 닥칠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왕위에 오른 안국군이 1년 만에 죽자, 태자 자초가 진나라 임금(장양왕)이 되었다. 그는 여불위를 승상에 임명하고 문신후에 봉하고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러나 즉위 3년 만에 죽었다. 13세의 어린 태자 정이 보위에 올랐다. 정은 여불위를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仲父)라고 불렀다. 여불위의 전성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여불위의 신념이 해놓은 것

 

여불위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위를 누렸다. 원래 여(呂)씨는 춘추시대 때 ‘사(士)’의 신분이었다. 춘추시대 때 ‘사’는 봉건제도 신분에 따라 천자→제후→대부→사의 순서로 이뤄진 종적인 신분에 속했다.

 

그러나 전국시대를 맞이하여 지배계급 사이에 권력 투쟁과 제후국들의 잦은 전쟁을 치르면서 무사와 문사로 나뉘었던 ‘士’는 업종 전환을 한다. ‘학자(관료)’가 되거나 ‘상인’이 되어야 했다. 아니면 ‘책사(策士)’가 되거나 ‘식객(食客)’으로 남아야 했다. 여씨 가문은 상인의 길을 선택했다. 따라서 부(富)를 축적하는 데는 성공하나 학문적 지식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이 점이 여불위에게 늘 골칫거리였다.

 

여불위가 활동하던 당시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팔자를 누린 사람을 일러 세인들은 ‘전국 사공자’라고 불렀다. 제(齊)나라에 맹상군(孟嘗君), 초나라의 춘신군, 위나라의 신릉군, 조나라의 평원군이 그들이다.

 

그들은 대부분은 왕자(춘신군 제외)의 신분이었다. 여불위는 사공자를 부러워했다. 시샘했다. 그들처럼 나라의 선비를 대우하고 빈객을 모시는 일이 자기가 진나라 상국으로 가장 먼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졌다. 후발주자인 여불위는 사공자처럼 어느새 식객을 3000명이나 모았다. 사공자와 달리 학문적인 교양이 취약했던 여불위는 사공자와 차별화를 꾀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자해 빈객들의 주도하에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명작을 펴냈다.

그리고는 <여씨춘추>에 자신감을 가지고서 진나라 도성 함양(咸陽)의 성문에 진열하고 상금 천금을 걸었다. 여불위는 열국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증감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

 

여불위는 누구보다도 강한 신념의 소유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분야든 자신이 최고라는 신념을 얼마나 철저하게 믿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된다”라는 명언이 있다. 사공자 누구도 펴내지 못한 시대의 명작을 어쨌든 여불위는 ‘일자천금(一字千金)’의 가치가 있는 책으로 펴내는 데에 유일하게 성공한 인물이었다.

 

필자는 여불위와 자초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서 여불위의 캐릭터에 어울리는 즉, 강한 신념을 뜻하는 여덟 글자(八字)를 말하고 싶다. 다음이 그것이다.

 

“의행무명(疑行無名) 의사무공(疑事無功)”(<상군서>)

“의심을 갖고 한 행동은 명예롭지 못하고, 의심을 갖고 일을 하면 성공하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여불위가 본 자초에 대한 믿음이 그러했다.

 

‘장사의 신’ 호설암, 여불위에 한 수 배우다

 

중국사의 마지막 왕조 청(淸)나라 때에는 전설적인 거상(巨商)이 살아있었다. 그의 성(姓)은 호(胡)이고, 이름은 광용(光墉)이며, 자는 설암(雪岩)으로, 보통은 호설암(1823~1885)이라고 부른다.

 ‘장사의 신’으로 일컬어지는 호설암을 두고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은 “호설암이야 말로 봉건사회의 마지막 위대한 상인이다”라고 일찍이 극찬한 바 있다.

 

호설암은 1823년 중국 안휘성 적계(績溪)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안휘성은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아버지가 죽고 집안이 어려워지자, 12살 어린 나이임에도 호설암은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항주에 있는 환전기관인 신화전장(新和錢庄)에 취직한다. 성실하게 일했다.

 

세월이 한참 흘렀다. 어느새 호설암의 나이가 막 20세를 넘기고 있을 때였다. 자주 가던 찻집에서 왕유령이란 형님을 알게 된다. 왕유령은 복주 사람인데 아버지를 따라 절강에 왔다가 항주까지 흘러들었다.

