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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진주 기생, 풍류 문인, 배따라기
논개.
우리나라 역사는 남성의 전유물로 알려져 왔다.
여성은 역사에서 언제나 도외시되는 존재였다.
특히 이조시대에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로 전락.
그러다 보니 역사상에 드러난 여성에 대한 평가는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폄하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남성 못지않게 역사상 걸출한 여인들도 있다.
이를테면 웅녀, 유화부인, 소서노, 낙랑공주,
허황옥, 우황후, 미실궁주, 선덕여왕, 선화공주,
신명순성황후, 기황후, 문정왕후,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이매창, 논개, 명성황후 등이 그러한 여인들
1. 웅녀(熊女) - 국조 단군왕검을 낳은 고조선의 국모.
2. 유화부인(柳花夫人) - 여신으로 모셔진 고구려의 국모.
3. 소서노(召西奴) - 고구려·백제 건국한 고대사의 여걸.
4. 낙랑공주(樂浪公主) - 호동왕자를 위해 목숨을 버린 비련의 여인.
5. 허황옥(許黃玉) - 김수로대왕과 국제결혼한 김해 허씨 시조.
6. 도미(都彌)의 아내 - 백제 여인의 정절을 빛낸 절세가인.
7. 우황후(于皇后) - 제왕을 선택한 고구려의 여걸.
8. 한주(韓珠) - 고구려 안장왕을 사랑한 백제 미인.
9. 미실궁주(美室宮主) - 미색으로 서라벌을 울린 화랑들의 여왕.
10. 평강공주(平崗公主) - ‘바보’ 온달을 고구려 용장으로 만든 왕녀.
11. 선덕여왕(善德女王) - 관음보살로 추앙받던 신라 최초의 여왕.
12. 선화공주(善花公主) - 백제의 서동왕자를 사랑한 신라의 왕녀.
13. 신명순성황후(神明順成皇后) - 정종·광종을 낳은 태조 왕건의 셋째부인.
14. 천추태후(千秋太后) - 고려의 자주성 지킨 목종의 모후.
15. 기황후(奇皇后) - 고려 공녀 출신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여걸.
16. 문정왕후(文貞王后) - 정난정과 ‘여인천하’ 구가한 중종의 제2계비,
17. 신사임당(申師任堂) - 현모양처의 모범, 빼어난 예술가.
18. 황진이(黃眞伊) - 풍류기행으로 자유롭게 살았던 개성의 명기.
19. 허난설헌(許蘭雪軒) - 삶의 아픔을 빛나는 시로 바꾼 대표적 여성시인.
20. 이매창(李梅窓) - ‘변산3절’로 꼽히는 부안의 명기.
고대사회에서는 신분이 높았던 걸출한 여성들
근대사회로 올수록 신분이 낮은 걸출한 여성들.
우리나라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바뀐 흔적.
논개는 이조 중반 임진왜란 당시의 여성.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동반자살.
이조 충신과 열녀 행적에서 제외되었던 논개
그러한 논개 무덤에 연시를 받친 승려시인 한용운.
1879.8.29 충남 홍성 출생 ~ 1944.6.29 서울 死亡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
'한용운은 왜 논개에게 연시를 바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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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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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깊은 광음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는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옥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핀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에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이냐 울음의 모우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이냐.
빠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꺽이우지 못한 낙화대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밝히운 강 언덕이 묵은 이끼는 교긍에 넘쳐서
푸른 사롱으로 자기의 제명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가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만은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같은 굳은 언약을 져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에 울고 잇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그대에게 '눈물'의 곡조를 낙인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가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에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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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제와는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집.
그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운명했던 한용운.
19 나이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던진 논개.
그는 논개의 애국심 앞에 연시를 받친 것 아닐까?
11세기 영국의 '고다이버'를 연상하게 하는., 그녀.
................고다이버 부인....................
1898 영국 화가 죤 콜리어 作 '고다이버 부인'
외설인가? 예술인가? 혼란스러워 지는 호기심.
자신도 모르게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
'새벽 미명에 마을 중심가를 향해 걷는 말 한 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인 '고다이버'.
긴 생머리와 고개를 늘어트린 채 말을 타고 있는 모습
시끌벅적해야 할 마을 광장은 이상할 만큼 고요한 정적
사람 그림자조차 볼 수 없으며, 창문조차 굳게 닫힌 거리.
햇빛도 수줍은듯, 그녀의 알몸을 비껴 흩어지는듯.
그녀의 숭고한 알몸 시위에서 유래된 고다이버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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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버이즘'(godivaism)...........
마치, 전설 속 주인공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고다이버
11세기 영국 코벤트리 지방 영주의 신부 이름에서 유래.
그녀의 남편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영주 리어프릭
그녀는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자
농노를 대신해 남편에게 세금감면을 간청.
영주는 17세 신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인간의 나신을
신이 주신 최고의 예술품이라 생각했다는데
당신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시장을 한바퀴 돌아
그 신의 예술품을 보여준다면 당신 뜻대로 하겠소."
아직 어린 신부 고다이버는 갈등에 빠진다.
그러나, 과중한 세금때문에 죽어가는 농민들
그들을 구할 방법이 그것 뿐이라면
그 길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
그녀는 긴머리로 가슴과 국부를 가린채
다음날 아침 알몸으로 말을 타고 나선다.
과중한 세금정책에 고통받는 농민들을 위해.
그러나, 놀랍게도 커튼이 드리워진 거리.
그녀의 소식을 소문으로 전해들은 농민들.
아무도 그녀를 보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
그러나, 몰래 엿보는 사람도 있기 마련.
아직 17세에 불과한 아름다운 영주의 부인
그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엿본 양복 재단사 톰
마을 사람들과의 사전 약속을 잊어버리고
커튼을 들춰 몰래 엿보는 순간 눈이 먼다.
숭고한 그녀 뜻을 더럽힌 것에 대한 신의 벌
훔쳐보기 대명사 '피핑 톰'(Peeping Tom) 유래.
그녀 이야기는 학자와 역사가들에게 많은 논쟁거리
당시로서는 알몸 시위가 너무나 파격적이었기 때문.
그녀의 시위는 많은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거룩한 뜻.
지금까지 ‘관행이나 상식, 힘의 역학에 대응하여
역의 논리로 대처하는 시위를 고다이버즘이라 한다.
전통적 관습과 상식을 깨는 정치행동 = "고다이버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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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버 부인의 동상...................
'영국 콘벤트리 광장에 있는 고다이버이 동상.'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전설 속의 여인.
긴 머리를 늘어트린채 알몸으로 말 타고 있는 여인.
'콘벤트리에서 아직까지도 존경받는 여인.'
런던에서 차로 70분 거리에 있는 콘벤트리.
그녀의 동상은 콘벤트리 대성당 옆에 위치.
