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10월의 날씨가 천 리 먼 길 답사를 떠나는 이의 장도를 축복해준다.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많이 나서 쌀쌀하기는 하지만 대낮은 야외활동 하기에 맞춤한 날씨다.
고속도로가 꽉 막혀 있다. 이 좋은 날씨에 집에만 있질 못하겠다는 듯이 고속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누렇게 익은 벼를 보며 황금물결 일렁이는 풍년의 들판 어쩌고저쩌고 하는 진부한 수식의 말을 무색케 한다. 곳곳에 이른 벼를 벤 논도 있고 대형 콤바인이 수확에 열중하는 모습도 보인다.
5시간이 넘는 지루한 버스길에 드디어 우리의 첫 목적지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에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시간 절약을 위해 이상배 선생의 개괄적인 설명을 했다. 대흥사는 대둔사(大芚寺)라고도 불리며 신라 때 창건한 절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 및 창건주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에 8도 도총섭으로 승병의 총본영이 있던 곳이란다. 서산대사는 묘향산에서 입적하였지만 스님의 의발(衣鉢)은 이곳 대흥사에 전해져서 이후 조선불교의 중흥의 계기가 된다. 또한 『동다송(東茶頌)』을 지은 초의(草衣)스님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에 관한 일화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서산대사는 ‘좌탈입망(坐脫入亡 : 앉은 채로 열반에 듦)’했다고 한다. 또한 열반하시기 전 자신이 직접 그린 영정에 쓴 시는 그의 법력을 알려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八十年前渠是我(팔십년전거시아)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후아시거)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구나.
또한 죽음을 앞두고 지은 그의 임종게(臨終偈 : 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짓는 시)는 삶과 죽음을 초탈한 도인의 풍모를 그대로 드러낸다.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흩어짐이라.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 살고 죽고 가고 옴이 또한 그러하다.
스님의 저서인『청허당집(淸虛堂集)』에는 그야말로 주옥같은 시들이 많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삶을 관조하고 세상을 초탈하여, 비록 불교를 믿지 않는 속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시를 통해서 마음을 정화하고 해탈의 심경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청허당의 한시는 한자도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기초 한자만 알아도 읽기가 쉽다.
스님은 조선 명종 때 승과에 급제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스님은 후학들이 올바른 수행의 길을 제시하고 인도하기 위하여 『선가귀감(禪家龜鑑)』유명한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스님은 선종과 교종을 한 구절로 정의하니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고 하여 선교(禪敎)가 하나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불자들을 위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속인들의 마음을 깨우치기에도 좋은 안내서라고 생각한다.
주차장에서 절집으로 향하는 길 좌우에는 수림이 빽빽하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공기의 신선함이 느껴져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셔 본다. 웰빙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 시대에 피톤치드라는 수목이 발산하는 물질에 흠뻑 빠져들기에도 좋은 오솔길 같다. 부지런히 경내로 들어가는 데 고래등 같은 넓은 기와집이 눈에 띈다. 절의 요사채가 앞에 있나 했더니 ‘유선관(遊仙館)’이라는 여관이란다. 절집에 여관이 있다(?) ‘신선이 노니는 집’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조금 올라가니 부도전(浮屠田)이 보인다. 서산대사의 부도가 있다고 하는데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을 닫아서 찾지를 못하겠다. 다만 담장너머에서 봐도 초의선사(草衣禪師)의 부도는 잘 보인다. 귀부가 받치고 있는 커다란 비석 사이에 조금 초라한 듯 약간 기울어진 형태로 서 있다. 사각의 이중 대좌 위에 석고(石鼓)형 몸돌과 팔각형의 귀꽃이 달린 상층부를 이루고 앙련의 삼단 상륜 위에 둥근 돌이 놓여 있다. 석고의 중앙에 ‘草衣塔’이라 새겨져 있어 선사의 부도임을 알 수 있다. ‘풀 옷’이라는 법호에 걸맞게 조금 엉성한 듯 보인다.
