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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6부 5
라스콜니코프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뒤를 돌아보면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외쳤다.
“나는 당신한테 말했을 텐데요.....”
“아니, 그저 이젠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뿐입니다.”
“뭐, 뭐라고요?”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한 1분쯤 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듯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거나하게 취해서 늘어놓은 이야기로 보아”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날카로운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당신은 내 누이동생에 대해서 그 추악하기 짝이 없는 야심을 내버리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전보다 더욱 열중해 있다는 걸 나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그 애가 무슨 이상한 편지를 받았다는 것도 나는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까부터 줄곧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어요....설사 당신이 한길 어디서 색싯감을 발견했다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나는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무엇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건지 스스로도 명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아니, 뭐라고요! 그럼 지금 순경을 불러도 좋습니까?”
“부르시오!”
두 사람은 다시금 얼굴을 맞댄 채 잠시 버티고 서 있었다. 이윽고 스비드리가일로프의 표정이 돌변했다. 자기 위협이 좀처럼 라스콜니코프에게 먹혀들지 않는 것을 깨닫자, 그는 갑자기 몹시 유쾌하고 친밀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시군요! 나는 당신 사건에 무척 흥미를 느끼면서도 일부러 당신에게 그 말을 끄집어내지 않았습니다. 환상적인 사건이니까요. 그래서 다음 기회까지 미뤄두기로 했는데, 당신은 그야말로 죽은 사람까지도 노하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군요....자, 그럼 가보실까요. 그러나 미리 말해둡니다만, 나는 지금 돈을 가지러 잠깐 집에 들렀다가 방을 잠그고 다시 나와서, 마차를 잡아타고 건너편 섬으로 가서 밤새껏 놀다 올 작정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내 뒤를 따라와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럼 나도 우선 그 집으로 가겠습니다. 당신이 아니라 소피야 세묘노브나한테 말이오. 장례식에 못 간 걸 사과도 할 겸.”
“그건 당신 자유겠지만, 소피야 세묘노브나는 집에 없을 겁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내 오랜 지기이며 현재 어느 고아원 감독으로 있는 유명한 노부인한테 갔으니까요. 나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세 아이의 양육비 조로 돈을 내놓았을뿐더러 고아원에 기부까지 해서 그 노파를 완전히 구워삶았지요. 그리고 소피야 세묘노브나의 신상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죄다 이야기했더니, 오히려 굉장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곧 소피야 세묘노브나는 노파가 별장에서 나와서 임시로 머물고 있는 어느 호텔로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상관없어요, 아무튼 나는 들르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당신은 나하고 어올릴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아무래도 마찬가집니다. 아, 벌써 집에 왔군요. 그런데 당신이 나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는 건 내가 너무나 조심스러워서 여태까지 여러 가지 질문으로 당신을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하는데요....내 말을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당신은 아마 보통 일이 아니라고 느끼셨겠죠?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 틀림없이 그럴테니까! 그러니 당신도 이제부턴 좀 더 조심해야 할 겁니다.”
“그러니 문 뒤에서 엿들으라는 건가요!“
”아아, 당신은 그 이야길 하시는 겁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웃었다.
”하긴 이 모든 일이 있은 후에도 당신이 끝내 이야길 꺼내지 않으셨다면 나는 오히려 놀랐을지도 모르죠. 하, 하! 그야 나도 당신이 그때 거기서 장난삼아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지껄인 말 가운데 다소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건 대체 뭡니까? 나는 어쩌면 시대에 너무 뒤떨어진 인간이라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지도 모르니까요. 제발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가장 새로운 이론으로 계몽을 해주십사 하는 겁니다.“
”당신이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 내가 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비록 내가 좀 엿듯기는 했다해도 말이죠. 내 말은, 무엇 때문에 당신은 연방 탄식을 하고 계시느냐 그겁니다! 당신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실러가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문 뒤에서 엿듣지 마라는 둥 하는 겁니다. 정 그렇다면 정정당당히 출두해서 여사여사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 이론상으로 약간의 착오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고 자백하면 될 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 문 뒤에서 엿듣는 건 나쁘지만 자기만족을 위해 노파 따위는 아무렇게나 죽여도 좋다는 확신이 있으시다면 한시바삐 아메리카로라도 도망을 치는 겁니다! 동망치란 말이에요! 아직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돈이 없나요? 여비는 내가 대드리죠.“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혐오의 빛을 띠며 라스콜니코프는 말을 막았다.