2차대전 당시 독일군 폭격으로 폐허였던 마을.
옛 잔해를 그대로 둔채 그 옆에 신축한 대성당.
하필이면, 그 곁에 알몸 여인의 동상을 세운걸까?
전설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역사를 관광 자원화하는 지혜.
그 슬기로움은 본받을만 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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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축제는 논개가 탄생(1574년 9월 3일)한 날을 기념.
그 정신은 민족정신이며 우리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모태.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숭고한 맥이 이어져오는 듯.
'그 숭고한 맥은 어디에서 발원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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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 전설 속 천왕성모의 8 딸은 8도 무당.
한반도 팔도로 보내졌고, 각각 터전을 잡았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8 무당은 곧 8도의 지배자.
셋째 딸은 벽소령을 넘어
청학동 삼신봉 거쳐 하동.
그후 하동에서는 함양 마천 백무동까지 가지 않았다.
하동에 하나 둘 무당이 늘어 백여명에 이르렀기 때문.
백무동은 무당 100명을 배출한 곳이라하여 일명 백무당.
길흉화복을 예고해 주는 100 무당은 예언자.
인간사 과거 현재 미래 운명을 꿰뚫는 존재.
무당은 하늘이 점지하고 선택한 선녀같은 존재.
미신이 기승을 부린 구한 말.
무당의 본향으로 정착한 백무동.
개화기 일제 치하에서 금지된 무속.
살길을 찾아 뿔뿔히 흩어진 무당들.
화개면·악양면·적량면·횡천면·고전면·금남면·
금성면·진교면·양보면·북천면·청암면·옥종면,
신흥·위대 출장소 등 1개읍 12개면을 거느린 하동.
화개면 악약면 등 4개 면은 진주로 편입되었다.
하여, 백여명 하동 무당이 오늘날 진주기생 근원.
백무동에서 벽소령을 거쳐 진주에 뿌리내린 무당들.
하여, 벽소령(광대골) 부자바위에 얽힌 선녀의 전설
'형제봉 전설'과 연하천 일대 유혹적인 요정의 전설.
고대사회 통치자 무당이 신분 전락하는 과정의 전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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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기생의 신분은 8부류의 천민에 해당.
그러나, 그 삶은 사대부 권력 지배층들과 대등.
당대의 석학들과도 정담을 나누며 풍류를 즐겼다.
경회루에서 문무 백관을 한시로 제압한 소춘풍.
그 연회에서 궁궐기생 소춘풍에게 반했던 성종.
성종의 구애마저 거절해 더욱 유명했던 소춘풍.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후궁 자리도 사양.
기생 신분을 지킨 소춘풍은 성종의 숨겨진 연인.
선녀 같은 고혹적인 매력으로 왕을 사로잡은 여인.
'성종이 그녀를 찾아와 뜰에서 정사를 나눌 정도.'
우리나라 명기들은 선비 못지 않게 지조를 중시.
신분으로는 천민이지만 역사에 남는 여류 시인들.
풍류를 즐기면서도 지조와 절개를 목숨처럼 여겼다.
역사적으로 천대와 멸시 속에서 살았던 기생들.
국가 위기마다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해낸 기생들.
구한말 기생 사진을 보면 왕실 여인 못지 않은 기품
'그 근원적 기품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우리나라 단군신화를 보면 인간의 조상은 곰.
천왕성모 전설로는 무당이 조선 8도의 지배자.
무당은 고대 사회 지배자이자 기생의 원조이다.
신라 김유신의 연인이자 국가제사를 담당했던 천관녀.
천관녀는 통일신라에 불교가 부흥하면서 무당으로 전락.
무당에서 비구니가 되어 천관사에서 여생을 보낸 천관녀.
천관녀는 원래 통일신라 화랑 집단을 이끈 원화.
지리산 세석평전과 노고단은 화랑들의 심신수련장.
천왕성모 전설 속 무당과 신라 원화는 무관하지 않다.
천관녀는 문헌 기록상 우리나라 기생의 원조이다.
하여, 기생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를 재조명해 보자.
역사적으로 진주는 평양과 함께 빼어난 기생의 고장.
'예전에 진주 의암호 인근 요정에서 묶었던 하룻밤.'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귀불가(歸不家)로 기억된다.
무척 오랜 기억이라 아스라히 기억 속에 남아있는 요정.
진주 친구의 환대를 사양할 수 없어 결국 밤을 지새웠다.
정통 가무와 판소리 가야금과 술시중 드는 기생.
어차피 객지의 노고를 풀 숙소가 필요했던 그날 밤.
올 땐 맘대로 와도 갈 땐 맘대로 못간다는 '귀불가'.
귀불가(歸不家)에서 자고 가라며 붙잡는 내 곁 기생.
'다음날 새벽녁까지 고이 지새웠던.. 긴 밤.'
그녀가 내 마음을 사로잡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할만큼 고혹적인 미모였던 그녀.
그녀를 품을 수 없을 만큼 힘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도 품지 못했던 기나 긴 밤.
옛 성현이 누린 풍류를 몸소 체험하고팠던 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없던 밤.
그녀가 들려준 논개 이야기가 내 마음을 사로 잡은 탓.
풍류 묵객이 즐겨 찾을만큼 격조 높은 요정이었던 추억.
참으로 길고도 짧았던 잊지못할 추억이 서린.. 진주의 밤.
'진주는 옛부터 풍류 묵객들이 많이 찾아들던 고장.'
지리산 남쪽 자락 어느 곳을 가도 거쳐야 했던 관문...진주.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 남쪽 허리 대중 교통 집결지는... 진주.
진주를 찾은 많은 여행자와 문인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촉석루.
논개가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뛰어 든 의암.
물이 깊고 소용돌이 치는 위험한 바위란 뜻의 이름 '위암'
논개가 열 손가락에 낀 반지로 왜장을 빠져나갈 수 없게 꼭 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義를 펼친 의기를 기리기 위한 이름.'의암'
의암호는 촉석루 앞 남강의 거대한 호수
논개가 숨진 의암을 품고 있다하여, 의암호.
의암의 주인공 논개는 많은 이들에게 기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실이었다고 한다.
논개는 장수군 주촌부락의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 박씨 외동 딸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숙부 주달무에게 가 자랐는데
숙부가 강제로 임내면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보냈다.
논개는 도망쳤다가 붙잡혀 장수현감 최경회의 재판을 받고
무죄방면 되었지만 의지할 곳 없어 최현감 후실로 들어간다.
그후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현감은 의병을 모집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
논개와 함께 진주로 부임한 그해 6월 29일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
'최현감 절도사는 김천일 고종후 장군과 함께 남강에 투신.'
논개는 국치의 설욕과 부군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엿보던 중,
그해 7월 7일 촉석루에서 왜군의 승전잔치에 기생을 가장한다.
