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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우금산(禹金山 329m)은 개암사의 병풍역할을 하는 산으로 변한과 백제 멸망의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다.
정상부의 우금산성은 삼국시대 석축산성으로 그 길이가 4km에 육박한다.
신라 장군 위금(位金)이 성을 쌓아 위금산성, 삼한시대에 우(愚)와 진(陳) 두 장군이 성을 쌓고 주둔해 우진산성으로 불린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성은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무렵, 김유신 장군과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유적지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비극의 역사 현장인 셈이다.
하나의 석성을 놓고 여러 이름이 있지만 우금산성으로 부르는 게 좋을 듯하고, 전체를 부를 때는 우금산, 정상의 바위는 우금암으로 부르면 무난하겠다.
우금산은 변산반도 국립공원 구역이지만 이정표 등 편의시설이 부족하여 아쉽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암사 입구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김유신 장군 사당이 있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편으로 소정방과 김유신이 백제의 마지막 저항군을 섬멸하고 축배를 들었을 것이고, 사당은 그 후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개암사(開巖寺)는 조계종 선운사의 말사로 백제 무왕(634년) 때 묘련왕사가 창건했다.
개암의 유래는 변한의 문왕이 난을 피하여 성을 쌓을 때 우(禹). 진(陳) 두 장군에게 왕궁의 전각을 짓게 하고, 동쪽은 묘암(妙巖), 서쪽은 개암(開巖)으로 불렀다.
그 뒤 원효와 의상대사가 우금암 밑 우금굴에서 수도하며 중수했다.
1314년(고려 충숙왕) 원감국사가 송광사에서 와서 30여 동의 건물을 세우고 대승불교의 경전인 능가경을 가르쳤기에 능가산(楞伽山)으로 부르고 있다.
일주문에도 ‘능가산 개암사’ 현판이 걸려있고, 내소사 또한 ‘능가산 내소사’이다.
그러니까 변산(卞山)의 또다른 이름이 능가산(楞伽山)이고,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義湘峰)을 네이버지도에는 변산으로 올려놓고 있다.
개암사는 조선 중기의 건물인 대웅전(보물 제292호)과 괘불탱(보물), 지방 유형문화재로 석불좌상과 동종이 있다.
중건사적기에는 백제 부흥군이 주류성에서 왜병과 나당연합군의 전쟁을 기록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산행은 상서면 지석리 만적사에서 출발하여 나즈막한 능선으로 남하하다 우금암에서 개암사를 좌측으로 끼고 한바퀴 돈다.
중간에서 개암사주차장으로 탈출하는 길이 여러갈래 있으니 탄력적 산행이 가능하다.
산행궤적
11km가 조금 넘는 거리를 5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참고로 필자는 유산(遊山) 스타일이라 후미에서 좀 밍그적 거린다.
고도표에서 정상석이 있는 봉우리(331m)만 우뚝할 뿐 우금산(329m,우금암)은 오르지 않았으므로 높이는 의미가 없다.
우금암 일대를 디테일로 확대하였다. 정상일대에 안내판이 없어 아쉬웠기에 자세히 올려보았다. <빨간 화살표는 필자의 동선.>
참고 개념도(월간 산)에 필자가 임의로 그려 넣었으므로 정확하지 않다. 개념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네비에 '지석리 마을회관'을 입력하여 지석마을 표석이 있는 지석마을 입구에서 100여m 더 진행하다 버스를 세웠다.
버스가 선 지점은 '초연목장'이고, 진행방향(만적사)은 초연목장 좌측으로 난 길로 바라보이는 낮은 산자락.
초연목장 맞은 편엔 아무런 표식없는 지석묘가 덩그러니 오랜 연륜을 간직한 채 누워있다. 아마도 마을이름 지석리가 생긴 유래일 것.
<돌아보는 모습.> 한마음은 따로 출발 세러머니가 없다. 그냥 차에서 내리면 목적지를 향하여 알에서 부화한 갓난 거북이처럼 본능적으로 산으로 붙는다.
호남지방엔 아직 보리와 밀농사를 짓는다. 고창의 청보리밭은 유명세를 떨친다. 어릴적 보리살이 밀살이의 추억이 떠올랐다. 딱 지금이 타이밍으로 적기다.
낮은 산자락으로 붙는 길엔...
꾸지뽕.
5분여만에 숲속으로 들어...
낡은 가옥 한 채가 보이더니...
마당바위 안내판이 나온다. 마당바위는 '월간 산'에서 말하는 '기차바위' 인 듯.