”알겠습니다.....하긴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너무 입을 놀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나는 어떤 문제가 현재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지 압니다. 도덕적인 문제죠? 시민으로서의, 인간으로서의 문제죠? 그런 건 내벌려두세요. 그런 게 지금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헤, 헤! 하지만 당신은 한 사람의 시민이요 인간이다, 그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참견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공연히 남의 일에 손댈 필요가 없었단 말이에요. 차라리 권총 자살을 하시죠. 어떻습니까, 그것도 싫습니까?“
”당신은 나를 쫓아버리려고 일부러 약을 올리고 있나 보군요........“
”허, 참 이상한 사람 다 보겠군. 자, 이젠 다 왔습니다. 어서 층계를 올라가십시오. 소피야 세묘노브나의 방문입니다. 어때요, 아무도 없죠! 거짓말 같습니까? 그럼 카페르나우모프한테 물어보십시오. 소피야 세묘노브나는 언제나 그 집에다 열쇠를 맡겨두곤 하니까요. 마침 저기 카페르나우모프 부인이 나왔군요. 네? 뭐라고요? 저 여잔 귀가 좀 멀어서요. 나갔다고요? 어디로? 자, 이젠 들으셨죠? 그 여자는 지금 없고, 어쩌면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엔 내 방으로 갑시다. 나한테도 들르겠다고 하셨죠. 자, 이게 내 방입니다. 레슬리흐 부인은 집에 없어요. 그 여잔 날마나 분주히 나돌아치죠. 그러나 좋은 사람입니다. 정말이에요. 그 여자는 당신에게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죠. 자, 보십시오, 나는 이 사무용 탁자에서 5푼 이자의 채권을 한 장 꺼냅니다.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온르 이것을 환금 없자한테서 현금으로 바꾸렵니다. 자, 보셨습니까? 이젠 더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탁자 서랍을 잠그고, 다시 방문을 잠그고, 우리는 다시 층계로 나왔군요. 자, 어떻습니까, 마차라도 부를까요? 나는 섬으로 가는 길이니까요. 드라이브라도 좀 하실까요? 나는 이 마차로 예라긴 섬으로 갑니다만, 뭐라고요? 싫으시다고요? 끝까지 버텨낼 수가 없으신가 보군? 그러지 말고 드라이브라도 합시다. 뭐, 괜찮아요, 비가 올 것 같지만 상관없습니다. 포장을 치면 되니까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이미 포장마차에 올라타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의 의심이 적어도 이 순간만은 온당치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꾸도 한마디 없이 몸을 홱 돌려 방금 온 센나야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이때 도중에 한 번만이라도 뒤를 돌아보았다면, 스비드리가일로프가 100보도 가기 전에 마부에게 돈을 지불하고 보도로 내려서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길모퉁이로 접어들고 말았다.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이 그를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서 떠나게 했던 것이다.
‘아아, 어째서 나는 그 야비한 악당에게, 그 음탕한 비열한에게 비록 순간적이나마 무엇을 기대했던가!’하고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사실 라스콜니코프는 너무나 성급히, 너무나 경솔하게 판단을 내려버렸던 것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 상황에는 신비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어떤 색다른 느낌을 주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여러 가지 중에서도 라스콜니코프는 누이동생에 관한 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자꾸 되풀이해서 생각하기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그는 혼자가 되자 언제나의 버릇대로 20보도 채 가기 전에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다리를 건너가다가 그는 난간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물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가 그의 등 뒤에 와 있었다.
그는 다리목에서 누이동생을 만났지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쳤던 것이다. 두네치카는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모습으로 거리를 거닐고 있는 오빠를 본 적이 없었으므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으나 오빠를 부를지 말지 망설였다. 문득 그녀는 센나야 쪽에서 황급히 다가오고 있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발견했다.
그러나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다가오는 눈치였다. 그는 다리 위로는 올라오지 않고, 라스콜니코프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면서도 보도 한쪽 옆에 걸음을 멈추었다. 벌써부터 두냐를 알아보고 있던 그는 그녀에게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그 손짓이, 오빠를 부르지말고 그대로 내버려둔 채 자기 쪽으로 와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두냐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살그머니 오빠 뒤를 돌아서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다가갔다.
”자, 빨리 갑시다“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로지온 로마느이치에게 우리가 만났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미리 말해둡니다만, 실은 오빠 쪽에서 나를 찾아왔기 때문에 이제까지 저 요릿집에 앉아 있다가 지금 간신히 떼어놓고 오는 길입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오빠는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낸 걸 알고 이상하게 나를 의심하고 있더군요. 물론 당신이 말한 건 아니겠죠? 당신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굴까요?“
”자, 이젠 모퉁이를 돌았으니까“하고 두냐는 상대방의 말을 가로챘다.
“오빠의 눈에 띄지는 않을 거예요. 미리 말해두지만요, 더는 당신을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다 말해주세요. 그런 용건은 할길에서도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요.”