주흥에 취한 왜장 게다니무라 로꾸스케을 남강가의 바위로 유인
'그 허리를 껴안고 물속에 몸을 던진, 논개 나이는 19 세.'
조정에서는 논개의 순절을 기려 의암이라는 사호(祠號)를 내렸고
그녀의 높은 정절을 추모하기위해 논개의 사당을 촉석루 곁에 짓고
1954년 그녀의 고향인 <전라북도 장수>에도 의암사 사당을 건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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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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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말기 진주기녀들이 지내는 제사가 바로 의암별제이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매년 6월 중에 날을 받아 지낸다.
....................의암별제를 만든 정현석 목사의 글..........................
“장수(長水) 기생 노은개(魯隱介)는 절도사 최 경회(崔慶會)이 소실
임진왜란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6만 군(軍)과 민(民)이 함께 전사하니,
논개가 촉석루 연회에서 왜장 허리를 끌어 안고 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후 조정에서 논개의 사당을 세워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진주 부임 다음 해, 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의기사(義妓祠)를 중건
의암별제를 지냈고 제관은 진주기생 중에서 뽑아 제례의식 절차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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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별제는 악사를 제외한 제관과 연희자가 모두 여자들이다.
통일 신라시대 천관녀가 주관한 국가제사 풍습에서 비롯된 듯.
초헌관을 비롯해 아헌관과 종헌관은 신망있는 늙은 기생 중에서 뽑고
당상과 당하의 집례는 글을 잘 아는 기생을 선임하여 맡겼다고 한다.
초헌관이 잔을 올리고 나면 대축이 논개의 영혼앞에 축문을 고한다.
“맵고 매운 영혼이여 산천의 정기로다.
빙옥같이 맑은 자태. 상설같은 곧은 마음.
임진년 난리를 만나 왜적에게 무너진 성벽.
육만 군민들이 한 구덩이에 묻힐 적에도
낭자의 충성심이 있어 죽음 앞에 겁낼손가?
백척 높은 바위 끝에 홀로 서서 맞은 웃음
왜놈 무찌를 때 티끝 같이 목숨 바쳤던 낭자
그 숭고한 충열에 힘 입어 나라강산 다시 밝아
천추에 높고 매운 논개의 절개 만고에 향기롭다.
돌에 새겨 높이 드러내
사당을 지어 제를 지내니
유월 한여름 좋은 날 때를 가려
삼백 미녀 분장하여 제청에 치성할 제
구슬픈 젓대소리, 제수도 푸짐하다.
임이여 내리셔서
맑은 술잔 드옵소서.”
의암별제는 전국기생들이 모여 촉석루에서 벌린, 국민적 축제.
1910년 일제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되며 의암별제의 맥이 끊겼다.
진주 기생들은 나라를 잃은 뒤에도 교방의 전통을 이어 진주권번
'진주기생조합을 만들어 의암별제를 전승하려했으나 실패.'
조선말 진주교방 출신의 최순이씨(1891~1973년)와 성계옥씨
최씨는 의암별제 진주검무를 배우던 제자 성계옥씨에게 전했다.
성계옥씨는 수년에 걸친 노력 끝에 1987년 ‘의암별제지’간행.
이에 따라 구전으로 이어온 의암별제 봉행이 본격적으로 가시화.
1992년 의암별제가 촉석루에서 맥이 끈긴 후 82년 만에 재현된다.
논개 (변 영로 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남 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마음 그 위에 흘러라.
아름답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며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남 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기리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남 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몇년 전까지.. 이조시대 충신과 열녀의 행적에서 제외된 논개.
단지, 천한 기생의 절개를 논하는 것이 가당하지도 않다는 이유.
1988 년 함양군수 최낙건이 논개의 묘를 재정비하며 논개의 삶에 매료.
논개에 관한 흩어진 사료와 유적을 찾아내 이전 통념과 다른 주장을 제기.
뒤늦게 나마 그녀에 관한 역사적 진실이 사실대로 밝혀져 다행한 일이었다.
진주 기생.
진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기생의 역사를 갖고 있다.
진주 기생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한반도 기생의 역사를 뜻한다.
기생은 전통사회에서 술자리의 시중을 들던 특수한 계층의 여성.
기생 또는 창기문화는 고대중국 은나라에서 유래.
특히, 당나라에 드어와 창(娼) 자를 사용한 흔적.
기(妓) 자의 뜻도 현대와 고대 중국과 전혀 다르다.
기(妓)란 '婦人小物也' 뜻풀이를 하면 놀이개란 의미
娼 또는 妓 명칭은 한나라 이후 倡妓, 女倡, 女妓, 御妓
(1) 은나라 湯왕에서 紂왕까지(BC 1783 - BC 1123)
660년간 무창(巫娼)시대, 즉 일명 종교적 매음 시대.
이 시기를 고대중국 창기 역사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2) 西周에서 東漢이 멸망하기까지(BC 1122 - AD 219)
약 1330년의 기간으로 노예 창기 및 官娼의 발생 시기.
(3) 남북조를 지나 수(隋)가 망할 때까지(AD 220 - 617)
약 435년간 家妓와 노예 창기가 함께 발전하던 시대였다.
(4) 唐, 宋, 元, 明의 4대(AD 618 - 1643)는 관기 전성시대.
약 1028년 간 당과 송에 관기(官妓)와 영기(營妓)가 있었다.
(5) 1619년 淸의 건국후 1911년 신해혁명까지
약 290년간, 사설경영(私設經營)의 창기 시대.
송나라 창기 제도는 당나라 제도에서 기인.
북송(北宋)은 관기 및 영기 제도가 있었다.
남송(南宋) 항주(杭州)에는 많은 와사(瓦舍)
송나라 태종이 북한(北漢)을 멸망시킨 뒤
부녀자들을 탈취해 군영으로 끌고 다닌 것
이것이 영기 제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관기 제도는 식구가 없는 관료들에게 제공되었다.
관기 몸값은 5천 냥으로 5년 만기 후에야 귀가가 가능.
본관이 관기를 데리고 갈 경우 다시 2천냥을 내야 했다.
중국 장안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방탕한 매음굴.
그들의 자제들까지도 흘러 들어 타락의 장소로 변했다.
소흥과 양기 군영이 많은 지역은 서북 사람들이 많았다.
서북사람들은 와사(매음굴)를 만들고
기녀들을 모아 병사들을 상대로 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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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의 한량들은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 했다.
해어화(解語花)란 '말하는 꽃' 기생을 일컫는다.
한반도의 기생은 고대 부족사회의 무녀에서 비롯.
전쟁에서 패한 고대국가 부녀자들은 관기(官妓).
고려 때 교방제도와 기생학교는 이조시대에도 계승.
