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정말 이종원 그 자식이 그랬단 말야?"
나운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은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지금 직접 일을 당한 자신조차 믿어지지 않는데, 나운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은하는 종원이 자신을 버릴 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처음부터 남들보다 야심이 컸던 그 사람,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그룹 회장의 딸이 달려드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대학 시절부터 동거를 해왔고, 둘 사이에 딸이 있다한들 외면할 까닭이 어디 있을까. 사람이 윤리, 윤리 해도 진정 중요한 순간에 그 큰 실익을 버리고 윤리를 택하는 건 성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녀는 그에게 성자가 되기를 바랄 만큼 욕심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아니, 어떻게 지 딸네미가 죽어가는데 그 여자랑 놀아나고 있을 수가 있어? 그게 인간이니? 인간이야?"
그랬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아빠가 보고 싶다는 그애 앞에서 은하는 너무 쉽게 종원을 놓아준 자신이 미워 견딜 수 없었다.
"엄마, 왜 아빠 안 와, 아빠 보고 싶어..." 끝내 그렇게 중얼거리다 딸은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인연을 끊었다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외면해버린 아버지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그 회장 딸과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은 죄악이다.
은하의 머릿 속에선 그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부숴버릴 거야."
은하는 조용히 입술을 다물며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렷이 말했다.
부숴버릴 거다. 다시는 인간다운 대접을 못 받도록 완전히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버릴 거다. 나한테 이제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하나뿐인 딸마저 보내버렸으니까.
아니, 아직 내 친구 나운은 남아있구나.
시집살이에 바쁠텐데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고마운 나운.
"그래, 부셔버려. 그렇게라도 풀어야지 어떡하겠니. 집에 가서 설거지 하면서 접시 열심히 부셔라. 나도 항상 맘이 혼돈스러울 때는 집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화투장을 떼는데, 그러면 맘이 좀 풀리더라. 그런데 화투장 떼다가 혼자 치면서도 설사를 할 때가 있거든. 그러면 얼마나 열받는지 아니? 정말 화투의 세계는 깊고도 오묘한 게..."
은하는 다시 한 번 속으로 크게 외쳤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없어! 친구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없어!
#2.
밤새워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종원, 그놈을 뼛속깊이 후회하게 할 수 있을까.
하루종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가슴 속에서는 증오만이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전광렬 이사와 함께 한 점심자리에서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밥을 다 먹고 일어서는데, 전광렬 이사가 한 말 때문에 그나마 정신을 좀 차릴 수가 있었다.
"어휴, 은하 씨. 보신탕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웠네. 다시 봤어요."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목구멍으로 넘기면서도 그게 무슨 음식인지 몰랐었다.
그런데 그게 보신탕이었다니...
...솔직히 맛은 있었다.
"보신탕은 몸 속의 양기를 보해 주어 은하씨같은 처녀들이 밤을 나기 힘들게 만들지요. 또한 단백질 성분이 풍부하여 피부관리에도 뛰어난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인간이 부업으로 한약방을 한다더니, 끝내 아는 척을 한다.
처녀한테 밤 나기 힘들게 만드는 음식 먹여놓고 뭐가 자랑스럽다고 일장연설인지.
회사에서도 일은 안 하고 엉뚱한 짓만 시켜대더니, 하여튼 저 인간 뇌 속에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한 번 검사해보고 싶다.
그나저나 원작대로라면 저 인간하고 결혼해야 할텐데, 그럼 난 평생 정력보강용 음식이나 해대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어떤 망할 것이 새벽 두 시에 전화질인가.
깨있었으니 망정이지,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침대에 누워서 한참 장혁과 쎄쎄쎄하는 꿈을 꾸고 있을 시간 아닌가.
특히 매일 밤 열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는 피부가 가장 활발하게 살아나는 시간이라 나같은 미인은 꼭 그 시간에 수면을 취해줘야 한다는 상식도 모른단 말인가?
이 시간에 전화하는 놈은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도 못 들어봤나?
당장 전화를 받아서 한 소리 해주리라.
"여보세요?"
"은하니? 나 나운인데, 좋은 생각이 났어!"