“첫째로 이 이야기는 도저히 한길에서 할 수 없으며, 둘째로 당신은 소피야 세묘노브나의 이야기도 들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또 셋째로는 두서너 가지 서류도 보여드려야 하겠고....하지만 당신이 내 집에 오기 싫으시다면 나도 모든 설명을 집어치우고 곧 이대로 물러가겠습니다. 겸해서 말해둡니다만, 당신이 소중히 여기시는 오빠의 지극히 중대한 비밀이 완전히 내 손안에 들어 있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냐는 망설이듯 그 자리에 선 채 꿰뚫을 듯한 눈초리로 스비드리가일로프를 응시했다.
“무엇을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도회지는 시골과 다릅니다. 시골에서도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한 것보다도 나에게 더 심하게 하시지 않았나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는.....”
“소피야 세묘노브나도 알고 계시나요?”
“아니, 그 여자한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집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 집에 있겠죠. 바로 오늘 계모의 장례식을 치렀으니까, 아무리 뭐래도 오늘만은 손님을 구하러 나다니진 않을 겁니다. 나는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아무한테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당신한텐 알린 것도 약간 후회가 될 지경입니다. 이런 경우엔 어떤 사소한 부주의라도 밀고나 다름없어지고 마니까요. 나는 바로 저기 살고 있습니다, 바로 저 집에. 다 왔군요. 다 왔군요. 저 사람이 이집 문지기입니다. 문지기는 나를 알고 있죠. 보세요, 나한테 인사를 하잖아요. 저 친구는 내가 여성하고 함께 걷고 있는 걸 봤으니까, 물론 당신 얼굴도 기억할 겁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계시다면, 당신에겐 매우 유리할 테죠. 아니, 이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걸 용서하십시오. 나는 이 셋집 사람한테서 방을 빌려 쓰고 있습니다. 소피야 세묘노브나는 나하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인데 역시 세든 사람한테서 방 하나를 빌리고 있죠. 층마다 셋방살이들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어린애처럼 두려워하십니까? 내가 그렇게 무서운 사내로 보입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얼굴이 겸손의 미소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지금 미소 같은 데 마음을 쓸 겨를이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점점 심해져가는 흥분을 감추려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두냐는 그의 이상한 흥분을 눈치챌 만한 여유가 없었다. 어린애처럼 자기를 두려워한다는 말이며, 자기가 그렇게 무서운 사내로 보이느냐는 상대방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몹시 자극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파렴치한 사내라는 건 알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어서 앞서 가세요.” 그녀는 겉보기엔 무척 침착한 태도로 이렇게 응수했으나 그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소냐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 집에 있나 없나 확인해봅시다. 없군요. 내 예상이 빗나갔는걸! 하지만 그 여잔 곧 돌아올 겁니다. 난 알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외출을 했다면, 고아들의 일로 어느 부인을 찾아간 게 틀림없습니다. 애들 어머니가 돌아갔으니까요. 나도 좀 참여해서 일을 그들어 주었죠. 만약에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1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오늘 중으로라도 당신한테 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게 내 방입니다. 방을 두 개 쓰고 있죠. 문 저쪽은 주인인 레슬리흐 부인 방입니다. 그럼 이번엔 이쪽을 보십시오. 중대한 증거를 보여드릴 테니. 이 문은 내 침실에서 현재 비어 있는 두 개의 방으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게 그 방들이죠....이건 좀 자세히 봐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꽤 넓은, 가구가 딸린 방 두 개를 빌려 쓰고 있었다. 두네치카는 의심쩍은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으나, 장식이나 가구 등속의 배치에도 별로 색다른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다소 이상한 점도 없지는 않았는데, 예를 들어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방이 거의 사람이란 살지 않는 텅 빈 두 방 사이에 끼어 있다는 정도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을 분이다. 그의 방으로 들어가려면, 직접 복도에서가 아니라 거의 언제나 비어 있는 안주인네 방을 두 개나 지나야만 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침실에서 열쇠로 잠긴 문을 열고 역시 텅비어 있는 방을 두네치카에게 보여주었다. 두네치카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보여주는지 영문을 몰라서 문지방에 멈춰 서려 했다. 그러나 스비드리가일로프가 황급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 이쪽을, 이 두 번째 큰 방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 문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엔 열쇠가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 옆에 의자가 있고요. 두 방에서 의자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엿듣는 데 편리하도록 내 방에서 갖다 놓은 겁니다. 그리고 문 저쪽에 소피야 세묘노브나의 탁자가 있고, 그 여자는 거기 앉아서 로지온 로마느이치와 이야길 한 거죠. 한편 나는 이 의자에 앉아서 이틀 밤이나 연달아, 두 번 다 거의 두 시간식 여기서 이야기를 엿들은 겁니다. 그러니까 물론 나는 어떤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게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이 엿들으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럼 다시 내 방으로 갑시다. 여기는 앉을 데도 없으니까요.”
