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가.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일지라도 그 생각하는 바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얼마 전, 바로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중견 한 마리를 내게 데리고 왔다. 견종은 닥스훈트로 온 몸이 윤기가 자르르르 흐르는 새까만 털로 덮여있고, 주둥이도 가늘고 길쭉한데다 짧은 다리하며 긴 몸뚱이가 썩 귀여운 구석이 있는 개는 아니다.
"선생님이 개를 워낙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데려왔는데요, 남편 가게에서 키우던 앤데 저희가 키우려 해도 여건이 되지 않아……. 키울 여건이 되신다면 대신 키워 주십사 하고……. 이름은 깜순이예요. 얼마 전 첫 새끼를 낳은 앤데 두 살쯤 됐나 봐요."

▲ 며칠 전에 입양한 깜순이(2년 추정)
닥스훈트란 견종은 사진에서나 봤지 실제로 가까이 대하기는 첨이다. 위에서 내려다 볼 때 그 긴 몸통이 유난하다 여겨질 뿐더러 땅강아지처럼 바닥에 납작 붙어있는 것이 일견 해학적이다. 몸통을 잡고 번쩍 치켜드는데 제법 살이 통통하고 묵직했다.
함께 살면서 부대끼다 보면 아무리 못나 뵈는 개라도 정이 가는 법이요, 따라서 그 하는 행동거지가 남들 눈엔 어떻게 비치든 주인 눈에는 예뻐 보이게 마련이다. 해서 시간이 흐르면 정도 붙고 사랑도 느끼게 되려니 하는 생각에 선뜻 입양을 받아 들였다.
이미 내겐 지난 1월 중순에 선배가 4개월 된 여아라며 데려온 갈색털이 부수수한 잉글리쉬코카스페니얼로 예삐라 이름 붙인 중견이 한 마리 있다. 머리 양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커다란 귀하며 넓적한 주둥이하며 큰 눈망울 하며…….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예삐란 녀석으로 인해 손해 보는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엄청 부산하고 어지르기 좋아하는 녀석이라 하루 종일 녀석만 쫓아다니며 치워도 치워도 소용없는 것이 몸만 한번 부르르르 떨면 한 움큼의 미세 털들이 온 방안을 뒤덮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둥이가 닿는 곳은 모조리 물어뜯고 갉아대어 남아 난 살림이 없을 정도이다. 녀석은 물건만 물어뜯는 게 아니라 주인장인 나까지 만만하게 보았던지 두 팔이며 목이며 가슴, 허벅지, 종아리 등 녀석이 긁고 물고하여 생겨난 상처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코카종이 원래 산만하고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종이라 했다. 예삐가 망가뜨린 물건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전기장판 코드를 끊어놓아 한동안 잠자리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고, 전기밥솥 코드도 끊어놓아 새것으로 장만해야 했으며, 새로 산 전화기도 코드를 끊어놓아 다시 장만해야 했다. 50만 원짜리 크리스천 디올 안경이며 휴대폰까지도 자근자근 씹어놓아 못쓰게 만들어놨으니 중요하다 싶은 물건들을 행동반경이 못 미칠 위치에 치워놔도 잠시 자리를 비워두면 뭔가 사단 내기 일쑤였다. 그래도 밉기는커녕 그 장난마저 귀엽게 느껴지니 아무리 값진 물건일지라도 우리 예삐만이야 하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리라.
내 생활이 그다지 넉넉지 않아 비좁은 집안에서 다 자란 개를 한꺼번에 두 마리씩 거두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동물을 좋아하고 그 뒤치다꺼리에 그다지 큰 불만도 없을뿐더러 녀석들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더 값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숱한 사람들로부터 배반당했으며, 숱한 사람들로 인해 숱한 피해를 입고 그로인해 곤욕을 치룬 바가 많기에 사람한테는 그다지 믿음이나 정이 안가더라도 개에게는 예외였다. 오로지 주인이라고 따르고 오로지 주인의 눈치만 살피는 가여운 녀석들이다. 맛있는 음식에 조금 더 먹을 욕심을 낼지언정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릴 줄도 모른다. 주인을 얼마나 따르는지 잠시만 외출 갔다 와도 그리 반길 수가 없는 것이다.
깜순이가 들어오면서 궂은일들이 한결 늘어났다. 예삐와는 달리 깜순이는 똥오줌을 가릴 줄 모른다. 아무데나 내키는 대로 싸질러놓고 다니는데 그 때문에 오줌을 밟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어허! 이러면 쓰나?"라며 머리를 한번 쥐어박았다. 큰 소리를 친 것도 아니요, 그다지 아프게 쥐어박은 것도 아닌데 깜순이는 빨빨거리며 뛰어다니던 평소와는 달리 딴엔 주인이 저만 미워한다고 느꼈던지 어두운 침대 방에 콕 틀어박혀 요지부동이다. 10여분이 지나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침대 방으로 들어가 보니 웅크린 채 내 눈치를 살피듯 빤히 지켜보는 것이다.
"우리 예쁜 깜순이를 누가 구박했노?"
한참을 어르고 달래서야 깜순이의 서운함을 씻어낼 수 있었다.
한번 주인한테 버려졌던 개는 새 주인을 만나면 또다시 버려질까 두려운 것이다. 따라서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환경이 바뀌고 주인까지 바뀐 깜순이의 경우 그래도 눈치 하나는 있어서 새 주인인 내 눈밖에 나는 것만큼 두려운 게 또 있으랴.
덩치로 보면 예삐가 깜순이의 거의 두 배 가까이 더 컸다. 평소 저희들끼리 찧고 까불 때 보면 예삐가 완력으로나 덩치로나 분명 깜순이 보다 우월했다. 그런데 묘한 것이 깜순이가 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면 천방지축 날뛰던 예삐는 한쪽으로 머쓱하게 물러나 앉는다. 특히 밥을 먹을 땐 더한 것이 공평하게 두 개의 밥그릇에 나누어 줘도 깜순이가 양쪽 그릇을 오가며 양껏 먹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예삐 차례가 온다는 것이다. 어느덧 저희끼리도 그런 식으로 서열이 결정된 모양이다.

