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교통부가 아파트 가격 담합지역이라고 지목한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우성아파트의 주민 정모(41·주부)씨는 “주변 아파트 단지들도 담합으로 가격을 일제히 올려놨는데 뒤늦게 따라한 우리만 죄인 취급을 받게 됐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정씨는 “다른 아파트는 현수막도 붙이고 연일 방송을 해대며 몇 개월새 가격을 8000만원 이상 올려놨는데 우리는 겨우 전단지 몇 개 붙인 게 고작”이라며 “비록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주민 대부분이 억울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담합 아파트로 발표된 서울 관악구 신림 11동 대우 푸르지오 아파트 인근에서 중개업소를 운영하는 박모(45)씨는 “건교부 발표를 보니 가격을 올려달라고 중개업소를 괴롭혔던 아파트들은 다 빠져나가고 뒤늦게 담합을 시작한 단지들이 주로 적발됐다”며 “하지만 실거래가 공개 외에는 처벌 규정이 없어 앞으로 담합이 사라질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건교부는 이들 아파트를 포함해 수도권의 58개 아파트 단지에서 부녀회·아파트발전위원회 등을 중심으로 가격 담합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21일 밝혔다.
지난 11일 이후 집값 담합 신고센터에 신고된 96개 단지를 현장 조사한 결과 이들 58개 단지에서 담합 행위를 적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담합행위가 극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지역의 아파트들은 이번 발표에 거의 포함되지 않아 정부가 뒷북만 울렸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실거래가 두배까지 담합한 경우도
이번에 적발된 아파트 단지는 서울 13곳, 인천 1곳, 경기 44곳이었다. 특히 부천에서는 35개 단지가 적발됐다.
담합가격이 실거래가의 두배 수준인 곳도 있었다. 고양시 덕양구 행신1동 샘터마을 1단지 화성아파트의 경우 39평형 실거래가가 2억7000만∼3억2000만원인데 담합가격은 6억원, 실거래가 3억7000만∼5억원인 50평형의 담합가격은 7억5000만원이었다.
담합 증거는 대부분 전단지였다. 신길2차 우성아파트는 “매매시 32평은 4억8천만원, 27평은 4억500만원에 중개업소에 매매 의뢰하라. 전 주민의 반상회에서 결의됐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승강기 등에 붙였다가 걸렸다. 이 곳의 담합 가격은 실거래가(32평 2억8000만∼3억5000만원, 27평 4억500만원)보다 2억원 가량 높았다.
하지만 이들 아파트들이 담합으로 실제 값을 끌어올리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21일 현재 화성아파트 39평의 일반 시세는 3억6500만원(담합가격 6억원), 50평은 5억7000만원(7억5000만원)이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보라매 삼성아파트 37평형의 담합가격은 4억8000만원(실거래가 2억7000만∼3억4000만원)이었지만 국민은행 시세는 2억9500만원이었다. 담합에도 불구하고 시세가 별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국민은행·한국감정원과 부동산 정보업체들은 이번에 적발된 담합지역 아파트의 시세를 앞으로 4주간 인터넷에 게재하지 않게 된다. 대신 건교부는 이들 단지의 최근 실거래가를 홈페이지(www.moct.go.kr)에 공개했다.
“담합으로 이미 집값 올린 지역은 다 빼놓고…”
과거 담합을 통해 목표치까지 집값을 올린 지역에선 이미 담합행위가 시들해졌다. 평촌에 비해 가격이 덜 올라 올 초 담합행위가 종종 벌어졌던 산본의 경우 이번 조사에서 한 개 단지만 적발됐을 뿐이다.
산본의 K부동산 관계자는 “올 초 2억원 중반이던 36평형 아파트의 집값이 담합행위 이후 호가가 5억원대를 넘었고, 실제로 4억5000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며 “하지만 요즘은 주민들이 담합의 필요성을 거의 못 느끼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평촌의 S부동산 관계자도 “평촌에서는 이미 담합행위가 사라진 상태”라며 “현 집값 수준에 만족하는 주민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또 담합행위가 성행했던 서울 강남을 비롯해 목동·분당 등 이른바 ‘버블 세븐’ 지역의 아파트도 이번 조사에서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담합이 끝났거나 담합의 필요성이 없을 정도로 알아서 가격이 올라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 조사에선 서울의 외곽지역과 상대적으로 가격이 약세였던 부천, 고양 행신·화정 등에서 담합행위가 무더기로 걸린 것이다.
담합행위 사라질까
담합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이들은 전세 계약자들과 무주택 서민들이다. 실제로 이번에 담합행위를 고발한 이들의 상당수가 세입자와 매수 희망자들이었다.
하지만 담합 실태를 공개하더라도 담합이 사라지긴 힘들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정부는 당초 과태료 부과 등 처벌 조항을 포함한 담합행위 근절 대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처벌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고심하다가 담합 단지에 대한 명단 발표와 실거래가 공개라는 수준의 대책에 그친 것이다.
은밀한 담합은 적발되지 않고 있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이번 조사에서 전단지나 현수막을 붙이는 등의 노골적인 담합행위만 적발됐다. 반상회나 인터넷 동호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은밀한 담합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평촌의 중개업자는 “중개업소를 압박해 호가를 높이거나 유인물을 부착하는 노골적인 담합은 줄어들 것”이라며 “그러나 특정 지역의 가격만 급등하는 현상이 계속된다면 주민들이 담합 유혹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건설교통부 관계자는 “처벌 규정을 두는 문제는 논란의 소지가 있어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