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정은 말로 옮기기가 어렵다.
문득 오래된 친구가 생각나는 저녁이 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함께 걷던 골목과
웃음소리가 떠오른다. 가슴 한쪽이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따뜻한 것 같기도 하다.
또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서러워진다. 크게 슬픈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나만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마음 둘 곳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런 감정들을 우리는 어떻게 말로 만들었을까. 한국어에는 마음의 결을 섬세하게 나누어 담아낸
말들이 많다. 그립다. 서럽다. 안쓰럽다. 애달프다. 아련하다. 섭섭하다.
이 말들은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어서 특별한 것이 아니다. 비슷한 감정을 가리키는 말은
어느 언어에나 있다. 다만 한국어는 그 감정의 결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
슬픔이라고 한 덩어리로 묶지 않고, 그 안의 미세한 차이를 오래 들여다본다.
마치 한 장의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색의 농담까지 살피듯이...
그립다 — 마음속에 다시 그리는 일
'그립다'는 말의 뿌리를 흔히 '그리다'와 연결해 설명한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눈앞에 없는
누군가를 마음속에 다시 불러오는 일.
이 설명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리움이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보고 싶다'는 말에는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 중심에 있다.
반면 '그립다'에는 없는 것을 마음속에서 다시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떠올릴 때도 그렇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생각할 때도 그렇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얼굴을 그리고, 목소리를 그리고, 풍경을 그린다.
그 과정 자체가 그리움이다. 그래서 그리움은 이상한 감정이다.
아프지만 따뜻하다. 슬프지만 아름답다. 상실을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되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음이 화가가 되는 순간. 그것이 '그립다'라는 말이 품고 있는 감각이다.
서럽다 — 세상과 어긋난 마음
'서럽다'는 조금 다르다.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흔히 '설다'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설익었다. 낯설다. 아직 충분히 익숙해지지 못했다.
이 설명이 맞다면 서러움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세상과 나 사이에 생긴 어긋남의 감정이다.
어린아이가 낯선 곳에서 울음을 터뜨릴 때가 그렇다.
타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문득 고향을 떠올릴 때도 그렇다.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도 그렇다.
서러움에는 외로움이 있다. 억울함도 있다. 그리고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는 막막함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프다는 말보다 서럽다는 말을 더 특별한 순간에 사용한다. 눈물이 나는 이유가
단순히 슬퍼서가 아닐 때. 마음 둘 곳을 잃었을 때. 그때 사람들은 "서럽다"고 말한다.
안쓰럽다와 애달프다 — 나의 마음을 넘어서는 감정
한국어의 감정어 가운데 흥미로운 점은 나 자신의 감정보다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
많다는 것이다.
'안쓰럽다'가 대표적이다. 상대가 힘들어 보일 때, 딱해 보일 때, 고생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릴 때
우리는 안쓰럽다고 말한다.
내가 아픈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아프다.
타인의 고통이 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애달프다'도 비슷하다. 가슴이 저릴 만큼 절절한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일 수도 있고, 안타까운 처지를 바라보는 마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감정들이 모두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한국어의 많은 감정어들은 철저히
혼자 있는 개인의 감정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감정을 가리킨다.
네가 힘드니 나도 아프다. 네가 슬프니 내 마음도 무겁다.
그 감각이 언어 속에 남아 있다.
'한'이라는 그 말
한국의 감정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을 꼽으라면 아마 '한'일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한을 한국인만의 특별한 정서라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한은 하나의 감정이라기보다 여러 감정이 오랜 시간 쌓여 만들어진 상태에 가깝다.
그리움도 있다. 서러움도 있다. 억울함도 있다. 체념도 있다.
쉽게 풀리지 않는 슬픔과 오래된 기다림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한이 특별한 감정인가가 아니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만큼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언어는 감정을 발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 존재하던 마음에 이름을 붙여 서로 알아볼 수 있게 만든다.