초의선사는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한 분으로도 이름이 높다. 그래서 ‘茶聖(다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추사 선생과 각별한 사이로 지냈으며 24년 연상이 되는 다산을 스승처럼 모시며 유학 경전을 읽기도 했다. 초의선사의 사상은 한 마디로 ‘茶禪不二(다선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선사는 ‘玉花茶(옥화차)’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갈파한 것이다.
榛穢除盡精氣入(진예제진정기입) 차의 더러운 티끌 없는 정기를 마시는데 大道得成何遠哉)대도득성하원재) 큰 도가 이루어짐이 어찌 멀겠는가?
차를 마심으로 깨끗한 정기가 몸속으로 들어가니 차 속에 깨달음의 요소가 다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초의선사의 사상을 ‘茶禪一味(다선일미)’라고도 한다.
초의선사와 동갑내기로 절친하게 지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은 초의선사에게 ‘茗禪(명선)’이라는 호를 지어 주기도 했다. 이 작품의 협서에 보면 초의선사가 추사 선생께서 직접 제작해서 보내준 차에 대한 고마움이 절절히 배어 있다. ‘차와 선을 함께 한다’로 풀이 될 수 있으니 ‘‘茶禪不二(다선불이)’의 세계를 다르게 일컫는 말이다.
‘般若橋(반야교)’라고 쓰인 다리를 건너니 조금 가니 ‘頭輪山 大興寺(두륜산 대흥사)’라고 편액을 한 일주문이 보인다. 안쪽에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解脫門(해탈문)’이라 쓴 커다란 글씨의 편액이 걸려 있다. 글씨의 웅혼한 힘이 넘쳐난다. 큰 글씨의 획이 힘차게 날아갈 듯 행서체로 쓰여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이제 해탈을 할 것인가? 좌우의 사천왕상이 무서운 눈초리로 쳐다보니 괜히 움찔해진다. 영원한 해탈은 아닐지라도 일상의 번뇌 일랑 청정도량(淸淨道場)에서 잠시 잊어보자.
해탈문을 나서니 절집 저 너머로 두륜산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뚝한 산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저 산 중턱에 우리가 친견하려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암자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멀리서 보는 두륜산의 전경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산 정상의 바위가 예사롭지 않다. ‘頭輪’이라는 명칭 자체가 산머리가 바퀴처럼 둥글다는 뜻이다. ‘바퀴’는 단순히 둥글다는 의미도 있지만 초기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인도를 통일한다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전설이 있으며 줄여서 ‘윤왕(輪王)’이라고도 한다.
절집을 가로질러 목적지를 향해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긴다.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진 ‘표충사(表忠祀)’를 지나고 동국선원의 선방을 지나 두륜산으로 향한다. 오르는 길이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조금 더 올라 개울을 지나니 돌길이 깔려 있다. 얼른 신발을 벗고 맨발로 암자를 향해 오른다. 돌길에 느껴지는 발바닥의 감촉이 서늘하면서 지압으로 눌리는 발바닥의 촉감이 기분 좋다. 별것 아니려니 하고 맨발로 오르니 목덜미에 땀이 배어 등줄기로 흘러내린다.
제법 가파른 길이 이어지고 산길바닥도 잔돌이 깔려 있고 깨진 병조각도 많이 보인다. 깨진 병조각은 산속에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염주 알 같은 땀을 흘리며 헐떡이는 숨결을 고르며 오르는데 암자가 보인다. 암자라고하기엔 제법 큰 집에 검둥개가 컹컹 대며 외지인을 맞는다. 쫄쫄 나오는 샘물로 목을 축이고 위로 오르니 “龍華殿(용화전)”이라 편액한 건물이 보인다. 마애여래불의 부식을 막기 위해 보호각을 지어 놓고 용화전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숨을 고르며 마애불을 본다.
공식 명칭은 국보 제 308호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으로, 보물 제48호였다가 2005년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제단이 없었으면 앙련의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여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아쉽다. 마치 석굴암의 본존불을 친견하는 듯하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도 그렇다. 통견(通肩)의 법의가 의젓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마애불을 친견하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답사를 끝내도 될 만하다. 특히 여래불은 처음 친견한다. 주로 미륵사상에 의한 미륵불이나 약사불을 친견해 왔기 때문이다.
