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905
심신일체(心身一體)라, 부처님 법문은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고 봅니다. 가령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부모님한테 의지해서 나기 전에 우리가 어디에 모양이 있습니까. 부모님한테서 나기 전에는 그것은 이런 사람 모양이 없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의 의식, 업식(業識)이라 하는 식(識)만 있습니다. 모양이 없는 업식이라는 식(識)만 그것이 인연 따라서 부모님한테 오기 위해서 어머님 배 안에 있다가 이와 같이 사람 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본래는 그것은 마음뿐인 것인데 업식뿐인 것인데, 업식이 인연 따라서 결국은 각 물질이나 세포를 주워 모아서 사람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모양이 있다 하더라도 본래는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닙니다.
겉으로 봐서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 몸인 것이고 알맹이는 결국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도 기분 나빠서 먹어보십시오. 그냥 음식에 체하고 맛도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아까 제가 말한 우리 인생이 가장 좋아하는 극락세계, 즉 아주 시원하고 조금도 마음이 뜨겁지도 않고 마음이 괴롭지도 않은 그런 청량지, 더울 때 시원한 물 마시고, 약주를 마시고 청량음료를 마시는 그런 기분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맑은 기분으로 사는 세계가 청량지(淸涼地)인데, 그와 같은 극락세계가 바로 청량지인데 청량지에 가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두운 마음을 떠나서 밝은 마음으로 가는 것이 이것이 불교의 본질입니다. 밝은 마음만 가지면 청량세계, 그런 맑은 기운 시원한 기운은 항시 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어두워서 청량세계나 극락세계를 못 보는 것이지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두운 마음, 어두운 마음이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탐욕을 부리는 마음 또는 성내는 마음, 이런 마음이 어두운 마음입니다. 사물을 바로 판단도 못 합니다. 우리 중생은 보통은 다 어두운 마음입니다. 밝은 마음은 조그만큼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나그네와 똑같습니다. 다행히 부처님 법 만나서 가까스로 우리가 참다운 밝은 길로 가는 길을 조금 알 뿐입니다. 조금 알 뿐인데, 우리가 부처님 지혜를 아는 정도를 세 가지로 구분해서 말합니다. 부처님 법문을 아는 그런 지혜를 말입니다. 어두운 마음에서 밝은 마음으로 가는 길, 또는 괴로운 중생세간에서 중생의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나 청량지(淸涼地) 세계로 가는 길, 이런 가는 길의 지혜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물론 참다운 지혜는 하나밖에 없겠습니다마는 우리 중생이 차근차근
업장을 녹이고 밝아지는 정도에 따라서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한 가지는 문혜(聞慧)라 들을 문[聞]자 지혜 혜[慧]자. 겨우 컴컴한 중생 마음이 부처님 법문 들어서 안단 말입니다. 계행도 지키고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러면 아, 그런 것이구나. 이와 같이 우리가 들어서 안단 말입니다. 들어서 안다 하더라도 들어서 좀 아는 그걸로 해서는 우리가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냥 한번 들은 대로 해버리면 좀 들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워낙 버릇을 많이 붙여놓았기에 우리 중생의 버릇이란 것이 굉장히 무섭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 법문 좀 들었다 하더라도 집안에 가서 자기 버릇대로 해버린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귀로 좀 들어가지고서 아는 지혜는 이것은 천박합니다. 그래서 자고로 공부도 천박한 공부를 가리켜서 구이학(口耳學)이라 입 구[口]자 귀 이[耳]자 겨우 귀로 들어서 할 정도의 지혜를 가리켜서 구이학이라, 입이나 귀에 따르는 저 가슴에 못 들어가고서 귀나 입에서 뱅뱅 도는 그런 지혜를 가리켜서 구이학이라 이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만 가지고서는 우리가 부처님 법문을 좀 들어서 안다 하더라도 이것은 역시 별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보다 할 뿐이지 아 그렇구나, 꼭 내가 지켜야겠구나 그런 사무친 지혜가 안 나온단 말입니다. 거기에다가 조금 더 듣기도 많이 하고 자기 스스로 불경 책도 많이 보고 염불도 해보고 절에 가서 기도도 해보고 이렇게 하면 그때는 차근차근 가슴 쪽으로 그때는 아는 것이 깊어집니다.
그것보고 그때는 사혜(思慧)라, 생각 사[思]자 지혜 혜[慧]자 여기 계시는 분들은 우선 귀로만 들어서 입으로만 그냥 조금 옮길 둥 말둥 하는 그런 얇은 지혜가 아니라 이렇게 뙤약볕에 절까지 오시는 것은 모두가 다 사혜(思慧)라 부처님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그런 지혜가 되시니까 이렇게 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혜에 해당하는 그런 깊은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도는 부처님 말씀은 꼭 옳구나 꼭 지켜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신단 말입니다.
