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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한울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
김병화(金秉嬅) 당호(知吉堂, 지길당)
평남 순천군 은산면 이신리 출생
포덕 42년(1901) 10월 16일 생 (음)
포덕 126년(1985) 11월 2일 환원(84세)
내성단전선 대표, 천도교 선도사, 여성회본부 고문.
구술 : 자부 오용녀(용운당)
어머니는 해방 후에도 천도교 내수회를 수습하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고,
교회발전을 위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간절치 않은 날이 없었어요.
한번 뜻을 정하면 다른 말은 믿지 않으시고
스승님의 가르침 그대로 믿음과 정성 공경을 생활화하셨습니다.
어머님(김병화)은 평남 순천군 은산면에서 동학을 하신 부친 김이학 어른과 모친 김이화 어른의 따님으로 태어나 부모님이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할머님께서는 왜정 때 치마폭에 태극기를 숨겨 가지고 다니시며 독립운동을 하셨고 할아버지께서는 포덕 52년 53년 대정 3년 대도주로부터 포상도 여러 번 받으셨어요. 그런 모범적인 천도교 집안에서 자란 어머님은 포덕55년에 입교식을 하시고 포덕 62년(21세)에 아버님(이선영)과 결혼해 외아들(이동건)을 두셨습니다. 그 외아들과 내가 결혼해 지금은 딸 일곱에 아들 하나를 둔 대가족이 됐지요. 모두 편안하게 잘 살고 있고 내 큰 딸 작은 딸은 벌써 환갑이 넘었습니다. 연년생이라 대가족으로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다 한울님의 은덕으로 잘 지내왔어요.
삼청동에 살 때는 애들 아버지(이동건)가 미군부대에 다녀 걱정 없이 잘 살았어요. 어머님 바느질 솜씨가 좋으셔서 식구들 색동치마 저고리도 직접 만들어 입히셨는데 그 시절에 그 옷을 입고 칼라 사진을 찍고 그랬으니까요. 삼청동 집이 좀 커서 저의 집 사랑채에 김광호(백덕실 고문 시할아버지) 선생님도 한때 같이 살았고, 조순화 사모님도 같이 살았어요. 교인들의 발길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지방에서 오시면 며칠씩 교인들이 묵어가셨는데, 삼청동 경무대 옆에 와서 딸 부잣집 하면 처음 오는 분도 다 찾아올 정도였어요.
어머님은 굉장히 부지런하셨어요. 집안일 하시면서도 밤낮으로 동분서주 오가며 교회 일을 하시고 집에서도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셔서 영부도 많이 받으셨어요. 환원하시는 그날까지 일년을 하루같이 새벽 4시면 일어나셔서 한겨울 추위에도 찬물로 목욕하고 아침 5시 기도식을 하셨습니다. 청수 모실 때는 촛불 켜고 향 피우고 옷을 정갈히 하고 극진히 아침저녁 기도식을 하셨어요.
영부가 필요하신 교인들에게는 영부를 나누어 드려 병도 낫게 해 드렸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영부를 먹고 자라서 병치레 한번 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어요. 이것이 다 한울님 은덕 아니겠어요.
어머님은 성령출세하셔서 지금까지도 평소에 아끼시던 분들에게 도움을 주고 계시고 우리들을 보살펴 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천도교를 하시는 분으로서 스승님의 가르침 그대로 남들이, 보통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실천에 옮기시며 한울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교회와 여성회를 위해 활동하셨어요.
그래서 봉훈의 훈장도 받으셨고 천도교 내수단을 결성해 주옥경 사모님을 초대 회장으로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주 사모님을 모셨습니다. 해월신사님 출세 100주년 기념 수도관 건립기성회 임원과 천도교 도사 중앙 종리원 부령도 하셨어요.