▲ 지난 1월 중순경에 입양한 예삐(8개월 추정)
내게 있어 깜순이보다 예삐에게 더 정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넉 달 전부터 정들여 온데다 또 멍청하여 단순하게 느껴지고 천방지축 날뛰기만 하는 예삐가 더 살가운 것이다.
깜순이는 예삐에 비해 내 눈치를 더 살핀다. 괜한 이유로 "어허! 이놈들 봐라!" 호통을 치면 예삐는 얼른 책상 밑으로 숨어들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데 반해 깜순이는 내 앞으로 다가와 발랑 드러누워 배를 훤히 드러내 보인다. 이른바 순종의 표시이다. 두 살이 지난 아이까지 출산한 경험이 있는 그래서 사람의 표정이나 몸짓을 읽을 줄 아는 노련함이 예삐보다 앞선 까닭이리라.
깜순이는 어찌나 샘이 많은지 예삐를 껴안고 "우리 예삐, 예뻐 죽겠다!"라며 쪽쪽 빨아주면 그걸 못 봐준다. 그 쑛다리로 펄쩍 펄쩍 뛰어오르면서 예삐의 다리를 물어뜯고 마구 짖어대며 내 품에 안기려고 안간힘을 쓴다. 깜순이를 안고 "예쁘다"고 얼러도 예삐는 마냥 시큰둥한데 비해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하루에 몇 번씩 그 짓을 하면서 깜순이의 질투를 자극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예삐와 깜순이를 함께 마주하면서 '참으로 간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란 생각이 자꾸 든다. 뚱뚱하고 못생긴 아이보다 잘 생기고 날씬한 아이를 더 챙기려 드는 인간세상에서 늘 겪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차별들을 생각하면 '두 녀석에 대한 차별만큼은 절대로 하지 말고 골고루 사랑해줘야지' 늘 마음을 다져보지만 그래도 예삐에게 더 마음이 쏠리는 걸 어쩌랴.

▲ 옆집에서 깜순이 새끼를 데려와 깜순이, 예삐랑 함께 어울려 노는 모습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黃喜 1363∼1452)에 얽힌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황희가 여행을 하는 도중 길가에서 잠시 쉬어 가려는데 마침 두 마리의 소로 밭을 가는 농부가 눈에 띠어 하릴없이 농부에게 "두 마리의 소 중 어느 것이 일을 더 잘합니까?"라고 큰 소리로 물었다. 농부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던지 대답을 하지 않고 밭갈이를 마저 끝내고 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황희의 귀에 입을 바싹 들이대고 속삭여 말하기를 "저쪽 소가 일을 더 잘합니다."라는 것이다.
황희가 이상하게 여겨 "무엇 때문에 일부러 귀에 대고 말합니까?"라고 되물으니 농부가 대답하기를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일지라도 그 생각하는 바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한쪽이 더 낫다하면 나머지 것은 못하다는 것이니 못하다는 소가 이 말을 듣는다면 어찌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겠습니까?"라는 것이다. 소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농부로서는 일을 잘하는 소나 잘 못하는 소나 차별 없는 대우를 해주려 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깜순이를 대하는 내 눈빛이 어느덧 측은지심에 젖어있음을 깨닫는다. '내 마음의 간사함으로 인해 행여 깜순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까?' 그게 그리 걱정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