좋은 생각은 무슨...
네 머리에서 나와봤자 이종원네 집에 쥐를 풀어놓자 정도밖에 더 되겠냐.
그런 일로 새벽 두 시에 전화하다니 너도 참 할일 없었구나. 그런데...
"...내 생각 어때?"
"괘, 괜찮은데, 그게 생각대로 잘 될까?"
은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맨날 53명 중에 52등하던 나운이의 머리에서 이렇게 놀라운 생각이 나오다니....꼭 이럴 때 그럼 53등은 누구였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 있다.
내용과 상관없으니 넘어가자.
...그래, 참 집요하다. 그건 은하였다.
어쨌든 은하는 나운의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솔직히 나운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어디서 베낀 아이디어라 생각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일에 그렇게 신경써준 나운에게 고마웠다.
"나운아 고마워..."
"어머, 자기야...잠깐만...나 전화 좀 끊고...어머...잠옷 찢어져.......자기야...어머..."
고맙긴 개뿔이 고맙냐. 염장을 질러도 유분수지.
#3.
다음날 4대 통신망과 인터넷의 유명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저는 XX그룹의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심은하라고 합니다.
저에게는 대학교 때부터 함께 동거를 해왔던 이종원이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정식으로 식을 올리거나 혼인신고를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혼 관계에 있었고, 저희 사이에는 귀여운 딸도 한 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종원은 저를 버리고 저희 그룹의 회장의 외동딸인 유호정과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가난하고 고아 출신인 저보다 유호정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시절 순진하기 짝이 없던 저를 숲으로 끌고 가 강간하다시피 하여 첫 아이를 임신시킨 뒤 그것을 미끼로 여태껏 사실혼 관계를 유지해온 짐승같은 이종원 그 인간이 지금 또 다시 순진한 여자를 향해 마수를 뻗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종원 그 인간은 혹시라도 그 여자와의 결혼에 제가 방해가 될까 싶어 사람을 시켜 저희 딸을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짓까지 저질렀습니다.
전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런 인간이 우리와 같은 땅을 이고 산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중략)...'
#4.
"은하야, 은하야...너 통신 들어가 봤어?"
"아니."
"지금 난리야, 난리! 지금 온통 유머란에 우리 얘기 뿐이라고!"
"유머란? 아니, 왜? 내 얘기가 웃기대?"
"그게 아니라 원래 통신망에서 게시판은 서로 크로스오버도 하고 퓨전도 하고 그러는 거야. 너도 퓨전요리 알지? 그것 맛있잖아. 청담동에 잘하는 집이 있거든. 지난 번에 내가 가봤는데..."
나운, 이것은 툭하면 딴소리다.
접때는 파운데이션 화장품 이야기로 시작해서 차태현 가수데뷔로 끝나더니.
"야, 그런데... 거기서 종원 씨가 강간하다시피 했다는 거 하고, 딸을 살해했다는 건 너무 심하더라. 꼭 그렇게 써야 하는 거야?"
"그거? 나도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서로 퍼가는 통에 누가 살을 좀 붙였나봐. 원래 구전문학의 특성이 그런 거 아니겠니? 왜 우리 옛날에 판소리 소설 배울 때 많이 들었잖아. 민중들이 서로 서로 내용을 덧붙인다고...그러니까 생각나는데 그때 우리 국어 가르치던 김창식 있잖아. 지금 XX여고에 있다고 하는데, 그 학교에 글쎄 양미라가 말이지.."
#5.
XX그룹 홈페이지는 네티즌들의 폭주 때문에 폐쇄되었고, XX그룹은 항의전화로 인해 업무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종원의 고등학교 졸업사진은 오양 비디오처럼 인터넷에 떠다녔고, 정말 이종원은 준 범죄자가 되어 이 땅에서 살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XX그룹은 급격히 준 매출량 때문에 열 손가락은커녕 중소기업 수준으로 전락했고,
그 그룹의 외동딸인 호정은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은하는 종원을 부숴버리겠다는 소원은 달성했을지 모르지만, 자신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일에 대해 부담을 느낀 나머지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이고, 나운은 아직까지 엉뚱한 소리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