100평 넓이의 바위에 보이는 마차바퀴 자국은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소정방을 만나러 마차를 타고 갈 때 생긴 자국이라 하고, 바위아래 만적사에는 옛 절터의
주춧돌이 남아있어 오래전부터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춧돌 옆엔 '석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지만 확인하지는 못했고, 그 옆에서 나는 약수는 용천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이 마당바위 옆 1m 크기의 굴입구에서 불을 때면 1km 떨어진 하서마을에서 석달 열흘만에 연기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나무꾼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신선들의 바둑구경을 하다 내려와보니 쑥대만 무성하다하여 '숙실마을'인데, 이 말이 곧 '애곡리(艾谷里)'인 것. * 쑥 애(艾)
만적사의 스님은 연로하신 노(老) 스님이라 병환으로 절집을 비어놓은 듯해 퇴락해 보인다.
산길은 만적사 우측 마당바위로 바로 올라붙는다.
상서 방면에서 능선으로 붙는 길은 또 있지만 이 코스야말로 바로 마당바위를 통하여 붙을 수 있으니 으뜸일 것.
* 월간 산의 개념도엔 기차바위(마당바위)가 주능선에 표기되어 있다. 이는 잘못된 것.
아주 멋진 암릉으로 릿지화가 아니더라도 일반등산화에 착착 달라 붙는다.
육산인 산세, 낮은 고도에 이렇듯 웅장한 대슬랩(slap)이라니...
우금산의 초입에 이만한 볼거리도 없었다면 김빠진 맥주.
마당바위 이후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듯 산길은 대체로 뚜렷한 편이지만 묵어있어 잡목 가지손들이 옷자락을 잡아 당긴다.
채 10분이 되지않아 올라선 주능선상의 196.8m봉우리. 이 능선 끝자락으로 내려다보니 등로는 제법 반듯해 뵌다.
첫봉인 196.8봉에서 조금 내려섰다 다시 치켜 오른 273.3m 삼각점 봉우리.
아랫마을이 '용서리'라 '서래야'님 버전으로 '용서봉'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 분이 다녀가며 코팅지를 붙였나?
이 봉우리는 독도주의 지점. 무심코 직진방향으로 가다보면 알바. 예전 필자가 소속한 마산의 모 산악회 시그널이 알바코스로 달려있다.
무전으로 '빽'이라고 하였지만 선두 준족 몇명은 이미 알바를 하고 말았고...
족적은 분명하지만 산길은 대체로 거친 편.
선두가 직진방향으로 가다 되돌아 오는 모습. * 조그만 나무 막대기로 휀스를 하였지만...
아무런 이정표가 없으니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를 이용해야만 최소의 알바를 면할 것.
산사면을 좌로 돌다 우측 어께쭉지위의 조그만 봉우리(261.5m)를 다녀오기로 했다.
261.5봉엔 철지난 고사리가 지천.
다시 되돌아 내려와 임도(해발140m)에 내려섰다. 그 바람에 후미팀들과 한 팀을 이루게 되었고...
임도를 조금 걸어 작대기로 걸쳐놓은...
화살표 방향 산자락으로 다시 올라 붙는다.
성곽의 흔적인 듯 석축이 무너져 있더니...
잘록한 창수재(장수재, 200m)에 닿는다. 창수재는 아랫마을 창수동의 고개.
조릿대구간을 통과하자...
본격 우금산성으로 든다. 좌측 오름길로 조금 올라 보았더니...
터지는 조망. 서쪽으로 펼쳐진 바위병풍은 지난번 다녀온 쇠뿔바위봉. 그 아래는 창수동의 '가는골저수지'
'개암산천'에서 올라오는 능선 끝엔 '개암저수지'
금세 산성의 윤곽이 분명한 우금산성에 올라선다.
나아갈 방향에 우금암이 우뚝하더니...
동행하는 형규회장이 번쩍 손을 치켜든다.
능선 우측으로 쇠뿔바위능선이 하늘금을 그리고...
비켜보면 나즈막한 산들이 바다로 해달린다.
우금산의 실질적인 정상(331m)이지만 그 위용이사 우금암에 비길 순 없을 것.
암증맞은 우금산 정상석은 호주머니에 넣고 내려가도 될 만한 반댓돌.
삼각점이 그를 지키고 섰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도드라진 바위턱이 보여...
비켜돌아 조금 당겨 보았더니 정수리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서 암봉이라하면 이것.
우금암일 것. 아주 기운찬 산세로 다가온다.
그 뒤로 이어지는 오똑봉우리는 삼예봉능선.
중앙 계곡으로 금강정사는 숲에 가렸고, 개암저수지 건너 비산비야(非比非野)의 산줄기는 변산지맥. 좌측에 유독 도드라진 뾰족봉우리는 주산(舟山 232)인 듯.
책을 쌓아놓은 듯한 바위. 이 바위를 '책바위'라 명명했다.
쇠뿔바위능선 좌측 끝자락 뒤로 살짝 드러난 시설물이 있는 봉우리를...
