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지만 엄연히 직업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선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떤 직업이면 어떠냐고 말하는 분들도 정작 자기 자식들이 갖기를 원하는 직업은 세상적 기준에 가깝고, 부모로서 딸들의 배우자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것들은 분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천 5백년전 여호수아 시대에도 직업에 대한 차별이 있었을까요? 신분의 차별이 있었습니다. 2천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의 천한 목수였습니다. 공생애 기간 예수님을 괴롭혔던 사람들은 예수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본문의 라합은 기생입니다. 라합을 미화하기 위해 역 역사가 요세푸스와 구약성경의 해설서인 탈굼, 그리고 유대 랍비들은 '기생'(조나) '여관 주인'으로 해석했지만 히 11:31;약 2:25은 라합을 '기생'(포르네,πόρνη)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이 단어는 '여관 주인'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기생은 모든 시대에 가장 천한 여자를 부르는 “창녀”를 지칭하고 있으며, 히브리어 '조나'는 '간음하다', '매춘하다'는 뜻을 가진 '자나'에서 파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사람들의 생각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거슬러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가장 천한 여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으나 라합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사는 기생이라도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여리고 사람들에게 라합은 창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창기로 대했습니다. 그녀를 타락하고 음란한 여자로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라합은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열린 귀를 갖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흘려보내지 않고 다시 생각하며 마음에 새길 줄 알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녀는 들려진 이야기 속에서 살아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해서 들었지만 믿음을 얻고,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구원의 약속을 받아낸 사람은 라합뿐이었습니다. 비록 기생으로 살았지만 그녀는 가족과 친족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했던 창기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대를 만족시키며 살았습니다.
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라합처럼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세상이 흘러가는댜로 휩쓸려 살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기원전 1451년경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라합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호와시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리고를 찾아온 정탐군들을 숨겨두고 한 밤중에 올라가 그들에게 라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수3:9절 “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10절 “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이 승리의 열쇠하는 사실을 확신했을 뿐 고대 가나안의 가장 큰 성인 여리고성을 무기도 없이, 전략도 없이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고 100% 확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사는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멘이라고 확신하며 대답할 수 있을까요?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의심하며 살아갑니다.
라합은 이방여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지 못합니다. 그녀의 귀에 들려진 이야기만이 그녀가 하나님에 대해서 들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속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로마서의 말씀이 라합의 삶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출애굽기 6:2-3절을 보면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여호와라는 이름을 조상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는데 그 이름의 의미는 전능하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란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믿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믿습니까? 라합이 믿었던 두가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실 것이고, 홍해를 가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까?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수천년 인류의 역사와 지식과 경험을 챗봇안에 넣어놓고 질문만 하면 답이 나오는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까?
김우현감독의 팔복시리즈중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의 주인공 정재완씨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의 뒤틀린 작은 몸. 하지만, 그 몸을 감추거나 숨기거나 꾸미지 않습니다. 그리 하고 싶어도 그리 할 수 없는 것이, 그의 몸입니다. 거리를 걸을 때, 그의 몸은 절벽 위를 걷듯이 아슬아슬합니다. 구부러진 한쪽 발이 바닥을 쓸며 힘겹게 일보 전진할 때, 그의 몸은 균형이 흐트러집니다. 그러면, 파도에 휩쓸리는 작은 배처럼 출렁거립니다. 정재완, 그는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김우현 감독의 다큐 영상을 통해서, 그는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가 친구인 김 감독에게 한 말이 슬픈 송곳이 되어 시청자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하나님은, 저, 전능, 하신 부, 분이잖아? 나도 고쳐, 주실까?” 이 짧은 두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기 위해서,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습니다. 이 말은 애통의 언어였습니다. 뇌성마비 장애 속에 갇혀 있는, 몸에 대한 전능자의 이해를 구하는 말이었습니다. <영상을 잠시 보겠습니다.>
그가 고백하고 노래한 하나님, 그를 뇌성마비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분, 그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동거하는 그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봐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 되게 하시고 성공하게 하시는 분이 전능하신 여호와가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고난과 아픔속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그분의 신실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고 오늘도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라합의 하나님, 재완씨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라합을 통한 두 번째 메시지는 구원의 증표, 붉은 줄을 드러내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귀를 닫고 사는 시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귀를 막았습니다. 항상 귀를 열어둬야할 지도자들도 들을 줄 모릅니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학계,예술계,과학계, 심지어 종교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듣지 않으니 자기 고집대로 합니다. 귀가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리더쉽은 듣는 귀를 가진 리더쉽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잘 듣는 훈련을 시키십시오.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리더가 될 것입니다.