후덕한 체모의 형형한 눈빛이 근엄하고 위의가 넘치며 두툼한 입술과 살이 오른 양 뺨이 자애로움이 가득하다고 안내문에 써 있다. 그냥 그대로 그런 느낌이 든다. 광배는 또 어떤가? 이중 광배의 뚜렷한 둥근 선이 법력의 경지를 보여준다. 좌우의 공양천인상도 다른 마애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섬세한 조각 수법도 뛰어나다. 위부분의 화염무늬도 뚜렷하게 조각되었으나 오른 쪽 위의 바위가 떨어져 나간 것이 흠이다.
한 동안 무연히 바라보고만 있다. 그저 말없이. 그렇게 보고 또 보고 있으니 흔연(欣然)이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집착할 때 고통이 생기고 집착을 버릴 때 참된 즐거움이 나타나니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치신다. 동시에〚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의 열 번째 가르침이 떠오른다. “被抑不求申明 抑申明則怨恨滋生 以屈抑爲行門(피억불구신명 억신명즉원한자새 이굴억위행문 : 억울함을 당했다고 밝히려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한이 생겨나게 된다. 억울함으로 자신을 수행하는 문으로 삼아라.)”
속인들의 마음은 다 같은 마음이리라. 부처님 앞에서면 자비로움에 자신이 왜소해지고, 예수님 앞에서면 박애하라는 가르침에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마음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노라니 갑갑한 느낌이 든다. 마애불은 역시 탁 트인 대자연 속에 자연 그대로 있어야 제 면모를 나타낼 수 있다. 양각된 면만 바라보게 되니 덩그마니 떨어져나간 돌을 조각해 놓은 듯하다. 말이 너무 많다. 단 한마디. 見覺! 如如不動!
밖으로 나와서 전체를 보니 산 쪽으로 커다란 바위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보호각을 철거하고 두륜산에 안긴 본 모습의 마애불을 상상해본다.
그 옆에 단아한 자태를 한 삼층 석탑이 보인다. 보물 제301호 북미륵암 삼층석탑이다. 2층의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이 올려진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아담한 모습의 깔끔한 자태가 돋보인다. 이 높은 곳까지 와서 탑을 조성한 사람들의 불심을 엿볼 수 있다. 워낙 마애불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다지 특별한 특징이 없이 평범한 신라양식의 탑을 친견하고 다시 내려간다. 대흥사 경내에 내려와서야 위쪽에 삼층탑이 하나 더 있다고 하여 아쉬운 탄식을 했다.
내려가는 길에 동국선원을 지난다. 추사가 썼다는 동국선원의 현판이 있다는 데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라 출입을 금한단다. ‘表忠祀(표충사)’라는 현판이 보인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1788년 건립되어 정조임금이 직접 쓴 ‘表忠祀’편액이 하사되었다. 그래서 오른쪽에 임금의 친필이 있다는 ‘御書閣(어서각)’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팔도돛총섭으로서 승병들을 총 지휘한 서산대사의 공적을 기려서 지은 것으로 중앙에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좌우에 사명대사와 처영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억불숭유(抑佛崇儒 : 불교를 억압하고 유고를 높임)를 제창했던 조선시대에 이렇게 임금의 친필이 내려진 것은 조선 후기 불교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린 묘향산 ‘酬忠祀(수충사)’와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린 밀양의 ‘表忠祀(표충사)’가 있다. 우측에 표충비각이 있다. 당시 공시당상(貢市堂上)으로 있던 영호(潁湖) 서유린(徐有隣)이 지은「서산대사표충사사적기명(西山大師表忠祀紀蹟碑銘)」이 새겨진 커다란 빗돌이 세워진 비각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된 ‘千佛殿(천불전)’으로 간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천불전의 편액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편액이다.