어머님이 당호(지길당)를 받으실 때는 지금은 교령이지만 그때는 대령이라고 해서 천도교 대령 정광조 선생님으로부터 받았어요. 정광조 선생님은 의암성사님 사위예요. 그리고 천도교 중앙종리원순회교사, 경성부순회교사로 일하시고 내성단 1회 강습회 실무도 담당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조국이 광복됐을 때 며칠 동안 도시락을 여러 개 싸들고 서울 감옥 앞에 나가셔서 감옥에서 풀려나오는 독립운동가들 중 마중 나온 가족이나 친지가 없는 분들에게 도시락을 나누어 드리고 고향으로 내려 갈 차비가 없는 분들에게는 차비를 나누어 드리는 일을 하셨어요. 내성단 전선 대표, 경성부 대표로 일하시면서 5월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을 땐 어머님이 천도교 경성부 대표이시면서도 백종송 어른의 부인이셨던 김정룡 선생을 천도교 경성부 대표로 미·소 공동위원회에 추천 하시는 등 겸양의 미덕을 보이셨습니다.
한번은 어머님이 행방불명 되셨어요. 아마 삼일재현운동이 일어났을 때인가 봐요. 그때 어머니가 여성회 대표로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여하셨거든요. 조선호텔 길 건너편 상공 회의소가 있었는데 그 옆에 있는 경남극장 지하실에서 아마 나흘 만에 나오셨을 거예요. 식구들은 나중에야 알았죠. 의자에 앉혀 놓고 고문을 시켰대요. 정보계통에서 그랬나 봐요. 그 당시 삼일재현운동으로 북쪽에서는 천도교를 우익으로 몰고 남쪽에서는 좌익으로 몰고 그랬어요. 천도교가 침체된 원인이에요. 시퍼렇게 멍들어 오래 걸렸어요. 삼청동에 살 때 어머니가 막 하혈하고 그러셨는데 나중에야 알았죠. 어머니가 갑자기 행방불명되고 김광호 씨가 우리 삼청동 사랑채에 사셨는데 어머님 고문 사건은 아무도 몰랐어요. 명동 아줌마(한명빈)께 말하니 그 사모님도 권태화 고문께서 집에서 애들 봐주고 한명빈 사모님은 장사를 하니 자세한 건 몰랐던 거예요.
천도교인들 고생 많이 했어요. 천도교를 눌러야 정치인들이 세력을 넓히니 그랬던 것 같아요. 할머니들은 나라를 위하고 천도교를 위하는 정신이 있었어요. 김일대(백덕실 고문 시아버지) 씨는 삼일재현운동 때 두목으로 지목되어 사형됐는데 여기 이남에 추모비를 세웠어요. 삼청동 살 땐 집이 커서 ㄷ자로 큰 정원도 있고 사랑채도 있어서 사랑채에 김일대 선생의 아버지 김광호 씨가 오셔서 살다가 가셨죠. 박현화 할머니와 우리 할머니는 잘 지냈어요. 이북에 재현 운동밀사로 가시기 전에 할머니 만나서 얘기하고 가셨어요. 오근 씨 부인인 유은덕 씨는 이북에서 잡혀서 죽었어요. 이북에 김달현이라는 교인이 있었는데 밀고를 해서 삼일재현운동에 관련된 천도교인이 1만5천 명이 체포되고 87명이 희생됐어요. 천도교 역사는 구국운동에 앞장섰기에 그래요.
어머니는 해방 후에도 천도교 내수회를 수습하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고, 교회발전을 위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간절치 않은 날이 없었어요. 한번 뜻을 정하면 다른 말은 믿지 않으시고 스승님의 가르침 그대로 믿음과 정성 공경을 생활화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삼청동 집에서 주옥경 사모님을 도와 천도교 창도 100주년기념사업유지회를 만들고 교육기관 설립을 준비 하셨습니다. 그동안 뜻을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하려던 때였어요. 그런데 6.25가 일어난 거예요. 모든 사업이 중단되고 피난길에 올랐죠. 그때 우리는 자하문 밖 권우초 사모님 댁에 피난을 갔는데 그분은 어머님이 입교시킨 분이었어요. 진실하고 열심이셔서 누구든 한울님이라 칭하셨고 우리 아이들 보고도 한울님 오셨다고 말씀하셨죠. 권우초 사모님은 그 후로도 가족들과 신앙생활 잘 하셔서, 따님 홍순경 사모님은 지금 인천교구 여성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계세요. 다른 자제분 홍순복씨는 얼마 전에 환원하셨고요.