그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를 데리고 응접실로 쓰고 있는 첫 번째 방으로 되돌아와서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자기는 적어도 그녀에게서 2미터쯤 떨어진, 탁자 맞은편 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의 눈 속에는 언젠가 두네치카를 위협했을 때와 똑같은 불길이 어느새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고는 다시 한 번 경계하듯이 주의를 둘러보았으나, 이 거동은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불신의 빛을 얼굴에 나타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방의 외딴 분위기는 마침내 그녀를 불안 속에 몰아넣었다. 그녀는 안주인이라도 집에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끝내 물어보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또 하나,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고통이 그녀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마음이 뻐개질 것만 같았다.
“이것이 당신 편지지만”하고 그녀는 편지를 탁자 위에 꺼내놓고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쓰신 것 같은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당신은 오빠가 저질렀다는 범죄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너무나도 명백히 암시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제 와선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을 거예요. 하기는 당신한테서 듣기 전에도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긴 들었습니다만, 나는 털끝만큼도 믿지 않았어요. 그건 더럽고 우스꽝스런 모함입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무엇이 원인이 되어 그런 소문이 나왔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증거 같은 게 있을 리 없어요. 당신은 증명하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자, 어서 말해보세요! 그러나 미리 말해두지만요,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아요!”
두네치카는 성급히 서두르며 빠른 어조로 이렇게 말해버렸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로 나를 믿지 않으셨다면, 모험을 하면서까지 이렇게 혼자서 나를 찾아오실 수 있었을까요? 대체 무엇 때문에 오셨느냐 말입ㄴ디ㅏ. 단지 호기심 때문인가요?”
“나를 괴롭히지 마시고, 어서 말해주세요!”
“당신이 대담한 아가씨라는 건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당신이 라주미힌 씨에게 부탁해서 여기까지 함께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당신하고 함께 오시지 않았고, 당신 주변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자세히 살펴보았죠. 정말 대담합니다. 결국 당신은 로지온 로마느이치를 구해주고 싶었던 겁니다. 하긴 당신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성스러우니까. 그런데 당신 오빠에 관해선데, 글쎄 뭘라고 말해야 좋을까요? 당신도 방금 당신 눈으로 그분을 보셨겠죠, 어떤 모양을 하고 계시던가요?”
“당신은 설마 그것만을 근거로 삼고 말하는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닙니다. 그분 자신의 말을 근거로 하는 거죠. 그분은 이 집에, 소피야 세묘노브나한테 연이어 이틀 밤이나 왔었습니다. 두 사람이 어디 앉아 있었는지는 방금 보여드린 대로입니다. 오빠는 그 여자에게 모든 걸 다 고백했어요. 오빠는 살인자예요. 오빠는 노파를 죽인겁니다. 그리고 노파를 죽인 현장에 우연히 들어온, 노파의 동생인 리자베타라는 헌옷 장수 여자까지 죽여버렸습니다. 두 사람 다 준비해간 도끼로 죽인 거죠. 물건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죽였고, 실제로 돈과 몇 가지 물건을 훔쳤습니다. 오빠는 모두 상세하게 소피야 세묘노브나한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비밀을 아는 건 그 여자 한 사람뿐입니다만, 그러나 그 여자는 말로나 행동으로나 살인에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당신처럼 그 여자도 소스라치게 놀랐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그 여잔 절대 오빠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두네치카는 죽은 사람같이 파랗게 질린 입술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숨까지 헐떡였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이유라곤 조금도 없단 말이에요. 그럴 만한 동기도 없고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오빠는 물건을 강탈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원인이 있습니다. 오빠는 현금과 물건을 훔쳤단 말입니다. 하기는 그분 자신의 자백에 따르면, 돈이나 물건엔 조금도 손대지 않고 어느 돌 밑에 파묻어두었으며 지금도 거기 있답니다. 그러나 그건 단지 손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죠.”
“아니, 정말 오빠가 물건을 훔치거나 강탈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세요? 오빠는 그런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두냐는 이렇게 외치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도 오빠를 아시잖느냐 말이에요, 만나보셨죠? 그래, 오빠가 도둑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이던가요?”
그녀는 마치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애원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공포 같은 것은 이미 염두에도 없었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이런 일에는 몇천 몇만 가지의 조합과 분류가 있는 법입니다. 도둑놈은 물건을 훔치기만 하지만, 그 대신 마음 속으론 자기가 비열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훌륭한 신사가 우편물을 약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마느 그 사나이는 어쩌면 자기가 정말로 훌륭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야 물론 그 얘기를 남한테서 들었다면,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귀를 믿지 않을 수는 없거든요. 오빠는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그런 짓을 하게 된 모든 이유를 설명하셨지만, 여자도 처음엔 자기 귀를 믿지 않더군요. 그러나 마침내는 눈을 믿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눈을 믿은 거죠. 오빠 자신의 입으로 여자에게 말했으니까요.”
