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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8년] 과거제 실시
← 김홍도의 <모당평생도>에 나타난 장원급제자의 3일유가 장면
958년(고려 광종 9) 4월 16일 중국 후주(後周)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로 처음으로 과거제가 시행되었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크게 제술과·명경과·잡과·승과로 나눌 수 있다. 1024년(현종 15)에 각 지방에서 시행하는 예비시험인 향시가 생겼고, 1031년(덕종 즉위)에는 귀족관료의 자제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국자감 유생들의 시험인 국자감시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무과가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승과제는 폐지되었다. 조선의 과거제는 생원시·진사시·문과·무과·잡과 등으로 나뉘었고, 정기시와 부정기시의 구분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변동에 따라 과거제도에 많은 폐단이 발생하자 실학파, 특히 유형원이나 정약용에 의해 과거제 개혁방안이 제기되기도 했다. 개항 이후 1894년에 단행된 갑오개혁에 의해 성균관이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개편되면서 과거제는 폐지되었다.
[1828년] 에스파냐의 화가 고야(Goya, Francisco de) 사망
1746. 3. 30 ~ 1828. 4. 16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1828년 4월 16일 프랑스 보르도에서 82세로 사망했다.
생전에 빛과 어둠이 수시로 교차되는 삶을 살았던 고야는 스페인의 벽촌에서 태어나 1798년 궁정 수석화가로 화가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차지했다.
고야는 펜테토도스 출생하였다. 1766년경 마드리드의 F.바이에우문하에 들어갔고 1798년 궁정 수석화가가 되었다. 작풍은 대체로 1771년부터 1794년까지 후기 로코코의 작풍과 그 이후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후기 로코코시대에는 프랑스 18세기의 ‘아연화(雅宴畵)’ 영향으로 왕조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다룬 작품이 많고, 그 후 융그스와 티에폴로로부터 다채로운 색채기법을 배웠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보시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인물을 그렸는데, 초상화에서 인물화로 전환하였다.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 표현 등 고야의 인간관은 차차 악마적 분위기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향에서 일대 전환한 동기는 청각을 잃을 정도의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이었다. 그 결실이 후일 인상파의 마네에게 영향을 준 《1808년 5월 3일 The 3rd of May 1808:The 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과 연작판화 《전쟁의 참화 Los desastres de la guerra》이다. 특히 후자에는 82장의 흑백 에칭에 살육 ·광기 ·허무 ·폭행이 철저히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판화 카로, 피라네지 등에도 열중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표적 연작판화인 《로스 카프리초스(변덕) Los caprichos》(1796∼1798, 80장)와 《디스파라테스(부조리)》(l8l5∼1850, 15장)를 보면 고야의 작품 특유의 암담한 느낌이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3년] LSD를 이용한 최환각 효과 발견
← 거름 위에서 자라는 작은 환각버섯속(Psilocybe) 버섯
1943년 4월 16일 스위스의 화학자 알베르트 호프만이 우연히 LSD의 합성제품을 통해 최환각 효과를 발견했다. 이후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 천연물질에 대한 연구가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대표적인 환각제로는 클라비켑스 푸르푸레아(Claviceps purpurea)에서 얻을 수 있는 LSD-25(d-리세르그산디에틸아미드), 미국 남서부와 멕시코에서 자라는 페요테선인장(Lophophora williamsii)의 활성성분인 메스칼린, 특정 버섯의 멕시코종인 프실로키베 멕시카나(Psilocybe mexicana)와 스트로파리아 쿠벤시스(Stropharia cubensis)에서 만들어지는 실로신과 실로시빈 등이 있다. LSD는 알코올 중독증, 자폐증 치료나 말기 암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LSD의 사용이 사회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자 과학적 연구에만 사용하도록 제한되었으며, 약품제조도 엄격히 규제되었다.
