鄧麗君私家相冊 덩리쥔 개인 앨범 (4편)
时间:2010-3-24 23:36:37 点击: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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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열독: 덩리쥔_특별주제, 화보집_특별주제/ 金康顯 飜譯 2010-9-18
音乐课也是邓丽君很喜欢的,可是一个星期只有两堂课,且每堂课老师只教一首歌,让邓丽君觉得很郁闷。邓丽君记忆力超强,尤其是歌词,
唱过一次即不会忘记,能够过目成诵。 五年级时,邓丽君被学校推举参加县演讲比赛,因为当天就要决出人选,第二天就要上台演讲,
演讲稿都没有着落,邓妈妈非常着急,倒是邓丽君安慰她说没有问题。结果第二天,她没有讲稿就在台上侃侃而谈,说得非常好,
把第一名捧回了家。邓丽君小学时候的奖状。 “邓丽君小姐于1963年8月份参加本台第一次梁祝电影插曲空中歌唱比赛成绩优异,
经评定为个人组第一名,特发给奖状以资鼓励。” 这是改变邓丽君命运的一张奖状,十岁的邓丽君获此奖状之后,就逐渐有了更多的登台机会,
她的表演欲望和才华都得到了充分的展现,这让年少的她兴奋而忐忑。有意思的一点是,奖状中直呼只有十岁的邓丽君为“小姐”。
음악 수업도 덩리쥔이 매우 좋아하는 것인데 그러나 일주일에 겨우 2시간 뿐이었고 게다가 매시간마다 선생님은 노래를 한 곡만
가르쳐서 덩리쥔을 매우 침울하게 하였다. 덩리쥔의 기억력은 매우 뛰어났는데 특별히 가사에 뛰어나서 한번 노래를 부르면
잊지 않아서 한 번 보면 암송할 수 있었다. 5학년 때 덩리쥔이 학교의 추천으로 縣이 주최하는 웅변대회에 나갔는데 그날 곧바로
결선에 나갈 사람을 정하고 그 다음날 바로 연설대에 올라서 웅변을 하는 것이었다. 웅변 원고가 모두 없어져 덩리쥔의 어머니는
매우 조급해 하였으나 오히려 덩리쥔은 어머니를 위로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드디어 그 다음날 덩리쥔은 원고 없이
단상에서 당당하게 발언을 하였는데 매우 말을 잘하여서, 일등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덩리쥔의 초등학교 때의 상장이다.
"덩리쥔 샤오졔는 1963년 8월 본 방송국의 제1회 양산백과 축영대의(梁山伯與祝英台) 영화 삽입곡 공개 방송 노래자랑 대회에서 성적이 우수하여,
심사를 거쳐 개인부 일등상으로 인정하며 특별히 상장을 수여하고 이로써 격려합니다."
이것이 덩리쥔의 운명을 바꾼 한 장의 상장으로 10살의 덩리쥔이 이 상장을 받고서는 점차로 더욱더 많이 무대에 오를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녀의 공연 욕망과 화려한 재주를 모두 충분히 알리게 되었다. 나이 어린 그녀는 흥분도 되고 불안도 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상장에서 겨우 10살의 덩리쥔을 小姐샤오지에(역자 주: 성숙하고 지체 높은 아가씨 라는 뜻)라고 직접 부른 점이다.
邓丽君在校获得的奖状,这是一张国语比赛的奖状。虽然出生于台湾,但是父母俱由大陆迁移而去,且童年生活在眷村,
周遭里的习惯用语都是汉语(国语),邓丽君的国语自然不会落人后面。邓丽君与弟弟邓长禧童年时的合影。 邓丽君是家中唯一的女儿,
出生一年之后,她尚未断奶,弟弟邓长禧即出生了。作为唯一的女儿,邓丽君比弟弟受到更多的宠爱。他们的大哥邓长安回忆说,
当母亲喂邓长禧吃奶时,邓丽君常常抢着去吃,而妈妈总会让她先吃饱了再喂她弟弟。由于年龄相近,邓丽君与弟弟在一起的时间最多,
童年时就一起长大,一起玩耍,邓长禧习惯叫姐姐为“老姐”。“我的老姐邓丽君,本名邓丽筠,河北省大名县人,身高1.67米,
体重47公斤,喜欢唱歌,爱吃猪脚。” 邓丽君全家拜访台北县芦洲亲戚时在一起合影。前排右二为邓丽君,右一为其弟邓长禧,
立于两人身后者为他们的母亲赵素桂。邓丽君父亲是‖国 . 民 . 党‖军官,1949年‖国 . 民 . 党‖败退台湾后全家随之迁进台湾。
这张照片很有中国北方人家的味道,房门上的对联横批上写着“天地间诗书最贵”。
덩리쥔이 학교에서 받은 상장으로 이것은 국어(북경어) 웅변대회의 상장이다. 비록 대만에서 태어났으나 부모가 모두
대륙에서 건너왔으며 게다가 어린 시절을 권촌(역자 주: 군인가족 집단 거주지)에서 지냈으며
주변에서 늘 사용하는 말이 모두 한어(국어: 북경어) 이어서 덩리쥔의 국어는 자연스레 남보다 뒤처질 수 없었다.
