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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1;15-25, 네 번째 고난주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025. 3. 30.
사40;26, 주께서는 그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시147;4,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 도다. 각각 이름을 부르시는데 빠짐이 없이 예배드리시는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부르시는 예수님의 호칭인데 이 호칭의 의미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부르고 호칭할 때, 그 사람에 대한 호칭이 언제나 동일하지는 않을 때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이름을 사용하고, 별칭과 애칭으로 부를 때가 있고 반드시 의미하는 이름을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과 어떤 필요에서 어떤 호칭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과 생각과 철학과 의미가 담겨있고 또한 사랑과 관점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르는 호칭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 줄탁동기 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유정란을 아시지요? 무정란은 유정 란은 자연부화를 합니다. 병아리로 부화할 때, 밖으로 나 갈 때가 되었음을 병아리가 안에서 알을 톡톡 쳐서 어미 닭에게 알리는 것을 줄탁동기의 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어미 닭이 밖에서 알을 쪼아 껍질을 깨트려 주는 것이 탁(啄)입니다. 그런데 이 줄과 탁이 정확하게 같은 시각이 될 때에 건강한 병아리가 부화되어 나옵니다. 밖에서 쪼아 주는 것이 안에서 두드리는 것보다 빨라도 안 되고 늦어도 안 됩니다. 안과 밖의 타이밍이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튼튼한 병아리가 태어난다는 것이 줄탁동기의 문자적 의미입니다. 여러분, 세상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일구어 가거나 매사를 처리하는 데에도 적절한 때와 적절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아무 때나 나서는 것이 아니고 너무 늦어서도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행동이 때를 앞지르면 많은 손해와 희생이 뒤따르고, 때를 놓치면 후회가 되는 것이 줄탁동기의 의미이고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줄탁동기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는 주님의 음성과 사람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 깨닫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었고 직접 말씀을 하셨는데도 그 말씀은 마음에 두지 않았으나 닭이 소리를 낼 때에 깨달은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줄탁동기의 완벽한 줄이 되는 자신이 지각과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지각이고 무슨 행동입니까? 줄의 지각과 줄의 행동인데 더 이상 알속에 있으면 않 된다는 것을 깨닫는 지각과, 알을 두드려 그 때를 밖으로 알리는 행동입니다. 만약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를 놓쳐도 정상적인 신앙인의 복된 삶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세상과 사람에게 보내는 신호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지각과 함께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쪼아 주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 중에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탁의 지각과 탁의 행동을 정확하게 실행합니다. 언제 어느 때에 나에게 줄의 지각과 줄의 행동이 필요한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다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깨뜨리기 위하여 쪼아 주어야 할지? 채워 주어야할지? 세워주어야 할지? 궁휼을 베풀어야 할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행동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열심이고 사랑입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의 지각과 행동인 줄이 문제입니다. 삶의 문제 해결과 해답을 못 얻는 것, 또한 줄의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고, 지각과 행동이 없습니다. 파숫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는 줄의 역할이 없습니다. 여러분, 왜 세상이 혼돈과 혼란이 끊어지지 않고, 정의의 이름으로 잘못된 지난날을 반복합니까? 줄탁동기의 원칙에서 벗어나고, 줄탁동기의 법칙을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지각을 지녔다는 사람은 비판만 할뿐 행동하지 않고 행동이 앞서는 사람은 바른 지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각을 상실한 행동이 문제를 야기 시키고, 행동이 결여된 지각이 망상을 만들어 냅니다. 생각과 삶은 늘 분리되어 있고, 악순환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과 믿음의 세계와 축복과 기적의 은혜와 부르심과 사명도 이와 같습니다. 소명과 사명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요21;1-5.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명령을 좇아 갈릴리로 되돌아간 제자들은 갈릴리에 도착한 뒤에 주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확인 했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필요에 따라,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이전의 방법에는 언제든지 자신 있었습니다. 경험과 자신을 가지고 열심히 그물을 던졌습니다. 만나야 할 주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는데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기잡이에 열중했습니다. 밤이 맞도록 쉬지 않고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빈손과 빈 그물과 빈 결과이었습니다. 줄의 지각과 줄의 행동이 전혀 없습니다. 이때 바닷가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5절,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낯익은 음성인데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듣던 음성인데도 모릅니다. 주님은 정확하게 탁을 했는데 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나이다. 기계적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똑같은 음성이 다시 울립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그 음성이 지닌 힘에 이끌려 다시 한 번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면서도 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던진 그물을 들어 올렸을 때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끌어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전개된 대 역전의 결과에 감격하고 있을 때, 7절.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바로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이제야 줄탁동기인 줄이 나타납니다. 애들아! 고기가 있느냐?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라 하니! 