9살 때 부친을 잃고 부족에서 추방되어 홀로서기를 한 ‘테무진’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물고기와 들쥐를 잡아먹으면서 살았지만 강력한 리더십으로 부족을 통합하고, 몽골제국을 건국한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0만의 군대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칭기즈 칸이 되었습니다. 그는 빠르고 뛰어난 군사전략과 용맹으로 수많은 적들을 제압했으나 그의 리더십의 기초는 관용과 경청이었습니다.
그는 문맹자였습니다. 자신의 이름조차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귀를 열고 남의 이야기와 가르침들을 적극적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귀로 입력된 다양한 정보와 방대한 지식과 놀라운 지혜를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리더로 세상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칭기즈 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관용과 들음의 리더십입니다. 안타깝게도 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예수님은 관용과 경청의 본보기였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기주의적이고, 계산적이며, 배타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으나 들리는 이야기를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 들음이 믿음이 되었고 그 믿음으로 그녀와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우리는 라합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와 그 가족들의 구원은 라합의 용기 있는 결단의 보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녀는 여리고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녀를 다스리는 왕은 여리고왕이었습니다.
수2:3절입니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반역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목숨을 건 용기를 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리고 왕은 라합의 집에 그 정탐꾼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을 끌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라합과 그 가족의 목숨은 여리고 왕에게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라합은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을 지켰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고 아들을 살린 것처럼, 라합은 자기와 가족의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라합에게서 에스더왕비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갈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단했던 것과 같은 용기를 봅니다. 라합의 결단으로 인해 그녀는 여리고성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고, 다윗의 조상, 보아스의 아버지인 살몬과 결혼하여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내건 결단이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그저 편안하게 버림과 포기의 결단이 없이 예수믿었으니 구원받았다고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합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의 은혜에 담긴 목숨을 버리는 결단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1999년 4월 미국 콜로라도주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고 모두 25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사건에서 한 소녀가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라는 범인들의 질문에“Yes, I Believe in God!”라고 외쳤습니다. 그녀는 범인의 총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그녀가 남긴 고백은 신앙인들에게 오래 기억되었습니다. 당시 17세였던 캐시 버넬이란 학생입니다. “Yes, I Believe in God!”이라고 그녀가 대답하자 남학생은 총구를 그녀에게 대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없어!” 그녀는 차분히 말했습니다. “아니야, 하나님은 살아 계셔. 너도 그분을 믿어야 해.” 그러자 화가 난 범인은 방아쇠를 당겼고 캐시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캐시가 처한 상황에 처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두렵지 않았을까요? 때로 믿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처럼,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처럼, 목숨을 걸고 왕 앞에 나갔던 에스더처럼, 바로의 명을 어기고 아들을 살린 모세의 부모처럼, 여리고 왕의 명령을 속이고 정탐꾼들의 생명을 구했던 라합처럼, 목숨을 건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증거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정탐꾼들이 돌아간 그날 부터 라합의 집에는 하나의 징표가 생겼습니다. 창문에 매달린 붉은 줄입니다. 그 줄은 모든 여리고 사람들과 라합의 가족을 구분하는 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게 되는 날 구원을 얻는 증표입니다.
수2:21절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구원받은 성도는 구원을 이루는 날까지 구원의 증거를 드러내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가진 것을 기쁨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일곱바퀴를 돌고 난 후 “무너져라”외치던 날에 여리고성의 사람들이 모두 진멸 당할 때 라합의 집에 걸린 붉은 줄은 생명을 구하는 증표가 되어 라합과 그 가족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붉은 줄이 매달려 있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되는 예수의 보혈입니다. 그 구원의 증거를 세상에 드러내며 살아가는 예신 가족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세상속에서 구원의 증표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