덩리쥔이 남동생 덩창시(鄧長禧)와 어린 시절의 같이 찍은 사진이다. 덩리쥔은 집안에서 하나밖에 없는 여자아이인데
태어난 지 1년 뒤에도 덩리쥔은 아직 젖을 떼지 못했는데, 남동생 덩창시(鄧長禧)가 곧바로 태어났다. 하나밖에 없는
여자아이이기에 덩리쥔은 남동생에 비해서 더 많은 총애를 받았다. 그들의 큰오빠인 덩창안(鄧長安)이 돌이켜보며 말을
하였는데, 그때 어머니는 덩창시에게 젖을 먹일 때, 덩리쥔은 언제나 배부르게 먹게 하였는데, 어머니는 늘 덩리쥔을 먼저
배부르게 먹이고 나서 다시 그녀의 동생에게 먹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이가 서로 비슷하여서 덩리쥔과 남동생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가장 많았고 어린 시절에는 같이 자라며 함께 놀았다. 덩창시(鄧長禧)는 누나를 老姐(늙은 누나)라고 부르던
습관이 있었다. "우리 老姐(늙은 누나) 덩리쥔은 본명이 鄧麗筠(덩리윈)이고 河北省大名縣(하북성 대명현) 사람으로
키는 167cm, 몸무게는 47kg으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돼지 다리 먹기를 좋아해요" 라고 하였다.
덩리쥔의 모든 가족은 대북현 로주 친척을 방문하였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앞줄의 오른쪽 2번째가 덩리쥔이고
오른쪽 1번째가 그의 남동생 덩창시이다. 두 사람의 뒷줄에 서 있는 사람이 어머니 趙素桂(조소계)이다.
덩리쥔의 아버지는 국민당 군관으로 1949년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한 후 대만으로 전 가족을 이끌고 이사를 하였다.
이 사진은 매우 중국의 북방 사람들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방문 위에 天地間詩書最貴(하늘과 땅 사이에 시경이 가장 귀하다)
라는 대련이 가로로 쓰여져 있다.
邓丽君身上的衣服与20世纪50年代的日本童装几无二致,这些都是她母亲亲手为其缝制的。
1953年1月29日邓丽君出生于云林县褒忠乡龙岩村,次年6月全家搬迁至屏东市军用机场附近的眷村。
邓爸爸于1955年退伍,开始在外省人聚居的地区经营小生意,他们曾在屏东开了一间小米店。
邓丽君的一副好嗓子,除了秉承天赋之外(据说她的嗓音多遗传自母亲,邓妈妈的嗓子就不错,即使老年之后说话声音也很嫩细),
也是自己努力锻炼学习的结果。很小的时候,邓爸爸每天清晨都会用自行车载着她到附近的河边去练声。邓丽君对着朝霞一遍一遍地唱,
把嗓子磨炼得越加圆润饱满,唱腔也愈发成熟,声线也更具灵气。 1963年8月,在“中华电台”举办的黄梅调歌唱比赛中,
邓丽君雏凤清于老凤声,击败了当时年纪和经验都要大她很多的杨燕、金陵等人,
以一曲《访英台》摘取了冠军,这首曲子是当时风靡港台的影星凌波主演的电影《梁祝》中的插曲。
邓丽君小的时候总有比哥哥弟弟更多的做客机会,只要一有亲友家的喜庆事,
邓妈妈喜欢将女儿打扮得漂漂亮亮的一起去参加,回来后还要到邻居家开设的照相馆里立此存照以资纪念。算是童年时做女儿的最大好处。
덩리쥔이 입고 있는 옷은 20세기 50년대의 일본 아동복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런 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손수 만든 것이다.