이조 중기 유교문화와 융합 독특한 기생문화를 낳는다.
황진이(黃眞伊)·이매창(李梅窓) 등등은 시조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고려가요도 문학성이 뛰어난 기생층이 향유, 전승한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난 기생을 명기라 한다.
미모로 이름난 기생, 가무를 잘해 이름난 기생.
시사(詩詞)를 잘하거나 해학을 잘해 이름난 기생,
서화를 잘해 이름 난 기생,
신의를 지켜 이름 난 기생.
황진이, 홍랑, 매창 처럼 시를 잘하는 기생은 유난히도 많다.
이들 기생의 시는 당대 시인들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이조시대 문학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정적인 작품들.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보내오니
님 주무시는 방 창가에 심어두고 보시옵소서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면 나를 본 듯 여기소서.'
이조시대 선조 때 함경도 경성 기생 홍랑의 작품이다.
홍랑은 당대 최고 시인 중 한사람 최경창과 정분 깊었다.
선조 6년 최경창이 북해 평사(北海評事)로 경성에 가 있을 때
홍랑이 이듬해 서울로 돌아간 최경창을 영흥(永興)까지 배웅하고
함관령에 이르러 저문 날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 마음 담았다 한다.
이조 유교문화에서 관기는 천대와 멸시를 겪으며 태어났다.
나라의 중죄인은 삼족을 멸하는 엄격한 제도가 있었기 때문.
하여, 중죄인은 왕에게 사배 후 사약을 기꺼이 마셔야만 했다.
중죄인의 삼족은 살아 남더라도
노비가 되어 대물림 벌을 받았다.
하여, 사면을 받지 못하면 대물림 노비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다.
특히, 중죄인의 삼족 여인네들은 관기가 되어 살아가야 했었다.
지체 높은 양반이었어도 기생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기생이 멸문 가문을 살리는 길은 무엇일까?'
몸을 팔아 부를 축적 또는 권력의 힘을 빌리기.
장래성 있는 당대 석학을 지극 정성 섬기는 길.
당대 석학을 분별할 안목과 사로잡을 만한 재색.
'이조 때 진주에 기생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조의 시조 이성계는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불렀다.
그후 이조는 지리산 일대의 불교문화 탄압정책을 썼다.
지리산은 고려 세력 은둔처이자 우리나라 불교의 성도.
사찰에 암행어사를 파견하거나 과중한 세금을 부과.
국사제도 승과 과거시험 폐지.도성안 승려 출입금지.
불교종파를 소수로 통폐합하고 종파 별 사찰 수를 제한.
'수많은 사찰이 문을 닫자 갈곳 없는 승려들.'
비구는 관노 삼고 비구니는 방지기 또는 관비가 된다.
이조 억불정책에 의해 수많은 승려가 8천민으로 전락.
남원 진주의 기생문화는 이조 억불정책 유산인듯 싶다.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불렀던 이조시대.'
당파싸움으로 억울하게 가문이 몰락한 양반 규수.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 스스로 기생의 길을 택한 듯.
진주를 찾는 명사 또는 유배지 당대 석학들과의 교류.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듯.'
진주기생은 옛부터 충절을 목숨처럼 여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조에서 박해받았던 승려와 기생은 국란 때마다 나라를 구했다.
이조를 임진왜란 위기에서 구해낸 인물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조는 잦은 당파싸움으로 중죄인 신분이 뒤바뀌었다.
공신이 역적이 되고 역적이 공신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따라서, 관비가 되었다가 신분회복이 된 후의 사회 문제.
하여, 관비제도로 인한 문제점을 개선할 필요성이 있었다.
결국, 기생학교에서 관기를 양성하는 교방제도를 도입했다.
14살 전후 어린 처녀를 모아 3년 이상 교육과정을 만들었다.
교방은 고려·조선 시대부터 기생들의 노래와 춤을 관장한 기관.
교방청은 중국 당나라 궁중에서 관기에게 가무를 가르치던 관청.
중국 교방은 발해를 거쳐 고려 문종 때 도입, 조선조까지 이어졌다.
이조에는 장악원 소속의 좌방(아악)과 우방(속악)을 교방이라 불렀다.
교방은 지방 관아에 부속된 건물로 관문 밖 객사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 기생들은 악기 노래 춤과 예기를 익혀 공적인 연회에 불려 다녔다.
조선 말기에 기생은 일패(一牌)·이패·삼패 등으로 구분되는데,
일패는 한국 전통가무의 보존·전승자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고
이패는 밀매음 (密賣淫) 기생, 삼패는 공창(公娼)의 기능을 했다.
기생의 신분을 3등급으로 나누어 관청 별로 관장한 삼패제도.
이조 제도에서 관기는 본관 사또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남원고을 춘향의 정절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유 그 때문.
기생이라도 언제 신분회복이 될지 모른다는 의미도 담긴 듯.
하여, 격조 높은 기생은 사대부 양반도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따라서, 기방은 품격 높은 사대부와 기생의 로맨스 산실.
격조 높은 기생은 당대 석학들과 겨룰만한 시를 구사했다.
아울러 신분 격차를 초월한 깊은 연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1905년 ‘진주교방’은 을사조약으로 문을 닫게 된다.
진주교방 관기제도가 없어지자 ‘기생조합’이 생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생조합이 서울의 광교 조합이었다.
광교조합은 유부녀 기생조합에서 한성권번으로 개칭.
기생조합이 일본식 이름으로 바뀐 것은 1914년 경이다.
'권번은 이조때 기생을 총괄하던 교방청의 후신.'
당시 서울에는 한성권번·대동권번·한남권번·조선권번,
평양에는 기성권번 등이 있었고, 그 밖에 진주 부산 대구
광주 남원 개성 함흥 등에도 각각 권번들이 조직되었다.
당시 기생 1백여명과 견습생 5-60명으로 학부를 설치해서
오전과 오후 2번에 걸쳐 가무 음곡 산수 국어 예법을 교육.
약 3년의 수업 연한을 거쳐 고전시조 가야금 등 무곡 유행가
서화 국어 예법 등 학술 과정을 더해 졸업자에 한해 기생 자격
'관기가 기생이 된 교방은 일제 때 유곽으로 바뀐다.'
기생 본연의 품격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 진주교방.
100 년전 위암이 진양삼절 중 하나라고 만천 하에 알린.. 진주기생
진주기생들이 만든 교방이 있어 많은 시인과 가객이 진주를 찾았다.
당대 문인들은 풍류를 찾아 진주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주 권번은 1915년 진주경찰서 경무부장 전전승(前田勝)이 설립.
진주 기생조합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기고,
경찰서에 함께 근무하던 경부인 최지환에게 은밀하게 재조직을 지시.
