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4:1절을 보면 호세아 2:2절처럼 “리브”, 즉 “논쟁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문맥에 맞게 “리브” 동사를 번역하면 “법정의 고발, 고소”라는 의미입니다. 호세아 2:2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각각이 “어머니”인 이스라엘 전체를 고소합니다. 하지만 호세아 4: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 주민을 고소합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합니다. 소송의 이유를 1~2절에서 설명합니다. 첫째, “진실”(에메트)이 없습니다. “에메트”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정직성과 많이 관련됩니다. 정직성의 반대는 속임수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이 없다는 말은 속임입니다.
둘째, 인애가 없습니다. “헤세드”는 다양하게 번역이 됩니다. 인자, 자비, 사랑 등으로 번역됩니다. 전제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아래에서 연결됩니다. 언약적 관계 때문에 그것에 신실함, 충실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애”가 없다는 것은 언약 관계의 단절(파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남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결혼의 마지막 단계가 서로 아는 것인데, 이것이 없다는 말은 언약적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이 땅 주민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까? 4절을 보면 본문의 관심이 백성에서 제사장에게로 옮겨 갑니다. 제사장이 백성과 다투고 있습니다. 왜 다툽니까? 5절에 “너”는 누구입니까? 특이나“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제사장을 가리킵니다. 제사장과 백성 사이에 다툼이 발생합니다. 이유가 5절입니다. 제사장 역할 중 중요한 세 가지는 제사 집행, 토라를 가르침, 재판입니다. 제사장이 이 주요 역할을 못 하니까 수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재판을 공정하게 안 하면 백성과 계속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이 어떤 상태이기에 다툼이 일어납니까? “낮에 넘어지고 밤에 넘어지리라”에서 “넘어지다”라는 말이 히브리어 “카솰”입니다. “카솰”이란 단어는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중심을 잡지 못할 정도로 정신 못 차리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비틀비틀하면서 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술에 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길로 잡아야 할 지도자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카솰”은 영적인 현재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영적으로 분별, 지각 능력이 없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6절은 기존 해석과 이해와 매우 다릅니다. 문맥을 잘 봐야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에서 “너”가 누구입니까? 첫 번째 해석은 백성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제사장입니다. 이 두 번째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고 전하지 못합니다. 결국 “나도 너를 버려 제사장 되지 못하게 하겠다”, 즉 심판입니다.
왜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합니까? 책임이 백성에게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그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제사장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7절을 보면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제사장의 수가 많아지고 권력을 가집니다. 그들이 번성할수록 영화(카보드)를 욕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권력과 특권을 잘 이용하지 않고 그것이 부패와 타락의 원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변질되게 했습니다.
8절의 “속죄제물”은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하타트”로서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속죄제물, 다른 하나는 죄입니다. “죄”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죄악”도 히브리어 “아온”으로서 “죄”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타트”와 “아온”을 병행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제사장들이 계속 죄의 부패성에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목자”는 두 가지 개념으로 쓰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지칭합니다(시편 23:1, 80편). 왕이신 분으로 다스리는 권세를 가리킵니다. 통치권을 나타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목자권을 한 사람, 한 지도자에게 이양하고 위탁합니다. 시편 78:70~71절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목자권을 이양하고 위탁하십니다. 71절에 “기르게 하셨다”라는 말은 원어를 보면 “양을 먹이다, 목양하다”의 의미입니다. 즉, 목자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34:23~24절을 보면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정작 에스겔 34장을 보면 하나님은 양 떼들을 돌보라고 목자를 세웠는데, 이스라엘의 목자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의롭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목자들이 그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도적질하고, 그들을 진짜 잘 먹이고 보호하기는커녕 그들은 잡아먹고 가죽을 벗겨서 옷을 입고 그들은 방치해서 그 양 떼들이 온 땅에 흩어집니다.
에스겔서가 쓰일 당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의 온 땅에 흩어졌고 짓밟히고 종노릇 하고 흩어지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온 디아스포라 세계에 흩어져 유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이들의 목자가 되겠다, 그들을 자기 땅으로 다시 회복하게 하겠다, 다윗과 같은 다윗 자손의 목자를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에스겔 34장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이 이 에스겔서 3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바로 그 선한 목자입니다. 다윗이 선한 목자였는데, 그런데 다윗과 같은 선한 목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예수님이 그런 선한 목자입니다(에스겔 34장, 37장, 미가 5:3, 시편 78:71-72). 또한 하나님이 선한 목자인데(시편 23:1, 80:2, 예레미야 31:9), 예수님이 바로 내가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목자의 이미지는 단지 나를 뒤에서 응원하고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왕의 이미지입니다. 다스림입니다. 왕을 위해 백성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이것을 뒤집어 놓습니다. 목자가 양 떼를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예수님이 목자이되, 선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과 에스겔 34장을 비교하여 보면, 에스겔 34장에서 말씀하지 않는 목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4~15절을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에스겔 34장(에스겔 37장) 어디를 봐도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10:11, 15절을 보면 두 번이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로서 무엇을 하실 분입니까? 양 떼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분입니다. 대속의 죽음을 하실 분입니다. 이것이 자기의 선한 목자 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로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신 분입니다.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분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그의 백성이 친밀한 교제를 가능케 하신 분이십니다. 영생을 누리도록 만드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상처가 난 베드로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그리고 목자로서의 새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은 다스림입니다. 명령하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가 난 마음을 회복하실 뿐만 아니라, 선한 목자로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명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제사장, 목자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백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그들과 동일하게 행실대로, 행위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9절).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목자의 모습을 보인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선한 목자가 되어서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게을리하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자들이 아니라 양을 위해 희생과 사랑을 다 하는 참된 왕으로서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