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사라진 옛 마을에서 사람의 향기를 간직하고 살아 남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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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이 투하된 뒤에도 살아남았을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약모밀의 꽃. |
[2011. 9. 19]
맨날 그렇게 하는 것처럼, 창문을 열어 젖히고 밤 사이에 앙금 되어 내려앉은 작업실의 적막을 아침 바람에 실어 날려보냅니다. 어제부터 몰라보게 차가워진 줄은 알았지만, 아침 바람은 잠바를 벗어나온 팔뚝을 서늘하게 합니다. 맑은 물을 천천히 끓여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내리자 작업실에 한가득 진한 커피 향이 차오릅니다. 차가운 바람, 커피 향, 라디오 음악이 모두 좋습니다. 가을이군요.
추석 명절은 잘 지내셨나요? 고향 집은 어떠셨나요? 모두 즐겁고 풍요롭게 추석 명절 보내셨겠지요. 명절 연휴 동안 그리도 무덥던 날씨가 이제는 차가워졌습니다. 아침 트위터에서 '가을이 지각한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왔나보다'는 글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분 말씀대로 헐레벌떡 뛰어온 가을입니다. 식물들에게는 햇살 모자란 여름이었지만, 이 가을은 풍요롭게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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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청원 연제리 모과나무. 모과나무 가운데에는 유일한 천연기념물입니다. |
명절 전에 충남 청원 지역을 답사했습니다. 추석 앞의 혼잡한 교통 사정을 피할 요량이기도 했지만, 명절 때면 떠오르는 나무가 있어서였습니다. 청원 연제리 모과나무가 그 나무입니다. 처음 이 나무를 만난 건 십 여 년 전입니다. 우리나라의 모과나무 가운데에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몇 그루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때만 해도 그리 유명한 나무는 아니었지요.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건 올 1월이었지요.
그때 나무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어요. 요즘이라면 길을 잘 찾아주는 네비게이션이라는 게 있지만, 그때는 그런 요상한 물건이 나오기 전이었지요. 나무는 거미줄처럼 꼬이고 꼬인 골목으로 엮인 한적한 시골 마을 뒷 동산에 서있었기에 자동차로는 접근할 수 없고, 골목 길을 한참 걸어서 찾아가야 했지요. 어렵게 나무를 찾아간 저녁 어스름, 나무 곁에는 마을 노파 세 분이 앉아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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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리 모과나무는 오래 된 나무이지만, 여전히 열매를 튼실하게 매답니다. |
그때도 추석을 며칠 앞둔 때였습니다. 노파들은 수다스럽다고 해도 좋을 만큼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 분이 동시에 늘어놓는 이야기는 수신인에게 도달하지 않고 그냥 허공으로 흩어졌습니다. 노파들도 수신인을 염두에 두지 않는 듯했습니다. 노파들 곁에 주저앉았지만, 도무지 한 분의 이야기조차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공으로 흩어지는 말들 사이에서 '아이들, 애들, 며느리, 딸, 손주, 아들' 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추석을 앞둔 때여서 뿐은 아니었을 겁니다. 자식들을 대처로 내보내고 고향 집을 지키며 살아가는 노인들의 삶에서 그들에 대한 기다림, 그리움은 아마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같은 하늘 같은 골목에서 살을 맞대고 사는 분들이 굳이 쉬지 않고 내놓을 수다가 뭐 그리 많겠습니까. 그분들에게 매일 새로워지는 건 오로지 대처로 나간 자식들 향한 간절한 기다림 뿐이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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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를 간직하고 우람하게 하늘로 솟아오른 연제리 모과나무의 줄기. |
그리고 한 동안 이 나무를 찾지 못했어요. 당연히 노파들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할 겨를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5년 쯤 전에 다시 이 나무를 찾았습니다. 당연히 나무 곁에서 만났던, 조금은 우스운 노파들의 수다 생각도 짊어지고 찾아갔지요. 그런데 아뿔싸! 나무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분명 수첩에 적어둔 번지 수도 틀리지 않았는데, 그 수다한 노인들이 깃들어 살던 다정한 마을은 통째로 사라지고, 황량한 공사판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오송생명과학단지 조성 공사 중'이라는 대형 입간판을 바라보며 질퍽거리는 흙길을 몇 차례를 돌아다니다 겨우 나무를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마을은 없었습니다. 나무를 찾아가면서 나무보다 먼저 떠올린 노파들을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때 그대로 살아 남은 건 오로지 한 그루의 모과나무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노파들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어느 낯선 곳에서 보내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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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할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숱한 옹이와 상처 자국을 남긴 연제리 모과나무의 줄기. |
나무 줄기에 담겨있을 노파들의 수다를 귀가 아니라 눈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날 뒤로, 연제리 모과나무를 생각하면, 자식을 그리워 하며 끊임없이 말들을 늘어놓던 노인들의 안부가 먼저 떠오릅니다. 십 년 전에 뵈었던 노인들이니, 그 분들의 건강도 염려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자식들과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도 궁금하고요.
지난 추석에 연제리 모과나무를 찾은 건 그래서였습니다. 물론 노파들의 자취를 찾아낼 수야 없지만, 그저 떠올리고 싶었습니다. 연제리에 조성된 '오성생명과학단지' 조성 공사는 마무리됐고, 지금은 잘 닦인 터에 공장 건물들이 한창 들어서는 중입니다. 그리고 나무 주위로는 새로 나무를 더 심고, '모과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공원을 조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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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얼룩이 선명하게 드러난 연제리 모과나무의 멋진 피부. |
공원에는 아담한 정자도 하나 새로 지었고, '모과울'(과학단지 조성 이전의 마을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큼지막한 비도 세웠습니다. 정돈된 모습은 그리 나쁠 것 없지만, 사람의 향기가 사라져 나무는 몹시 외로워 보였습니다. 옛 사람의 흔적도 그렇지만, 아직 단지 조성 초기 단계여서, 공원을 찾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명절 전에 조금은 우울해진 마음으로 연재 칼럼을 써야 했습니다.
[나무와 사람 이야기 (45) - 청원 연제리 모과나무]
지난 주에도 매일 한 편의 시를 꼼꼼히 읽을 수 있어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연잎 위에 떨어진 물방울을 보며 만남의 신비를 이야기한 김영무 시인의 시로 시작한 한 주였습니다. '물은 잎을 적시지 않고, 잎은 물을 깨뜨리지 않는' 연잎의 물방울이 우리 사는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나눠야 할 사랑법이지 싶다는 생각을 시에 덧붙였습니다. 아래에 다른 시들과 함께 링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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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옛 마을 '모과울'이 사라진 오송생명과학단지 안에 홀로 살아 남은 청원 연제리 모과나무. |
['시가 있는 아침' - 김영무, '연잎'] ['시가 있는 아침' - 문태준, '한 호흡'] ['시가 있는 아침' - 김명수, '우리나라 꽃들엔'] ['시가 있는 아침' - 문인수, '주산지'] ['시가 있는 아침' - 문정희, '새 옷 입는 법'] ['시가 있는 아침' - 하순명, '그리운 찔레꽃']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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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옛시조 한수가 생각납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잘감상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님은 우리나라 '큰나무' 연구의 1인자라 할 수 있지요. 큰나무에서 느끼는 감정은 누구나 비슷할 겁니다.
줄기의 생체기가 무수한 세월을 안고 있군요 나무가 말을한다면 예날선조들의 삶도 더 잘 알수있을텐데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무들은 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지요. 우리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