이때 금향을 비롯한 고참 기생들이 만든..‘진주기생조합’
얼마 후 부채를 갚고 재정이 건실한 진주권번으로서 발전.
당시 진주기생조합은 기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시대의 변천으로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뀐다.
그리고, 남자들의 손으로 권번 경영권이 넘어가게 된다.
1939년 11월 2일 드디어 주식회사 ‘진주 예기권번’의 창립
이 회사는 자본금 5만원을 최지환씨등 8명이 평등하게 출자
전통적 진주 기생의 풍류와 멋을 복원하려는 취지로 만들었다.
권번에서는 동기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고 화대 받는 역할을 담당.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라서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고
이들 권번기생은 다른 기생들과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즉, 1970년대의 밀매음 기생문화와는 품격이 달랐던 것이었다.
...................진주기생들의 삼일만세 의거......................
논개의 충절, 매국노 이지용의 첩이 되기를 거부한 산홍이
“대한독립만세! 왜놈들은 물러가라.”를 외친 진주의 기생들
1919년 3월 19일 한금화를 비롯한 진주기생들의 태극기 행렬
이때 일본 경찰이 진주 기생 6인을 구금했을 때 한금화의 혈서.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가 피누나.”라는 노래 가사
고은 시인도 <만인보2>에 <기생독립단>에 대한 시를 남겼다.
-기생독립단-
평양기생 아미녀가 떨쳤지요
사나이들 뼈깨나 녹았지요
평양하고 비슷한 데가 진주성이지요
대동강하고 남강이 사촌이지요.
진주기생조합 기생 50명이 기미년 3월 29일
자혜병원으로 정기검진 받으러 가던 중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 외쳤지요
기생 김향화가 앞장서 외쳤지요
병원으로 가서도 검진 거부하고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외쳤지요.
만세를 부른 기생들은 다 붙잡혀 가서
김향화는 6개월 징역 받아 콩밥 먹었지요
기생들은 꽃값을 받아 영치금을 넣었지요
면회 가서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그럴 때마다 만세 주동자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궁할지라도
조선 불효자식에겐 술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따라 주지 말고
권주가 또한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
<김향화>는 진주기생이 아니고 수원기생.
3월 29일에 수원 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
검진받기 위해 자혜병원으로 가던 중 독립만세.
그것도 경찰서 앞에서의 만세 의거 사건.
진주 기생들의 만세 의거 역시 당시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1919년 3월 25일자 ‘기생이 앞서서 형세자못 불온’이란 기사.
이때 기생들의 의거는 진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거.
4월 1일 해주의 기생일동은 손가락을 깨문 피로 그린 태극기
이에 용기를 얻고 참여한 만세시위 군중은 3천명이나 되었다.
진주기생조합 기생들의 3·.1 만세 의거는 색다른 의미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논개가 왜장을 안고 순국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생은 나라로 부터 대우를 받기보다 멸시를 당하던 신분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나라에서 기생에게 베푼 것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굳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이유가 없었던 기생들.
이 시대에서 다시 한번 곰곰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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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와 남원은 반야봉을 마주보는 위치.
지리산 자락의 사람들은 지리산을 닮았다.
지리산 골짜기마다 삶의 모습은 각각 다르다.
'지리산자락 마을마다 풍습과 삶도 각양각색.'
지리산을 바라보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보인다.
격동의 역사와 피맺힌 민족 한까지 품은 지리산.
섬진강은 그 아픔을 어루만지는 어머니 손길 같다.
진주와 남원은 서편제와 동편제 판소리의 본 고장.
지리산과 낙동강은 풍류문화와 판소리의 산실이다.
진주 기생은 우리나라 문학의 큰 주류를 이룬 산실.
'산홍, 승이교, 채란, 매화는 진주 명기들.'
......
산홍.
.......
의암사에는 매국노를 꾸짖은 진주기생 '산홍'의 시가 걸려있다.
김소월 시인의 정한(情恨)을 뜻하는 진달래 꽃이 산홍화(山紅花)
마산 출신 가수 진방남의 노래 가사 중에 나오는 산홍이기도 하다.
'나를 혼자 버리고 무정하게 떠난 산홍이 도대체 누구길래
너 없는 내 가슴은 눈오는 벌판, 달없는 사막, 불꺼진 항구.'
옛부터 ‘북 평양 남 진주’라고 불릴 만큼 명성 높았던 진주기생
가무가 뛰어났고 , 정조가 두터워 왕실잔치에 불려나갔던 명기들.
구한말의 애국선비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에도 기록된 기생 산홍.
'매국노 이지용이 천금을 싸들고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
"모두가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들에게 주시지요."
산홍은 당대의 권력자 이지용을 매국노라 꾸짖었던 정의로운 기생이다.
이지용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
그당시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을 산홍이 했던 것.
역사는 산홍의 정의로움을 논개의 정절 못지않게 높이 평가한다.
1906년 이지용이 산홍에게 거절 당했기에 의암사 현판에 걸린 시.
'촉석루 곁 의기의 벗들
평양성 안에 충랑의 이름
산홍이 한낱 유곽에 남았으나
누군들 열녀의 정렬로 일컫지 않으랴
어느 역적 부엌에다 요리상 올리라 하니
큰 소리로 도마치며 문밖으로 나갔네
가련하다 그날 여러 역적들 살려 두었으나
개들도 주인 마음 알아 남은 음식 먹지 않았네.
온 나라 사람이 다투어 매국노에게 달려가
노복과 여비처럼 굽신거림이 날로 분분하네
그대 집 금과 옥이 집보다 높이 쌓였어도
紅一點인 산홍은 사기가 어렵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 매천 황현,
'매국노를 꾸짖은 산홍을 위한 시'가 논개 사당에 걸려있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그곳 현판의 시를 음미해 봐도 좋을 듯.
................
승이교(勝二喬).
.................
진주 기생 중에 가장 뛰어난 시인은 승이교(勝二喬).
승이교는 ‘해어화사’에 조선시대 명기로 기록되어 있다.
본명 억춘이 승이교라고 이름을 지었던 사연는 무엇일까?
중국 삼국시대 강동의 영웅 손책과 주유는 동서지간이다.
이들은 당대의 미인, 대교와 소교를 각각 아내로 맞이했다.
손책의 부인이 대교이고 주유의 부인이 소교였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승이교는 ‘대교와 소교 즉 이교를 능가한다’는 의미.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그렇게 불리웠을까?'
승이교에게 마관(馬官)벼슬을 한 김인갑이란 애인이 있었다.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 6 품 외관직인 조선시대의 관직.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민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를 총괄.
승이교는 총명하여 김인갑의 사랑을 받았고 그에게 시를 배웠다.
