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에 쓰는 편지 】
K 시인에게
변 종 환 (시인 · 한국바다문학회 회장)
K 시인님!
요즘 시 잡지가 참 많습니다. 새로 시작한 시 전문지도 많습니다. 오래된 시 관련 잡지들도 많습니다. 어떻게 이 많은 책을 다 볼까요? 어떻게 좋은 시를 빠짐없이 언급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내 눈이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 깜냥껏 읽을 수 있는 만큼이나 읽겠다고 생각해봅니다.
중요한 잡지다, 그렇지 않은 잡지다 하는, 이미 만들어진 이름값을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는 다 부담입니다. 유명 시인이다, 그렇지 않다 하는 기준도 나는 따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시를 쓰는 데 때로는 부침浮沈이 있게 마련인 때문이지요.
무엇보다 시 쓰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대하는 태도 하나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시문학 또는 시단이라는 형식을 택한 수준 안에서 시적 분위기가 더 나빠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시가 유행을 따르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도 우리는 따져 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유행은 지나가게 마련이지요. 또 돌아오게도 마련입니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것일수록 옛것에서 찾아 바꾸고 다듬은 것인 경우가 많지요. 우리 몸과 마음 안에는 하루짜리 분초 단위짜리 시간도 흐르지만 백 년, 천 년, 만 년짜리 시간도 흘러 다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의식할 것입니다. 우리 문학사는 깊은 시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전통의 힘을 중시하고 새롭게 살린 시일수록 더 완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힘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새로운 것이 갖는 미정형의 가능성도 넓게 헤아려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시에 젖어들어 정상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8년 말이었습니다. 헤아려 보니 벌써 46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새로운 시인이 숱하게 많이 등장했습니다. 우리 문학사는 이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한정된 숫자의 시 작품을 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시가 참 많으면서도 적디 적은 세상인 것 같습니다. 이승훈 시인의 시 「좋아, 웃어라」는 우리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엔 너도 나도 시를 쓴다. 지식인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무식한 사람은 무식을 감추기 위해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모두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나도 시집을 낸다. 대머리도 쓰고 이가 빠진 인간들도 쓰고 병든 늙은이도 작은 방에 앉아 시를 쓴다. 손을 떨면서 기침을 하면서 모두 죽어라 하고 시를 쓰고 시집을 낸다. 모두 대단한 인간들이다. 나도 대단한 인간이다. 모두 미친 것 같다. 시를 쓰고 부지런히 시집을 내고 상도 받고 아무튼 재미있는 나라다.”
- 이승훈 시인, 「좋아, 웃어라」 일부
시 한 편 감상하시겠습니다. 이문재 시인의 작품 「푸른 곰팡이」입니다.
푸른 곰팡이 - 산책시散策詩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이문재 시인의 이 시는 여유의 삶과 명상의 삶을 위하여 쓴 시 같습니다.
오늘의 삶, 현대적인 삶을 3M 또는 3S의 시대라고 흔히 말하지요. 대량생산(mass production), 대량소비(mass consumption), 매체선전(mass media)의 시대라서 3M의 시대라고 하고요, 속도(speed), 스포츠 또는 스크린(sports or screen), 섹스(sex) 범람의 시대라고 해서 3S라고도 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편리해지고 화려해졌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그만큼 더 잃어가는 것, 사라져 가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사람들 사이의 맑고 따뜻한 인정의 향기이며 사색과 명상의 그윽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관계의 상징인 연락 수단도 이제 사람의 향기가 담긴 편지가 아니라 기계문명의 전화 한 통화로 간단하게 해결되지요. 살아가는 일도 보행이나 산책이 아니라 차로 달리고 비행기로 날아가는 것이기에 명상이나 사색의 여유가 날로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스턴트시대로 접어들어 인간관계도 그처럼 즉물화, 자동화, 기계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향기를 회복하는 일, 인간성이 살아 숨 쉬고 인정이 넘실거리는 삶을 살아가고 싶은 것이지요. 이문재 시인의 「산책시편」이 그 상징인 것입니다. 느긋하게 기다릴 줄도 알고 생각하고 반성하며 살아갈 줄 아는 여유의 삶, 느림의 삶을 통해 사람의 향기를 회복하고 누리면서 살고 싶다는 뜻이 담긴 것입니다.