난리 통에 가족이 몇 번씩 헤어졌다 만나고 폭격당하고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겪으면서 겨우 군포까지 갔는데 거긴 마마가 유행이었어요. 그때 난 애가 셋이었는데 6살, 4살, 2살이에요. 아이들 몸에 열이 나고 새까맣게 마마를 뒤집어쓰는데 덜컥 겁이 나대요. 동네 아이들이 다 죽어 나가니 정말 우리 아이들도 잘못되는 줄 알았어요. 다행히 차츰 지나면서 씻은 듯이 낫더군요. 아이들이 아무 일없이 그때 살 수 있었던 건 어머님 정성과 한울님의 감응덕분이라 생각합니다. 한울님은 지극정성으로 극진히 원하면 들어 주시잖아요.
피난 갔다가 다시 삼청동으로 돌아와서 집을 수습하고 어머님은 다시 교회 일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삼청동 개천 건너에 신남홍 사모님, 김상화 사모님, 오일순, 오복순 자매도 같이 사셨어요. 박현화 사모님과 어머님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우이동 봉황각에 들어 가셔서 청소하고 가꾸시며 성사님 묘소에 풀도 뽑느라 집에도 안 들어오셨어요. 그래서 아들(이동건)이 이종사촌(윤두선)과 같이 우이동에 가서 봉황각에 철조망을 치고 성사님 묘소도 정비하고 어머님을 도와 드렸죠. 그렇게 우이동 봉황각을 유지하는데 고생을 하셨지만 항상 기쁜 마음으로 발 벗고 나서서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몸이 힘든 줄도 모르셨어요. 그런 우리 어머님을 보고 홍경지 사모님은 천도교에 미쳤다고 했으니까요.
우이동이 어느 정도 정비가 됐을 때, 미군부대에 다니던 아들이 미군 간부들을 데리고 봉황각에 들렀습니다. 봉황각 주변을 구경시켜주고 식사도 대접하면서 천도교에 대해서 설명해 주니 미군들이 감탄을 하더래요. 그때는 봉황각 뒤쪽이 굉장히 넓어서 호두나무, 밤나무도 많았고 뒤에 계곡에 물도 많았어요.
그러고 나서 주 사모님께서 우이동 봉황각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때부터 어머님은 봉황각에 사시다시피 하면서 주 사모님을 극진히 봉양하셨죠. 어머님이 우리 아이들(숙경, 순복)을 데리고 다니셔서 주 사모님이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포덕 99년(1958년) 1월에는 6·25 동란으로 흩어졌던 교인들을 모아 천도교 창도 백년기념사업유지회를 다시 조직하시고 그해 3월 용담정 재건 발기 위원회를 만들고 재건사업에 앞장서서 모금운동도 하셨어요. 권태화, 정부화, 양이제 할머님들과 같이 성심을 다해 포덕 101년 6월 30일 폐허에 용담정을 재건하시고 낙성식 때 어머님이 사회를 맡아 성대하게 봉행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덕 99년에 경운 학원을 설립하셨어요. 일명 야학이라고 했어요. 가정이 불우하고 가난해서 학업을 놓치고 글을 몰라 안타까워하는 여성들에게 한글을 깨우치게 하고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쳤어요.
저녁 7시부터 9시 20분까지 40분씩 세 시간을 6학급 수업을 했는데 일 학급을 6개월씩 3년간 국민학교 전 과정을 마치도록 했어요. 천도교에 교육의 필요성을 실천하신 거예요. 그리고 경운 유치원도 설립해서 대교당 2층 성화실에서 허경일 선생님과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허경일 선생님은 밤에 직접 오셔서 가르치셨어요. 허경일 선생께서는 역사공부도 하신 교수셨는데 바른말을 잘하셨죠. 할머니도 같이 바른말 잘하셨기에 옳은 일인데도 주위로부터 말을 좀 들었어요.