강양관 안에 서풍이 일어나니
뒷산은 붉게 물들고 앞 강은 맑아
비단 창에 달 밝으니 벌레소리 목메어
외로운 베개 찬 이불에 잠못 이루네
江陽館裏西風起
後山欲醉前江淸
紗窓月白百蟲咽
孤枕衾寒夢不成
갈바람이 치마폭 휘 불때마다
뜬 몸엔 가는 세월 속설은 것을
연당에 가을비 부슬부슬
이슬맺힌 가지엔 매미소리 목메이네
추위에 놀란 기러기 저소리
쓸쓸한 산성을 넘어가누나
님 그리는 꿈에서 깨어나 보니
가을 달빛이 창으로 비쳐드네
西風吹衣裳
衰容傷日月
蓮堂秋雨疎
露枝寒蟬咽
霜雁墜飛聲
寂寞過山城
思君孤夢罷
秋月照窓明
남명과 퇴계의 제자인 권응인은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격찬.
“아직 어리고 총명하니 정진하면 옥봉(玉峰)의 경지에 이르리라."
옥봉이 사랑하는 이에게 보낸 연시는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창가에 달 오르니 그리움 사무칩니다
꿈을 꾼 것들이 만약 흔적이 되어있다면
그대 집 문앞 돌길에 깔린 모래가 되었겠지요.
갈바람이 치마폭 휘 불때마다
뜬 몸엔 가는 세월 속 설운 것을
연당에는 가을비가 부슬거리고
이슬 맺힌 가지엔 매암이 우네.'
'김소월의 스승' 김안서 저서
‘한국여류 한시선집’ 中에서..
......
채란.
.......
채란은 진달래 꽃과 같은 여인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기생.
봄바람이 불면 제일 먼저 한반도 어디에서나 피어나는 꽃.
바라만 보아도 곱고 하도 흔해 누구나 쉽게 꺾을 수 있는 꽃.
그녀는 진달래꽃이 피는 곳마다 떠돌며 몸이 팔려다녔던 신세.
김소월 시인이 남긴 불멸의 대표작 <진달래 꽃>의 여자 주인공.
1924년 오랜 방황 끝에 연변으로 돌아온 민족 시인 김소월.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에 민족 설움과 애한이 깃든 시를 발표하며 채란을 만난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의 '주옥같은 시'를 보면 채란과 깊은 관계.'
채란은 생모 아닌 편모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채란이 어릴 때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간 탓.
편모는 개가 밑천을 마련하려고 13살 채란을 전라도 행상에게 판다.
채란은 팔도, 홍콩, 따이렌, 텐진을 떠돌다가 연변에서 소월을 만난다.
그당시 진주는 관기, 교방도 폐지되고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뀔 무렵.
채란은 진주권번 들병이(삼패기생) ‘뿌리없는 몸’.
타향으로 팔려다니면서 스스로 춤과 노래를 익히고,
멀리 고향이 그리울 때에는 시로 마음을 달랜 듯 보인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 붓들면 님이지.
............팔베개 노래............
花紋席 돗자리놋燭臺 그늘엔..
七十年 苦樂을 다짐 둔 팔베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얻은 팔베개.
朝鮮의 강산아 네가 그리 좁더냐.
三千里 西道를 끝까지 왔노라.
삼천리 西道를 내가 여기 왜 왔나.
西浦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山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家門에 시집가서 사느냐.
嶺南의 晉州는 자라난 내 故鄕.
父母없는 故鄕이라우.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개.
來日은 相思의 거문고 베개라.
첫닭아 꼬꾸요 목놓지 말아라.
품속에 있던 님, 길 차비를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金剛 斷髮令.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 하라우.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
돌아갈 故鄕은 우리 님의 팔베개 뿐.
................................................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
김소월이 그 노래를 듣고 기록한 민요시라고 알려졌다.
채란은 김소월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던 여인.
대표작 <진달래 꽃>은 채란과의 이별을 시로 표현.
채란을 만나 헤어져 죽을 때까지 남긴 시엔 그 흔적들.
.......김소월(1902 8.30∼1934]........
본명 :김정식( 金廷湜) 배재고보 졸업
경력은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운영했다.
본관은 공주(公州). 평안북도 구성(龜城) 출생.
오산(五山)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
동경상대에 재학 중 관동 대진재으로 중퇴 후 귀국.
...................................................
.........김소월의 작품들................
1922년 낭인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 춘강(春崗)
오산중학시절 作. 문단에 오른 후 발표.
먼 후일, 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배재고보에 편입한 후 대표 작품.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등등 8편.
1922년 -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진달래꽃>,
소설-<함박눈> 산문시-꿈자리, 깊은 구멍. 등등 발표.
1923년 - 설움과 애한의 정서가 깃든..'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시 작품을 발표.
1925년 처가집 구산군 서산면에서 발표 作 꽃촛불 켜는 밤,
옛 임을 따라가다가 꿈깨어 탄식함이라, 무언, '진달래꽃'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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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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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는 기생이나 인물 고운 계집 종 이름.
사랑하는 남녀 결합을 상징하는 꽃 매화.
매화는 이조시대 기생 이름으로 널리 통용.
눈 속에 홀로 핀 소녀 기생.. 매화
'재가열녀'라고도 하는 이조시대 명기.
약 220 년 전, 황해도 곡산 16살 동기(童妓)., 매화
빼어난 청순미에 노래도 잘 불렀고 특히 시조에 능했다.
정절을 받치면 일생을 섬겨야만 한다는 철저한 정절 관념
그 소녀 기생의 정절을 취하려는 뭇 풍류 묵객들
그만한 남자 아니면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매화.
전국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남자들을 마다했던 그녀.
칠십 고령 어윤겸에게 열 일곱 순결을 받친 매화.
황해도 관찰사 어윤겸이 곡산에 순시 차 들렀을 때 였다.
곡산 사또가 마련한 주연에서 매화를 보고 반했던 어윤겸.
그날 밤, 어윤겸의 시중을 들기 위해 객사로 찾아 온 매화
내면에 일렁이는 흔들림을 감출 수 없었던 어윤겸.
그녀가 금침을 깔아 놓고 나가려하자 불러 세웠다.
매화는 그 의중을 짐작하고, 살포시 곁에 앉았다.
"올해 네 나이 몇이냐?"
"예, 열 일곱이옵니다."
"너는 여지껏 머리얹어 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더냐?"
"아니옵니다. 있긴 있었사오나 소녀가 거절하였습니다."
"거절하다니..그 연유가 무엇인고?"
"황공하옵니다마는 천기일지라도,
한번 몸을 허락하면 수절해야 하옵는데,
아직 그런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음, 갸륵한 생각, 여자는 정절이 생명이어야지.
너의 정절을 지키려는 갸륵한 뜻에 감탄했느니라.
너는 네가 바라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정절을 지키거라."
"......................."