[1867년] 라이트(Wilbur Wright) 출생
1867년 4월 16일 태어남 / 1912년 5월 30일 죽음
윌버 라이트는 동생 오빌 라이트와 함께 최초의 비행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발명가이다. 라이트 형제로 더 많이 알려진 이들은 집안 형편과 건강상의 문제로 정규교육을 마치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인쇄기계를 만들어 인쇄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첨단산업에 속하던 자전거 수리 및 제조업을 운영하는 등 기계에 대해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러던 중 1896년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이 활공비행 실험 중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고 자극을 받아, 비행기 발명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비행기들이 실패한 이유가 비행제어기술의 부족에 있다고 보고, 롤링이 가능한 날개 등 제어장치들을 개발했다. 1900년부터 시작된 글라이더 실험에서 수차의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1903년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만들면서 비행에 성공했다. 첫 실험에서 행해진 최초의 비행이 12초, 이어 2번째 비행이 59초의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졌지만 인간이 마침내 하늘을 날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이정표들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윌버는 1912년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오빌은 1948년까지 살면서 항공공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1889년] 채플린(영국 태생 미국의 배우·감독.) [Chaplin, Charlie] 출생
본명은 Sir Charles Spencer Chaplin.
1889. 4. 16 영국 런던~1977. 12. 25 스위스 코르지에쉬르베베.
← 채플린 /〈방랑자〉에서의 채플린
미국에서 제작된 무성영화에서 익살스럽지만 애수를 담고 있는 떠돌이의 모습으로 등장,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14년 영화에 처음 출연한 이후 2년 만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20년대 초반이 되자 그가 출연하는 영화의 흥행성은 대단해 어떤 영화사도 그에게 출연료를 지불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에만 출연했다. 1920년대 말엽 유성영화가 도입된 이후에는 거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지만 그의 초창기 작품들이 영화의 고전으로 인식되었고 재상영되었을 때도 새로운 관객들의 찬사를 받아 그의 명성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편 희극 영화로는 〈키드 The Kid〉(1921)·〈황금광시대 The Gold Rush〉(1925)·〈도시의 불빛 City Lights〉(1931)·〈모던 타임스 Modern Times〉(1936)·〈독재자 The Great Dictator〉(1940) 등이 있다. 1975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채플린은 뮤직홀 연예인이었던 찰스 채플린과 한나 채플린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8세 때 나막신춤 프로인 〈8명의 랭커셔 소년들 Eight Lancashire Lads〉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그뒤 곧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어린시절을 기숙학교와 고아원 등을 전전하며 보냈고 때로는 거리에서 생활하면서 무대에 서기도 했다. 17세 때 영국의 보드빌 극단인 프레드 카노 극단에서 일하고 있던 그의 이복형이 이 극단에서 일자리를 구해주어 1913년까지 카노 극단에 소속해 수많은 뮤직홀에서 풍자극에 출연했다. 1913년 카노 극단의 뉴욕 순회공연중 키스톤사의 슬랩스틱류의 단막 희극영화 제작자인 맥 세넷의 눈에 띄어 키스톤사와 영화출연계약을 맺었다. 그 해 12월부터 주급 150달러를 받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으며 연극무대와는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2번째 영화인 〈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 Kid Auto Races at Venice〉(1914)를 찍으면서 중산모에 꼭끼는 프록 코트, 헐렁한 바지, 커다란 신발, 콧수염, 지팡이 등 그의 독특한 의상을 처음으로 고안해냈는데 그때까지는 자신의 특징인 애수를 자아내는 인물묘사와 방랑자로서의 중요한 인물특성이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의 코미디 영화들은 1주일에 2편꼴로 급히 제작되었지만 처음부터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곧 그는 자신이 출연하는 모든 영화의 감독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봉급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뛰어올라 1915년 에세네이영화사로부터는 주급 1,250달러를 받았으며, 1916년 뮤추얼영화사로부터는 주급 1만 달러에 계약 보너스로 15만 달러를 받았고, 이듬해 퍼스트내셔널영화사와는 8편의 영화출연 계약으로 100만 달러를 받았다. 2년 뒤 당대 유명한 스타였던 메리 픽퍼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 W. 그리피스 감독과 함께 유나이티드아티스츠영화사를 설립해 각각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영화를 제작하여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퍼스트내셔널사와의 계약이 〈순례자 The Pilgrim〉(1923)를 끝으로 만료된 뒤 그는 1966년 유니버설영화사 작품인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A Countess from Hong Kong〉을 만들기까지 오직 자신의 영화사 작품을 제작했다.