경운학원 졸업장을 보면 주옥경 사모님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경운학원 출석부도 있고 졸업할 때 졸업생이 쓴 한글로 된 송사가 아직도 있어요. 하지만 재정 뒷받침이 전혀 안 되니 도저히 운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안타까워하시며 문을 닫았어요. 어머님은 여성회에서 그 모든 일을 다 했어요. 그대로 유지했으면 좋은 학교 하나 만들었을 거예요. 그해 문교부에서 웬만한 학원들을 전부 학교 허가 내줬거든요. 지금 어지간한 학교들은 그때 다 만들어진 거예요. 교단에서 뒷받침만 잘 해주었더라면 지금 굉장한 학교가 됐을 거예요. 어머님은 교육에 대한 꿈과 희망이 대단하셨는데 정말 안타까워 하셨죠. 어머님 뜻을 받들어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때 어른들은 먼저 나라를 편안하게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지상천국(地上天國)건설을 목표를 두시고 일을 하셨어요.
어머님은 백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포덕100년에 천도교 여성회 첫 기관지인 <오늘>을 신문형식으로 창간하시고 ‘우리 책임은 내수도’라는 제목으로 천도교 여성회의 발전 방안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때 주 사모님을 모시고 차기순(숙), 차이화, 홍창섭, 양이제, 홍경지, 김효순 여러분들이 힘을 모아 한마음으로 일하셨어요. 내용을 보면 주부의 자녀교육, 어머니의 하루, 부엌 개조 같은 세세한 것까지 나왔더라고요. 옛날에 그런 생각들을 하신 것 보면 참 대단해요. 미신타파, 단추달기 등 개혁적인 것을 여성회에서 다 했습니다.
지금의 수운회관 짓기 전, 대신사출세 백년기념관이 있었어요. 그곳에 보성사 인쇄소가 있었습니다. 원래 보성사는 조계사 옆에 있었어요. 거기서 독립선언문을 찍었는데 일본놈이 불태워서 없어졌어요. 그래서 대신사출세 백년기념관에 다시 보성사 인쇄소를 차리고 개벽지와 어린이잡지 복간을 찍었습니다. (수정)그곳을 그대로 보존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길을 낸다고 백년 기념관을 헐었어요. 거기서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에게 공부를 가르치시고 춤도 가르치셨는데, 지금은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 기념비만 남았죠. 보성사와 개벽사도 있었는데, 개벽사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남다른 곳이에요. 차상천(차웅렬씨 부친)선생님도 그곳에서 활동하셨어요.
남편이 군에 입대할 때 최린 선생님께선 ‘수심정기’라는 글을 직접 써 주셨어요. 오세창 씨는 낙원동에 사셨는데 ‘정의’ 라는 두 글자를 써주셨죠. 그 글을 조끼 안에 접어 넣어 두었는데 탄알이 와도 조끼 안에 있으니 탄알을 막는다 하셨어요. 남편은 그 후에 정말 폭탄을 맞아 가슴을 여는 수술을 했는데 살아났어요. 정성으로 믿는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어머님은 의암성사님 묘비 건립할 때도 모금 운동을 하며 앞장 서셨어요. 어머님들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끈끈한 정과 훈훈한 분위기로 가정의 경조사에 서로 내 일처럼 일해 주셨는데, 그 넓은 아량과 화목한 모습은 지금은 상상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포덕 111년 단오 날에 명산 화악산에 수도원이 지어졌습니다. 어머님은 권태화 할머님과 함께 누구보다 앞장서서 수도원을 짓는데 공헌 하셨어요. 가평 화악산 수도원을 짓기까지 그 험한 산 속을 오르내리시느라 무척 고생하셨죠. 그때 화악산은 군사지역이라 밑에는 미군이 있었고 개울 건너기 전엔 한국군 통신부대가 조그맣게 있었는데, 어머님이 가평군청에 자주가고 험한 산도 수십 번씩 오르내리니 보다 못한 한국 군인들이 차도 태워주고 많이 도와줬답니다.
깊은 산속이라 자려고 누워 있으면 호랑이가 와서 문을 두드렸대요. 어머님들은 힘든 줄 모르고 무서움도 이기며 끝내 화악산 수도원을 짓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여기서 많은 후학들이 나오고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수련하고 공부해서 명인 중에 명인이 나와 천도교를 널리 펼 것이라며 보람을 느끼셨습니다.