“대체 그 이유란 ....뭡니까?”
“이야길 하자면 길어지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거기엔 뭘랄까, 일종의 이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더군요. 예를 들어 근본 목적만 좋다면 악행 한 번쯤은 허용될 수 있다는 것과 똑같은 이론입니다. 한 가지 악행과 백 가지 선행이라는 거죠! 그야 물론 자존심 강하고 재능있는 청년으로서는, 예를 들어 불과 3천 루블 가량의 돈만 있으면 입신출세의 길도, 인생의 목표로 하는 장래 생활도 모두 일변시킬 수 있는데 그 3천 루블이 없다고 의식하는 경우 굴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게다가 굶주림과 비좁은 방과 남루한 의복, 사회적 비참함에 대한 자각, 그와 동시에 누이동생과 어머니의 처지를 생각하는 마음, 이런데서 일어나는 초조감을 계산에 넣어 생각해보십시오. 무엇보다도 큰 것은 허영심입니다. 자부심과 허영심이죠.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좋은 경향인지도 모릅니다. 결코 그 사람을 힐난하는 건 아닙니다. 제발 그렇게는 생각지 마십시오. 게다가 나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거기에는 또 하나의 독특한 이론이 있었습니다....제 나름의 이론이긴 합니다만, 그 이론에 따르면 말입니다, 사람은 물질적인 인간과 특수한 인간으로 분류되고, 특수한 인간이란 그 높은 지위에 의해서 법의 적용을 받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밖의 인간들, 즉 한낱 티끌에 지나지 않는 물질적인 인간을 위해서 법령을 제정해준다는 겁니다. 우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는 이론이죠 une theorie comme une autre('다른 이론과 다른 것이 없으니까요‘라는 뜻) 그리고 오빠는 나폴레옹에 굉장히 열중했나 봅니다. 즉 수많은 천재적 인간들이 개개의 악에 구애받지 않고 대답하게 그것을 짓밟고 넘어갔다는 점에 마음이 끌린 겁니다. 오빠도 아마 자기를 천재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적어도 얼마 동안만은 그렇게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오빠는 무척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민하고 계시는데, 이론을 만들어낼 수는 있었으나 대담하게 짓밟고 넘어갈 용기가 없다, 따라서 자기는 천재적인 인간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자존심 강한 청년에겐 그야말로 굴욕이랄 수 있죠. 특히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는........”
“그렇지만 양심의 가책은? 그럼 당신은 오빠에게 도덕적 감정 같은 건 전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과연 오빠가 그런 인간일까요?”
“아,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요즈음은 모든 게 엉망진창입니다. 하기는 그전에도 특별히 질서라고 할 만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대체로 러시아 사람들이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그 국토와 마찬가지로 마음들이 광막해서 환상적인 일이나 무질서한 일에 무척 마음이 끌리나 봅니다. 하지만 특수한 천재라는 것도 없이 그저 마음이 광막하다는 것만으론 곤란하죠. 당신도 기억하십니까, 시골에 있을 때 저녁마다 식사 후에 당신과 둘이서 테라스에 앉아서 이런 식의 이야기를 이와 똑같은 테마에 대해 여러 가지로 주고받던 것을. 더욱이 당신은 바로 그 광막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를 비난하기까지 했는데, 어쩌면 오빠가 여기 누워서 자기의 이론을 생각하던 바로 그 시각에 우리도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도 모를 일이죠. 원래 우리 교양 계급에는 특히 신성한 전통이란 게 없으니까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그저 누군가가 여러 가지 책에서 꾸며내든가.....아니면 연대기 같은 데서 끄집어내는 게 고작이오. 그러나 그런 건 대부분 학자들이 하는 짓이라서 모두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야기죠. 하지만 당신도 대략 아시다시피 나는 절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나 자신이 고등룸펜이고, 또 그런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여기에 관해서는 우리도 여러 차례 이야기했죠. 내 의견에 당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을 보고 나는 행복해졌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안색이 무척 좋지 않으시군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나도 그 이론을 알고 있어요. 모든 것이 허용된 인간을 논한 오빠의 논문을 잡지에서 읽었습니다.....라주미힌 씨가 가져다주셔서.”
“라주미힌 씨가? 당신 오빠의 논문을? 잡지에 실린 것을? 그런 논문이 있었나요? 난 몰랐습니다. 무척 재미있는 논문일 것 같군요! 그건 그렇고,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시렵니까,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소피야 세묘노브나를 만나보고 싶어요.” 두네치카는 가냘픈 음성으로 말햇다.