채플린의 화려한 성공은 한편으로는 스타 시스템의 도입에 따른 것이다. 스타 시스템은 제목이나 줄거리보다는 인기있는 연기자를 간판으로 내걸어 흥행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픽퍼드·페어뱅크스 등과 함께 채플린에 대한 대중의 열화 같은 인기는 이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방랑자 The Tramp〉(1915)에서 채플린은 처음으로 애수 띤 분위기를 가미하여 자신이 연기하는 키작은 방랑자를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스타이자 감독이며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대본작가로서 그는 한 비평가가 묘사한 대로 '부자의 눈에 비치는 가난한 사람'의 내면세계를 파헤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채플린 자신은 그의 영화의 주인공을 '작은 친구'라고 불렀는데, 이 인물의 특성은 〈편안한 거리 Easy Street〉(1917)·〈어깨총 Shoulder Arms〉(1918)·〈키드〉·〈황금광시대〉·〈도시의 불빛〉·〈모던 타임스〉, 그리고 그가 제작한 첫 유성영화 〈독재자〉(1940) 등에서 발전되어갔다. 이 인물은 그의 자전적인 영화 〈라임라이트 Limelight〉(1952)에서도 짧기는 했지만 재등장했다.
채플린의 개인적인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4번 결혼했는데 3번은 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밀드레드 해리스(1918), 리타 그레이(1924), 폴레트 고더드(1936) 등 여배우들과의 결혼이었으며, 1943년에는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오나 오닐과 결혼했다. 첫번째와 2번째의 이혼은 1944년 친자확인 소송 때처럼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또한 1942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채플린이 후방근무를 요청한 것이 다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채플린의 정치적 입장은 부분적으로 그가 미국 시민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푸른 수염의 사나이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개작한 그의 영화 〈베르두 씨 Monsieur Verdoux〉(1947)는 특히 미국 재향군인회의 분노를 샀다. 미납세금을 납부하라는 미국정부의 압력과, 그가 국가전복을 기도하는 단체와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정치가, 신문 칼럼니스트들의 맹렬한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채플린은 1952년 미국을 떠났다. 그의 재입국 자격이 미국 법무부에서 문제시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채플린은 1953년 제네바에서 그의 재입국 허가신청을 포기했다. 그뒤 채플린과 그의 가족은 스위스 베베 근처 코르지에쉬르베베에서 거주했다. 1957년 런던에서 〈뉴욕의 왕 A King in New York〉을 제작했는데, 이 영화는 미국 하원의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와 어리석은 텔레비전 광고들, 미국생활의 여러 측면을 비판하는 소리로 가득 찬 희극이었다. 이 영화는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있다는 비난을 또다시 야기시켰으나 채플린 자신은 이를 분명하게 부인했다. 1966년 말론 브랜도와 소피아 로렌을 주연으로 하고 그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은 영화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을 제작했으며 이 영화에 살짝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1972년 미국으로 돌아와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로부터 특별상을 받았다.(A. Knight 글)
[1874년] 한말의 의병장 이강산 [李江山] 출생
1874. 4. 16 전남 함평~1910. 6. 6.