안내문을 보니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천불전은 과거, 현재, 미래 어는 곳에나 항상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천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즉, 언제 어느 곳에서나 누구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전각이라 할 수 있다. 정면과 측면이 3칸이며 다포계의 팔작지붕으로 전형적인 조선후기 건물이다. 법당 중앙에는 목조 석가모니 부처님과 문수,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주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 천불은 경주 불석산(佛石山)의 옥돌로 조성되었는데, 1817년 배로 싣고 오던 도중 부산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일본 큐슈(九州)로 표류해 갔다가 다음해인 1818년에야 대흥사로 돌아와 봉안된 것이다. 그래서 천불 가운데는 ‘日’자가 적힌 불상이 있다. 4년에 한 번씩 천불의 가사(袈裟)를 바꾸어 드리는 불사가 있다.
일본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와서 부처님의 어깨에 ‘日’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도 아담하면서 단아한 건물의 모습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앞에 당간지주가 서 있다. 기둥에 걸린 주련의 글씨도 단아한 맛이 있다. 깨끗한 예서체의 흰 글씨가 더욱 청정하게 느껴진다. 첫 구의 ‘길 道(도)’가 예서체의 독특한 서체로 되어 있어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조금 당황할 수도 있다.
世尊坐道場(세존좌도량) 세존께서 도량에 앉아 계시니 淸淨大光明(청정대광명) 맑고 깨끗함이 크게 밝고 환하네. 比如千日出(비여천일출) 마치 천개의 해가 나온 듯 照耀大千界(조요대천계)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네.
천불전에서 좌측에 있는 건물은 ‘龍華堂(용화당)’이다. 용화당은 전남 유형문화제 제93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용화당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寮舍寨)다. 안쪽의 전체적인 내부는 볼 수 없지만 안내문을 보니, 지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둥의 높낮이를 조정하여 건축한 자연친화적인 건물이란다. 스님들의 교육과 선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초의스님의 스승인 완호스님이 1813년 중건하였다고 한다. 내가 주목하는 건 건물 보다는 당대의 명필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가 예서체로 쓴 편액이다. ‘꽃 華(화)’자의 서체가 원래의 글자와 판이하게 달라 알기가 쉽지 않다. 정갈하면서도 단정한 멋스러움이 있다. ‘용화(龍華)’는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줄임말로 ‘미륵보살이 성불한 후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연 법회’를 말한다.
천불전을 나와 대웅전 쪽으로 가는 길목에 ‘연리근(連理根)’이라는 두 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드러난 뿌리가 붙은 채로 서 있다. 서로 다른 두 나무의 줄기가 만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겹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한단다.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되기에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라’에 비유된단다. 대흥사의 느티나무는 천 년의 세월을 그렇게 살아와서 더욱 영험함이 드러난다고 한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끈 것은 연리근을 설명한 안내문에 적혀 있는 한 편의 시와 같은 구절이다.
오늘 등불 하나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속 깊은 사람 변치 않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 하나 참 고운 등불 하나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지만 몇 번을 읽으며 변치 않을 등불 하나 밝히길 소원해본다. 모퉁이를 돌아 금당천의 다리를 건너면 대웅전이 있는 북원 구역이라 부른다. 다리 위에서 보니 커다란 건물이 개울을 베개 삼아 누워있다 해서 ‘枕溪樓(침계루)’라는 편액이 보인다. 뱀이 엉켜 꿈틀거리듯, 척척 늘어진 엿가락이 뒤엉킨 듯, 글씨가 활달하면서도 시원스러움을 느낀다. 역시 원교(圓嶠)의 글씨답다. 침계루는 우리나라의 사찰 곳곳에 있다. 절집이 주로 산자락에 있어서 계곡 건너에 건물이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계곡 가에 건물을 지으니 침계루가 된다.
