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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urse in Miracle 3:51 – 3:60
VII. The Loss of Certainty
VII. 확실성의 상실
51 We said before that the abilities which man possesses are only shadows of his real strengths and that the intrusion of the ability to perceive, which is inherently judgmental, was introduced only after the separation. No one has been sure of anything since. You will also remember, however, that I made it clear that the resurrection was the means for the return to knowledge, which was accomplished by the union of my will with the Father's. We can now make a distinction which will greatly facilitate clarity in our subsequent statements.
51 우리는 앞에서 사람이 소유한 능력은 단지 그의 진정한 강점의 그림자일 뿐이며, 본질적으로 판단적인 지각 능력은 분리 이후에야 도입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는, 그 누구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는 또한 내가 부활은 앎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단이었고, 이것은 나의 뜻을 아버지의 뜻과 연합시킴으로써 성취되었다고 말한 것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에 나올 내용을 명확히 하는 데서 큰 도움이 될 구분을 하나 할 수 있다.
52 Since the separation, the words "create" and "make" have been greatly confused. When you make something, you make it out of a sense of lack or need. Anything that is made is made for a specific purpose and has no true generalizability. When you make something to fill a perceived lack, which is obviously why you would want to make anything, you are tacitly implying that you believe in separation. Knowing, as we have frequently observed, does not lead to doing at all.
52 분리 이후로 “창조하다”와 “만들다”라는 말이 굉장히 혼동되었다. 무언가를 만들 때 너는 어떤 결핍감이나 필요의 느낌 때문에 만든다. 네가 무언가를 만들 때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므로, 그것은 진정한 일반화 가능성이 없다. 지각된 결핍을 채우는 것은 분명 네가 무엇이든 만들고 싶어 하는 이유이며, 그럴 때 너는 분리를 믿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살펴본 대로, 앎은 결코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53 The confusion between your own creation and what you create is so profound that it has become literally impossible for you to know anything. Knowledge is always stable, and it is quite evident that human beings are not. Nevertheless, they are perfectly stable as God created them. In this sense, when their behavior is unstable they are disagreeing with God's idea of the creation. Man can do this if he chooses, but he would hardly want to do it if he were in his right mind. The problem that bothers you most is the fundamental question which man continually asks of himself, but which cannot properly be directed to himself at all. He keeps asking himself what he is. This implies that the answer is not only one which he knows but is also one which is up to him to supply.
53 너는 네가 창조된 것과 네가 창조하는 것을 아주 심하게 혼동하고 있다. 따라서 네가 무엇이든 안다는 것 자체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앎은 언제나 안정적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꽤나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정녕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완벽하게 안정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안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바른 마음 상태에 있다면 좀처럼 그렇게 원할 리가 없다. 너를 가장 성가시게 하는 문제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문하지만 사실 자신에게 묻는 것이 전혀 적절치 않은 근본적인 질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자문한다. 이것은 곧 그 답이 사람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제공할 수도 있는 답임을 암시한다.
54 Man cannot perceive himself correctly. He has no image. The word "image" is always perception-related and not a product of knowing. Images are symbolic and stand for something else. The current emphasis on "changing your image" merely recognizes the power of perception, but it also implies that there is nothing to know. Knowing is not open to interpretation. It is possible to "interpret" meaning, but this is always open to error because it refers to the perception of meaning. Such wholly needless complexities are the result of man's attempt to regard himself as both separated and unseparated at the same time. It is impossible to undertake a confusion as fundamental as this without engaging in further confusion.
