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최승아
DNA는 스투키, 피아노NO 1 외
가방에는 언제나 그녀의 양손이 무겁게 매달려있다 가벼우면 허전하기 때문이라며 안개 낀 날 도수 높은 안경을 쓴다 안경알을 닦아도 여전히 형광등은 흐릿하고 계절은 전속력으로 그녀를 앞질러간다 과감하게 또는 화려하게 기분을 악세사리처럼 갈아 끼워보지만 시험기간은 사계절 내내 계속된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드롭커피는 잔에 닿기도 전에 식어있다 한낮에도 길고 음습한 복도에는 풀지 못한 문제로 빼곡하지만 뚜껑을 연지 오래된 피아노는 언제 휘발할지 모르는 소리를 담금주처럼 가둬놓고 있다 고개를 들면 가끔 구름 몇 송이 피었다지는 게 보인다 구석에서 묶음 째 천정을 떠받치느라 두루마리화장지는 종일 허리가 휘어져있다 닦아야할 곳이 점점 늘어나는 날은 먼지 뿌연 이면이 먼저 다가온다 뾰족한 투구를 눌러쓰고 스투키는 언제나 찌를 곳을 찾아 술래가 되어가지만 한 블록 뒤에 숨은 소리는 소음튜닝을 한 바이크에 화들짝 놀라 공회전을 한다 피아노에서는 스투키NO, 1번이 신음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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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잠
아버지를 갉아먹던 열꽃은 밤마다 뽕잎에서 기어 나온 고치 같았다 잘못 뽑은 사랑니 때문에 거울 속에도 보이지 않던 실은 철사나 솜뭉치로 때로는 계란 껍질로 둔갑한 채, 끊임없이 아버지를 옥죄어왔다 신경줄이 엉키자 잠의 매듭을 풀지 못한, 정신병동 흐릿한 불빛은 꺼질 듯 말 듯 사경을 헤매었다 완전변태를 꿈꾸던 나는 한 겹의 허물도 벗겨내지 못한 불완전애벌레, 사이렌이 새벽을 긋고 지나갈 때마다 잠의 긴 터널 속에서 두 귀를 틀어막았다 길어진 불면의 그물코 사이로 눈두덩이 퉁퉁 부어오른 내가 보였다 “아버지 그만 생니가 빠져버렸잖아요” 열네 마디 누에고치 속에서 한 올의 실도 뽑아내지 못한 나는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잠의 언저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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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아(최분숙) 2012년 《시와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오프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