침계루를 지나니 맞은편에 그 유명한 대웅보전이 보인다. 특히 이 북원의 경내는 참 재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웅보전의 편액은 원교 이광사가 썼고, 오른 편의 ‘白雪堂(백설당)’ 편액은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썼고, 백설당 건물에 걸린 ‘無量壽閣(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가 썼고, 침계루 안쪽의 ‘圓宗大伽藍(원종대가람)’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글씨다. 그러니 이곳에서 명필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안복(眼福)을 누리는 것도 좋다.
전남문화재 자료 제245호로 지정된 대흥사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식 건축양식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추녀 밑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장식이 눈길을 끈다. 건물 안의 천장에 장식한 간결한 용머리 조각, 날아가는 새를 조각한 장식등이 이채롭다. 그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물의 형태를 조각한 장식들이 많이 있다. 구불구불한 원래 형태의 통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써서 인공미와 자연미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더 유명한 것은 편액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 길에 대흥사에 들러 원교가 슨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보고 조선의 글씨를 망친 사람이 쓴 편액을 떼어버리고 자신이 쓴 것을 달으라고 했단다. 그런데 해배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보니 원교의 글씨를 잘못 보았으니 그냥 다시 달으라고 했단다. 추사체를 완성하고 나니 내공이 깊어져서 그랬던 것이다. 또한 창암을 만나서 글씨에 대한 품평을 할 때 그저 시골 동네에서나 알아줄 글씨라고 혹평을 해서 창암의 제자들이 화를 내며 추사를 혼내주려고 한 일화도 전해진다. 그런데 지금은 세 사람의 글씨가 한 자리에 있으니 화해의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대흥사 답사를 마치고 명승 제59호로 지정된 ‘달마산 미황사(達磨山 美黃寺)일원’의 미황사로 간다. 미황사에는 세 가지 아름다운 경관을 만날 수 있다고 하여 마음 설렌다. 새벽안개가 걷히면 드러나는 흰 빛의 수직 암봉(巖峰), 세 번만 절하면 삼천 배를 이룬다는 미황사 대웅전의 천불 벽화. 사찰 마당에서 바라보는 황금빛 노을이 달마산 미황사의 세 가지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차 안에서 이상배 선생이 미황사 창건에 관한 설화를 이야기해 준다. 어느 날 돌로 된 배가 달마산 포구 아래 이르렀다. 범패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확인하고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다가오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그래서 의조대사가 몸을 정갈히 하고서 배를 맞이하니 배가 다가왔다. 이 배에 올라보니 금 옷을 입은 사람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에는 불상과 경전이 실려 있었다. 배에 싣고 온 돌을 깨니 황소가 한 마리 나왔다. 그날 밤 금옷 입은 사람이 의조대사 꿈에 나타나 ‘나는 인도국의 왕인데 금강산에 봉안하러 갔다가 절이 많아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이곳이 금강산과 비슷해 왔다. 소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다. 다음 날 소를 끌고 한 곳에 이르러 소가 눕고 크게 울어 그곳에 통교사라는 절을 짓고 다시 일어나 가서 누운 곳에 절을 지은 것이 미황사라고 한다. 미황사라는 이름은 소 울음소리가 아름다워서 ‘아름다울 美(미)’와 금인의 빛깔에서 ‘누를 黃(황)’자를 써서 미황사라고 했단다.
미황사는 우리나라 육지의 가장 남쪽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선조 때 다시 지었고 다시 영조 때 수리하였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언덕진 길을 올라가니 일주문이 있는데 편액이 없다. 건물을 새로 짓는 중이어서 조금 어수선한 길을 에돌아 계단을 오르니 우뚝한 건물 앞에 선다. ‘紫霞樓(자하루)’라고 힘찬 행서체의 유려한 글씨로 편액을 한 누각이다. 저녁노을이 지면 붉은 노을이 비추어 이런 이름을 얻었는가 보다.
버스에서 미황사를 바라보니 뒤편의 달마산의 모습이 금강산의 만물상을 갖다 놓은 듯 보였다. 또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다는 말은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멀리서 보는 달마산 정상의 암봉(巖峰)의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의 생김생김이 이 절집의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린다.
