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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3주일)
하나님의 뜻 행하기-“사랑의 꿈틀거림”
창3:8~13; 고후4:13~5:1; 막3:20~35
지난 주로 이번 봄 10주간의 오전, 오후 집단상담과정이 끝이 났습니다. 오전 오후 합해서, 이번 과정은 우리 교우들이 가장 많이 참여한 과정 같습니다. 교회에서 집단상담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번에 특별히 여러 교우들과 함께 하여 반가웠습니다. 10주간 함께 울고 웃으며, 자신을 정성스레, 정직하게 만나려고 애썼고, 또 함께하는 친구들을 정성스레, 정직하게 만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제 안에 있는, 보고 싶지 않은 두려움과 긴장, 불안을 만났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사랑”도 만났습니다.
우리가 집단상담을 하는 이유는, 감정이 중요하니 감정대로 살라거나 혹은 싸움닭이 되자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혹은 세상에 자신을 열어내 보자, 소위 마음을 넓혀보자는데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의 강화에 있지 않고 “나”의 확장에 있습니다. 작은 나라는 성벽에 머물러서 그것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크고 넓은 나, 단단한 성벽이 아니라 낮은 울타리와 열고 닫는 문이 있어서 좀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나를 열고 닫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욕구 수준, 내 상태를 알기 위해(정확히 말하면 접촉하기 위해), 또 너의 욕구 수준, 너의 상태와 제대로 접촉하기 위해, 우리는 나의 “감정”과 너의 “감정”을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일어나는 감정은 나와 너의 상태를 그래도 정확히 알려주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로는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하고 정당화해도, 말로는 이렇게 저렇게 자신을 잘 설명해도, 감정만큼 자신을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특히 관계 속에서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감정만이 중요하다, 혹은 감정에 빠지거나 자기애를 강화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나와 너를 좀 더 정직하게 만나자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넘어서자, 초연해지자는 것입니다. 감정에 끌려다니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억압된 감정”이나 “무시된 감정”으로는 우리가 초연해질 수 없고, 오히려 거기에 매어버리고 고착되어 버리기 때문에, 우선 감정을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일이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닙니다. 당연히, 집단상담 몇 번으로 우리가 감정에 매이지 않게 되고, 우리의 의식구조가 바뀌어서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람으로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 감정을 만나게 되면 소위 부작용이 더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해방감은 잠시, 마음은 더 부대낄 수 있고, 애써 가라앉혀 놓았던 구정물이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옆 사람이 볼 때도, 평소 안하던 짓을 하고, 쓸데없는 평지풍파를 일으켜서 불편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는 조금 수준은 다른 얘기이겠지만, 오늘 예수님이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가까이 있던 가족들에게 들었던 오해도 바로 이런 것이었겠지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관습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았을 때, 당시 사회가 인정하는 그 수준에서 살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기는커녕 미쳤다고 진단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미쳤다고 진단해 버리면 편하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은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무시나 제거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사실 인간 역사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로 일어났지요. 많은 경우 마녀사냥이 이런 방식의 발로였겠지요. 우리도 그렇지요? 관계가 불편해지면, 내가 화가 났거나 서운하다는 느낌보다 상대에 대한 판단들이 어마어마하게 올라오지요.
예, 다시 돌아가서 어쨌든 우리가 가까이 있는 이들의 이런 거부감, 역풍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사랑” 때문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의 생명을, 삶을 끌고가는 꿈틀거리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안에 꿈틀거리는 이 “사랑”은 우리를 잘 살게 하는 생명의 힘입니다. 생존은 잘 살기 위한 첫걸음이니, 이 사랑은 우선 어떻게든 생존하려는 힘일 수 있겠지요. 그러면서 이 “꿈틀거리는 사랑”은 우리에게 제대로, 진정성 있게, 특별하고도 고유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역동이 되어 우리 가운데 늘 존재합니다. 그래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싯귀, “우리는 사랑의 빛줄기를 지니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잠시 세상에 머물러 있나니”라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 집단상담과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뭔가 새로운 용기를 내보려는 마음, 희망을 갖고 싶은 마음, 새로워지려는 마음에는 이 “사랑”의 꿈틀거림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보자면, 저는 이것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활동이라고 믿습니다. 이 꿈틀거림을 처음 느꼈을 때 우리 안에는 어떤 희망과 더불어 열정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도원에서는 이것을 “수련자의 열정”(fervor of Novitium)이라고 부릅니다. 회심한 초심자에게 나타나는 열심히라는 것이지요. 이 열정은 뭔가에 열심을 내려는 마음이지만, 아직 그 열심은 방향이 제대로 잡히지 않고 소위 정화되지 않아서 이리 튀고 저리 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이어서 쉽게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꿈틀거림에는 그 반대의 힘도 작용합니다. 내 안에 꿈틀대던 사랑이 힘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뭔가를 조금 알고 나서 찾아오는 권태일 수도 있지요. 수도원에서는 이것을 “아케디아”라고 부릅니다. “정오의 유혹” 혹은 “정오의 악마”라고도 하지요. 아케디아는 본디 게으름, 나태라는 뜻인데, 오히려 “넌덜머리”, “진절머리”라고 하는 것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토마스 키팅 신부님은 이것을 “밖으로는 얻어터지고 안으로는 진절머리 나는 것”이라고도 했고, “질척한 거름을 씹는 맛”이이라고도 했습니다. 이것은 수도원에서 수련자들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넓히려는 사람, 자신을 정직하게 만나보려는 사람, 자신을 확장하려는 사람, 자신의 영적 여정을 본격적으로 걸어가려는 사람에게는 거의 따라오는 단계입니다.