이쯤에 관직에 오르지 못한 왕유령의 아버지는 병을 얻어 목숨을 잃고 만다.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처지인지라 왕유령은 계속해서 항주에서 객지생활을 하고 있었다. 실업자 신세였다. 그래서 몰골이 아주 꾀죄죄한 상태였다. 가끔씩 찻집에 나왔는데, 우연히 호설암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

 

청나라 시대의 관직 매수는 가짜 관직을 하나 사는 것으로, 이부(吏部)에서 발행하는 증서를 손에 쥐면 관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만약 결원이 생겨 그 자리에 앉고 싶다면 반드시 이부에 가서 보고해야 했는데, 이를 ‘투공(投供)’이라 불렀다.(중략)

왕유령의 사정을 소상히 알게 된 호설암의 뇌리 속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왕유령이 비범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만약 그가 서울에 가서 ‘투공’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훗날 큰 인물이 되어 자신이 입신양명하는 데 후원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중략)

 

호설암은 주머니에서 천지갑을 꺼내 한 겹씩 열어젖히더니 500환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원래 주인이 빚을 받아오라고 해서 생긴 돈이지만, 애초에 돌려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으니 빈손으로 가도 탓하지 않을 듯했다. 그리하여 호설암은 그 돈을 전장에 내놓지 않고 그것을 밑천으로 큰 투자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마침 왕유령이란 인물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제 그에게 이 돈만 쓰면 되는 것이다.

호설암의 안목은 탁월했다. 그는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은 재주라 할 수 없고, 사람으로 돈을 벌어야 진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호설암이 돈을 꺼내자 왕유령은 크게 놀랐다. 호설암이 북경에 ‘투공’하러 갈 수 있도록 돈을 주겠다고 하자, 왕유령은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이렇게 큰돈을 빌리는 데 보증 서줄 사람도 없었고 또 갚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호설암의 진심을 파악한 왕유령은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땅에 엎드려 절을 하려고 했다. 호설암은 그런 그를 서둘러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서로 사주를 적은 종이를 교환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호설암은 거나한 술상을 차려 왕유령의 성공과 금의환향을 기원했다. 다음날 왕유령은 북쪽으로 길을 나섰다. (장옥빈·이붕 지음, 백은경·이진 옮김, <재기>, 고수 펴냄)

 

앞에 글은 ‘재물의 기운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는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책 <재기>에 나온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호설암이 <사기열전>을 여러 번 읽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진정한 자아 발견은 역사서를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불위가 자초를 통해서 ‘기화가거’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 것처럼 호설암 역시 왕유령을 통해서 그가 ‘기화가거’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서다.

 

전장의 이름으로 수금한 돈 500환짜리 지폐를 호설암은 왕유령의 미래 가치를 보고 과감히 투자를 했다. 이는 엄연히 공금횡령에 속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사실이 발각되어 호설암은 전장에서 해고되고 만다. 다행히도 호설암 덕분에 왕유령은 중앙정부의 관리에게 줄을 대어 절강염대사(저장성의 돈을 관리하는 자리) 자리를 얻어 돌아올 수 있었다.

왕유령의 벼슬이 올라갔다. 그럴수록 호설암의 주머니도 두둑해졌다. 왕유령은 저장성의 재산 관리를 호설암에게 일임했다.

 

이를 기반으로 호설암은 부강전장을 열었다. 금융업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20여 개의 체인 전장을 열기에 이르렀다. 또 왕유령 덕분에 저장성의 군량미 운반과 병기 군납을 독점할 수 있었다.

졸지에 호설암은 저장성 거부가 되었다. 여불위가 자초와 만남을 통해서 일약 어마어마한 부를 이룩한 것처럼, 호설암도 왕유령과 만남을 통해서 일약 점원에서 거상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이코노믹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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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여불위(呂不韋) 열전

 

박종윤 소설가

 

진(秦)나라 시황제는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었다. 장양왕이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였다.

그는 연회에서 무희에게 한눈에 반하여 여불위에게 부탁하여 그녀를 넘겨받았다. 그 무희는 여불위의 첩이었다. 장양왕이 그 무희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 바로 시황제 정(政)이었다.