상업에 종사하다가 1909년 7월 하순경 함평군 대야면 복룡리에서 박치일(朴致一)·정인술(鄭寅述)·박장봉(朴章奉)·서성학(徐成學)·양창국(梁昌國) 등과 함께 거의한 뒤 이들과 함께 김태원(金泰元:또는 金準)의 진에 합류하여 의병활동을 했다. 1909년 8월 29일 함평 등지에서 일본과 교전한 후 평소 의병활동을 방해하던 나주헌병분견소 및 구밀파견소의 밀정 이판안(李判安)·김정태(金正泰)·최치도(崔致道)를 주막에서 살해하고 박복남(朴福男)은 산속으로 연행해 살해했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12월 25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폭동 및 모살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항소했으나 1910년 3월 8일 대구공소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순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03년] 시인 김해강 [金海剛] 출생
1903. 4. 16 전북 전주~1987. 5. 21.
초기에는 경향시를 쓰기도 했으나 뒤로 가면서 전통적 정서에 호소하는 시를 썼다. 본명은 대준(大駿).
천도교 전주교구 종리원장의 맏아들로 태어나 천도교에서 세운 창동학교를 거쳐 1916년 서울에서 고모부가 교장으로 있는 보성학교에 입학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혼인했다. 1920년 전주신흥학교 고등과 3학년에 편입, 1922년 졸업하고 서울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운영하던 종학원에 입학했으나 천도교 신구파의 싸움으로 다시 낙향하여 1925년 전북도립사범학교를 마쳤다. 그뒤 진안국민학교·전주사범학교·전주고등학교 등 교단에서 평생을 보냈다. 1962~63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북지부장을 지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달나라〉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192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날의 기원〉이 이응수·박아지와 함께 당선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카프에 가입하면서 1930년대초까지 경향시를 주로 썼고, 그뒤 친구 김남인의 도움으로 전주에서 1935년 〈시건설〉을 펴낼 무렵에는 향수 어린 서정시를 주로 썼다. 전주에서 함께 활동하던 김창술과 첫시집 〈기관차〉를 펴냈으나 일제의 출판금지 조처로 발간하지 못했다. 그뒤 김남인과 함께 〈청색마〉(1940)를 펴냈는데 여기에는 몇 편의 친일시도 섞여 있다. 초기에는 날카로운 현실비판 의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낯선 언어로 그리지 않고 강한 상징성으로 담아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황을 인정하였으나 이에 순응하지 않고 그것을 부숴나가려는 의지를 보여주어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맞서는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시를 썼다. 1933년 이후부터는 대개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통한 전통적 정서를 노래했고, 해방 뒤에는 전주에 머물면서 틈틈이 시를 써서 1968년 정년퇴임기념시집 〈동방서곡〉, 1984년 〈기도하는 마음〉을 펴냈다.
[1904년] 소설가 박화성 [朴花城] 출생
1904. 4. 16 전남 목포~1988. 1. 30.
긴장감있는 문체로 현실을 꿰뚫어보는 글을 썼다. 본명은 경순(景順), 호는 소영(素影). 1915년목포에 있는 정명여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천안공립보통학교·아산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영광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1926년 숙명여고보 신학년제(4년제)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1929년 일본여자대학 영문학부를 수료했다. 1961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1963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1965년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24년 〈학생계〉에 시 〈백합화〉를 발표하고, 이듬해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단편 〈추석전야〉가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뒤 잠시 작품활동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광수의 추천으로 〈하수도공사〉(동광, 1932. 5)·〈백화〉(동아일보, 1932. 6. 8~11. 22) 등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농민이나 노동자의 궁핍한 삶과 지배계급의 기생적인 생산양식의 모순을 파헤치는 데 힘썼다. 그녀는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과 반항의식을 그렸다. 초기문학을 대표하는 〈하수도공사〉는 실업자 구제를 위한 하수도 공사를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다루었는데, 반항의 형식이 소극적·간접적이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홍수전후〉(신가정, 1934. 9)는 홍수 때문에 생긴 농민의 비극을 그리면서 노동자·농민의 조합과 정치적 조직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담한 문체로 현실성에 뿌리를 둔 작품을 썼으며 1932~37년 주목할 만한 작품활동을 했다. 〈고향없는 사람들〉(신동아, 1936. 1)에서는 자연재난과 일제의식민지정책으로 삶의 터를 잃어버리고 떠도는 농민의 생활을 보여주어 가난이나 유랑을 민족적 문제로 바라보았다.
