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리적 억압과 무의식의 투영: 김영조 「폐가」
뒤란의 대나무숲/ 독각귀가 산다는데
담벼락 해 저물면/ 도둑괭이 숨어들고
왕거미/ 제 명줄 내어 허공중에 집을 짓네
앞마당 쑥대밭에/ 젖어 드는 푸른 달빛
힘들게 버티고 선/ 처마 끝 신열 오르면
쏙독새/ 어둠을 타고 긴 그림자 떨군다
김영조 「폐가」 전문
김영조 시인의 시조 「폐가」는 인간 내면의 무의식과 억압된 감정이 외부 세계로 투영된 상징적 공간으로 읽힌다. 폐가는 단순히 인간이 떠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두려움과 불안, 고독이 응축된 심리적 장소로 해석된다.
"뒤란의 대나무숲/ 독각귀가 산다는데"라는 초장부터 독각귀라는 존재는 무의식 속에 자리한 공포와 불안을 암시한다. 독각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존재로, 이는 무의식 속에서 생겨난 두려움과 불안의 상징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억압된 욕망이나 두려움은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가 꿈이나 환상의 형태로 표출되곤 한다. 독각귀는 바로 이런 억압된 감정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피하고자 하지만, 계속해서 무의식 속에서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감정을 상징한다.
"담벼락 해 저물면/ 도둑괭이 숨어들고"에서 도둑고양이는 억압된 욕망이나 원초적 충동을 상징한다. 도둑고양이의 숨어듦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행동으로, 무의식에 감춰진 충동적 욕망이 억압된 채로 표출되지 못하고 숨겨져 있음을 나타낸다. 억압된 욕망은 때때로 비일상적인 상황이나 대상에 투영되어 표출되며, 이러한 고양이의 등장은 바로 억눌린 원초적 본능의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
"왕거미/ 제 명줄 내어 허공중에 집을 짓네"는 폐가라는 공간이 불안정한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왕거미는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집을 짓는 모습으로, 이는 인간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와 긴장감을 나타낸다. "제 명줄 내어"라는 표현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집을 짓는 행위를 통해, 불안정한 상황에서의 생존 본능과 자기 파괴적 욕구가 동시에 드러난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 욕구는 인간의 무의식에 깃든 죽음 본능(타나토스)과도 연결된다.
둘째 수는 폐가의 외진 앞마당을 배경으로 한다. "앞마당 쑥대밭에/ 젖어 드는 푸른 달빛"은 서늘한 달빛이 폐허 속에 은밀히 스며드는 모습을 통해 억눌린 감정이 서서히 드러나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힘들게 버티고 선/ 처마 끝 신열 오르면"이라는 중장은 폐가가 오랜 시간의 고난과 압력 속에서 마치 열병에 시달리듯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억압된 감정이 터져 나오려는 심리적 긴박감을 암시하며, 인간 내면의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쏙독새/ 어둠을 타고 긴 그림자 떨군다"에서 쏙독새는 무의식 속의 불안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쏙독새의 울음과 긴 그림자는 무의식 속의 깊은 불안과 고독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억압된 감정들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쏙독새가 떨구는 "긴 그림자"는 마치 억눌린 감정의 길고 긴 흔적처럼, 폐가의 공간을 더욱 음산하고 불안한 장소로 변모시킨다.
이처럼 「폐가」는 무의식의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그곳에 깃든 여러 존재와 이미지들이 인간의 억압된 감정과 무의식 속의 불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시인이 묘사한 폐가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고독, 억눌린 욕망이 투영된 심리적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조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감춰진 감정과 그들의 표현 방식을 심리적으로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다만, 시가 감각적 이미지와 상징적 묘사에 집중한 나머지, 심리적 주제의 확장이나 통일성에서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또한, 각 수의 종장 처리 면에서 주제나 감정의 흐름을 충분히 마무리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그럼에도 이 시조는 폐가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고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며, 전통 시조의 현대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김영조는 일상의 공간을 넘어선 심리적 긴장과 무의식의 세계를 시적 언어로 예리하게 포착하며,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리뷰: 김태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