1953년 1월 29일 덩리쥔이 雲林縣 褒忠鄕 龍岩村에서 태어났는데, 그 다음해 6월 온 가족이 屛東市 군용 비행장 근처의
권촌(眷村)으로 이사를 갔었다. 아버지는 1955년 군대에서 전역을 하고는 외성인(外省人) 거주지에서 작은 장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찍이 핑똥(屛東)에서 작은 쌀집을 하였었다. 덩리쥔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하늘이 물려준 것 이외에
(남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목소리는 다분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덩리쥔의 어머니의 목소리는 좋았다.
심지어 나이가 든 뒤에도 말하는 목소리도 매우 아름답고 가냘펐다.) 또한 자기가 노력하면서 단련 학습한 결과이다.
매우 어릴 때 아버지는 날마다 이른 새벽에 자전거로 딸을 태우고 가까운 시냇가로 데리고 가서 발성 연습을 하였다.
덩리쥔은 아침 노을을 보면서 하나 하나씩 노래를 하면서 목소리를 연마하여서 점점 원만하고 부드럽게 되었다.
唱腔(중국 희곡 음악 중의 성악)도 더욱 성숙하여졌다. 목소리도 더욱 총기를 갖추게 되었다.
1963년 8월 중화 텔레비전이 주최한 황매조(黃梅調) 노래자랑 대회에서 덩리쥔은 어린 봉황이 늙은 보황보다는
목소리가 맑은 것처럼 그때 나이와 경험이 그녀보다 더 많았던 金陵等 사람인 楊燕을 물리쳤다.
[訪英台]라는 곡을 가지고 일등상을 받았다. 이 노래는 그때 홍콩과 대만을 휩쓸던 영화스타인 [凌波] 주연의 영화
[梁祝]의 삽입곡이었다. 덩리쥔이 어릴 때는 언제나 오빠와 동생보다 더 많이 손님으로 초대될 기회가 있었는데,
만일 친구네 집에 좋은 경사가 있기만 하면 덩리쥔의 어머니는 딸아이를 예쁘게 단장하고는 같이 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집에 돌아온 뒤에 또한 이웃집에 있던 사진관에 가서 이를 기념하고자 이를 찍었다. 어린 시절 딸아이의 가장 잇점인 셈이었다.
주변에서 늘 사용하는 말이 모두 한어(국어;북경어) 이어서 덩리쥔의 국어는 자연스레 남보다 뒤처질 수 없었다.
.....................보낸 원본이 이런데 옮기는 과정에서 바뀌었네요.......................수정바랍니다
일반 대만 본섬 출신이라면 민남어를 쓰지만........................... 원향인 출신이라서............................. 국어 즉 북경어 다시 말해서 한어를 쓰면서 자랐기에................................ 국어가 뛰어 났다는 내용입니다
첫댓글 凌波 LingBo_訪英台 fangyingtai (香港輝黃2000年演唱會)
능파의 노래 파일] http://cafe.daum.net/loveteresa/46b/1084
어릴적도 항상 해 맑은 표정 이였군요....
주변에서 늘 사용하는 말이 모두 한어(국어;북경어) 이어서 덩리쥔의 국어는 자연스레 남보다 뒤처질 수 없었다.
.....................보낸 원본이 이런데 옮기는 과정에서 바뀌었네요.......................수정바랍니다
일반 대만 본섬 출신이라면 민남어를 쓰지만........................... 원향인 출신이라서............................. 국어 즉 북경어 다시 말해서 한어를 쓰면서 자랐기에................................ 국어가 뛰어 났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귀한 옛 사진도 올려 주시고...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 짬짬이 등님을 사랑하는 많은 팬들에게 좋은
해 주시느라 수고 많으신 진캉시앤님께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등님의 귀한 자료들 모두...펌 해 갑니다.
남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쓰여진 위인전을 읽으면서 어느 면에서 다가 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힘들어 한 적이 있었으나
덩리쥔의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이 쓴 글을 읽고는
인간적 고뇌 노력 가난 하였지만 자식을 사랑하던 부모의 노력 타고난 재주를 일찍 발견하고 키워주던 혜안등이
가까이 다가오네요
어릴때부터 재주가 뛰여 났네요.좋은 자료 잘 보고 갑니다.요기 반주음도 감사히 받아갔어요.^^
이 반주는 凌波의 버전인데 등님이 애초에 부른 것보다 음질이 더 낫죠, 그러나 저러나 아쉬운 건 등님의 녹음곡이 소실되었는지 소개된 자료가 없군요..;;
[訪英臺방영태/ 번창곡] 조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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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노래연습장] http://cafe.daum.net/loveteresa/43fs/481
다양한 덩리쥔의 이야기를 보실 수 있어요
어서 어서 오세요
鄧 여사님 키는 165cm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