해방 뒤에는 현실비판보다는 남녀의 애정관계에 관심을 갖는 등 대중성을 띤신문연재소설을 많이 썼다. 소설집으로 〈백화〉(1943)·〈홍수전후〉(1948)·〈새벽에 외치다〉(1966)·〈휴화산〉(1977) 등과, 수필집으로 〈추억의 파문〉(1966)·〈순간과 영원 사이〉(1974) 등이 있다. 1958년 목포문화상, 1966년 한국문학상, 196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1961년] 카스트로, 쿠바 사회주의 국가 선언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의 주도하에서 몬카다병영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게릴라전을 포함하는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노선을 가진 ‘7월 26일 운동’이 결성되었다.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로 상륙한 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의 17명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출발한 게릴라운동은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이루게 되었다. 초기에는 토지개혁 등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나,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미국기업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단행하였다. 4월 16일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2004년] 삼성전자 1분기 영업이익 사상최대 달성
삼성전자가 2004년 1분기(1~3월) 영업이익이 4조원을 넘는 사상 최대의 실적을 달성했다. 분기별 영업이익 4조원(34억7000만달러)은 세계 초일류기업인 인텔(24억8000만), IBM(21억6000만), 노키아(14억5000만)보다 월등히 높고, 세계 최대 기업으로 불리는 GE(42억9000만)에 근접한 수치다. 장사를 해서 번 돈(영업이익)으로 놓고 보면, IT제조기업으로는 세계 1위이며 전체 제조업체 중에서도 2~3위권에 해당한다.
삼성전자는 2004년 4월 16일 경영설명회를 열고, “지난 1분기에 매출 14조4136억원, 영업이익 4조89억원, 순이익 3조14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실적은 전분기와 비교해 매출은 11.9%, 영업이익은 52.6%, 순이익은 68.7% 성장한 것으로 창사 이래 최대치다.
[1927년]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 XVI) 출생
베네딕토 16세
[Benedict XVI, 1927.4.16~ ]
본명은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ger)이다. 1927년 4월 16일에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주(州) 마르크트 암 인(Marktl am Inn)에서 태어났다. 프라이징신학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95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57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8년에 프라이징신학대학교 신학교수로 부임하였다. 1966년에 튀빙겐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당시 그의 신학 강의 내용이 보수적이고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학생운동에 가담한 학생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1969년에 레겐스부르크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부총장까지 올랐는데, 학식이 풍부하고 행정면에서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7년 3월에 뮌헨 대주교가 되었고, 그해 6월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1981년에는 로마 가톨릭의 신앙교리성 수장을 맡았다. 2002년에는 추기경단의 수석 추기경이 되었다. 2005년 4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제265대 교황에 선출되어 4월 24일 공식 취임하였다. 교황에 선출되면서 자신의 이름을 베네딕토로 정하였는데, 라틴어로 '축복(blessing)'이라는 뜻이다.