 

시황제는 진나라 소왕 48(기원전 259)년에 정월 조나라 도읍인 한단에서 태어났고 이름을 정이라 하였다. 정이 열세 살 때 아버지 장양왕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 진나라 왕위에 올랐다.

 

당시 진나라는 이미 서쪽으로 파, 촉, 한중을 차지하고 남쪽으로 완을 넘어 영까지 점령하여 그곳에 남군을 두었다. 그리고 북쪽은 상군으로부터 동쪽 일대를 다스리게 되어 하동, 태원, 상당의 세 군을 설치하였으며 동쪽으로는 형양에 이르기까지 땅을 넓히고 동주와 서주를 멸망시켜 그 지방에 삼천군을 두었다.

 

진나라에서 우선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은 여불위이다. 그는 재상으로서 10만호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문신후라는 작위도 받았다. 그는 또 여러 나라의 유세객들을 초청하여 기회만 있으면 천하를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 뒤 나중에 시황제 때 재상이 된 이사(李斯)는 그 무렵 아직 여불위의 식객에 지나지 않았다. 장군이 된 몽오나 왕기, 표공 등도 여불위의 식객이었다. 정은 어려서 진나라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정치는 중신들에게 맡겼다. 그가 왕위에 오른 해에 진양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불위는 양책의 거상이었다. 여러 나라를 오가며 물자를 값이 쌀 때 사들였다가 귀할 때 비싼 값에 파는 방법으로 수많은 재산을 모았다.

 

진나라 소왕 40년에 태자가 죽고 42년에 차남인 안국군이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에게는 20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때 정부인인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 20명의 아들 가운데 자초(子楚)라는 왕자가 있었다.

자초의 어머니 하희는 안국군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러한 이유로 자초는 볼모가 되어 조나라에 보내졌다.

 

그리고 진나라가 자주 조나라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볼모인 자초는 조나라에서 냉대를 받았다. 자초는 진나라 소왕의 손자라고는 하지만 수많은 첩 가운데 태어난 왕자이며 볼모의 몸이기 때문에 생활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여불위가 장사 일로 조나라 한단에 왔을 때 자초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동정했다.

 

“그가 진나라 공자라고? 그것은 곧 보물이다. 내가 사두기로 하지.”

그렇게 말한 여불위는 곧장 자초를 찾아갔다.

 

“모든 것을 제게 맡겨 주시면 반드시 공자께서 후일 잘 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자초가 웃으면서 답했다. “뜻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이 우선 큰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여불위가 말을 받았다.

“공자를 출세시키는 것은 곧 저의 성공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때서야 자초는 여불위의 말뜻을 알아듣고 안방으로 불러들여 밀담을 주고받았다. 여불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진나라 소왕은 늙었고 당신 아버지 안국군은 태자입니다. 듣자 하니 안국군은 화양부인을 총애하는데도 그 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태자의 후계를 정하는데 화양부인의 힘이 크게 작용하게 됩니다.

 

당신은 20명의 아들 중에 중간쯤에 태어난 분으로 오랫동안 외국에서 볼모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만일 진나라 왕이 돌아가시고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면 태자를 정하게 됩니다. 그때는 본국에 있는 형님들이나 형제들에 비해 당신은 현저하게 불리한 입장입니다.”

자초는 여불위의 말허리를 꺾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다. 어떤 좋은 방법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진나라 소왕의 손자 자초는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희망 없는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장사 일로 조나라에 온 거상 여불위가 그 소식을 듣고 자초를 찾아가 밀담을 나누었다. 자초는 찾아온 여불위에게 공손하게 출세할 방법을 간곡히 물었다.

여불위는 그를 위해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하게 되었다.

 

“당신은 경제적 여유도 없으며 더구나 볼모의 몸입니다. 그러고 보면 본국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선물은 물론 여기에 찾아오는 빈객들과의 교제도 어렵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전 재산을 던져서라도 진나라로 가서 아버지 안국군과 화양부인에게 당신을 후계자로 삼기 위한 일을 꾸미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자초는 머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했다.

