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좌) 작품 ‘비상’ 작업에 열중인 구필화가 박정씨. / (우) 작품 ‘6월의 열정’을 마무리하는 구필화가 임형재씨. photo 한국구족화가협회 |
경기도 일산에 사는 구필화가 임형재(48)씨의 입엔 오늘도 붓이 물려 있다. 임씨는 현재 주문받은
일출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그가 붓끝을 움직일 때마다 나뭇결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세밀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1987년 대학교 2학년이던 그는 학과 엠티에 참여했다가 불의의 사고로 하루아침에 장애를 얻었다. 전신마비가
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건 아버지가 상 위에 올려놓은 명태 한 마리였다. 재미 삼아 그려본 도화지 속 명태가 임씨에게 잊고 지냈던 화가의 꿈을
상기시켰다. 그때부터 붓을 잡기 시작한 그는 인고의 노력 끝에 1998년 세계구족화가협회(AMFPA)에 가입,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꽃과 나무를 심었고 이는 수목원 ‘그림이 있는 정원’으로 자라났다.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끊임없이 화폭으로
옮긴 임씨는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1999년과 2000년 두 번이나 입선했다.
세계구족화가협회 한국지부 사무실은 서울
방배동에 있다. 세계구족화가협회?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 지난 3월 7일, 한국지부 사무실을 찾아가 배미선 대표를 만났다.
세계구족화가협회 한국지부 사무실답게 벽면에는 구족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 하나하나에 모두 임씨와 같은 사연을 담고 있다고
했다.
그중 소녀와 소년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의 양털구름을 그린 아기자기한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뇌성마비로 팔을
쓰지 못하는 구필화가 허환(39)씨의 작품이다. 배 대표는 구족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실제 그들을 만나지 않아도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허환씨는 솜털 같고 앙증맞은 그림대로 실제 성격 또한 너무 귀여우신 분이세요. 이런 걸 보면 꼭 언어가 아니라 비언어인 그림으로도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죠.”
세계구족화가협회는 전 세계 구족화가들의 이런 예술적 소통 활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그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국제적 단체다. 특히 설립자 에릭 스테그만은 독일인으로 그 자신 역시 소아마비로 팔을 쓰지
못하던 구족화가였다. 그는 장애로 인해 화가로서의 재능을 방치하거나 작품 판매 경로를 찾지 못해 실력이 있음에도 생계를 꾸려나가지 못하는
구족화가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장애인들을 적선이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 보는 인식이
강했다.
스테그만은 1956년 중부유럽 구족화가들을 모아 구족화가협회를 세웠다. 본부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리히텐슈타인공화국에 두었다. 설립회원 각자의 주거지로부터 가까웠고 국제적 통용화폐인 스위스프랑의 이점을 누릴 수 있는 동시에 호혜적인
세율과 투자환경이 매력적이었다. 이를 토대로 현재는 전 세계 70여개국, 700여명의 재능 있는 구족화가들이 활동하는 국제적 모임으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는 1985년 구필화가 김준호씨가 처음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활발한 작품
활동에 감명받은 구족화가들이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고 그 수가 7~8명으로 늘어나면서 1992년 1월 한국지부가 설립됐다. 이후 재능 있는
구족화가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현재 구필화가 14명과 족필화가 8명, 도합 22명이 국내에서 활동 중이다. 지난 3월 1일에도 신입회원
임경식씨가 가입했으며 활발한 인재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그림을 전공한 이들조차 미대 졸업 후 그림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배 대표는 유독 구족화가들이 작품 판매에 애를 먹는 이유는 “화가의 인지도에 따라 미술 작품의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림은 수학처럼 10호, 20호 사이즈에 딱 맞춰 가격이 정해지지 않는다. 화가의 전시회 개최 횟수, 유명 대회 입선
여부, 대학과 전공 등 복합적인 활동배경을 여러 방면으로 고려해 그림 가격을 결정한다. 그러나 구족화가 대다수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장애를 얻은
후 비로소 그림에 대한 재능에 눈뜨거나 독학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배 대표의 말이다. “장애인이라는 시선 때문에 그들의 그림을 구매하는 걸
적선처럼 여기는 것도 큰 문제예요. 장애 극복 스토리가 오히려 편견이 돼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훌륭한 작품마저 ‘장애를 감안하면 꽤
준수하다’는 식으로 폄하하기 쉽죠.”
협회원은 70개국
화가들
구족화가협회는 다양한 프로모션 활동과 장학제도를 운영한다. 배 대표에 따르면 한국지부는 일 년에 네 번
구족화가들의 원작(原作)을 받아 리히텐슈타인 세계구족화가협회 본부로 보낸다. 그림 저작권은 모두 본부가 보유하며 이를 활용한 상품판매 수익을
협회원들에게 장학금 형식으로 매달 나누어 준다. 보통 심사를 거쳐 카드나 달력 등 제작에 적합한 작품을 본부가 선별해 각국 협회로 복사본을
보내면 현지 실정에 맞게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 작품을 활용한 상품이 해외에서 팔려 한국 작가들의 이름을 함께 알리기도
한다. 70여개국 모두가 본부로 어마어마한 양의 그림을 보내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없어 보통 심사가 끝나면 원작은 주인에게
돌려준다.
