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에게 지고 싶지 않아
요즈음 화두(話頭)인 ‘챗GPT’를 2월 초순 컴퓨터에 깔아놓고 첫 질문을 했다. 시중에 화제는 많이 되고 있지만,
실제 이용하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던 때이다. 내가 회원으로 있는 ‘에세이스트’ 카페에 ‘챗GPT’를 설치하고‘
제호로 작문을 해서 올렸다. 게재한 당일 조회 수가 상당히 많았던 일이 생각난다. 관심이 크고 많았다는 인증이다.
< ‘챗GPT’ 별거 아닙니다. 컴퓨터 있고 하는 요령만 알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질문을 하면 ‘챗GPT’가
대답을 해주는 대화형 인공 지능입니다. 나의 컴퓨터에도 ‘챗GPT’ 설치를 했습니다. ‘챗GPT’를 설치하고 첫 번째
질문을 해 봤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한국의 봄에 대한 詩 하나 알려줘’ 하니 대답이 윤동주 ‘산과 들 사이로’가
나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시 알려줘, 하니 유시민의 ‘봄’이 나옵니다. 요즈음 ‘챗GPT’가 화두(話頭)입니다.
제가 구순(九旬) 나이입니다. 이 나이에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챗GPT’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알아도 시대에 적응 아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글쎄요... 이에 제가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몸은 점점 노쇠(老衰)하여 간다. 하지만 정신만은 멀쩡해 젊은 사람에게 지고 싶지 않다.
내 나이 어느덧 구순.
새해 들어 만나는 사람들이 나이를 묻는다. 특히 영종도 하늘문화센터 수영장에서 묻는데, 얼굴에 검버섯이 많은
사람이 수영하기 때문에 묻는 것 같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나이만 먹는지 어느새 구순이 되었네요.’
‘넷... ?’. 상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크게 놀라는 모습이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요... 젊게 사시는 무슨 비결
이라도 있으십니까?’ ‘비결은 무슨... 나이라는 게 먹는다고 어디 다 늙기나 한답디까...’
구순의 노래.
구순이면 오래 산 것인가 덜 산 것인가 살 만큼 산 것인가. 아침 일찍 일어나 컴퓨터 앞에서 워드를 친다. 그리고
구순의 노래, 구순의 글 써보려 한다. 나의 구순 노래는 ’김용임의 훨훨훨‘이다. 이 노래 가사가 마음에 와닿는다.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젊었을 적엔 이기심으로 이것저것
욕심을 부려 봤으나 이제 이 나이에 무엇을 탐을 내겠는가. 묵묵히 말없이 사는 게 제일인 듯하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주창했다. 아무것도 갖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필요 한 것만 갖고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가자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의식주가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이를 위해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그렇게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그저 불편 없이 살 수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버려라 훨훨 벗어 버려라 훨훨, 탐욕도 성냄도
버려라, 벗어라 훨훨훨, 아 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라 하네>
이제 모든 것을 훨훨 벗어 버리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살고 싶다.
재수가 없도록 노력.
일전 지인 3인이 만났다. 나를 보고는 건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내 대답이 ’요즈음 재수 없으면 백 세까지 산다고 하더라’
정말 재수가 없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하였다. 젊어서는 재력이 있어야 살기가 편안하다. 늙어서는 건강이 있어야만
살기 편안하다. 젊어서는 재력을 쌓느라고 건강을 해치고, 늙어서는 재력을 허물어 건강을 지키려 한다. 재산이 많을
수록 죽는것이 억울하다. 인물이 좋을수록 늙는 것이 싫다. 재산이 많다고 해서 죽어 가져갈 방도 없고, 인물이 좋다고
죽어 안 썩을 도리 없다.
아무리 지식 많은 사람도 자기 늙어 죽음 생각 아니하고, 호스피스 간병인도 제 죽음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 육신이
약하면 하찮은 병균마저 달려들고, 입지가 약하면 하찮은 인간마저 덤벼드는 것이 세상사(世上事)이다. 권력이 너무
커서 철창신세가 되기도 하고, 재산이 너무 많아 쪽박 신세가 되기도 하는 일이 세상에 허다하다. 우린 최고 통치권자였던
사람이 철창신세를 지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세도가 등등 할 때는 사돈에 팔촌도 다 모이지만, 쇠락한 날엔 측근에
모였던 형제마저 떠나가는 것이 세상사이다.