베드로가 바로 이때 주님을 보고 깨닫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초대교회에서 영적인 도움과 영적인 봄으로 간주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순절이라는 렌트 Lent는 봄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부활절 축제를 위하여 기도와 금식과 구제의 영적 훈련을 합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부담스럽고 번거롭게 느껴집니다. 시간을 빼앗겨 손해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절 이후가 되면 전혀 상황이 다르게 바뀝니다. 왜요? 영적유익이 당한 손실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순절 왜 필요한가요? 나타나지 않는 줄의 지각과 줄의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줄의 지각과 줄의 행동의 제 기능이 발휘하도록 하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이 예배에 찾아 오셔서 빈 그릇과 빈 그물밖에 없는 우리에게 애들아! 이렇게 부르시는 은혜가 있고, 그리고 주시라고 소리치며 행동할 수 있는 줄의 지각과 행동이 회복이 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베드로의 이름에 대한 호칭입니다.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호칭입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러나 시몬을 처음 만난 주님께서 게바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게바는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앗수르의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아람어를 함께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시몬에게 반석이란 이름을 주셨던 것은, 시몬이 반석과도 같은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고, 줄의 지각과 행동이 그의 삶에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이 반석이란 헬라어가 petros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시몬에게 지어주신 게바란 이름의 헬라식 표기입니다. 헬라식 표기가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몬이란 유대식 호칭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눅7;40,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막14;37, 시몬아 자느냐? 네가 잠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예수님은 평소에 베드로가 가장 친근감을 느낄 유대식 이름의 시몬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호칭하는 것은 베드로를 단순한 제자가 아닌 때로는 자녀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형제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마16;23,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초로 죽음과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며 주님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사단이 호칭이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사단이라 호칭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생각을 더 중요시하는 것은 결국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줄의 지각과 행동을 사용하지 않는 결과물을 만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랴! 에 따라 호칭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신 직후, 이제 몇 시간 이후면 잡혀가시게 될 최후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높은지 또다시 다투었습니다. 그 모습을 침통하게 보시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헬라식으로 부르셨습니다. 눅 22;23,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베드로란 이름의 뜻은 반석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전혀 반석 같지 않게 행동하는 그 한심한 순간에 오히려 반석이라 부르셔서 어떤 경우에도 반석이어야 할 베드로의 정체성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본문은 베드로에게 매우 특이한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부르셨을까요? 평소 베드로를 시몬이라 부르시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족보를 중시하던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을 소개하거나,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누구의 자녀인지를 밝힙니다. 저 사람은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나는 누구의 아들 누구입니다. 그러니까? 제 3자에게 소개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2인칭 상대에 대한 호격으로 이 호칭이 사용되는 예는 흔치 않습니다. 굳이 사용한다면 상대에 대하여 격식을 갖추어 예의를 표하고, 상대를 존중히 여길 때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호칭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예전에 한번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16;16,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도대체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거침없이 고백하는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님을 향한 고백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을 할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극찬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라고 부르셨는데 요한의 아들 시몬과 같은 표현입니다. 베드로를 칭찬하실 때에 최고의 예의를 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한번입니다. 그런대 오늘은 15절과 16절과 17절에서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호칭이 현장마다 의미가 있었음을 볼 때 지금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른 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의미가 무엇일까요? 무엇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호칭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실까요? 먼저 본문의 상황입니다. 주님께서 새벽이 동트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심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셨고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조건적인 필리아의 사랑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 번째 질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조건에 따라 제한적으로 사랑하는 베드로를 품어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필리아의 수준에 있는 베드로를 온전히 품어 주시므로, 배신했던 베드로의 모든 죄와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사랑의 실체는 용서입니다. 스치듯 보낼 사람이었는데, 깊어 옹이가 된 주님의 사랑 때문에 베드로는 베드로가 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갈릴리를 일평생 잊지 못하는 것은 동터 오는 이 오늘의 갈릴리가 자신을 향한 주님의 위대한 용서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를 선포하시는 이 극적인 순간에 베드로를 향하여 예의를 갖추어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세 번씩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더 깊은 진리와 의미는 무엇입니까?
