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젋은 시절의 방영진 작가 | |
방영진은 1939년 서울 영천에서 제화점을 하던 집안의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다닐 적부터 만화에 재미가 들려 있던 그는 중학생이 되면서 김용환, 김성환 씨의 작품을 사 모으며 본격적으로 만화가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한다. 고교 시절에는 같은 지역 출신으로 후에 만화가가 된 노석규, 이우헌과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고교를 졸업할 때쯤 방영진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노석규가 당시 신문만화를 그리던 김경언 씨에게 편지를 띄워 답장을 받고는 나보란 듯이 그의 문하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방영진도 평소 존경하던 신동헌 씨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는 답장이 오기까지 기다리지를 못하고 직접 그의 집을 찾아갔다.
방영진은 20세 초기부터 퇴행성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아서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그의 집을 찾아간 이래 그는 신동헌 씨 밑에서 데생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홍대 학생인 이재학은 훗날 ‘검신 검귀’ 등 무협만화 작가로 성공했고, 애니메이션의 꿈을 품고 있던 신능파는 지금은 넬슨 신이란 예명으로 ‘트랜스포머’ 애니메이션의 제작감독 겸 A콤프로덕션과 ‘애니메이툰’ 정보 잡지의 사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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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으로 만든 인기 캐릭터들, 오른쪽으로부터, 약동이, 땡이, 라이파이, 두통이 | |
그리고 토속만화 지망생인 황정희는 나중에 ‘심청전’과 ‘춘향전’으로 유명해졌고 신문만화가 지망생인 이우헌은 ‘덜렁이’로 유명세를 탔다. 이렇게 모두들 열성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것에 그는 크게 자극을 받았다. 신동헌 씨는 일주일에 한번은 누드크로키를 하는 시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월 회비는 20만원 정도였으나 1년을 거기서 공부했다.
그리고 신능파를 통해서 좋은 교재를 구입하는 방법을 터득, 일본만화의 동향을 파악하고 영국의 ‘펀치’나 ‘뉴요커’ ‘딕 트레시’ ‘찰스 아담슨’ 등 유명한 작가들의 그림을 사 모으기도 했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보이지 않는 경쟁 속에서 데뷔할 날을 위해 전력을 쏟았다.
그 시절엔 출판물도 적었을 뿐 아니라 쪽수도 한두 쪽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신인들에겐 게재될 기회를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 같았다.
하지만 1959년 만화잡지에 투고한 ‘투명인간’이 좋은 반응을 얻게 되자 ‘새벗’ ‘칠천국’ 잡지사에서 청탁이 들어오게 되었다. 씨는 평소 김내성 씨의 소설 ‘청춘극장’과 셜록 홈즈, 루팡, 괴도 20면상 등 외국 번역판을 수없이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탐정
약동이’를 구상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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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병고의 몸으로 방영진씨가 마지막 남긴 캐릭터들 아래 : <약동이와 영팔이>, <명탐정 약동이> |
그러나 그는 푼돈이 나오는 잡지 쪽보다 목돈이 나오는 단행본 쪽에 승부를 걸 것을 선택했다. 크로바문고사에서 발간한 추리만화 ‘명탐정 약동이’의 인기는 단숨에 급상승했다. 포기 직전에 있던 범인을 비상한 추리력으로 체포하는 약동이 시리즈는 편수를 거듭하면서 인기가 올랐으므로 처음 계획을 바꾸어 대장편으로 이어나갔다.
아마 한국 만화사에서 추리만화로 대성공을 거둔 작가는 오직 방영진 씨 한 사람 뿐일 것이다. 한때는 비슷한 그림에 이름까지 박경신으로 붙인 모방 작품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훗날 ‘약동이와 영팔이’ 등 생활 명랑만화도 출간하여 그런 대로 인기작이 되기는 하였지만 역시 그의 장르는 독보적인 추리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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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엘런포우 <황금충>(1955년) | |
추리물의 원조는 미국의 E 엘런포우의 소설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 ‘검은고양이’ 등으로 벌써 2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뒤를 이어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는 변장술, 암호 해독, 호신술, 비상 소형휴대기 소지, 위기의 순간 동물 활용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탐정작가들을 위한 교재로 불린다. M 루블랑의 ‘괴도 루팡’은 미리 예고하고 훔쳐 가는 호쾌한 도둑을 등장시켜서 재미를 준다. 그리고 E 플레밍의 ‘007’, 히치콕의 ‘사이코’ ‘형사콜롬보’ 등 추리영화 시리즈도 오랜 인기를 유지해 왔다. 추리만화로 시작한 미국의 ‘베트맨’ ‘딕 트레시’는 현재도 대단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어 모두 연구해 볼만한 대상이다.
희랍시대의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사자’도 추리물 최초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고 당나라 시대의 명재판관 포청천 역시 추리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추리작품을 이어 창작하는 후배는 없다. 이웃 일본에는 ‘소년탐정코난’ ‘소년탐정 김전일’등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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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지막 작품 <미나 행진곡>, ‘여학생’지에 12회 연재 | |
병에는 장사가 없다고, 방영진 씨는 지병이 악화하자 작품을 중단했다. 그는 괴로움을 잊기 위해 기타를 손에 들었다. 씨는 학창시절에 밴드부에 속해 있어서 음악엔 소질이 있었다.
음악을 통해 조금씩 삶의 활기를 되찾게 된 그는 방송국에 곡을 내기도 했고 창작동요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렇게 밝은 마음으로 노래하던 그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더 이상 이어 나가지는 못한 채 1997년 마침내 기타를 옆에 놓아두고 세상을 하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