당겨보니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
우금암이 막아선다. 지금 필자가 선 지점은 사거리. 우측 방향이 개암사와 원효굴, 좌측 방향은 금강정사와 쌍둥이 닭집 방향.
필자는 우금암 바위벽에서 우측으로 내려보다 다시 좌측으로 우회하여...
우금암을 좌로 돌았다. 사진은 우측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 모습.
우금암을 좌로 돌아 반대편 성곽의 모습.
우금암을 돌아 보았더니 그 위용이 대단.
개암산천(B팀)에서 올라온 민재씨가 전망바위에서 반긴다.
내려다보니 개암사의 전각들이 아늑하게 자리잡았다. 그 좌측으로 A팀들이 하산할 임도와 산허리엔 나중에 걸어갈 임도가 선명하다.
개암사를 당겨보고...
다시 우금암을 돌아 올려보았더니 꼭대기에 한 사람(▽)이 올라가 있다.
살짝 당겼더니 셀카를 이용하여 인증샷을 하고 있다.
이제 다시 같은 방향으로 돌아 아까 지나간 사거리에 섰다.
초록색 화살표는 우금산 정상석(만적사) 방향으로 우리가 지나온 길, 파란색 화살표는 금강정사를 거쳐 쌍둥이 닭집, 빨간 화살표 방향으로 돌았더니...
작은 동굴-베틀굴-이다. 빨간 화살표 방향의 바위를 돌아 올라야만 우금암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는 선등자(先登者)의 이야기.
컴컴한 굴안으로 들어가 후랏쉬를 터뜨려 촬영한 뒤...
돌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진행하다 벤치가 있는 삼거리에서 파란 화살표 방향으로 50여m 이동하면...
마치 코끼리 콧구멍을 닮은 듯한 원효굴.
안으로 들어가 같은 방법으로 촬영. 오래전엔 원효대사가 수도했다지만 그 후엔 누군가가 기도한 듯한 기도터.
굴안엔 석간수도 나오고...
밖으로 돌아본 모습.
우금산성 안내판.
이제 개암사로 바로 내려가는 민재씨와 헤어져 삼거리로 돌아 나왔다.
함께하는 한덤님은 혼자 보내가 거시기하다며 동행하였고...
이후 등로는 고도가 거의 없는 룰루랄라 산사면을 따르는 길.
'8-02' 말뚝이 이정표를 지나고...
발자국 갈림길 삼거리에서...
조금 진행하다 만난 바위 전망대에선...
개암저수지와 개암사가 내려다 보여...
살짝 당겨보았더니 고릴라 얼굴을 한 바위가 먼저 카메라에 잡힌다.
다시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조금 나섰더니...
바위지점에서 의상봉이 조망되어...
조금 당겨보았다.
삼예봉능선도 조망된다.
등로 옆 세멘트 구조물은 식별 불가하고...
출입금지 사립문은 열려있다.
임도를 만나 크로스하여 직등을 하기로 하였지만 출입금지.
임도를 따라 월정약수 방향으로 가기로 하였다.
뭔 출입금지 판이고?
무슨 꽃? 스승님한테 물어야 알란가?
좌측으로 보이는 우금암을 당긴 사진..
앞서간 일행들을 만났다. 사거리 끝 벤치가 있는 뒤에 월정약수.
월정약수로 내려가 보았더니...
경고문이 있어...
확인해보니 먹지 말라는 말.
이 무슨 꽃?
후반부의 계획은 자연히 접히고 말아.
임도를 통하여 개암사주차장으로 직강하는 수밖에.
이 무슨 꽃?
임도는 아주 잘 포장된 길.
체육시설을 지나...
우리 버스가 보이는 지점에...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의 행적비가 서 있다.
1895년 2월1일에 체포되어 총살된 우제 김기병은 65세의 고령으로 동학농민군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김기병은 1831년 상서면 내동 출생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 준수하며 효성이 지극한 우국충정의 명망이 높던 인물이었다.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하서면에서 500명의 농민군을 취합 해창의 무기고를 접수하여 혁명군으로 무장, 부안관아를 접수하였다.
그 후 황토현 전투, 전주성 점령 및 공주 우금치 전투에도 함께 하다가 패퇴하여 부안에 잠입, 동지를 규합하며 저항을 하다가 밀고를 당하여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1895년 2월 1일 부안읍 동문(현 동중리)밖의 형장에서 부하 8명과 함께 비통하게 총살되었다.
행적비를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서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 능선 자락을 살펴본다. 처음 안내하기는 이 능선으로 길을 찾아보라고 하였기 때문.
시간의 제약상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능선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족적이 화살표 방향으로 가늠된다.
