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일지
2023년 4월 6일 목요일 아침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이다. 고난주간에 나는 저녁 시간을 기도와 말씀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저녁 7시부터 12시까지 예배당과 사무실에서 기도와 성경연구를 하기로 했다. 알고 보니 권사님들도 낮에 기도를 하러 오셨고, 이장로님 부부는 오후에 기도를 하러 오셨단다.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다.
이번 주간에 기도하면서 깨달은 점을 정리한다. 우선 4월 4일 화요일 밤에 깨달은 내용이다:
1.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어떤 고생을 하셨는지 기도 중에 생각해 보았다.
2. 아무리 결심을 했다고 하지만 너무 우악스러운 손길에 자신을 맡기셨다. 군인들은 사정을 보아주지 않고 예수님을 막 다루었다. 뺨을 치고 손을 잡아 늘여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으로 꿈틀거리고 신음을 터트리신다.
3. 한 마리의 짐승처럼 나무에 달려 있는 그 모습은 결코 우아한 그림이 아니다. 창백한 얼굴, 일그러진 표정, 벗기고 생채기 난 몸, 그리고 조롱의 대상으로 나무에 달려 계셨다.
4.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을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을 베푸시고 가르치신 사람들에게 미리 예고하셨고 그들에게 보여주시려고 나무에 달리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하시는지를 잘 보라고 몸소 보여주신 것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5. 그 모습을 본 사도들, 마리아들, 삭개오와 수많은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지불해야 할 대가가 무엇임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시 회복하시고 높이시는지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서 완주할 수있었을 것이다.
6.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한 알의 밀알에 비유하셨다. 땅에 떨어져 자신을 희생함으로 많은 밀알을 결실하는 그 이야기는 바로 이 상황을 보여준다. 자신들이 예수님의 열매임을 깨달은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한 알의 밀이 되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 신앙이 전수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 만민을 위한 희생이었다.
7. 그 희생이 결실하는 과정은 반드시 한 세대 안에서 그리고 한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8. 고난 주간에 예수님을 생각한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이 왜 그렇게 고통을 겪으셨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을 위해 그 고통을 당하셨음을 깨닫는다. 자신과 같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모든 것을 주는데 너는 무엇 하느냐?’는 질문은 의미를 가진다.
9.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추하고 수치스럽고 너무 가엾다. 그런데 그 모습은 하나님께는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예수님도 자신이 들리는 것이 영광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승천과 승귀는 십자가에 달리심을 통해서만 되는 일이었다.
4월 5일 수요일 밤에 깨달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강단에 서서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회중석에 서서 기도를 드릴 때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는 회중을 바라보는 곳에 있다. 나는 한 공동체의 지도자라는 깨우침이 드는 곳이다.
2. 목회자는 성도들을 부모형제처럼 가까이하고 섬기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한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지났다. 모세가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 험한 길을 무사히 지날 수 없었을 것이다.
3. 하나님은 자신의 종 모세에게 하나님처럼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결과 모세는 파라오 앞에서 하나님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그의 형 아론 앞에서도 하나님처럼 행동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한다는 의미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4. 공동체의 지도자는 큰 호령(號令)으로 공동체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그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공동체의 끝까지 전달된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마침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의 선배 목사님 한 분은 사무실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겨 놓으셨다: ‘목회자는 지도자다!’ 나는 이제 그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5. 하나님 앞에서 좀더 머무르고 싶다.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손길로 다듬어지도록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기다리고 싶다. 그런 영적인 경험은 눈을 뜨고 연구하는 시간에 얻는 깨달음과는 다르다.
6. 문득 중학생 때 교정에서 전교생 앞에서 구령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 구령은 지도자의 목소리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들려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