 

“잘 부탁합니다. 그 일이 성공하면 진나라의 반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여불위는 전 재산 중에서 5백금을 교제비로 자초에게 주고 나머지 5백금으로 진귀한 물건들을 사가지고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에 도착한 여불위는 우선 화양부인의 언니를 먼저 만났다. 여불위는 가지고 온 5백금의 물건을 모두 부인에게 바치고 그의 환심을 산 뒤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조나라에 볼모로 있는 자초는 제후의 빈객들 사이에 매우 총명한 분이라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언제나 화양부인을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안국군과 부인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화양부인 언니는 무척 좋아했다. 여불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언니에게 화양부인에게 찾아가라고 부추겼다.

 

“여자란 매력이 없어지면 남자의 사랑을 받기 어렵다고 합니다. 지금 화양부인은 태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아들이 없습니다. 태자인 안국군은 많은 아들 중에서 총명하고 효성이 두터운 분을 골라서 후계자로 정하게 될 겁니다. 화양부인이 지금부터 먼저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삼아서 후계자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안국군이 살아 계실 때는 물론이고 가령 그분이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양자가 왕위에 오를 것이므로 화양부인도 권세를 잃지 않고 여생을 편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두고 한마디로 ‘만세의 권세를 얻는다’라고 합니다.

화양부인께서는 젊었을 때 발판을 튼튼히 해두셔야 합니다.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총애를 잃은 뒤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나라에 있는 자초는 총명한 분입니다. 형제들의 순서를 보아도 그렇고 생모의 순위로 보더라도 후계자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을 것이므로 화양부인을 의지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초를 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정해 놓으면 부인께서는 평생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불위의 공작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나갔다.

 

화양부인은 찾아온 언니에게서 자신의 앞날에 대해 얘기를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그녀는 태자인 안국군에게 기회를 보아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는 자초가 총명하고 또 그와 사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초를 존경하고 있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화양부인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안국군을 설득했다.

 

 

조나라에 볼모로 있는 안국군의 아들 자초를 출세시키기 위하여 진나라로 간 여불위는 화양부인 언니를 만났다. 화양부인의 미래를 위한 설득이 잘 진행되어 나갔다.

 

화양부인은 기회를 보아 안국군에게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는 자초를 아들로 삼아 자신의 여생이 편하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저는 다행히 태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지만 아들이 없습니다. 부디 부탁이오니 자초를 후계자로 삼아 저의 장래를 의지하게 해 주십시오.”

 

안국군은 간절하게 청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 주면서 서로 발설하지 않기로 비밀을 약속했다. 안국군과 화양부인의 약속 결과는 자초에게 보내지는 돈이 늘어났고 여불위에게 자초의 뒷일을 부탁까지 했다.

 

그 뒤부터 자초는 차츰 제후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여불위는 조나라 한단에 있는 무희 중에서도 뛰어나게 아름답고 춤에 능한 여자를 자신의 집에 두고 있었다. 그 무희는 얼마 있지 않아 막 여불위의 아이를 수태하게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여불위가 자초를 집으로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자초는 그 무희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렸다.

 

자초가 여불위에게 그 무희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다. 여불위는 그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이미 전 재산을 던져 자초에게 장래를 걸고 있는 만큼 그것은 큰일을 앞둔 작은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 무희는 아이 밴 것을 숨기고 자초의 품으로 옮겨갔다. 그 뒤 그 무희는 예정된 날로부터 두 달이나 늦게 아들 정을 낳았다. 자초는 그 여자를 곧 바로 정부인으로 삼았다.

 

세월은 흘러 진나라의 왕이 된 안국군이 죽자 조나라에서 돌아와 있던 태자 자초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진나라 장양왕이었다. 여불위의 첩이었던 그의 정부인은 왕후가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장양왕 자초도 죽었다.

정이 13살 어린 나이에 진나라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시황이었다.

여불위는 이미 진나라 상국이 되어 있었다.

 

태후가 된 진나라 왕 정의 어머니는 아들의 눈을 피하여 여불위와 불륜의 관계를 계속 맺고 있었다.

여불위의 권세는 하늘을 찔러 하인은 1만 명에 육박했다.

 

그 무렵 위나라 신릉군, 초나라 춘신군, 조나라 평원군 그리고 제나라 맹상군 등은 서로 다투어 유능한 인재를 초청하여 세력을 겨루고 있었다. 여불위도 가만있지 않았다.

