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재 李範載(1916 ~ 1953)】 "32년 6월 함흥지역 학생운동 주도"
1916년 7월 15일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진동면(鎭東面) 양유리(楊柳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최정자(崔靜子)와 결혼하여 1녀를 두었다. 1930년 3월 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함흥(咸興) 영생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영생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한명환(韓明桓)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한명환은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이의수(李義洙)·이용선(李容善)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1931년 12월 함흥고등보통학교 및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마르크스주의연구회를 조직하고 연구부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수차례 모임을 가졌다.
1932년 5월 상순 이낙묵(李樂黙)과 함께 함흥 내 각 중등학교의 연합 동맹휴학을 계획하였다. 그해 5~6월 영생고등보통학교·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의 학생들을 만나 정보 교환, 독립운동 자금 모집, 동맹휴학 참여 권유, 격문 작성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드러나 6월 14~15일 5개 중등학교 동료 학생 10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1932년 12월 6일 주동자 13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사유재산제도를 불인하고자 그 목적 실행을 위한 협의를 했다”는 명목으로 기소되었다. 1933년 4월 1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즉각 항소하였으나, 그해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4년 5월 15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1944년 흥남(興南) 소재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를 파괴하기 위해 계획하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