정말 아무런 좌절감이나 실패도 없이 오롯이 성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장하는 길, 영적 여정의 길은 직선이 아니라 한참 돌아가고 어떤 때는 뒤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곡선입니다. 있던 자리를 계속 맴도는 나선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꿈틀거림”은 죽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사랑의 꿈틀거림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계속 추동할 것입니다. 어떨 때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통해서, 어떤 때는 혼란스러운 카오스 상태를 경험하게 하면서, 우리를 우리의 중심,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케디아는 정오의 악마라기 보다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시려는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은 사랑의 꿈틀거림을 “질그릇 속에 간직된 보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속에 보물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보물은 우리 안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데, 우리가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고, 꺼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금방 깨어질 것 같은 질그릇이지만, “꿈틀거리는 사랑”으로 인해 수많은 시련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만드시는 진정한 자신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오늘 그 다음에 나오는,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내가 아는 나를 고집스레 붙잡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에, 질그릇에 목숨을 걸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영을 가지고, 예수를 살리신 분이 우리도 살리시고 세워주신다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온전히 알아가며 우리의 마음을 넓히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꿈틀거리는 사랑이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이고 경험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가족들에게 오해를 받습니다.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려 했고, 율법학자들은 좀더 세련되게 예수를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진단을 했습니다. 바알세불은 직역하면, “주인의 집”이라는 뜻으로,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바알세불, 즉 “주인의 집”은 엄청난 자기중심성, 자기구심력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알세불은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유지하는 일에 올인하면서 주변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있는 이 구심력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주인의 집” 즉 바알세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활동과 능력은 오히려 자기를 넓히는 일이었고, 사랑을 확장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거대한 사랑의 꿈틀거림이었고, 그 사랑의 힘은 사람을 살리고 성장시키는 힘이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건강하게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극단적일 될 때, 지나친 긴장과 두려움이 동원됩니다. 이 두려움을 더욱 부추키면서 주변에 두려움과 불안을 퍼뜨리는 힘이 우리 안에도,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너 자신을 지킬 것은 너 자신뿐이라고 말합니다. 너의 인생의 궁극적인 주인은 너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규율과 통제로라도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규율과 통제는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꿈틀거림과는 반대의 힘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두려움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두려움을 추동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추동하는 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하시며,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죄에 매인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목이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저는 자신 안에 꿈틀거리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에는 모든 것이 다 있지만, 사랑이 없습니다. 지옥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또 한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와 예수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무리 속에 있던 예수에게 사람들이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의 가족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는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로 냉정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러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씀합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무슨 말씀일까요? 나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니 가족 관계에 매일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제가 볼 때는 사랑의 확장, 사랑이 넓어지는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주인의 집”이 되어 모든 주변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구심력이 아니라, 사랑의 꿈틀거림이 주변으로 더욱 퍼져 나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오늘 바울 식으로 말하면,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꿈틀거림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종종 알아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궁금해 합니다. 결국은 다 자기 뜻대로 행하면서 말이지요! 또는 어떤 규율이나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자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자신 안에 꿈틀거리는 사랑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이 미세한 꿈틀거림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틀거림이 우리를 이끄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14세기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이것을 “a meek stirring of love”이라고 불렀습니다. “온유한/부드러운 사랑의 꿈틀거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수많은 욕구와 환상도 있지만, 부드러운 사랑의 꿈틀거림이라는 “지향”이 있습니다. 그 지향은 아주 섬세하고 정묘해서 금방 알아차릴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줍은 야생동물처럼” 우리 앞에 금방 모습을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또 나타났다가도 금방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일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사랑의 꿈틀거림은 우리를 있게 한 바탕이며 원천입니다.
우리가 어떤 순간 부드러운 생명의 신비를 본 듯할 때, 우리가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주변은 온통 어둡지만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희미한 등불 하나가 꺼지지 않고 타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온갖 생각들이 들락거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고요하게 지금 여기에 머물 때, 그때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사랑을 알아차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