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아베 정부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 없이 배상도 아닌 위로금으로 매듭짓고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옮긴다는 비밀 합의를 맺었다. 이 굴욕적인 합의에 반대하는 청년, 학생이 '소녀상' 앞에서 농성을 벌인지 벌써 2405일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고 오히려 평화헌법을 폐기하는 개헌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윤석열 정부 또한 2015 합의를 바로 잡기는커녕 강제징용 노동자의 배상문제를 국민의 성금을 모아 위로금으로 해결하겠다며 박근혜 정부의 길을 뒤쫓고 있다.
'소녀상' 앞 농성의 중심인 '반일행동'의 4기 대표 이수민을 7월 30일, 일본대사관 앞 토요투쟁 현장에서 만났다. 그로부터 역사를 거스르는 일본정부와 대일 굴종외교를 펴는 윤석열 정부에 맞서 어떻게 사죄와 배상을 받아낼 것인지 2015년부터 7년간 농성하며 겪었던 어려움과 그 오랜 시간을 버텨온 힘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 소녀상 앞에서 발언하는 이수민 대표 그는 2021년 말부터 반일행동 4기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수민제공
▲ 소녀상 앞에서 이수민 그는 반일행동 4기의 대표를 맡고 있다.ⓒ 민병래
이수민은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낼까 망설이다가 2020년 7월 14일 사건부터 시작했다. 그동안 극우파는 소녀상 앞에서 많은 행패를 부렸다. 술 취해 욕을 하는 건 기본이었다. 성희롱도 흔했다. 자유연대 김상진 사무총장은 "천막으로 가리면 거기서 뭣 좀 하려고? 거기서 혹시 OO하고 막 그런 건 안 하지 설마?"라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이렇게 차를 가까이 들이대며 위협을 느끼게 한 적은 없었다. 이 사건은 7월 16일 저녁, MBC 주요 뉴스로도 나올 만큼 충격이 컸다.
이수민과 반일행동은 종로경찰서로 달려갔다. 유튜버 김기환을 '살인미수'로 고소하고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김기환은 '펜앤드마이크'를 통해 "귀가하던 중 카메라 위치조정을 위해 잠시 차를 세웠는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소녀상 앞이었다"라며 자기를 고소한 '반일행동'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말했다.
"종로경찰서는 김기환을 무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어요. 기가 막혔죠. 더 화가 난건 '명예훼손죄'를 수사한다고 경찰이 우리의 이름을 캐묻고 사찰하는 거였어요. 정작 피해자는 우린데 이게 말이 되나요. 일본하고 싸우기도 힘든데 극우파와 종로경찰서가 우리를 너무 힘들게 했어요."
이 사건은 검찰에서도 불기소로 종결되고 말았다. 경찰만이 아니라 검찰마저 극우를 감싸는 듯한 모습에 이수민의 마음은 멍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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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대비속에서 소녀상을 지키는 이수민(앞줄 오른쪽) 그는 2021년부터 반일행동의 4기 대표를 맡고 있다.ⓒ 이수민제공
▲ 소녀상 앞을 지키기 위한 농성장에서 이수민(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파란 우비) 그는 2021년부터 반일행동 4기의 대표를 맡고 있다.ⓒ 오마이뉴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경찰은 극우단체들이 '반일행동'을 '집회방해와 코로나 방역법 위반'으로 고발하자 소환장을 발부했다. 종로서는 반일행동 회원 이경송과 김은혜, 몇몇 시민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살인미수'와 '성희롱'으로 극우파를 고발한 것은 무혐의 처분하고 자신들만 기소의견으로 처리하니 이수민은 경찰의 수사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가 경찰에게 분노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극우파가 2020년 6월 20일, 소녀상 뒤에 욱일기가 그려진 현수막을 걸었을 때 '반일행동'은 이를 떼어내려 했다. 이때 경찰은 "집회 물품이고 표현의 자유"라며 반일행동의 회원을 제압하고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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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힘, 시민의 힘이에요. 6월 24일 날 수요시위가 끝나고도 우리는 자리를 계속 지켰어요. 다음 날도 극우파가 집회를 할 예정이니 떠날 수가 없었죠. 경찰도 계속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뒤에선 시민들이 경찰을 지켜봤죠. 결국 경찰은 연대의 힘이 두려워 포위망을 풀었어요. 그날이 지난 7년여 농성 기간 중 가장 감격스러운 날이었어요."
그의 말대로 소녀상 앞은 뜨거운 연대의 장이었다. 앞에서 대치하던 의경과 경찰이 슬쩍 음료수를 놓고 가기도 하고 신촌에서 일한다는 어떤 배달기사는 망원동에서 고로케를 사서 3년 동안 주 5회씩 격려 방문을 거르지 않았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 농성장에선 고로케 아저씨라 부른다.
또 소녀상 앞에서 매주 1000배를 하는 시민, 사탕 한 알, 김밥 한 줄을 챙겨주는 주변 건물의 경비아저씨, 천막을 같이 설치하고 검찰청 앞 기자회견에 동행했던 아저씨, 언니·오빠 존경해요라는 댓글을 달아준 중학생 등의 뜨거운 연대가 있었다. 소녀상 앞은 든든한 성채였다. 해외에서도 발길이 이어졌으니 프랑스 리옹에서 왔던 엉투완베잉은 "농성장에서 노숙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고 영광이었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소녀상 앞 연대는 국내에 머무르지 않았다. 일본이 2015 합의에서 요구했던 게 당시 전 세계에 설치된 아홉 개의 기림비를 철거하는 것이었다. LA주재 일본 총영사 아키라무토는 "내 임무는 (LA 인근) 글렌데일시의 소녀상을 철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2022년 7월 독일의 카셀 대학 총학생회에서 자체적으로 소녀상을 설치했을 때도 프랑크푸르트 주재 일본공사가 카셀 대학 총장을 직접 찾아가 항의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