왜 한국어에는 감정어가 많을까
정확한 답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한국인들은 오래전부터 감정을 언어로 다듬고 노래해 왔다는 것이다.
시조와 가사, 민요와 판소리에는 수많은 감정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그리움과 서러움, 외로움과
애달픔 같은 마음들이 수없이 노래로 불려져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말로 붙잡으려 했다.
이름을 붙이려 했다.
어쩌면 감정어가 풍부하다는 것은 감정이 특별히 많다는 뜻이 아니라, 감정을 오래 들여다보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감정어들
그러나 모든 감정어가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애틋하다. 아련하다. 이 말들은 아직 존재하지만
점점 문학의 언어가 되어가고 있다. 젊은 세대의 일상에서는 자주 들리지 않는다.
반대로 새로운 말들이 생겨난다. 시대가 달라지면 사람들이 자주 경험하는 감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언어는 살아 있다. 새로운 감정을 만나면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이름은
서서히 잊혀진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립다. 서럽다. 안쓰럽다.
이 말들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그 감정 자체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말이 없으면 마음도 흐릿해진다
말이 감정을 담는 것일까. 아니면 말이 감정을 만드는 것일까.
아마 둘 다 맞을 것이다.
그립다라는 말이 있기에 우리는 그 감정을 더 선명하게 느낀다.
서럽다라는 말이 있기에 슬픔과는 다른 결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름이 없는 감정은 흐릿하다. 뭔가 이상한 기분.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름이 생기는 순간 감정은 모습을 드러낸다.
아,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이 이것이었구나. 언어는 그렇게 마음을 비춘다.
말은 마음의 그릇이다. 그릇이 사라지면 마음도 흐릿해진다.
그래서 오래된 감정어를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히 옛말을 공부하는 일이 아니다.
수백 년 전 사람들이 무엇을 그리워했고, 무엇 때문에 서러워했으며, 누구를 안쓰러워했는지를
만나는 일이다.
앞장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생명에게 붙인 다정한 이름을 보았다. 세상을 몸으로 이해하던
눈을 보았다. 손으로 재던 감각을 보았다. 그리고 마음의 이름들을 만났다.
언어는 사람의 삶속에서 태어난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그리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서러워하고,
안쓰러워하는 한. 그 마음을 담은 말들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첫댓글 <오늘의 샹송> Je suis malade / Lara Fabian
Je suis malade(마음이 아파요)는 1994년 Lara Fabian이 리메이크해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끈 곡이다.프랑스의 가수
Serge Lama가 1973년에 발표한 곡으로 라라 파비안의 대표곡 중 하나다.실연의 아픔을 노래했다.
뛰어난 가창력과 미모를 겸비한 그녀는 1970년 벨기에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벨기에와
이탈리아,캐나다에서 성장했다. 브뤼셀 왕립음악원에서 수학했다.
91년 캐나다 몬트리올로 건너가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릭 앨리슨과 함께 앨범을 내고 데뷔했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등 다양한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서정적인 소프라노 목소리가 매력적이다. https://youtu.be/dVvlmpo5g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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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럽다와 슬프다의 비교,
안쓰럽다라는 단어에 들어간 연민의 감정 등을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이 게시판에서만 읽히기엔 아까운 글입니다.
비온뒤님의 해박하심과 깊은 사색과 뛰어난 필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달항아리님.
오랜세월 우리민족과 함께 해온
순우리말은 참 다양한 표현이 많습니다
이제 외래어속에 점차 사라지는게
안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맞춰 말도 변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산님.
열하일기에 나오는 통곡할 자리라는
요동 땅 통곡하기 좋은 자리라는 그 곳을
한때 상상해보기도 했지요
요동이 그 곳이 어떤 곳이기에 박식한
양반이 어허! 통곡하기 좋은 자리구먼 했을까요
님의 글을 읽고 잠깐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일반적인 통곡과는 다른 의미로
쓴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운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