54 사람은 자신을 바르게 지각할 수 없다. 그는 어떤 이미지도 갖고 있지 않다. “이미지”라는 말은 언제나 지각과 관련된 것이지, 앎의 산물이 아니다. 이미지는 상징적이며, 다른 무언가를 나타낸다. 요즘 “당신의 이미지를 바꾸세요.”라고 강조하는 것은 단지 지각의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거기에는 알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암시한다. 앎은 해석의 여지가 없다.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것은 의미를 지각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언제나 잘못될 여지가 있다. 이렇게 전혀 불필요한 복잡성은, 사람이 자신을 동시에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려는 시도의 결과다. 이와 같이 근본적인 혼동을 하면서 더 심한 혼동에 빠져 들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55 Methodologically, man's mind has been very creative but, as always occurs when method and content are separated, it has not been utilized for anything but an attempt to escape a fundamental and entirely inescapable impasse. This kind of thinking cannot result in a creative outcome, although it has resulted in considerable ingenuity. It is noteworthy, however, that this ingenuity has almost totally divorced him from knowledge. Knowledge does not require ingenuity. When we say "the truth shall set you free," we mean that all this kind of thinking is a waste of time, but that you are free of the need to engage in it if you are willing to let it go.
55 방법론적으로 말해 사람의 마음은 아주 창조적이었지만, 방법과 내용이 분리되면 늘 그렇듯이, 근본적이고 전혀 벗어날 수 없는 궁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만 사용되었다. 이런 식의 생각하기는 비록 상당한 창의성을 낳기는 했지만, 창조적인 결과를 낳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창의성이 사람을 앎과 거의 완전히 분리시켰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앎은 창의성이 필요 없다.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은, 이런 식의 생각이 시간 낭비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내려놓을 용의가 있다면 그런 생각에 관련될 필요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56 Prayer is a way of asking for something. Prayer is the medium of miracles, but the only meaningful prayer is for forgiveness because those who have been forgiven have everything. Once forgiveness has been accepted, prayer in the usual sense becomes utterly meaningless. Essentially, a prayer for forgiveness is nothing more than a request that we may be able to recognize something we already have. In electing to perceive instead of to know, man placed himself in a position where he could resemble his Father only by miraculously perceiving. He has lost the knowledge that he himself is a miracle. Miraculous creation was his Source and also his real function.
56 기도는 무언가를 요청하기 위한 방법이다. 기도는 기적의 매개이지만, 유일하게 의미 있는 기도는 용서를 청하는 기도다. 왜냐하면, 용서받은 자는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일단 용서를 받아들이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기도는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본질적으로 용서를 청하는 기도란 단지, 우리가 이미 가진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사람은 아는 대신에 지각하기로 선택함으로써, 오로지 기적적인 지각하기를 통해서만 아버지를 닮을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바로 기적이라는 앎을 상실했다. 기적적인 창조가 사람의 근원이었으며, 그의 진정한 기능이기도 했다.
57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and likeness" is correct in meaning, but the words are open to considerable misinterpretation. This is avoided, however, if "image" is understood to mean "thought" and "likeness" is taken as "of a like quality." God did create the Soul in His own Thought and of a quality like to His own. There is nothing else. Perception, on the other hand, is impossible without a belief in "more" and "less." Perception at every level involves selectivity and is incapable of organization without it. In all types of perception, there is a continual process of accepting and rejecting or organizing and reorganizing, of shifting and changing focus. Evaluation is an essential part of perception because judgments must be made for selection.
57 "하느님은 사람을 당신의 이미지대로, 당신과 닮게 창조하셨다.”라는 말은, 의미는 정확하지만 말 자체는 그릇된 해석의 여지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미지”는 “생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닮게”는 “같은 본성을 갖게”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각대로, 당신과 같은 본성을 가진 영혼을 창조하셨다. 그밖에는 정녕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더 많이”, 혹은 “더 적게”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없다면 지각은 불가능하다. 지각은 어떤 수준에서든 선택을 수반하며, 이것 없이는 조직화할 수 없다. 모든 유형의 지각에는 수용과 거부, 조직화와 재조직화, 초점의 전환과 변화라는 끊임없는 과정이 수반된다. 선택을 내리려면 반드시 판단해야 하므로, 평가는 지각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58 What happens to perceptions if there are no judgments and there is nothing but perfect equality? Perception becomes impossible. Truth can only be known. All of it is equally true, and knowing any part of it is to know all of it. Only perception involves partial awareness. Knowledge transcends all the laws which govern perception because partial knowledge is impossible. It is all one and has no separate parts. You who are really one with it need but know yourself, and your knowledge is complete. To know God's miracle is to know Him.
