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무상이라 하는가..
무상이란 차별 속에 있으면서 차별을 떠난 것이다
무념이란 생각 속에 있으면 생각을 떠난 것이다.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찰라마다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 <돈황본 육조단경>
1. 무상이란 차별 속에 있으면서 차별을 떠난 것이다
무상은 어려운 게 아니죠
오온을 관찰하면 그대로 관찰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무상으로 관찰되는 것에서 무엇을 느끼냐는 거지요
무상을 차별 속에 있으면서 차별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깊은 선정에 들어 관찰되는 세계를 말하는 게 되겠네요^^
아니! 무상은 무상(無常)인 줄 알았는데..
<육조단경>에 나오는 무상은.. 모양이 없다는 무상(無相)이다^^.
한문을 잘 모르지만.. '상(相)'이란 '상(想)'에서 '심(心)'이 빠져 있는 글자다.
그 뜻은 상(想)이란 마음에 생긴 이미지가 되는 데..
거기서 마음(心)이 빠졌다는 것[相]은 이미지가 아닌 외부에 존재하는 모습이 된다.
즉 나와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가 된 세계의 표현이라는 것.
보통 사람들은 우리가 사물[존재]을 본다고 여긴다. 그 말은 외부에 있는 존재를 우리 눈으로 보고 안다는 것.
그 과정을 보면 외부에 있는 존재(相)를.. 눈으로 보아.. 의식(心) 속에 이미지(想)를 만든 게 된다.
이렇듯 상(相)은 외부에 있는 존재이니..
무상(無相)이라는 것은 외부에 있는 존재가 없다는 뜻이다.
석가모니이래 불교의 근본은 존재 세계에서 법 세계로 들어와 마음을 대상[심학]으로 삼는다.
<화엄경>의 화엄이란 존재하는 세계에서 화엄이 아닌 마음에 있는 화엄이요,
<묘법연화경>의 연꽃 역시 외부 세계에 있는 연꽃이 아닌 마음에 있는 연꽃이 아닐 수 없다.
불교는 지금 여기 나인 존재 세계에서 지금 여기 나가 존재(相)가 아닌 마음인 법임을 깨닫고 깨치는 공부라 할 수 있다.
(물론 효진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ㅎㅎㅎ^^)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대상을 존재(相)로 알지만..
불교 문에 들어오면 나와 대상은 존재가 아닌 마음으로 법임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달이 차면 다시 작아지듯이라 해야 하는 건지..
상좌부에서는 일찌감치 법을 존재로 해석했고..
상좌부를 안티 하며 근본 불교로 돌아가자는 대승 불교였지만..
대승불교 역시 법을 존재로 해석하는 품을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이 보입니다.().
무상(無相)이란 지금 내 앞에 있는 엄연히 존재하는 이효리(相)는 이효리가 아니다(無相) 라고 하는 겁니다.
그에 반해 무상(無常)이란 내 앞에 있는 이효리는 지금 저 모습으로 있지만 항상하지 못하고 변하기에 무상(無常)이라 하는 거지요.
한문 상(常)이란 항상 한다는 것으로 사람들은 자기 생명이 천년 만년 넉근히 살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생주이멸하는 존재로 무상(無常)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깊이 들어가면 한 찰라도 존재(常) 하지 않는다는 것[無常, 법]을 이해하리라.
라고 알아야 함을 온 정성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선종에서는 존재(相)를 인정하면서.. 막무가내로 존재는 없어! 무상(無相)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뜻은 알겠는데.. 방법은 마치 경상도 문뎅이처럼 투박하고 거칠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ㅎㅎㅎ^^
플리즈.. 지금이라도 불교인 심학에서는 언어도단으로만 보이는 무상(無相)이란 말을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자.
무상이란 차별 속에 있으면서 차별을 떠난 것이다
차별이란 분별 세계를 말한다. 차별을 떠났다는 것은 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무상(無相)이라 하는데.. 그러지 말고 무상(無常)이란 말로 그냥 설명하자.().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는 한 찰라도 멈추지 않고 변하니.. 존재(相)라는 말은 애시당초 임파시블.
그러니까 존재는 없다는 무상(無相)이 아니냐고?.
허허.. 무상(無相)이란 말의 전제는 '존재(相)가 분명히 있다' 게 출발이다.
곧 토끼 뿔은 정말 있는데.. 잘 따져 보니 토끼 뿔은 없다고 설명하는 격이다.
무상(無相)하면.. <법성계>에 나오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 떠오른다.
그런데 법성계에 나오는 무이상이란 상이 없다는 무상이 아니라..
법과 성이란 존재는 둘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법과 성이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법과 성은 있다고 하는 것.
<금강경>에는 4무상(無相)이 나오는데..
그것은 구마라집 논사가 당시 중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다 보니.. 범어에는 무상(無想)으로 되어 있는 것을
무상(無相)이라 번역했다고 한다.
그 말은 오리지널 <금강경>에는 4무상(無相)이 아니라.. 4무상(無想)으로 되어 있다.
즉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아니라..
我想 人想 衆生想 壽者想으로.. 마음 심(心)이 들어가 있는 상으로 번역해야 했다는 것이다.
<금강경> 4구게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가 나온다.
여기서는 존재하는 상(相)은 상이 없다[無相]는 게 아닌 존재[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런 존재하는 상을 보면서 그것이 상이 아님[非相]을 볼 수 있다면..
이라 하지 않는가.
석가모니 가르침은 이해가 정말 어려울 뿐.. 언어도단이 아니다.().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1229
2.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찰나마다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을 듣고 나무꾼으로 살아가고 있던 혜능이 깨침을 얻었다고 하지요.
