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년 8월 25일 - 1990년 10월 14일)은 미국의 지휘자, 작곡가, 작가, 음악 강연자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지휘자 중 전 세계에 걸쳐 명성을 얻은 첫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뉴욕 필하모닉에서 장기간 음악 감독으로, 세계의 저명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캔디드, 원더풀 타운, 온 더 타운을 쓰기도 했다. 1954년에서 1989년까지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 시리즈를 위시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다수에 출연한 첫 번째 고전음악 지휘자로 고전 음악 대중화에 기여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뛰어난 피아노 테크닉을 구사했고 다수한 교향곡과 다양한 연주회용 음악을 남겼다.
어린 시절 편집 1918년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러시아 Rovno에서 이주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레너드 번스타인의 부친 샘 번스타인은 회사원이었고 처음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음악에 관심을 보이자 반대했지만 그러면서도 종종 루이스(아들의 별칭)를 오케스트라 공연장에 데려갔다. 한번은 번스타인이 피아노 공연을 듣고 곧 마음이 사로잡혀서 곧장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기간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보스턴 라틴 스쿨에 다녔다.
대학 편집 보스턴 라틴 스쿨에서 졸업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월터 피스턴에게 음악을 배우고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프리츠 라이너에게 지휘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커티스에 있는 동안, 레너드 번스타인은 Helen Coates와 Heinrich Gebhard에게 피아노도 배웠다. 다이나에게 지휘하는 방법을 배웠고 쿠세비츠키에게서도 지휘하는 방법을 사사(師事)하였다.
업적 편집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교육자로서 크게 인정받았고 대중에게는 뉴욕 필하모닉에서 장기간 음악을 감독해서 특히 잘 알려진 레너드 번스타인은 세계에서 유수한 여러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고 현대의 위기를 표현한 교향곡이나 영화 음악을 작곡한 사람으로서도 명성이 드높다. 특히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영화에 삽입된 음악을 작곡한 사람으로서 특히 주지(周知)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교향곡 3개, 오페라 2개, 뮤지컬 음악 5개 등 다수의 작품을 썼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정치 성향은 확고한 좌파였지만, 다른 동시대인과 달리 레너드 번스타인은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에 블랙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다.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초반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흑표당(Black Panther Party)[1]을 돕고자 자선공연도 했고 베트남 전쟁을 공개로 반대했다.
로진스키에게 인정받아 뉴욕 필하모니의 부지휘자가 되고 1943년 11월에, 아픈 브루노 발터의 대역으로 뉴욕 필을 지휘해 지휘자로 데뷰했으며, 즉시 성공했다. 1949년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올리비에 메시앙이 작곡한 튀랑갈릴라 교향곡을 세계에서 초연했다. 1957년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텔아비브에서 Mann Audiotorium의 개관 공연했으며, 그곳에서 많이 녹음했다. 1960년대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공영 텔레비전을 위한 《청소년을 위한 연주회》 시리즈로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레너드 번스타인가 한 작곡은 유대교 전례 음악(특히 레너드 번스타인가 지은 교향곡 제1번과 제3번, 치체스터 시편), 구스타프 말러, 조지 거슈윈, 레너드 번스타인의 친구 에런 코플랜드에게서 크게 영향받았다.
1989년의 크리스마스(12월 25일)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식 일부로서 연주했다. 공연은 20개국 이상, 청중 약 100만 명에게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그때, 레너드 번스타인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 가사를 바꿔서, 단어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꾸어 사용했다. “나는 베토벤이 우리에게 그 사람의 축복을 내렸으리고 확신한다”고 레너드 번스타인이 말했다.
많은 음악가 사이에서 크게 인정받는 지휘자였고 특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정기로 객원으로서 지휘하면서 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던 레너드 번스타인은 특히 구스타프 말러, 에런 코플런드, 요하네스 브람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당연히 레너드 번스타인의 자작곡에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으나 몇몇 사람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양식이 신파조인 데다가 짜증 나게 하고 주의가 산만하다고 생각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지휘하면서 춤추고 발작하듯이 기뻐하곤 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개인사는 지휘자로서 영광, 작곡가로서 생산성, 열정 넘치는 정치활동으로 말미암은 비판 사이에서 고통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레너드 번스타인은 가족을 향한 헌신과 양성애 성향 간에서 충돌을 느꼈다고도 전하지만, Arthur Laurents(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을 조력한 사람)는 《The Gay Metropolis》의 저자인 Charles Kaiser에게 레너드 번스타인은 단지 “혼인한 게이였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전혀 충돌을 느끼지 않았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단지 게이였다”고 말했다. 다른 친구 Shelly Rhoades Perle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전기(傳記)를 쓴 사람인 Meryl Secrest에게 자신은 “레너드 번스타인가 성(性)은 남성을, 감성은 여성을 원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만년(晩年)에 우울증으로 고생하기도 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 배우 Felicia Montealegre와 1951년에 혼인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Felicia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삼 번째 교향곡인 《Kaddish》의 1960년대 뉴욕 필 연주에 화자(이스라엘 출신의 전설 같은 Hanna Robina가 공연했던 역할)로 참여했다. 자상한 아버지인데 음악계에서 난잡한 성생활로 악명 높았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여러 동성애 관계가 Felicia 에게 알려지자 1976년에 별거했고 5년 전부터 파트너였던 작가 겸 음악 감독 Tom Cothran과 동거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1977년 Felicia가 폐암을 진단받자 그 여자에게 돌아와 그 여자가 죽을 때(1978년 6월)까지 간병했다. Tom Cothran은 1981년에 AIDS로 죽었다.[2]
미국 대통령 닉슨을 암살하려 시도했던 정신병자 Samuel Byck은 자신의 계획의 세부를, 한 사람으로서도 지휘자로서도 존경했던 번스타인에게 보냈었다고 한다.
1990년 8월 19일 텡글우드에서 벤자민 브리튼의 <Four Sea Interludes> 와 베토벤의교향곡 제7번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생애에서 최후로 지휘하고서 동년 10월 14일 폐렴으로 죽은 레너드 번스타인의 유해는 뉴욕 브루클린의 그린우드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