각국 지부별로 판매실적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이와 상관없이 각 지역별로 장학금 금액에 차이는 없다. 다만 회원
등급에 따라선 차등을 둔다. 배 대표는 회사원들의 월급을 밝히는 것이나 다름없어 장학금 액수를 밝히긴 어렵지만 “학생회원의 경우 그림 도구를 살
수 있고, 준회원과 정회원은 풍족하진 못해도 생계와 최소한의 작품활동을 충분히 이어갈 수 있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다양한 제품이 한국구족화가협회 홈페이지에서 판매 중인데 주력 상품은 설립 초기부터 만들어 온 우편카드와
달력이다. 그러나 배 대표는 “최근 손편지 사용이 줄면서 예전에 비해 수익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카드판매 수익금이 줄어들수록
장학금을 지원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들고, 그만큼 신입 구족화가들을 발굴하기가 어려워진다. “10만~20만원 하는 게 아닌 비싼 그림을
사라고까지 말씀 안 드려요. 대신 손편지, 손글씨가 많이 쓰였으면 좋겠어요. 4월 20일 장애인의 날, 군인의 날 등 지자체나 교육부 차원에서
일 년에 한두 번 편지쓰기 운동을 해도 좋을 텐데….”
구족화가협회는 별도의 가입비나 연회비가 없지만 모든 회원은 병이나
특별한 사유를 제외하곤 1년에 최소 네 작품 이상을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가입 시 학생회원으로 시작해 실력에 따라 단계를
밟아 준회원, 정회원으로 승급한다. 학생회원은 매 3년마다 평가를 하고 준회원 역시 그 안에서도 레벨이 나눠져 매년 평가를 해 다음 단계로
올라갈지 여부를 결정한다. 특히 정회원은 상당한 실력을 갖추어야만 그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격유지를 위한 별도의 평가체계가 없지만
표절행위는 엄격히 제재한다. 배 대표는 “전 세계적으로 정회원 수가 많지 않은데 우리나라는 현재 총 7명으로 설립 기간에 비하면 많은
편이다”라고 말했다.
가입 희망자 대부분은 협회 홈페이지나 TV방송 등 언론보도를 보고 찾아온다. 그러나 배 대표에
따르면 예전엔 구족작가들의 작품, 전시회를 보고 ‘아, 나도 저렇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알음알음 연락을 해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고 싶다고 모든 사람이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협회로 가입 희망 연락이 오면 우선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그려 놓은 그림이 몇 점 있다면 협회로 보내거나 전문화가들로 구성된 심사단이 직접 집으로 방문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한다. 이후 병원
장애진단서와 직접 실기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동영상을 첨부한 가입 서류를 리히텐슈타인 본부로 보낸다. 깐깐한 심사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가입
승인이 결정난다.
작업하느라 입안 헐고
치아 나빠져
배 대표는 가입절차가 까다로운 이유가 “구족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게 의욕만으로 쉽게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글씨를 쓰는 것도 힘든 이들에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일반인들에게도 미술은 무조건
시간 투자를 많이 한다고 해서 실력까지 비례해 늘어나는 분야가 아니다. 그래서 배 대표는 장학금 혜택을 보고 협회를 찾았다가 생각보다 뚝딱
작품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 실망해 금방 포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배 대표는 “처음부터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 대표적 예가 선 하나 제대로 못 그리던 상태에서
협회를 찾아왔던 이윤정 회원이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던 20대 중반에 방송을 통해 구족화가 활동을 접한 그녀는 협회로 수십 통의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의 열정에 감동받은 배 대표와 협회 사람들이 노원구 상계동에 있던 그녀의 집을 찾았다. 그림은 한 점도 완성된 것이 없었고 실력도
부족했지만 협회는 그녀에게 그림을 배울 수 있는 선생님을 소개해 주었다. 이후 끊임없는 노력 끝에 그녀는 결국 학생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구족화가들의 작업은 옆에서 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목 이하로 전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 도우미 없인 작업이 힘들다. 족필화가는 대개 바닥에 놓고 그림을 그린다. 구필화가는 휠체어 높낮이를 조절하거나 키에 맞는 이젤을 주문해
사용한다. 장시간 불편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직업병도 많다. 족필화가는 드물게 양발잡이도 있지만 대개 한쪽 발로만 그리다 보니 만성
허리디스크에 시달린다. 구필화가 역시 허리디스크, 목디스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전시가 잡히면 하루 8시간, 10시간씩 입으로 붓을 물고
있어야 한다. 입안이 다 헐기도 하고 치아가 나빠진다.