머물음이 없다는 무주(無住)는 대상을 접촉하면 일어나는 주체가 접촉되는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
그리되려면 주체는 무아가 되어야만 100% 머물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있다면?..
순금이라 하면서 99.999..라고 표현하듯 완전히 주체가 안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여 찰라마다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죠.
그것은 존재인 6경과 존재인 6근이 만나는 것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러기에
석가세존께서는 6근6경인 존재란 마음인 법[12처]임을 이해하고.. 깨닫고.. 깨쳐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인데..
구마라집 논사가 한문으로 번역한 <금강경>을 듣거나 본 이는
혜능 선사처럼 그의 마음에서는 존재 세계를 벗어난 마음 법을 이해하고 있어도..
석가세존의 세계인 법 세계를 설할 수 없으니..
교외별전, 언어도단, 이심전심을 던지는 겁니다.().
만일 <잡아함경>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6근6경은 사실이 아니기에 마음에서 생긴 2법6쌍인 12처 접촉으로 생기는 것이기에
수행을 통해 마음공부를 잘하면..
접촉으로 생기는 느낌[수], 이미지[상], 의도[행]에 매이지 않고 마음을 내어 행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나무꾼이었던 혜능이
"안과 색이 만나 안식[본다는 식]이 일어난다. 이때 안, 색, 안식은 모두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라는
<잡. 214경> 독경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일으켰을까요?^^.
그리고 수처작주(隨處作主).. 머무는 곳에서 주인이 되어라..라는 말이 있지요
주인이란 능동적으로 일에 대처하는 자라면 손님은 주인이 하라는 일만 따라 하는 자가 되지요
그런데 주인이다 손님이다라는 작자가 있으니
근본 불교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무아에 이르지 못한 수준처럼 보입니다.
본성이 찰라에 머물지 않는다에서..
본성이라 함은.. 무아를 깨친 경계라 하기에
부족하게 보입니다
3. 무념이란 생각 속에 있으면 생각을 떠난 것이다.
무념(無念)을 달리 무심이라 하듯..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지적하는 게 되겠지요.
그런데..
근본불교에서는 무념(無念)이란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념(염 念)이란 말은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사티 Sati라 합니다.
사티(사띠)는 요샛말로 번역하길 마음 챙김 mind fullness 이라 하여..
신구의 3행, 행주좌와 어묵정동인 일체 나의 언행이 일어나면 조용히 주시하는 자를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사티인 염은 언행이 있으면 그림자처럼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우리의 의식으로 멸하고 살리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생명이 있으면 의식이 있으면 빛에 그림자처럼 함께 하는 것입니다.
8정도에 나오는 정념은 염인 사티를 멸하고 생하는 게 아닌..
염의 활동인 마음 챙김을 강화시켜..
마치 염에 의해 의식이나 신구의가 행위하듯이 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러나 마음 챙김이라는 사티는 능동적으로 우리 언행을 콘트롤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림자처럼 언행이 일어나면 따라서 일어나는 구조이므로..
그와 같은 사티가 후기 불교[동북아시아 불교를 포함]에 이르면..
염의 오리지널 뜻인 현재 마음 챙김에다 과거 의식이라 할 수 있는 메모리를 포함하여 바른 기억(정념)으로 설명하지요
8정도에서 정념이란..
군말 없이 12연기와 4성제에 집중하여 그것에 의지해 자신의 언행을 바라보는 겁니다.().
말 나온 김에 8정도의 정견을 바르게 보기라고 하는 데.. 어떻게 보는 게 바르게 보는 겁니까?^^.
12연기법 대로.. 4성제 대로 보는 게 정견입니다. 더 군더더기를 붙이면 아니 됩니다.
정사유란 12연기법 대로 사유하는 것이요,
정어란 12연기법대로 말하는 것이요,
..
정념이란 12연기법 대로 마음을 챙기는 거구요,
정정이란 12연기대로 정에 머무는 거지요.
그런데 시중에서는 정념을 무엇이라 설명하나요?..
더욱 중요한 것은 8정도는 무아를 깨치는 방법으로 수행자의 태도라는 겁니다.
그러니 정념은 12연기법을 24시간 잊지 않고[오매일여] 항상 마음을 챙겨야 한다는 겁니다.
무념이란 생각 속에 있으면 생각을 떠난 것이다.
무념이란 산란한 생각은 물론 정념 마저 사라진 념이 일어나는 일이 없는 상태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티란 대상을 만나면 일어나는 마음을 챙기는 것인데..
사티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자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살아서 무념은 임파시블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생각 속에 있으면서 생각을 떠난 것을 무념이라 하면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게 되지요.
아주 심하게 말하면..
불교를 혼란에 빠뜨리며.. 더 나아가 불교를 죽이는 언어가 됩니다.
물론 무념을 말하는 의도는 알 수 있어요.
망상이든 바른 생각이든 모두 2법6쌍 접촉이 일으키는 것이라면 그것에 매이지 말라는..
그런 것을 바로 정념인 사티라 하는 것인데..
무념이란 사티마저 멸하라는 겁니다.
저리 되면 선 불교는 근본 불교와 연결 고리를 잘라버리고..
힌두교에 가까이 가는 종교가 되지요.
그런데 그와 같은 무념을 육조스님.. 선종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뜻은 맞지만 무념이란 단어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는 겁니다.().
그런 면이 중국 불교의 한계가 아닌가 합니다.^^().
[사족]
질문은 단 4줄인데..
답변은 왜 이리 긴가요!.
이츠 낫 페어!
해서 답변도 간단히 하면..
무상무념무주라고?.. 왠 이상한 소리..
다 뻥. 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