자하루 아래서 현판의 글씨를 감상하며 예서체로 멋지게 쓴 주련의 글씨와 글귀도 감상해본다. 예서체 특유의 한자 모습을 예술적으로 잘 살려 쓴 아름다운 글씨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다.
若人欲識佛境界 사람들이 부처님의 세상 알려거든 當淨其意如虛空 마땅히 그 뜻을 빈 하늘처럼 맑게 하라. 遠離妄想及諸趣 헛된 생각 모든 집착 멀리 떠나보내고 令心所向皆無碍 마음 향하는 곳 막힘없이 하라. 三界猶如汲井輪 삼계(三界)의 윤회 우물의 두레박 같아 百千萬劫歷徹塵 백천만겁 오랜 세월 지나가도다. 此身不向今生度 이 몸 금생에서 제도(濟度)하지 않는다면 更待何生度此身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 제도하리오.
글씨와 주련의 글귀에 정신을 팔렸다. 맑은 생각으로 영혼을 정화하고 망상과 집착을 떨쳐버리는 일. 그래서 윤회의 억겁에서 제도되어야 하리라. 글귀만 읽어도 차분한 마음이 일어난다. 글씨에서는 특히, ‘깨끗할 淨(정), 허망할 妄(망), 생각할 想(상), 없을 無(무), 바퀴 輪(륜), 이제 今(금)’자의 한자 모양이 독특한 모양으로 씌어져 있어서 서체를 감상하는 맛을 한층 돋우어준다. 또한 7구와 팔구의 겹쳐지는 한자인 ‘此身(차신), 度(도)’자의 모양을 서로 다르게 하여 같은 한자의 읽는 지루함을 없애준 작가의 예술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자하루의 밑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전면에 대웅전이 보인다. 자하루의 건물을 되돌아보니 전서로 힘차게 쓴 커다란 ‘萬歲樓(만세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글자의 획이 원교의 글씨를 많이 닮은 듯 한데 원교의 글씨는 아니다. 전서의 글씨에 나름대로 개성을 살린 글씨체가 예술적인 조형성도 있다. 전체적인 글자의 균형미도 있으며 흰색의 글씨가 주는 돋보임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글씨에 매혹되게 한다. 관지를 보아서는 누구의 글씨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 못내 궁금하다.
미황사 대웅전은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었다. 만세루 앞에서 보는 대웅전은 단청을 하지 않아서 민낯의 얼굴을 한 미인이 방금 목욕을 한 싱그러운 모습의 자태를 보는 듯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멀리 달마산을 뒤로 하고 앞에는 당간지주와 괘불을 걸기 위한 높은 괘불대가 세워져 있다. 10월 19일부터 괘불재(掛佛齋)가 열린다고 자하루에 현수막이 길게 걸려 있다. 보물 제1342호로 지정된 미황사 괘불탱은 높이가 12m에 넓이가 5m나 되는 대형 괘불이다. 괘불은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질 못했기 때문에 한 번 보고 싶은 욕망이 인다. 미황사 괘불탱은 일본에 큐슈 박물관에 미황사 괘불재가 초대되기도 했단다.
대웅전으로 가서 기둥과 주춧돌의 문양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추녀 밑의 용조각 상이 단청을 하지 않아 더욱 이채롭게 느껴진다. 나무 기둥도 단청을 하지 않아 갈라진 그대로의 모습이 늙은 주름살이 갈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주춧돌에는 거북, 게 등의 문양이 보인다. 절집 대웅전의 주춧돌에 게 문양이 새겨진 것을 보니 황지우 시인의 “게 눈 속의 연꽃”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투구를 쓴 게가/ 바다로 가네/ 포크레인 같은 발로/ 걸어온 뻘밭/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죽고 낳고 죽고 낳고/ 바다 한 가운데에는/ 바다가 없네/ 사다리 타는 게,/ 게座에 앉네”
보물 제1183호로 지정된 ‘應眞堂(응진당)’으로 올라간다. 응진당은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뛰어난 16분의 아라한들을 모신 전각이라 한다. ‘응진(應眞)’은 참다운 존재의 실상을 훤히 깨닫고 해탈에 이른 사람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의 한역(漢譯) 표기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짝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이 크면서 날렵하게 하늘로 치켜 올라가 큰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하다. 용머리 장식이 이채롭다. 주련을 읽어보니 선사(禪師)들이 말하는 모순된 어법의 선풍(禪風)을 느끼게 한다.