2-1. 먼저는 참된 사랑은 참된 용서이고 참된 용서는 상대에 대한 예의이고, 상대에 대한 존중입니다. 흔히 누군가의 잘못을 내가 용서할 때 나는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시혜자가 됩니다. 그런데 시혜자, 베푸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높은 곳에서 용서의 대상을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이는 용서를 베푼 내가 언제나 그보다 우월하다는 교만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하고서도 그 대상을 존중하거나 예의를 표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용서가 상대를 변화 시키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상대를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하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고 자기 과시입니다. 자기 과시적 용서는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철회되거나 상대에 대한 굴종을 강요합니다. 때문에 이런 용서는 참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진리의 배신자였던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친히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예의 아닙니까? 나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하여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이 나를 향한 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예의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찮은 우나를 날마다 함께 해주신다는 것 자체가 나를 지극히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나 여러분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왜 이처럼 예의를 다하시면서 나를 존중히 여기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용서며, 용서는 예의이고, 예의는 존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생명의 역사가 담겨지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상대뿐만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 참된 용서를 해야 합니다. 용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항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그런 의무를 다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두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시는 주님 호칭 속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는데 그 내용은 주님의 용서를 믿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는 사람이고, 용서 받은 자신을 스스로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용서를 말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회개는 했지만 죄의식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 결과 난 안된 다고, 난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를 합니다. 줄의 지각과 줄의 행동이 없어서 늘 은혜가 없고 축복이 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을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을 존중할 수 없고, 자신을 존중할 수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설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주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주님의 탁의 지각과 탁의 행동이 나에게 진심과 중심에 전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고 감옥에 넣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죄인 중의 괴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용서하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주님의 온전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시시각각 엄습하는 유혹 앞에서 아직 정죄감에 사로잡혀 수없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롬7;22-24에서 탄식을 합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여러분, 왜 이렇게 될까요? 바울의 탄식은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정죄 감의 노예 되었을 때 바울은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용서보다 과거의 죄가 더 크게 보였고 주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죄성을 더 중하게 여겼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때 자신은 도저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이었고, 그 결과로 자신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자학했고 갈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자포자기하던 사도바울이 마침자기 자신을 향하여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서 너, 너, 너가 누구입니까? 바울 자신입니다.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용서의 선포를 했습니다. 그 용서의 근거는 주님의 용서 때문입니다. 먹물보다 더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지 못할 때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자포자기하며 탄식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를 확신할 때 바울은 주저 없이 자기 자신을 용서했습니다. 용서치 못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의 음성인데 얼마나 감격적인 외침입니까? 타인을 향한 외침이기 이전에 바울 자신을 향한 외침입니다. 바울이 주님의 용서하심을 믿으므로 자신을 용서하고 자기 자신도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 됨을 믿고 인정했을 때, 그는 평생 자기 자신에 대하여 예의를 다하며 자신을 존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주님께 예의를 다하고 주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예의와 존중을 다 바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예의이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최상의 행위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주님의 면전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뛰어나가 땅을 치고 통곡했지만 자신에 대한 정죄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적의 현장이었던 갈릴리에서 주님을 까마득하게 잊고 허망한 물질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 오셨을 때에 베드로의 자신에 대한 절망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난 안된 다고, 난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며 정죄 감에 몸서리 쳤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용서하시면서 예의를 다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불러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이만큼 존중하니 내가 존중하는 너를 너 자신도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너에게 예의를 다할 정도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라는 요청입니다.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 만큼 내가 사랑하는 너 자신에 대해 너 스스로 예의와 존중을 다하라는 촉구입니다. 그런데 이 이후 사도행전 속에서 전혀 다른 베드로를 만납니다. 사랑과 용서의 베드로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예의와 존중을 다하는 베드로로 거듭난 베드로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대중 앞에 서게 되고 3000, 5000, 허다한 무리를 주 앞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되고, 기적을 베풀고, 은혜를 나누는 참된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와 주님의 소유된 백성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과 베드로와 같이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고 용납하여 귀중하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할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자신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먼저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 타인을 용서합니다. 새로운 피조물 된 자신에게 예의와 존중을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예의를 다하며 존중합니다.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에게 예의를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믿습니다. 사1;8,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행10;15,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신 것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어리석음을 하지 말고 속되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죄에 대하여 민감 하라는 말은 이미 회개한 것을 다시 기억하고 그래서 죄의식의 노예가 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는 두 가지의 큰 잘못을 했습니다. 먼저는 주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이해관계와 유익에 따라 늘 주님을 팝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더 큰 잘못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자살로 그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유는 자신을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판 뒤에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서 받았던 은30냥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선한 양심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자신을 정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죄의식의 노예가 되지 마시고, 더 이상 자포 자기 하지 마시고, 이미 회개한 허물로 인하여 더 이상 자신을 정죄하지 마시고, 주님의 용서와 보혈의 공로를 믿으므로 자신을 용서하시고, 독생자를 내어주실 정도로 존중해주신 자신을 존중하시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답게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용서하며 존중하는 삶으로 굳건하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면전에서 배신한 베드로도 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죽이던 바울도 있고, 다윗도 있는데 어찌 우리가 가능치 않겠습니까? 내 자신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나를 존중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의 꿈과 나의 비전이 이루어집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능력의 사람이 되고 어두움 속에서 시대를 앞서 가는 주인공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복음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사고에는 최종적 사고와 관련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먼저 관련적인 사고라는 것은 모든 것을 목적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사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든 것을 그 사람과 관련시켜 생각을 합니다. 신앙인의 인생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인생의 계획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님과 관련시켜 계획을 세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에 대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참된 신앙인에게는 Like라는 예수님처럼, In이라는 예수님 안에, Through라는 예수님을 통하여, On이라는 예수님 위에, Under라는 예수님 아래, With인 예수님과 함께, Unto라는 예수님을 향하여, For라는 예수님을 위하여 8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면 어디까지 달려가야 하나가 아니고 얼마를 달려가야 하나가 아니고 어디든지 어느 곳이든지 끝까지 달려가게 됩니다. 왜요? 뽑을 수가 없이 너무 깊어 옹이가 된 주님의 용서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사도바울과 기름 부어 세우신 다윗처럼 복된 인생과 기쁨을 맛보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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