주차장에는 벌써 삼삼오오 뒷풀이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필자는 개암사로 향한다. <사진은 돌아본 탐방지원센터>
새로 잘 지어진 일주문의 석기둥엔 거북이의 몸뚱이에 용두(龍頭)가 받치고 있다. 현판엔 '능가산개암사(楞伽山 開岩寺). 글쓴이는 확인할 수 없었고...
현판 위로 조각된 십이지신((十二支神).
돌아 보았더니 안쪽에도 마찬가지.
개암사로 올라가는 길옆엔 전나무가 식재되어 있고...
계곡을 따라 녹차밭이 형성되어 있다.
불이교를 건너...
사천왕문을 지나며 편액을 살펴본다.
낙관의 송원(松原)은 수덕사의 주지를 역임하시고 덕숭총림의 수좌로 정진하고 계시는 설정 송원(雪靖 松原 1944. ~ )스님을 말한다.
스님은 14세에 수덕사에 입산하시어 1955년 원담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셨다
아직 현판도 걸리지 않은 새 누각. 향긋한 나무내음이 새 전각임을 웅변한다. 누마루 2층에는 문을 달아 겨울철 보온을 대비하였다.
대웅보전 뒤로 아까 올랐던 우금암이 올려다 보인다.
한발 더 가까이 올라...
개암사 대웅보전(開巖寺大雄殿 보물 292호)은 효종 9년 밀영선사와 혜징선사가 절을 재건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1783년(정조 7) 승담선사가 중수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방형으로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이다.
팔작지붕을 받치고 선 활주가 어쩐지 힘에겨워 보인다.
전각들 앞으로 보이는 당간(幢竿)과 수조(水槽).
열린 대웅전 옆문으로 합장.
처마밑 화려한 연꽃 문양과 문살문양.
개암사 대웅전의 우물천장에 용들의 아우성?
대웅전의 안내판.
개암사 당간지주.
'청림리석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은 청림사(靑林寺)지에 있었던 불상을 개암사 경내로 옮겨왔다.
이 불상은 원래 목과 몸체 부분이 떨어져 있었는데 최근에 복원하였다.
머리의 두건은 어깨와 등부분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갠 뒤 양 손의 엄지 손가락을 곧게 펴 맞대고 있다.
모아진 손바닥으로 구슬을 감싸 쥐고 있어서 지장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석 받침대 위에 연꽃잎을 조각한 8각형의 대좌(臺座)를 올려 놓았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청림리 석불좌상의 안내판.
개암사 응진전의 '16나한상(지방유형문화재)'.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불교의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열 여섯분을 조각한 이 불상은, 조선 숙종 3년(1677년)에 조성한 것으로,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봉안하였으며, 그 좌우로 금강경, 새끼호랑이, 염주, 경전 등을 들고 다양한 자세의 나한들을 배치하였다.
나한들은 각이 진턱에 넓적한 머리의 모습 등 강인한 인상을 준다. 나한의 크기는 대략 92cm에서 98cm 사이로 옷은 최근에 색칠을 다시 한 것이다.<자료>
'개암사 영산회괘불탱 및 초본(보물 제1269호)'은 확인하지 못했다.
종각 안엔...
1689년(숙종 15) 제작된 '개암사 동종(開岩寺 銅鐘 전북 유형문화재 126호)'
정상의 용뉴(龍鈕 : 종의 꼭지부분 장식)는 단룡(單龍)의 용체로 감싼 용통(甬筒)을 갖고 있으며, 네 발로 정상을 딛고 서 있는 형태이다.
주조연대가 확실한 명문이 양각으로 명기되어 있는데, ‘康熙二十八年己巳四月日開巖寺大鍾重五十斤(강희28년기사4월일개암사대종중50근)’이다.
강희 28년은 조선 숙종 15년(1689)이며 개암사의 동종으로 주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자료요약>
안내판.
지금부터 400여년 전 심신이 괴로울 때 개암사를 자주 찾은 여인이 있었다.
바로 매창(梅窓)이다.
매창은 부안의 아전 이탕종과 기생사이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기생수업을 받았다.
천민출신 유희경, 양반출신 허균 등과 정을 나누웠지만 자신의 처지를 알고 체념하였다.
그녀는 사랑과 그리움, 외로움에 대한 수백 편의 시를 지었지만 불행하게도 57수만 개암사 목판에 새겨져있다고 한다.
그녀는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 37세에 생을 마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권율 휘하에서 의병을 모아 적진을 누비게 된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패전 소식만 잇달았다.
애타게 그리운 임의 무사를 기원하기 위해 수시로 개암사를 찾은 매창이 그때 지은 시조 '이화우(梨花雨)'가 전해져 온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 난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 이화우(梨花雨) : 비처럼 흩날리는 배꽃
배꽃 떨어지는 봄에 임과 헤어져 낙엽 지는 가을까지도 한시도 임을 잊지 못하고 잇는데, 임은 과연 나를 그리워할까 하는 심정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