지나가 버린 세월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가오는 세월을 관리하는 것은 더욱 소중하다.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식
있는 것을 부러워하나, 자식이 많은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한다. 자식 없는 노인은 노후가 쓸쓸하기 쉬우나, 자식
많은 노인은 노후가 심란(心亂)하기 쉽다. 요즈음 아이 우는 소리 듣기가 어렵다. 내 바로 선대(先代)만 하더라도 자녀가
보통 5~6명이었다. 우리 집도 9남매였다. 일정(日政)시대와 6 ̛25 때 그렇게 살기 힘들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기근(飢饉)을
버티던 시절에도 아이 낳고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가. 밥 굶는 사람 없다. 겨울에 수박, 딸기를
먹을 수 있다. 옛날 임금님도 겨울에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는데도 결혼도 아니 하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아니 낳는다. 그 이유가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는 까닭이라고 한다. 저 사람은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데,
저 사람은 40평 아파트에 사는데 나는 15평짜리 전세에 살아야 해, 저 사람은 값비싼 외제 차를 타는데 나는 겨우 티코급 차를
타야 해 등등 상대적인 빈곤, 박탈감 때문이라 한다. 2022년도 합계출산율이 0,78라고 한다. 우리 합계출산율이 세계에서
제일 꼴찌라고 한다. 합계출산율이란 만15~49세 가임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아이 숫자이다. 현재의 인구를
그대로 유지하자면 최소 필요한 합계출산율이 2,1은 되어야 한다. 상전벽해(桑田碧海)를 해도 분수가 있지 너무 변했다.
세상은 변하게 마련이라 하지만 너무 변했다.
개방적이던 사람도 늙으면 폐쇄적이기 쉽고, 진보적이던 사람도 늙으면 보수적이기 쉽다. 악(惡)한 사람은 큰 죄를 짓고도
태연하다. 선한 사람은 작은 죄라도 지을까 걱정을 한다. 내 경우가 그렇다. 70~80년 인플레가 한 참 극심할 때 내자(內子)가
아파트나 땅을 사자고 한다. 내가 무슨 대단한 애국자나 되는 양 펄쩍 뛰면서 그래서야 되겠느냐 몇 번 강권(强勸)하는 것을
물리치곤 했다. 지금도 간혹 그때 그 일을 무척 아쉬워하며 되뇌이곤 한다. 그 말엔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후회하거나
아쉬워해 본 일이 없다.
세월이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시쳇말로 시속 20대는 20km 90대는 90km 달리는 듯하다. 어지럽다. 휘청거려진다.
오래 산 게 죄이지 휘청거린들 누구의 도움이나 지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아파 보아야 건강의 가치를 알 수 있다. 늙어 보아야
시간의 가치를 알 수 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져야 한다. 구순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인생의 이치를 좀 알 듯하다. 알만하니
너무 늦었다. 모든 일이 마음대로 아니 된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을 느낀다. 제철이 끝나가는 매미의 울음소리는 처량하게
들리고 앞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의 웃음소리는 서글프고 구슬프기만 하다.
이제는.
나는 ‘세계의 평화의 숲’ 공원을 걷는다. 천천히 걷는다. 빨리 걸을 수도 없다. 와사보생(臥死步生) 차원에서 천천히 걷는다.
벤취에 앉아 좀 쉬어가련다. 쉬면서 나의 발을 쳐다본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다.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내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간 얼마나 걸었을까. 좋으나 싫으나 이 발로 걸어
왔다. 나의 삶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함께하며 걸어왔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던가...
모든 것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 속한다. 여러 가지 원소가 모여져 하나의 특정한 형체를 이루고 그 형체는 다시 허물어져
원래의 원소로 돌아간다. 햇수로 90년을 그토록 활력 넘치게 걷던 발이다. 보는 심정이 착잡하다. 그 많은 세월을 걸었으니
얼마나 골았을까... 이젠 그 힘도 다하여 뒤뚱거리며 걷는다. 제행무상에 입각하여, 모든 형체를 허무는 것은 신의 뜻이다.
무너지는 형체를 안타깝게 끌어안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비록 제대로 걷지 못하는 발이더라도 그나마 서행(徐行)할 수 있는
나의 발을 끌어안고 싶다. 그리고 그동안 걸어온 나의 생애에 애착과 고마움을 느낀다.
예로부터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다. 주변의 친지와 친구들이 이미 작고한 분들이 많다. 나는 재수가 없는
탓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모른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했다.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나의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나머지 삶이 조용히 흐르는 물처럼 고요했으면 좋겠다. 다시 ‘세계평화의 숲’ 공원을
천천히 걷는다. 파란 하늘이 마냥 드높아 보인다. 공원을 걸으면서 인생은 무엇인가? 노년을 어찌 살아야 지혜로운가?
가장 자연스러움은 어떤것인가? 잠시 상념에 잠겨 본다. 사람 사는 것 별거 아니다. 내 남할 것 없이 거기서 거기다. 특별히
차이 날 것이 없다. 이만큼 살아보니 그렇더라는 것을 알았다. 묵연 스님의 ‘다 바람 같은 거야’를 음미해 본다.
> 다 바람같은 거야/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니/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순간이야/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요/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이야/ (중략) 다 바람이야/ 이 세상에 온 것도 바람처럼 온 거고/ 이 육신을 버리는
것도/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야/ 다 바람인 거야/ 그러나 바람 자체는 늘 신성하지/ 상큼하고 새큼한 새벽바람 맞으며/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바람처럼 살다 가는 것이 좋아. <
(<<계간 석우회보>> 202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