강대국인 진나라 상국이란 자리에 있는 자가 약소국의 공자들에게 진다는 것은 수치라 생각하고 그는 인재를 초청해서 우대했기 때문에 식객이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

 

그 무렵 유세객들은 계속하여 돌아다니며 자신의 의견을 제후들에게 설득하고 있었으며 순자(筍子)와 같이 책을 지어 천하에 자기 의견을 넓히는 사람도 있었다.

 

여불위는 자신의 식객들에게 명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제각기 듣고 본 것을 기록하게 했다. 그것들을 모아 팔람, 육론, 십이기 등 20만 자나 되는 책을 편집시켰다. 그는 그 책이 천지, 만물, 고금의 사적을 망라하고 있다고 자부하여 ‘여씨 춘추’라고 이름 지었다. 그런 다음 그 책을 함양의 시장 입구에 진열해 놓고 천금의 현상금을 붙여서 각국에서 찾아오는 유세객이나 빈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의 내용을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사람에게 천금을 준다.”라고 방을 붙였다.

 

 

진나라 장양왕이 죽자 13살 어린 정(政)이 보위에 올랐다. 정치는 중신들이 맡아 보았다.

여불위는 이미 상국이 되어 있었다.

그는 예전 자신의 첩이었던 왕의 어머니 태후와 은밀한 불륜의 관계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 여불위는 자신의 식객들에게 명령하여 ‘여씨 춘추’를 집필했다. 그의 권세는 나날이 높아갔다.

 

 

?姬 ??

 

시황제 정이 다 자란 뒤에도 태후의 음란은 그치지 않았다. 여불위는 그것이 불안했다. 태후와의 관계가 드러나면 자신의 파멸은 뻔했다. 그는 생각 끝에 거대한 남근을 가진 노애라는 자를 식객으로 맞아들였다.

어느 날 연회장에서 여흥을 빙자하여 노애의 거대한 남근에 오동나무 바퀴를 끼워 굴리면서 저속한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마침내 그 소문이 태후의 귀에 들어갔다. 그것은 태후의 관심을 쏠리게 하려는 여불위의 계략이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얼마 뒤 태후로부터 그 남자를 손에 넣고 싶다고 여불위에게 은밀한 부탁을 해왔다. 그는 즉시 일에 착수했다. 우선 노애가 궁형에 상당한 죄를 범했다고 고소해 놓고 태후에게 비밀리에 전했다.

 

“궁형에 처하여 거세되었다고 해 두면 태후 옆에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불위의 말에 따라 태후는 비밀리에 관리를 시켜 형을 집행하지 말고 집행한 것처럼 꾸미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하여 노애는 수염과 눈썹을 뽑고 환관이 되어 태후 옆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로부터 태후는 노애에게 빠져 그의 아들까지 잉태했다. 그 비밀이 새어나가면 큰일이었다. 태후는 가짜 점을 치고 액을 피한다는 구실을 붙여 도읍 함양을 떠나 옛 도읍인 옹으로 옮겨 갔다.

노애는 잠시도 태후의 옆을 떠날 수 없었다. 많은 상을 받은 것은 물론 집안일의 모든 것을 한손에 거머쥐었다. 마침내 노애의 집 하인의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고, 벼슬을 얻기 위하여 찾아온 식객도 천여 명이 넘었다.

 

시황제 9(기원전 238)년 밀고자가 있어 마침내 그 일은 세상에 알려졌다.

 

‘노애가 태후와 간통하여 이미 아이를 둘이나 낳았으면서 이것을 숨겼다. 더구나 왕이 죽으면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을 들은 시황은 즉시 관리에게 조사하도록 명령하여 일의 전말을 알아내었다. 상국인 여불위가 관여된 것도 분명해졌다.

 

그 해 9월 시황은 노애의 가족을 모두 죽이고 태후가 낳은 두 아이도 죽였다. 태후는 다시 옛 도읍인 옹으로 옮겨갔고 살아 있는 노애의 가신들은 모두 재산을 몰수당하고 촉으로 쫓겨났다.

 

시황은 상국인 여불위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는 선왕에게 바친 공이 몹시 컸고 또 빈객과 유세객들이 그를 변호했기 때문에 시황은 그를 처형하기를 단념했다.

 

다음해 시황 10년 10월에 여불위는 상국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그 뒤 시황은 제나라 사람 무초의 의견을 받아들여 태후를 다시 함양으로 맞아들이고 여불위는 영지인 하남에서 집에만 칩거하도록 명령했다.