晝現星月夜開日(주현성월야개일) 낮에 별과 달이 나타나고 밤에 해가 뜨며 夏見氷雪冬見虹(하견빙설동견홍) 여름에 얼음과 눈이 보이고 겨울에 무지개 뜨네. 眼聽鼻觀耳能語(안청비관이능어) 눈으로 듣고 코로 보며 귀로 말할 수 있으니 無盡藏中色是空(무진장중색시공) 끝없는 법의(法義) 속에 색(色)이 곧 공(空)이네.
깨달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논리적이 아닌 직관에 의한 세계를 관조하는 우주적 사유의 원융무애한 경지를 말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널리 알려진『반야심경(般若心經)』의 ‘色卽是空(색즉시공 : 만물은 모두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는 없음)’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왼쪽의 건물을 보니 ‘洗心堂(세심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주련이 걸려 있어 읽어보려니 모두 전서체로 되어 있어 만만치 않다. 앞쪽으로 돌아가니 벽안(碧眼)의 여자 분이 방으로 들어간다. 문 위를 보니 추사의 글씨를 모각(模刻)한 ‘麋壽(미수)’라는 작품이 걸려 있다. 이 글씨는 처음 보는 작품이라 한참을 감상했다. ‘큰 사슴 麋(미), 목숨 壽(수)’이니 ‘큰 사슴처럼 오래 살라’는 뜻이다. 큰 사슴은 ‘사불상(四不像)’이라 불리는 동물로 머리는 말, 발굽은 소, 몸은 당나귀, 뿔은 사슴과 각각 비슷하나 네 가지가 모두 같지 않다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다고 하는 동물이다. 끝에 ‘老阮漫筆(노완만필)’이라고 쓰고 김정희라는 도서까지 새겨져 있다.
세심당을 지나서 미황사 부도전으로 간다. 산길을 돌아서 제법 걸어가니 각양각색의 부도군 이루고 있다. 시간이 촉박해서 세세히 살펴보지는 못하고 특이한 형태의 부도에 눈길이 머문다.<사진 17> ‘冬峰堂(동봉당)’이라 쓴 부도에 발길을 멈춘다. 전체적인 형태는 조금 허술해 보인다. 기단 부분은 연꽃무늬를 새겨놓았고 1층과 2층의 중간 받침돌은 연꽃 봉오리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에는 게, 거북 등 바다에 사는 생물들이 새겨져 있다.
바닷가에 지어진 절이라 그런지 미황사 대웅전의 주춧돌과 같은 문양을 새겨 넣었다. 2층 몸돌에는 문비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서 석탑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붕돌은 사각의 귀꽃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상륜부는 연꽃 봉오리가 우똑 솟아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특이한 형태와 문양이 눈길을 끈다. ‘동봉당’이라는 호가 한자로 씌여 있지만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언제 건립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특이한 형식과 문양으로 내방객의 눈길을 끈다.
시간이 없어서 바삐 내려간다. 저녁놀이 물들기 시작한다. 산길을 내려가는 나무숲 사이로 뉘엿뉘엿 지는 석양빛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레이저 광선이 강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 미황사의 세 가지 아름다움 중의 하나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 “알 수 없어요”의 한 구절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 입니까”가 떠오른다. 멀리서 보는 운무에 덮인 다도해의 전경이 아득한 세상의 끝처럼 느껴진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국문학자이며 시조 시인 월하(月下) 이태극(李泰極) 선생의「서해상의 낙조(落照)」라는 현대 시조가 지금의 전경에 어울릴 것 같다.
