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눅 13:22-30)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온 땅을 다스리도록’ 하십니다. (창 2:27-28) 하나님의 창조물을 인간이 소유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관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노동자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았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존재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인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사람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온 세상을 소유하고 싶었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뱀의 유혹을 받아들여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생각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죄를 저지르고도 자기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내 생각에 옳고 좋은 것이라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 진리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판단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입니다. 이런 인간의 착각을 바로잡고자 하나님은 처음 사람에게 명령합니다. ‘여자에게 임신의 고통과 아담에게 평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것’(창 3:16-17)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저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본래의 임무, 곧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관리하고, 인류를 번성하게 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노동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존하는 일이기에 신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노동을 천대합니다. 저주받아서 힘들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하나님은 저주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처음 사람과 같이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좀 더 편하게, 더 많은 이익을 좇으며 노동을 기피합니다. 편리한 삶, 편하고 쉬운 삶을 좇으면 더 힘들게 노동해야 합니다. 편한 것이 좋은 삶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편리한 것만 찾습니다. 편리한 것, 편한 것이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과학기술의 발전도 인간의 편리함만 추구합니다. 편리하게 살고 싶어서 자연을 마구 파헤칩니다. 편리하게 살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이 깎이고 바다가 메워지고, 열대 우림이 파괴됩니다. 과학은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편하게 전기를 사용하려고 원자력 발전을 늘리려고 합니다. 편하게 다니려고 도로가 넓혀집니다. 도로는 자동차로 가득 채워집니다. 인간의 바람대로 삶은 편리해졌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이미 지구의 경고는 시작되었습니다. 매년 자연재해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기상이변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창조질서를 보존하지 못하고, 파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경고를 무시하는 과학자,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일본 후쿠시마 핵 발전소 폭발로 생긴 핵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합니다. 그래도 기준치 이하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합니다. 안전의 기준이 과학이라는 것입니다. 탐욕과 교만이 가득한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안전하다는 말은 무책임한 말입니다. 바닷물에 희석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 쌓이고, 바다생물에 쌓여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교만이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셔서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도록 만드셨습니다. 지금 인간은 그때처럼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정치인들과 그 집단들이 하나님께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시고 바벨탑을 허물어뜨려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지구의 경고가 그 징조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신앙인들조차도 세상을 따라 편리한 것, 편한 것만 추구합니다. 예수 믿어도 편하고 쉽게 믿고, 더 많은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앙이 인간의 욕심을 채우고, 교만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로 여기는 타락한 신앙이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니까 하나님은 내 기도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람대로 된다면 남는 장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욕심은 더 많습니다. 욕심을 채우려고 신앙을 찾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과연 신앙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구원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아마 궁금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나는 구원 받는 자 중에 포함될까?’ 궁금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대답하십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나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의 자손’이라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셨다’며 주님을 내가 잘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람들에 대해 ‘모른다’며 밖에서 슬피 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하기에는 꽤 괜찮은 신앙인 같은데 왜 주님은 그들이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셨을까요? 첫 번째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자랑하며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좋은 신앙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은 주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역시 좋은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 나라 잔치에는 참여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과거’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우리 조상이 하나님의 백성이니 나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중에 온 사람은 ‘우리가 주와 함께 먹고 마셨으며, 주님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꼭 하시는 말씀이 ‘깨어 있으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현재’의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님께 ‘구원 받을 자가 적은가요?’라고 물었던 사람은 자기의 신앙 정도면 구원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 했다는 자부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바리새인도 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만한 믿음이면 누구보다도 낫다고 인정할 수 있는데,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주님은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지만, 동서남북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조건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 있는가 봅니다. 동서남북에서 와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 우리를 포함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역시 문 앞에서 쫓겨나 슬피 울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고 하셨습니다. 넓은 문, 넓은 길은 편하고, 좁은 문, 좁은 길은 불편합니다. 편한 것을 찾는 사람은 좁은 문으로 가려고 하지 않겠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편합니다. 왜 불편하냐면 내 생각을 버리고 주님 뜻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쉬지 않고 주님의 뜻만 생각하고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부여하신 ‘세상을 돌보고 보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자연을 보전하여 모든 생명이 기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늘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 길이 좁고 불편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이 있기에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욕심과 교만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세상에서 생명과 진리의 주님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