“그 방엔 어떻게 가죠? 이젠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니까. 꼭 지금 만낙 싶어요. 그 여자라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말끝을 맺을 수가 없었다. 문자 그대로 숨이 콱 막혔던 것이다.
“소피야 세묘노브나는 밤늦게야 돌아올 겁니다. 내 생각엔 그래요. 벌써 돌아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걸 보니 훨신 늦어질 겁니다....”
“아아, 당신은 거짓말을 했군요! 이젠 알겠어요....거짓말을 햇어요!.....처음부터 거짓말만 했어요! 난 당신을 믿지 않아요! 믿지 않아!” 두네치카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진짜로 미친 사람처럼 이렇게 외쳐댔다.
그녀는 거의 실신한 듯이 스비드리가일로프가 황급히 갖다 바친 의자 위에 쓰러졌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왜 이러십니까? 정신을 차리세요! 자, 물입니다. 한 모금 드세요.......”
그는 두네치카에게 물을 끼얹었다.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효과가 너무 컸나 보군!”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진정하십시오! 오빠에겐 친구라는 게 있으니까요. 우린 오빠를 도울 수 있고 구해낼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내가 오빠를 외국으로 데려갈 수도 있고요. 내겐 돈이 있습니다. 사흘 안에 여권도 구할 수 있습니다. 오빠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앞으로 얼마든지 좋을 일을 할 수 있고, 또 그것으로 모든 걸 속죄받을 수도 있는 겁니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아직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아니, 왜 그러십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이 악당 같으니라고! 아직도 사람을 놀리다니. 어서 나를 내보내줘요.........”
“어디로? 어디로 가시려고요?”
“오빠한테요. 오빠는 어디 있죠? 당신은 알겠죠? 왜 이 문이 잠겨 있죠? 언제 이 문을 잠갔어요?”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걸 모든 이웃에게 다 들리게 할 순 없잖아요. 나는 절대로 놀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단지 나는 언제까지나 그런 식으로 말을 주고받기가 싫어졌을 뿐이죠. 당신은 그런 꼴을 하고 어딜 가시겠다는 겁니까? 설마 오빠를 넘기고 싶진 않으시겠죠? 그런 짓을 하면, 당신은 오빠를 미치게 할 뿐이고 오빠는 또 오빠대로 자기 자신을 팔아버리게 될 겁니다. 오빠는 지금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당신은 오빠를 내주게 될 뿐입니다. 기다리십시오. 난 방금 당신 오빠를 만나서 이야길 해보았습니다만 아직은 구제할 여지가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자, 여기 앉아서 우리 함께 잘 생각해봅시다. 내가 당신을 부른 것도, 실은 둘이서 이 문제를 상의해서 좋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자, 어서 앉으라니까요!”
“어떤 방법으로 오빠를 구할 수 있다는 거죠? 정말로 오빠를 구할 수있나요?”
두냐는 자리에 앉았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 옆에 앉았다.
“그건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당신에게, 당신 하나에.” 그는 눈을 번득이면서,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다른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띄엄띄엄 속삭이듯 말했다.
두냐는 깜짝 놀라며 그에게서 멀찍이 비켜섰다. 그도 역시 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 말 한마디로 오빠를 구할 수 있습니다! 내가...내가 오빠를 구해드리죠. 내게는 돈과 친구들이 있습니다. 나는 곧 오빠를 떠나보내겠습니다. 여권도 내가 장만하겠습니다. 두 개, 하나는 오빠 것으로 또 하나는 내 것으로. 내게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모두 수완 있는 친구들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리고 당신 여권도 마련하겠습니다.....당신 어머니 것도.....라주미힌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나도 역시 당신을 사랑합니다.....끝없이 사랑하고 있어요. 제발 당신 옷자락이라도 좋으니 키스하게 해주십시오. 네, 부탁입니다! 나는 당신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 들어도 미칠 지경입니다. 제발 그렇게 하라고 말해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반드시 실행하겠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도 가능하게 해 보이겠습니다. 당신이 믿는 거라면 나도 믿겠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아아, 보지 마세요. 제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세요. 당신은 아십니까, 내 생명이 당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그는 헛소리까지 지껄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그는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냐는 벌떡 일어나서 문 쪽으로 달려갔다.
“열어주세요! 열어줘요!” 그녀는 두 손으로 문을 흔들고 문 너머로 사람을 부르면서 이렇게 외쳤다.
”빨리 문을 좀 열어줘요! 밖에 아무도 없어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독기 어린 조소가 여전히 떨리는 그의 입술에서 서서히 퍼져갔다.