"내 비록 늙었으나 몸이 동하지 않는건 아니다만,
네 뜻을 가상히 여겨 보내는게다. 어서 돌아가라."
"소녀는 오늘밤 여기 머물러 영감을 뫼실까 하옵니다."
17살 동기(童妓)가 첫 순결을 바치겠다고 하자
어감사는 당혹스러웠고 안스러웠지만 내심 기뻤다.
이백의 시를 생각하며 매화의 손을 끌어 잡은 어윤겸.
'인생은 뜻을 얻었을 때 모름지기 환락을 다할 것이니
황금의 술단지를 달빛 아래에 헛되이 버려 두지 말라- 이백.
매화가 들여 온 주안상을 밀쳐낸뒤 촛불이 꺼졌다.
깊어가는 밤의 정적 속에 두 사람 숨소리만 들렸다.
칠십 고령 어윤겸과 17 순결을 여는 매화와의 첫날밤
어윤겸의 극진한 애무가 난생 첫 남자였던., 매화
차츰 그녀를 달아 오르게 하고 몸부림치게 하였지만
나이 차가 워낙 많아 매화의 뜨거움을 식히는데는 한계
스물이 되자 매력이 철철 넘치는 무르익은 여인의 모습
한편, 어윤겸의 몸은 초췌해지고 점점 늙어 무력해졌다.
그무렵, 죽기 전에 보고 싶다는 어머니 편지를 받은 매화.
이 편지를 매화로부터 전해 본 어윤겸은 걱정과 위로
부담마(負擔馬)와 로수(路需)를 주며 다녀오라고 했다.
다음날 일찍 매화는 고향 곡산에 도착해 어머니와 상봉.
병이 위독하여 죽을 날을 기다리며 누웠다던 어머니.
버선발로 달려나와 사립문을 열고 딸을 반긴 어머니.
어머니가 매화를 황급하게 부른 사연은 따로 있었다.
어윤겸이 해주 감영으로 간후, 후임 곡산 사또 홍시유
매화를 찾았으나 이미 어윤겸따라 해주 감영으로 간 후.
홍시유는 안타까워 매화의 어머니를 정성껏 보살펴준 것.
매화의 어머니는 감동해 딸에게 편지까지 보냈던 것.
그녀가 곡성 사또를 찾아가 고마움을 표시하자 화답.
"매화야, 내가 너를 위해 매화타령을 부르마."
몽매에도 그리워했던 여인을 눈앞에서 만나자
그녀가 상관의 여인인 사실도 잊어버린., 홍 시유.
홍 시유의 젊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반한, 매화
매화타령에 맞춰 춤추고 오랜만에 흥을 맘껏 돋우었다.
어윤겸에 대한 죄책감과 홍 사또 매력에 빠져드는 자신.
난생 처음 여자로서의 기쁨을 만끽하고는 기진맥진한 그녀.
태우고 태워도 끝없는 정염
퍼내고 퍼내도 바닥없는 욕정
보름 동안이 너무나도 짧았던 두 사람.
그러나, 어윤겸에게 돌아가야 하는 매화.
'죽어 니즈랴 하랴,
살아 글여야 하랴.' - 매화.
강 위에 눈 녹으니 강물이 불었는데
밤이 되니 강 위엔 죽지가 슬픈 곡조.
당신을 보내고 나면 그리움을 어찌하오.
천리라도 그리운 맘을 물결 위에 보내리. -홍시유.
살들헌 내 마음과 알돌헌 님의 졍을
일시상봉 글리워도 단장심회 어렵거든
하물며 몃몃 날을 이대도록 - 매화
해주 감영으로 돌아온 매화
홍시유를 향한 마음속 그리움.
"꿈에 뵈는 님이 인연 업다 하건마는
탐탐이 그리온제 꿈 아니면 어이하리
꿈이야 꿈이언마는 자로자로 뵈여라" - 매화.
심중(心中)에 무한사(無限事)을 세세(細細)히 옴겨다가
월사창(月紗窓) 금수장(錦繡帳)에 님 게신 곳 전하고져
그졔야 알들이 그리는 쥴을 짐작이나. - 매화.
야심(夜深) 오경(五更)토록 잠 못 일워 전전(轉輾)헐 졔
구즌 비 문령성(聞鈴聲)이 상사(相思)로 단장(斷腸)이라.
뉘라셔 이 행색(行色) 글려다가 님의 압혜 - 진주기생 매화
매화 녯 등걸에 춘절(春節)이 도라오니
녜 픠던 매지(梅枝)에 픠염 즉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똥말똥 하여라 - 매화.
죽어 니저야 하랴 살아 글여야 하랴
죽어 닛기도 얼엽꼬 살아 글의이도 얼여왜라
져 님아 한 말씀만 하소라 사생결단 하리라 - 매화.
홍시유를 향한 그리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매화
자리에 누워버리자 놀란 어윤겸이 명의를 불러다 진맥
좋다는 약을 다 조제해 먹였으나 나을 리 없는 상사병.
어윤겸은 할 수 없이 매화를 고향 곡산으로 돌려 보냈다.
매화는 모처럼 그리웠던 홍시유 품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 병신옥사에 연루되어 투옥된 홍시유.
어윤겸 감사의 해주 감영에 갇혔다가 참형을 당한 홍시유.
홍시유가 참형당하자 그 정실부인도 남편따라 목 매어 순사
매화는 그 부인의 죽음을 보고 존경과 흠모의 정을 느끼었다.
매화는 홍시유 내외를 선영에 안장하고
날마다 그 묘를 찾아가서 울며 지냈다.
"죽어 잊어야 하랴, 살아 그리워 해야 하랴
죽어 잊기도 어렵고 살아 그리기도 어려워라
저 님아 한 말씀만 하소서, 사생결단 하리라. -매화 -
다음날 매화의 시신은 홍시유 무덤 곁에서 발견되었다.
어윤겸을 떠나 사랑을 찾아 홍시유에게 달려 갔던 매화.
홍시유를 위해 죽자 '재가열녀(再嫁烈女)라 불리운 매화.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던 매화.
고희 감사 애무만으로 갈증을 채울 수 없던 그녀.
결국, 홍시유 무덤 앞에서 숨진 재가열녀(再嫁烈女)
풍류문인
'백설(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룸이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늬 곳애 퓌엿는고
석양(夕陽)의 호올노 셔셔 갈 곳 몰나 하노라. - 이색(李穡)
본관은 한산, 자는 영숙, 호는 목은..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高麗三隱)이라 불린다.
매화는 눈밭에 피는 순결한 여인 또는 정절의 표상
사군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중 으뜸으로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겨울을 이겨내는 세한삼우(歲寒三友) 매화.
그 중에서도 눈 속에서 홀로 피는.. 설중매(雪中梅)
선비에게 지조와 절개, 강인하고 깨끗한 기품의 상징.