어허 저거, 물이 끓는다. 구름이 마구 탄다. 둥둥 원구(圓球)가 검붉은 불덩이다. 수평선 한 지점 위로 머문 듯이 접어든다.
불게 타는 저녁놀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미황사의 답사를 마무리한다. 어둠이 내리니 이제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하며 숙소로 이동한다.
전날의 뒤풀이가 과했나 보다. 일찍 일어나 ‘토말(土末 : 땅 끝)’에 가서 기념사진이라도 남겨야 하는데 너무 늦게 일어났다.
날씨도 좋고 아침공기가 상쾌하다. 매생이 국으로 해장을 한다. 도시에서 먹는 매생이 국을 만든다면 서너 그릇이 푼푼할 만큼 매생이의 양이 많다.
오늘의 답사는 해상 왕이라 불리는 장보고(張保皐)의 유적지 완도 청해진이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이상배 선생이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한다. 장보고는 본명이 ‘궁복(弓福)’이라 한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중국과 일본에 더 많은 자료가 있다고 한다. 장보고라는 이름도 중국 기록에 의한다고 한다. 그의 신분은 성이 없이 이름만 있는 것으로 미천한 사람이란다. 무예가 출중하여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의 직책을 맡았다고 한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려고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 한ㆍ중ㆍ일 세 나라의 무역을 독점하는 무역상이며 해상을 통괄하는 사실상 해적 왕이란다. 신라 말기의 혼란한 정치적 격변기에 끼어들어 염장이라는 부하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썰물로 물이 빠진 갯벌이 드러나 있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있어서 언제든지 건너갈 수 있다. 드러난 자갈밭의 갯벌을 지나가니 천 여 년의 세월을 묵묵히 땅 속에 박혀 있는 ‘목책(木柵)’의 나무 끝부분이 보인다. 10여 년 전만 해도 완전한 형태의 통나무가 있는 목책이 있었는데 바닷물에 썩어서 이제는 땅에 박혀 있는 끝 부문만 남았다고 한다. 그나마 썰물로 물이 빠져서 이런 목책의 끝부분이라도 볼 수 있는 행운이 아니냐고 한다. 청해진을 설치하여 수많은 해적들을 물리치며 해상무역을 했던 장보고의 활약상이 그려진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상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무장으로서의 능력과 무역상으로서의 활약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서는 지배자들의 기록이니 반란을 했다는 그의 행적이 좋게 쓰일 수 없으리라. 더욱이 신분제가 확고했던 당시 사회에서 일개 섬사람으로서 비록 많은 재물을 쌓았고 직급이 상승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를 상류계층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을 ‘장도(將島)’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유적지를 설명하는 안내판에 ‘장도 청해진 유적지’라고 소개되어 있다. 섬의 주위를 빙 둘러서 성을 쌓은 것 같다.
외성문을 들어서니 큰 우물이 있다. 당연히 우물이 있어야 사람이 살 수 있다. 잘 정비된 토성 위를 밟으며 주변을 감상한다. 멀리 강한 가을 햇살이 쪽빛 바다에 비춰 맑은 수정 빛을 발산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짭짤하면서도 비릿한 바다의 독특한 냄새를 맡는다. 산책을 하듯 잔디가 가지런히 심어진 토성을 밟으며 왔던 길 되돌아 귀향길에 오른다.
부안 젓갈 전문매장을 들린다. 몇 가지 젓갈을 사고 바지락 칼국수로 점심을 먹는다. 가는 길에 부안 청자박물관을 관람한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되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마침 도자기 전문가인 김대환 선생이 개관기념으로 자신의 소장품을 기증도 하고 겸해서 특별전을 열린다고 해서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다. 청자는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잘 알지는 못한다. 좋은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도자기 제작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과 도자기 체험실도 마련되어 있다. 청자박물관 관람을 끝으로 1박 2일의 답사를 마무리한다.
책에서 글로만 읽었던 소중한 유물들을 친견하는 일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자아낸다. “自得其樂(자득기락 : 즐거움을 스스로 깨닫는다)” 단 한마디의 말이 답사하는 이유의 대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