장르 선택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화는 조금만 실수해도 먹이
번지고 농도가 달라져버리는 탓에 화선지를 여러 번 갈아야만 한다. 유화는 그나마 덧칠해 실수를 만회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입에 붓을 물고 있어
유화물감 기름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다. 단시간 특징을 잡아 그려야만 하는 크로키는 길게는 한두 달에 걸쳐 작품을 완성하는 구족작가들에겐
특히나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가들이 의욕적으로 끝까지 붓을 놓지 않고 다양한 작품활동에 도전한다. 배 대표는 “여러 작가가 모여서
100호에 가까운 대작을 만들기도 하고 휠체어 제약을 극복하려고 도르래를 설치하거나 아예 이젤을 회전시켜 놓고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크로키는 어렵긴 하지만 결과물이 바로 나온다고 좋아하는 작가도 많아 누드크로키 동호회도 따로 결성해 활동 중이라고
한다.
덕분에 뛰어난 성과를 거두는 구족화가들이 속속들이 배출되고 있다. 족필화가 오순이(50)씨는 구족화가 최초로
단국대 동양화과에서 전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의 장애극복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구필화가 김영수(61)씨는 서양화
‘시티스토리’로 2015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해 주변 구족화가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고려대 건축학과를 졸업해 촉망받는
건축가로 활동하던 20대 젊은 나이에 근육이 약화되는 근이영양증을 얻었다. 계속 진행되는 병이라 몸의 힘이 떨어지고 있지만 60대가 된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영수씨는 “협회 가입 덕분에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장애인 가정은 자칫 가족 내 마찰이 많이 생길
수 있는데 복지부와 지자체에서 지원해주는 도우미와 협회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리는 동안 가족들도 쉴 수 있어 절대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2013년 세계구족화가협회 대표 전시작으로 뽑힌 ‘시선’의 박정(42) 화가 또한 2005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입선한 실력파다. 그는 고교 재학 시절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친구와 놀러간 수영장에서 불의의 입수사고로 경추가 골절돼 전신이 마비됐다.
이후 그의 일상은 맞벌이 부모님과 직장인 누나가 출근 후 텅 빈 집에 홀로 누워 있는 일뿐이었다. 그런 그가 구족화가로 활동하면서 달라졌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협회 작가들과 교류하며 힘을 얻었다. 고교 중퇴 후 손에서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해 대구대학교에 입학했다. 사회복지사인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다. “미대를 나오지 못했으면 지금 같은 성과를 내기 힘들었어요. 물감, 액자 가격 등이 만만치 않아 한 번 작업할 때마다
가족들한테 눈치가 보였는데 협회 가입 후 그런 걱정도 덜었고요.”
꼭 이런 성과만이 구족화가들이 붓을 잡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박정씨는 “몸은 묶여 있지만 캔버스는 나만의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그림 그릴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면서 “안 해본
사람은 모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갤러리에 내 그림이 걸릴 수 있고 그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설레고,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항상 붓을 잡을 때마다 가족의 고마움을 느낀다. “부모님과 누나는 나의 손발이 되어주었고 아내는 미대 재학 시절
강의실마다 함께 다니며 모든 수업을 도와주었죠.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어요.” 구필화가 임형재씨 역시 “구족화가들의 그림에는
사실상 가족들의 눈물과 웃음이 함께 배어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있지만 예전에는 구족화가들의 그림 소재를 위해 가족들이 산으로
들로 나가 그들의 눈과 귀를 대신해 다양한 사진들을 찍어다 주어야만 했다. 임씨는 “가족은 항상 가장 큰 원동력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가족이
있는 풍경’이란 작품 속 나무들도 가족을 의인화한 것으로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
장애인 그림이
아닌 작품으로 평가해야
배 대표에 따르면 뇌성마비 등 선천적 장애를 가진 회원들은 국내 협회 전체의 20~30%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성장 후 교통사고, 추락 등 후천적 장애를 얻은 경우다. 배 대표는 “구족화가들도 일반인과 똑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구족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생계를 떠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을
의미한다고 했다. “전시회와 강연 등 일단 외출할 일이 생기고 밖에 나가면 내 역할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기쁨이죠. 일반 취준생들이
취업에 성공해 회사에 나가고 일을 하면서 자기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들에게는 그림이 곧 인생 그
자체입니다.”
배 대표는 구족화가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딱히 구분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구족화가들의 작품을 장애인이 그린 그림이 아닌 하나의 온전한 예술작품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이유에서다. “작품에는 화가들마다 살아온
환경, 삶이 온전히 내포되기 마련이에요. 구족화가들의 경우 보통사람들이 볼 수 없는 삶이 담기기도 하고 특히 추상화는 설명이 곁들여졌을 때 더
큰 감동을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구분이 오히려 편견일 수도 있어요. 입으로 그리나 발로 그리나 훌륭한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은
그대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