”거긴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안주인은 외출했으니까 그렇게 크게 소릴 질러도 소용없을 겁니다. 공연히 자기 자신만 흥분시킬 뿐이죠.“
”열쇠는 어디 있어요? 당장 문을 여세요, 어서! 비겁한 인간 같으니!“
”열쇠는 잃어버렸습니다. 찾아낼 수가 없군요.“
”아니, 그럼 폭행을 하려는 거군요!“ 두냐는 이렇게 외치자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 한쪽 구석으로 달려가더니, 손에 잡힌 탁자를 방패 삼아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녀는 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으나 상대를 뚫어지게 소아보면서 그 일거일동을 예리하게 지켜보았다. 스비드리가일로프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녀와 대치한 채 반대쪽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을 억제할 만한 여유가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얼굴빛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는 아직도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폭행‘이라고 하셨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만약 폭행이라고 한다면, 내가 취한 조처가 얼마나 완벽했는지 아실 겁니다. 소피야 세묘노브나는 집에 없고, 카페르나우모프네 방까지는 너무 먼 데다가 빈방이 다섯이나 사이에 있습니다. 끝으로 나는 당신보다 최소한 곱절이나 힘이 셉니다. 게다가 나로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중에 고소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설마 오빠를 넘기는 짓은 할 수 없을 테죠? 그리고 당신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젊은 아가씨가 혼자서 독신 남자를 찾아올 때는 다 알 만하지 않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설사 오빠를 희생시키더라도 결국은 아무 증거도 내세올 수 없습니다. 폭행 여부를 증명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거든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비겁한 자식 같으니!“ 두냐는 격분에 떨며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말하십쇼.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입니다. 나 자신의 신념으로도 당신의 말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폭행은 비열한 짓입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만약 당신이 제의한 대로 자진해서 오빠를 구출하려고 결심하셨다. 해도 당신 양심에는 아무 꺼리낌도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아신은 다만 환경에 굴복한 데 지나지 않으니까요. 만약에 이 환경이란 말이 적당치 않다면 폭행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도 생각해보십시오, 오빠와 어머니의 운명이 전적으로 당신 손에 달렸다는 것을. 나는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한평생.....자, 나는 여기서 언제까지나 기다리겠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두냐엑서 여덟 걸음쯤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이제는 무엇으로도 그의 결심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더욱이 그녀는 그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별안간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노리쇠를 올리고 권총을 쥔 손을 탁자 위에 놓았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아! 그렇게 됐군요!” 그는 놀라면서 표독스런 미소를 흘리며 이렇게 외쳤다.
“이쯤 되면 사건의 형세가 역전되어버리는걸! 당신은 내 일을 훨씬 수월하게 해주시는 셈입니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한데 그 권총은 어디서 났습니까? 라주미힌 씨가 구해주던가요? 아니! 그건 내 총이군! 아, 그건 옛날 내 권총이군요! 그때 나는 그걸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그러고 보니 내가 시골에서 가르쳐드릴 영광을 가졌던 사격 연습도 역시 헛소만은 아니었군요.”
“네 권총이 아니야. 네가 죽인 마르파 페트로브나 거란 말이다. 이 악당 같으니라고! 그 집에 네 물건이라곤 하나도 없었어. 난 네가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놈이라고 의심하게 되면서부터 이걸 간수해두었지. 자, 한 발짝이라도 움직여봐라, 당장에 쏴 죽일 테니!”
두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권총을 쳐들어 쏠 자세를 취했다.
“그럼 오빠는 어떻게 되죠? 호기심에 한 번 묻고 싶군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선 채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물었다.
“고발할 테면 어서 고발해! 꼼짝 마! 움직이기만 하면 쏠 테다! 너는 부인을 독살한 놈이야, 난 다 알고 있어, 너야말로 살인자야!”
“당신은 내가 마르파 페트로브나를 독살했다고 확신하는 겁니까?”
“너지, 누구요! 너 자신이 나한테 암시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독약 이야길 하면서.... 네가 독약을 사러 시내에 갔다 온 것도....난 다 알고 있어....너는 전부터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야....누가 뭐래도 네가 틀림없어.....이 악당 놈!”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건 모두 당신 때문이었지....역시 당신이 원인이었단 말이오.”
“거짓말 마! 난 언제나 널 증오했어, 언제나.......”
“아니,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당신은 전도에 열을 올리면서 제정신이 아니던 걸 잊었습니까? 그날 밤 달이 밝은 데다 밤꾀꼬리까지 울고 있었는데.......”
“거짓말 마!” 두냐의 눈에선 미칠 듯한 분노가 번쩍였다.
“거짓말 말란 말이야, 이 천하의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거짓말이라고? 아니, 어쩌면 거짓말인지도 모르지, 거짓말이라고 해둡시다. 여자니까 그런 걸 상기할 필요도 없을 거요.” 그는 피식 웃었다.
“나는 당신이 쏘리라는 건 알고 있어, 귀여운 야수, 자, 쏴보시지!”