 

그런 후 일 년이 지났다. 진나라 안팎에서 여불위의 명성은 여전했고 제후들의 빈객이나 사자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줄을 잇는 형편이었다. 못마땅하고 불편해진 시황은 그가 모반이라도 할까 걱정되어 친서를 보내었다.

 

“귀공에게 어떤 공이 있어서 진나라는 하남후에 봉하고 십만 호를 주었는가? 또 진나라와 무슨 혈연관계가 있어서 중부라고 불리고 있는가? 즉시 일가를 이끌고 촉으로 옮겨가서 사는 게 좋겠다.”

 

여불위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차츰 권세를 빼앗기고 결국에는 죽음을 면할 수 없고 판단했다. 그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뉴스천지

 

 

 

 

呂不韋列傳第二十五

 

085/25

「始皇帝」益壯, 太后淫不止. 「呂不韋」恐覺禍及己, 乃私求大陰人「??」以爲舍人, 時縱倡樂, 使「?」以其陰關桐輪而行, 令太后聞之, 以?太后. 太后聞, 果欲私得之. 「呂不韋」乃進「??」, 詐令人以腐罪告之. 「不韋」又陰謂太后曰:?可事詐腐, 則得給事中.?「太后」乃陰厚賜主腐者吏, 詐論之, 拔其鬚眉爲宦者, 遂得侍太后. 太后私與通, 絶愛之. 有身, 太后恐人知之, 詐卜當避時, 徙宮居「雍」. 「??」常從, 賞賜甚厚, 事皆決於「??」. 「??」家?數千人, 諸客求宦爲「??」舍人千餘人.

 

085/25

「始皇」七年, 「莊襄王」母「夏太后」薨. 「孝文王后」曰「華陽太后」, 與「孝文王」會葬「壽陵」. 「夏太后」子「莊襄王」葬「芷陽」, 故「夏太后」獨別葬「杜」東, 曰?東望吾子, 西望吾夫. 後百年, 旁當有萬家邑?.

 

085/25

「始皇」九年, 有告「??」實非宦者, 常與太后私亂, 生子二人, 皆匿之. 與太后謀曰?王卽薨, 以子爲後?. 於是「秦王」下吏治, 具得情實, 事連相國「呂不韋」. 九月, 夷「??」三族, 殺太后所生兩子, 而遂遷太后於「雍」. 諸「??」舍人皆沒其家而遷之「蜀」. 王欲誅相國, 爲其奉先王功大, 及賓客辯士爲游說者衆, 王不忍致法.

 

085/25

「秦王」十年十月, 免相國「呂不韋」. 及「齊」人「茅焦」說「秦王」, 「秦王」乃迎太后於「雍」, 歸復「咸陽」, 而出「文信侯」就國「河南」.

 

085/25

歲餘, 諸侯賓客使者相望於道, 請「文信侯」. 「秦王」恐其爲變, 乃賜「文信侯」

書曰:"君何功於「秦」? 「秦」封君「河南」, 食十萬戶. 君何親於「秦」? 號稱仲父. 其與家屬徙處「蜀」!"

「呂不韋」自度稍侵, 恐誅, 乃飮?而死.

「秦王」所加怒「呂不韋」=「??」皆已死, 乃皆復歸「??」舍人遷「蜀」者.

 

085/25

「始皇」十九年, 太后薨, 謚爲「帝太后」, 與「莊襄王」會葬「?陽」.

 

085/25

「太史公」曰:「不韋」及「??」貴, 封號「文信侯」. 人之告「??」, 「?」聞之. 「秦王」驗左右, 未發. 上之「雍」郊, 「?」恐禍起, 乃與黨謀, 矯太后璽發卒以反「?年宮」. 發吏攻「?」, 「?」敗亡走, 追斬之「好?」, 遂滅其宗. 而「呂不韋」由此?矣. 「孔子」之所謂 '聞' 者, 其「呂子」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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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모 기업회장님이 자진했다는 뉴스로 세상이 시끄럽다.

여불위와 비슷한 점이 많다.

거상과 기업인. 정치인과의 인연. 권력자와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여불위가 이 분을 만났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선에는 전부 의리없는 도적놈들 뿐이구나"

 

돈으로 권력과 명성을 사는 것이 그렇게 잘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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