허나 그것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참말로 옮겨서 부처님 지혜를 훤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부처님 지혜는 틀림이 없구나 이같이 느끼고는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직은 못 봤으니까 참말 못 느낀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말로 느끼는 지혜가 수혜(修慧)라, 닦을 수[修]자 지혜 혜[慧]자, 닦아서 참선 염불도 염불이나 참선이나 그때는 사무치게 해가지고서 사무치게 해야 만이 우리에게 나쁜 버릇을 떼어서 없애버립니다. 우리 버릇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금생에 나와서 우리가 익힌 버릇도 얼마나 많습니까,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학교에서 이것저것 배운 그런 지식, 그런 버릇 말입니다. 이런 버릇이 굉장히 많아서 사실은 금생에 익힌 그런 버릇도 다 떼려면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그와 반대되는 좋은 버릇도 있겠습니다마는 보통은 다 부처님 법에 비추어본다고 한다면 이것이 부정적인 버릇이 많습니다. 그런 나쁜 버릇 가운데서 성내는 버릇이나 남의 사정은 이해도 못하고 괜히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독선적인 버릇, 욕심부리는 버릇, 그런 버릇 같은 것은 이것은 굉장히 떼기 어려운 것입니다. 헌데, 금생에 익힌 버릇만도 떼기가 어려운데 버릇이란 것은 금생에 익힌 버릇뿐만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생과 더불어서 금생에 나기 전에 익힌 버릇이 훨씬 큰 것입니다.
저 남극이나 북극에 가면 빙산이 있습니다. 얼음산이 있는데 얼음산은 해면에, 바다 위에 나온 것은 뾰쪽하니 별로 안 큽니다. 그러나 바다에 잠긴 물속에 잠긴 얼음덩이는 굉장히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빙산의 일각이라 뾰쪽이 나온 세상에 나온 그런 빙산은 작다 하더라도 물에 잠겨있는 빙산은 산더미같이 큰 것이 있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버릇도 금생의 버릇이, 금생에 잘 못 듣고 잘 못 배우고 잘 못 생각한 버릇이 마치 물 위에 나온 조그마한 빙산 같다고 하면 물에 잠긴 산더미 같은 버릇은 과거 전생에 익힌 버릇입니다.
금생에 나와서는 이십 년, 몇십 년 그와 같이 몇십 년에 해당한 버릇밖에 안 되지마는 과거 전생에는 무수 생 동안에 인간이란 것은 천 만생 윤회를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어느 생에서는 우리가 돼지가 되어서 돼지 같은, 욕심만 부리는 돼지 같은 존재로 해서 거쳐 왔고 말입니다. 어느 생에서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아주 표독스럽고 그런 잔인한 버릇을 붙여왔습니다. 어떤 때는 아수라가 되어서 싸움만 하는 그런 버릇도 붙여왔고 그런 버릇들이 우리 잠재의식에 우리 식(識)의 근원에 꽉 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생 버릇 금생 버릇을 떼려면 좀처럼 떼기 어렵습니다. 부처님 법 몇 마디 듣는다고 해도 그걸로 해서는 못 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로 들어 익혀서 들어서 얻는 그런 문혜(聞慧)라 또는 생각해서 아 그렇구나, 부처님 법이 정말 옳구나, 만법을 다 겨루어본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만큼 그런 위대한 법은 없구나, 우리 중생이 꼭 그 법만은 지켜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혜(思慧)를 얻었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근본 번뇌나, 근본 버릇은 못 뗀단 말입니다. 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때는 사무치게 애쓰고 닦아야 합니다.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로 해서 거기다가 생명을 딱 걸 정도로 해버려야 하는 것이고, 또는 염불을 배운 사람들은 염불로 해서 생명을 거기다 걸 정도로 해서 자기 공부를 일심(一心)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쁜 버릇이, 나쁜 버릇된 그런 마음들이 싹도 못 트게 말입니다. 우리는 조금 신통한 마음을 좀 내다가도 그만 버릇 때문에 단 순간 동안에 갸륵한 마음은 사라지고 나쁜 마음이 소생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 미워하는 마음 욕심을 지나치게 내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또는 사물을 바로 판단하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마음들이 싹트지 못하게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염[念] 생각 생각에 상속이라 서로 상[相]자 계속할 속[續]자. 부처님 생각하는 마음 또는 화두를 드는 마음 또는 주문 외는 마음, 그 마음이 생각 생각에 이렇게 이어져서 딴생각이 거기에 못 끼도록 그렇게 해야 우리 마음이 그때는 마음에 있는 버릇을 녹인다 말입니다.
버릇만 녹이면 우리 마음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우리 마음과 부처님 마음과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과 석가모니 마음과 예수님 마음과 공자님 마음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은 청정 무비한, 광대무변한 마음인데 다만 그 과거 전생에 나쁘게 익힌 지옥같이 익히고, 아귀로 익히고 또는 축생으로 익힌 마음, 금생에 나와서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또는 금생에 나쁜 생각하고 그와 같이 익힌 마음, 그런 악습들이 꽉 차 있으니까 우리가 우리 청정 무비한 본래마음을 못 봅니다. 본래 마음을 본 분들은 성인인 것이고 부처님인 것이고, 본래 마음을 못 본 사람들은 우리 같은 중생입니다.
중생이 할 것은 먼저 부처님 법문을 잘 들어서 자꾸만 익혀서 생각 많이 하고 동시에 닦을 수[修]자 지혜 혜[慧]자 수혜(修慧)라, 닦아서 익히는 지혜, 닦아서 익히는 지혜는 우리가 좋다 궂다 이렇게 섣불리 시비하는 그런 중생심을 자꾸만 부정해버려야 합니다. 시야비야(是也非也) 콩이야 팥이야 그러면 우리 마음이 버릇만 더욱 증장되어서 그때는 우리 중생심만 커나가는 것이지, 본래 청정한 불심은 잘 못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