그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며 강경파 교리에 정통하다. 가톨릭 내의 진보성향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으로, 해방신학이나 종교 다원주의, 사제의 결혼이나 여성 사제 서품, 개신교와 합동 미사 등에 반대한다. 마찬가지로 낙태·동성애·콘돔 사용·혼전 성관계·페미니즘·인간복제 등도 반대한다. 이와 같은 보수적인 성향으로 '신(神)의 로트와일러(독일의 맹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가톨릭이 세속주의와 다른 종교에 위협받지 않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도록 바티칸이 정통 원리에 충실하여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신학자와 신자들로부터 가톨릭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가로막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1844년] 프랑스의 소설가, 평론가 프랑스(France, Anatole) 출생
프랑스 [France, Anatole, 1844.4.16~1924.10.12]
본명 티보(Jacques-Anatole-Francois Thibaut). 파리 출생. 고서상(古書商)의 아들로 태어나, 고서와 골동(骨董)에 둘러싸인 그의 어린 시절은 《나의 친구의 서(書)》(1885) 《에르 노지에르》(1899) 《작은 피에르》(1918) 《꽃다운 인생》(1923) 등의 추억소설 속에 그려져 있다. 고답파(高踏派)의 영향이 현저한 시집 《황금시집》(1873) 《고린도의 혼례(婚禮)》(1876)를 내놓은 후, 소설 《실베스트르 보나르의 죄》(1881)로 일약 유명해졌다.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를 온통 뒤흔들었던 ‘드레퓌스사건’에서는 드레퓌스를 옹호하여 그 무죄를 주장하였는데, 이 사건은 작품 《현대사》에서 다루어졌다. 그리스·로마의 고전과 몽테뉴, 볼테르로부터의 영향이 두드러지며, 그의 사상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지적 회의주의(知的懷疑主義)로서, 자신까지를 포함한 인간 전체를 경멸하고, 사물을 보는 특이한 눈, 신랄한 풍자, 아름다운 문체가 그의 작가로서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소설가로서는 자전적 작가, 평론가로서는 인상비평가로서 어느 쪽도 주관적 경향이 강하였다. 1892년에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192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밖에
2004 PDA폰 보조금 지급 허용 개시
2003 중국, 고구려 장천 1호 고분 도굴한 조선족 3명 사형집행
2003 유엔, 북한 인권 규탄안 채택(찬성28ㆍ반대10ㆍ기권14, 한국은 불참)
2003 세계보건기구(WHO), 사스(SARS)유발 원인이 ‘변종 코로나바이러스’라고 발표
2001 이봉주 선수, 제105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
1999 한국-카타르,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8 세계 최고령 할머니 마리 루이스 메이외르 별세
1996 한-미 정상회담서 `한반도 3원칙` 선언
1992 조선일보 광주공장 준공식
1989 김봉준 WBA 미니멈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9 전자통신연구소 초고속 갈륨비소 반도체 개발
1987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창설
1982 중국.소련 국경무역 20년 만에 재개
1982 한국, 안티과(과테말라) 마부다 외상 공동성명 발표
1981 국방부, 북괴 이녹재 하사 귀순 발표
1980 국내 최초의 양수 발전인 청평양수발전소 1.2호기 준공
1975 인도의 대통령(1962~1967) 라다크리슈난 사망
1973 한국미술 2000년전 개막
1972 소설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살
1971 호남 통혁당 재건 간첩단 검거
1970 미·소 간 제1차 SALT(전략무기제한협상) 회담 개최
1966 헤비급 세계 타이틀전-무하마드 알리 승(勝)
1965 한일협정 반대데모로 서울시 대학 휴교
1964 로디지아 독립운동
1963 조흥은행 본점 건물 화재, 전소
1963 라오스 3파 휴전 합의
1959 한국-이탈리아 공관, 대사급으로 승격
1955 미국 대통령 미주기구(FOA) 해체하고 국무성에 국제협력국 신설을 지시
1954 산악인, 탐험가 허영호 출생
1953 문화인 등록령 공포
1953 오세창 사망
1952 3.1운동 33인중 한 명인 나인협 사망
1949 미국 고생물학자 쿠슈먼 사망
1948 서구 16개국,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조약 조인
1934 일본 나가사키 화재
1930 동아일보 제3차 무기정간
1898 조·청 국경분쟁에 “백두산 정계비 조사” 지시
1877 러시아-루마니아 동맹조약 체결
1844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 출생
1786 영국 항해가 탐험가 존 프랭클린 출생
1446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사망
69 제8대 로마제국 황제 비텔리우스 즉위
69 제7대 로마제국 황제 오토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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