두냐는 권총을 쳐들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가신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불길처럼 타오르는 커다란 검은 눈으로 상대방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상대방의 첫 동작만을 조심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토록 아름다운 그녀를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권총을 쳐든 순간 그 눈에서 번쩍이는 불길에 그는 온몸이 타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은 아프도록 죄어들었다.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대디뎠다. 그러자 발사의 음향이 울러퍼졌다. 종알은 그의 머리칼을 스치고 등 뒤의 벽에 박혔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웃었다.
“벌에 쐬였군! 정통으로 머리를 겨누다니....이게 뭐야?? 피 아냐!”
그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따라 가늘게 흘러 내리는 피를 닦으려고 손수건을 꺼냈다. 총알은 두개골 피부를 살짝 스친 모양이었다. 두냐는 권총을 내리고, 공포라기보다는 도깨비에라도 홀린 듯한 얼떨떨한 표정으로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또 무엇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 빗나갔으니 다시 한 번 쏘시오!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조용히 말햇다. 여전히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그 표정은 어딘지 침울해 보였다.
”그러시면 노리쇠를 올리기 전에 당신은 내게 뭍잡히고 맙니다!“
두네치카는 파르르 몸을 떨고, 재빨리 노리쇠를 젖히고는 다시금 권총을 추켜들었다.
”날 건드리지 말아요!“하고 그녀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정말 다시 쏠 거예요.....이번엔.....꼭 죽이고 말테니까.......“
”그야 그럴 테죠.... 세 발짝 거리면 못 죽일리가 없지. 그러나 만약에 죽이지 못한다면....그때는.......“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다시 두 발짝을 내디뎠다.
두네치카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장전이 서툴렀군요. 아니 괜찮습니다! 뇌관이 하나 더 있을 거요. 어서 고치시오, 기다릴 테니.”
그는 그녀 앞 두 발짝 떨어진 곳에 버티고 서서, 야성적인 결의와 정열에 불타는 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냐는 그가 자기를 놓칠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이번 만은 그를 죽일 수 있을 거야, 두 발짝 거리에서........’
그러나 별안간 그녀는 권총을 내던졌다.
”내던졌군!“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놀란 듯이 말하고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무언가가 대번에 그의 가슴에서 떨어져 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공포만은 아닌 성싶었다. 어쩌면 이 순간 그는 거의 그런 것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이해할 수 없는, 더 슬프고 더 침울한 별개의 감정에서의 해방감이었다.
그는 두냐에게 다가서서 한 손으로 조용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아으나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애원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다만 입술이 일그러졌을 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놔주세요!“ 두냐는 애원하듯 말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움찔했다. 그녀의 말투에는 무언가 전과는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럼 날 사랑하지 않소?“ 그는 나직이 물었다.
두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안 된다는 거요?......절대로?” 그는 절망적인 어조로 속삭였다.
“절대로!” 하고 두냐는 속삭이듯이 대답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가슴속에서는 무서운 암투의 한순간이 지나갔다. 형언할 수 없는 눈초리로 그는 두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안간 두냐에게서 손을 떼고 돌아서더니, 급히 창문쪽으로 달려가 그 앞에 멈춰 섰다.
다시 한순간이 지나갔다.
“자, 열쇠요!” 그는 열쇠를 왼쪽 호주머니에서 꺼내 두냐 쪽은 보지도 않고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등 뒤의 탁자 위에다 놓았다.
”집으시오. 그리고 빨리 나가주시오........“
그는 뚫어질 듯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냐는 열쇠를 집으려고 탁자 쪽으로 다가갔다.
”빨리요! 빨리!“ 여전히 꼼짝 않고 선 채 뒤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으며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되풀이했다. 그러나 이 ‘빨리’라는 말에는 그 어떤 무서운 느낌이 서려 있었다.
두냐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열쇠를 집어 들자 문으로 달려가서 재빨리 문을 열고는 방에서 뛰어나갔다. 그리고 1분 후에는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운하가로 달려가서 00다리 쪽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3분쯤 더 창가에 서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돌아서서 사방을 둘러보고는 조용히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었다. 이상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처량하고 슬프고 가냘픈 미소, 절망의 미소였다. 이미 굳어지기 시작한 피가 손바닥에 묻었다. 그는 증오에 찬 눈으로 그 피를 들여다보고는 수건을 적셔서 관자놀이를 닦았다. 두냐가 내던져서 문께에 뒹굴고 있는 권총이 문득 눈에 띄었다. 그는 권총을 집어 들고 살펴보았다. 그것은 조그마한 구식 회중용 3연발 권총이었다. 속에는 아직 탄환 두 알과 뇌관이 한 개 남아 있었다. 한 번은 더 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권총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모자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