어머님은 젊은 사람들이 수련하러 오면 자상하고 인자하신 친어머니처럼 다정하게 대하시며 예뻐하셨어요.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하고 있는 청년들에겐 김치도 해서 갖다 주시고 내 자식처럼 잘 해 주셨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어머님을 신식 멋쟁이 할머니라고 불렀어요. 언제나 한울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셨거든요. 호랑이가 어슬렁거렸던 깊은 골짝 화악산이 세월이 흘러 어머님 소망처럼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들의 노고가 이제 빛을 발하는구나,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어머님은 여성회 본부 창립 50주년과 60주년에 여성회 발전 공로 메달과 공로 표창 패를 받으셨어요. 포덕 113년에는 총부로부터 ‘천도교 선도사’로 추대 받으시고 포덕 118년에 여성회 본부 고문이 되셨습니다.
어머님은 항상 “앞으로 도를 많이 잘 닦아야 모든 질병도 이겨내고 남이 할 수 없는 일도 다 이룰 수 있다”며 마음으로 심고 드리고 열심히 수련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천도교 여성회를 위해 어떤 어려운 일도 발 벗고 나서서 지방이고 어디 안 가신 데가 없으셨어요. 남해나 부산같이 먼 거리도 아랑곳 않고 발톱이 빠질 때까지 다니셔서 천도교 하신 분 중에 김병화 사모님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스승님 가르침대로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을 믿고 진실하게 수련하면서 스승님 말씀대로 행하셨죠. 안타까운 것은 지금 여성회에 어머님 성함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역사에 기록 될 수 있어 참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할머님들은 친형제보다 더 친하게 지내셨어요. 생일 때 말을 안 해도 다 알아서 오세요. 봉황각 뒤땅이 굉장히 넓었는데 뒤로 나가면 개울로 통하는 문이 있었어요. 부인회가 모여서 닭죽을 드시고 노래를 하며 노시는데 다들 노래도 잘하시고 수련도 잘하셨어요. 그때는 개울에 물이 가득 차 있어 저녁 수련 할 때는 목욕재개하고 청수 모시고 그랬습니다. 주 사모님께서 회장으로 계셨지만 연세가 있으셔서 나오시지 못하시니 어머님이 일을 하시고 주 사모님께 보고하고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삼청동에서 평창동을 하루같이 다니셨어요. 그때 주 사모님이 어머님과 함께 계셨죠.
박경화 할머니의 생명도 연장해 주셨어요. 따님이신 명현수 사모님이 얘기를 해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는데 “어디 좋은데 다녀왔어요?”하고 물으니 김병화 할머니가 “너는 아직 올 때가 아니다”라고 하시더래요. 박경화 할머니는 몇 달 더 사시다가 가셨어요.
어머님은 돌아가실 때 주문을 많이 외우셔서 주무시는 듯 편안히 가셨어요. 환원하실 때 김승복 선생님, 이영복 선생님이 옆에 계셨어요. 갑자기 가셔서 안타까워 기가 막혀 며칠 동안 말이 안 나왔어요. 돌아가셔도 얼굴이 온화하고 편안하셨습니다. 내가 만져보니 차갑지도 않으시고 편안하게 환원하셨습니다. 장례는 여성회장으로 치렀습니다.
어머님은 이 땅에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을 이뤄야겠다는 굳건한 마음으로 교회와 여성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하셨습니다. 우리 집은 지금 4대째 천도교를 하고 있어요. 오래 전부터 이순종 님과 허경일 선생님이 어머님의 훌륭하신 업적을 기록으로 여성회 역사에 남겨야한다고 노력하셨으나 이루지 못하셨어요. 어머님이 환원하신지 22년이 지났지만 이제라도 여성회 역사에 기록 될 수 있어 기뻐하실 거예요. 자료가 없어서 기록되지 않는 여성회의 선구자님들이 남기신 업적과 모범적인 선행들을 후학들이 본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구술일: 포덕 148(2007)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