이문재 시인의 시들은 치열하고 내부가 끓고 있습니다. 그의 시들은 결사結社를 합니다. 주로 도시와 문명의 급소를 공격해 단숨에 제압하지요. 시 「푸른 곰팡이」가 실려 있는 두 번째 시집 『산책시편』(1993)은 시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도시적 공간의 무서운(파시스트적인) 속도에 대항해 '게으르고 어슬렁거리고 해찰하는' 8편의 산책시散策詩 연작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아파트단지가/웨하스처럼, 아니 컴퓨터칩처럼/촘촘하게 박혀”있는 곳을 느릿느릿 걷습니다. 그는 “도시는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느림보는/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도시에서 당하고 말지요/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마지막 느림보-산책시 3」)라고 썼습니다.
시 「푸른 곰팡이」에서도 느림을 예찬합니다. 사랑도 산책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산책 같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사랑은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이지만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을 살면서 사랑은 무르익고 완성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 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격렬한 사랑에 휩싸인 사람일지라도 백지를 앞에 두면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그러나 머뭇거림이 편지의 미덕이지요. 지우고, 생각을 구겨버리고, 파지破紙를 내는 시간에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나흘을 또 기다려 보아야 합니다. 나의 편지가 사랑하는 이의 안뜰과 마루와 품에 전달되기까지의 그 시간을 마른 목으로 가슴 설레며 살아보아야 합니다. 푸른 강이 흘러가는 그 기다림의 거리를 살아보아야 하지요. 그러는 동안 사랑은 푸른 강의 수심처럼 깊어질 것입니다.
요즘 이문재 시인은 따뜻한 체온의 ‘손’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내미는 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언젠가 그가 발표한 시 「손은 손을 찾는다」에서 “손이 하는 일은/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오른손이 왼손을 찾아/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빈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라고 썼습니다. 그의 시는 도시와 문명에 단호하게 맞서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있는, 그리워하고 연민하는 사랑의 마음이 살고 있습니다.
농 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시인과 농부
이문재
밥과 입 사이가
가장 아득한 거리
밥과 입 사이에
우주가 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문명도
밥과 입 사이를
좁히지 못했다.
우주의 원(圓)
몸의 원이
밥과 입 사이에서
끊겨 있다.
홍문과 땅 또한
이어져 있지 않다.
밥과 똥
똥과 밥 사이가
두절되어 있다.
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지구의 가을
이문재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두려워 헤아리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 크게 뜨면 뜰수록
이 눈부신 음식들
육신을 지탱하는 독으로 보입니다
하루 세 번 식탁을 마주할 때마다
내 몸 속에 들어와 고이는
인간의 성분을 헤아려보는데
어머니 지구가 굳이 우리 인간만을
편애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린다 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이문재李文宰 시인에 대하여
1959년 9월 22일 경기도 김포 출생.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 『시운동』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을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문재 시인은 유연한 시적 상상력으로 현실 세계를 부유하는 젊은 혼의 이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상과의 불화 및 방랑의 이미지가 담긴 『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1988), 미래에 대한 근심과 불안을 노래한 『마음의 오지』(1999) 등의 시집을 간행한 바 있으며 이외에도 『별빛 쏟아지는 공간』(2005), 『공간 가득 찬란하게』(2007) 등이 있습니다. 다채로운 심상과 독창적 시어가 특징이지요. 현대문학에 대한 평론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K 시인님!
일반적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비범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보잘것없는 평범한 존재일 뿐입니다. 자신을 비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만심은 허구적 관념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단지 허상일 뿐이지요. 이런 허상을 포기할 때 유리는 실제가 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존재임을 인정할 때, 본연의 우리 자신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스러워져야 합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살펴보시면서 행복한 시간 되십시오.
건승을 빕니다.
牧 雲 올림.
■ 변종환 ■
* 現, (사)부산예총 감사 ·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 부산진구문화예술인협의회 회장 * 부산문인협회 회장 · 부산시인협회 회장 · 한국문예연구문학회 회장 역임 * 시집 『水平線 너머』(1967‧親學社) 『풀잎의 잠』(2010·두손컴) 『松川里에서 쓴 편지』(2015·두손컴) 등 5권 * 산문집 『餘滴』 등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