58 판단이 전혀 없고 단지 완벽한 동등성만 있다면 지각은 어떻게 될까? 지각은 불가능해진다. 진리는 오로지 알려질 수만 있을 뿐이다. 진리는 전부 똑같이 참이며, 진리의 어떤 부분이라도 아는 것은 곧 진리의 전부를 아는 것이다. 오로지 지각에만 부분적인 인식이 수반된다. 앎은 지각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을 초월한다. 부분적인 앎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앎은 전부 하나이며, 분리된 부분이 전혀 없다. 너는 실제로 앎과 하나이며, 따라서 네가 단지 너 자신을 알기만 하면 너의 앎은 완전해진다. 하느님의 기적을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59 Forgiveness is the healing of the perception of separation. Correct perception of each other is necessary because minds have willed to see themselves as separate. Each Soul knows God completely. That is the miraculous power of the Soul. The fact that each one has this power completely is a fact that is entirely alien to human thinking, in which if anyone has everything, there is nothing left. God's miracles are as total as His Thoughts because they are His Thoughts.
59 용서는 분리의 지각을 치유하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바른 지각이 필요한 이유는, 마음들이 자신을 분리되었다고 보기를 뜻했기 때문이다. 각 영혼은 하느님을 완전하게 안다. 이것이 정녕 영혼의 기적적인 권능이다. 각 영혼이 이런 권능을 완전하게 가졌다는 사실은, 만약 누군가 모든 것을 가졌다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의 사고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사실이다. 하느님의 기적들은 정녕 하느님의 생각들이기에, 그것들만큼 총체적이다.
60 As long as perception lasts, prayer has a place. Since perception rests on lack, those who perceive have not totally accepted the Atonement and given themselves over to truth. Perception is a separated state, and a perceiver does need healing. Communion, not prayer, is the natural state of those who know. God and His miracles are inseparable. How beautiful indeed are the Thoughts of God who live in His light! Your worth is beyond perception because it is beyond doubt. Do not perceive yourself in different lights. Know yourself in the One Light where the miracle that is you is perfectly clear.
60 지각이 계속되는 한, 기도의 역할이 있다. 지각은 결핍에 기초하기에, 지각하는 자는 아직 속죄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진리에 맡기지 않은 자다. 지각은 정녕 분리된 상태이며, 지각하는 자는 정녕 치유가 필요하다. 기도가 아닌 영적 교통이야말로, 아는 자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하느님과 그의 기적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의 빛 속에 사는 하느님의 생각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가치는 의심 너머에 있기에, 지각 너머에 있다. 너 자신을 다른 빛 속에서 지각하지 말라. 너 자신을 유일한 빛 속에서 알라. 그 빛 속에서, 바로 너 자신인 기적은 더없이 명백하다.
[출처] [2월 3일] 텍스트 3:51 – 3:60 (한국 기적수업 공부 모임) | 작성자 도서출판 기적의 향기
첫댓글 기도는 무언가를 요청하기 위한 방법이다.
기도는 기적의 매개이지만, 유일하게 의미 있는 기도는 용서를 청하는 기도다.
왜냐하면, 용서받은 자는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용서는 분리의 지각을 치유하는 것이다.
지각이 계속되는 한, 기도의 역할이 있다.
기도가 아닌 영적 교통이야말로, 아는 자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하느님과 그의 기적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How beautiful indeed are the Thoughts of God who live in His light!
Your worth is beyond perception because it is beyond doubt.
Do not perceive yourself in different lights.
Know yourself in the One Light where the miracle that is you is perfectly cl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