유독 매화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던 퇴계(退溪)
1570년 매화가 피는 겨울 음력 섣달 초순, 임종
그 직전에 그가 남긴 말은.. “저 매화에 물을….”
그가 마지막 숨을 걷우면서까지도 잊지 못한 매화.
스물 남짓 꽃다운 나이에 숨진 그가 사랑했던 여인.
퇴계가 사랑하는 기생 매화에게 받친 두 편의 연시.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퇴계.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퇴계.
기생 두향은 어떤 여인이었을까?
단양 관기 두향은 단양군수 퇴계 이황을 만나고
그를 사모하여 수 차례 가까이 모시길 자청했지만
퇴계가 마음을 열지 않자, 두향은 애간장은 녹았다.
두향은 기품 넘치는 매화를 퇴계에게 바치자
단양 동헌에 심고 새 임지인 도산으로도 이식.
이황의 부음을 듣고 앉은 채로 숨을 멈췄던 두향.
너무나 짧고 아쉬웠던 연분 끝에 헤어지고
몇해 지나지도 않아 존경하는 사람의 부음
그 정한이 얼마나 컸으면 숨질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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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혼(姜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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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혼(姜渾)은 1464(세조 10)∼1519(중종 14)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
증조부는 영의정 맹경(孟卿), 아버지는 인범(仁範).
김종직(金宗直) 문인으로, 1486년(성종 17) 식년문과 급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 문인이라 유배된다.
얼마후 풀려나 문장으로 연산군 총애를 받아 도승지가 된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해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그뒤 대제학·공조판서·우찬성·판충추부사를 거쳤다.
시문에 뛰어나 당대에 이름을 떨쳤고 저서에〈목계집〉.
진주관기 소매에 시를 쓴 풍류묵객으로 유명.
증주기(贈州妓)라는 문집에 실린 강혼의 詩
高牙大纛三軍帥 목사는 삼군을 통솔하는 장군 같은데
黃卷靑燈一布衣 나는 한낱 글 읽는 선비에 불과하네
方寸分明涇渭在 마음 속에는 좋고 싫음이 분명할텐데
不知丹粉爲誰施 몸 단장은 진정 누구를 위해 할까
풍류묵객 강혼의 일화가 담겨있다는., 詩.
과연,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일까?
당시 기녀와 선비들의 로맨스는 교방의 멋이자 풍류.
경상우도 중심 진주에 옛부터 전해오는 '강혼의 일화.’
젊은 시절 한때 관기와 깊은 사랑을 불태운 목계 강혼
그무렵 진주 목사가 부임해 그녀는 수청을 들게 되었다.
강혼은 그녀를 빼앗기게 되자 그녀 소맷자락에 쓴 시 한수
그옷을 그대로 입고 신임 진주 목사에게 숙청 들러간 그녀.
신임목사는 그녀의 소맷자락에 쓰여진 시 한수를 읽게 된다.
그 글재주와 호기에 끌려 그와 술한잔 나누고 싶었던 진주목사.
그리고, 수청을 들 뻔한 기생도 강혼에게 돌려주고자 작정한다.
신관목사는 강혼의 시를 높이 평가하며 과거공부를 권고.
마침내 강혼은 문장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학자가 되었다.
신관목사가 강혼을 아껴 깨우치게 한 계책이라고 전해온다.
강혼의 재주를 아낀 주변에서 신관목사에게 은밀하게 청탁.
기생 역시 강혼 마음을 바로잡는데 큰 역활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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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내용.
영남 성산에 가서 기생 은대선을 사랑한 강혼.
돌아올 때 부상역까지 말을 태워가지고 왔는데
이미 침구를 가지고 먼저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공은 기생과 이불도 없이 역사에서 하룻밤을 잤다.
“선녀같은 저 모습 옥같이 흰살결에
새벽 창문 열고 거울 앞에 눈썹그리네
묘주에 거나하게 취하니 얼굴이 붉어져
동풍이 살짝 스치니 검은 머리 흩날리네"
이후 강혼은 상주에 이르러 은대선과 헤어졌다.
강혼은 조령 넘어 잠시 쉬다가 도성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성주 서생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나니
은대선이 불현듯 떠올라 바로 필묵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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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에서 헤어진 뒤 저물어 두메마을에 이르렀는데
텅비어 있는 객관이 쓸쓸도 한데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처량한데 등잔불을 돋우어 홀로 앉아 있으니
외로운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정과 회포는 서글퍼 말할 수가 없구나.
내일 아침 재를 넘으면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산새가 구슬피 지저귈 것이니 이 간장이 녹는듯.”-강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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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혼의 편지는 서생을 통해 은대선에게 전해졌다.
은대선은 강혼의 시와 편지로 병풍을 만들었는데
자획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용과 뱀이 움직이는듯,
남쪽으로 내려가며 성주를 지나가는 선비들은
그 병풍을 구경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송계 권응인(權應仁)은 강혼이 세상을 떠난 후
은대선을 만났는데 은대선은 이미 여든이 넘었다,
그당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은대선이 남긴 말.
“검은 머리 흩날리다가 이제는
흰머리 흩날리네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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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혼은 지금 진주에 잠들어 있다.
호방한 기질과 시에 능한 그였기에
기생과의 연시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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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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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 풍류시인 김삿갓.
평양감사가 잔치를 벌이며 능할 능(能)자 운을 부르자
김삿갓이 먼저 한 구절을 짓고 기생이 이에 화답한 시조.
金笠 : 平壤妓生何所能
妓生 : 能歌能舞又詩能
金笠 : 能能其中別無能
妓生 : 月夜三更呼夫能
김삿갓 : 평양 기생은 무엇에 능한가.
기생 : 노래와 춤 다 능하고 시도 능하다오.
김삿갓 : 능하고 능하다지만 별로 능한 것 없네.
기생 : 달 밝은 한밤중 지아비 부르는 소리는 더 능하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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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이 남긴 수많은 일화 가운데 한 토막이다.
그는 왜 평생 방랑시인으로 떠돌아다닌 것일까?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란 자책
안동 김씨 폐족이라는 세상의 멸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자처한 그.
하여, 평생 삿갓을 쓰고 방랑했던 그.
안동·평강·익산에서 3번이나 만난 아들.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매번 도망했던 그.
57세 때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쓰러져 있던 그.
어느 선비가 데려가 반년 가까이 보살펴주었던 그.
지리산 유람 3년 만에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운명.
1978년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세운 시비
강원도 영월에 전국시가비 동호회에서 세운 시비.
......... 시비에 새겨진 그의 마지막 시...........
날짐승도 길짐승도 다 제 집이 있건만
나는 한평생 홀로 상심(傷心)하며 살아왔노라.
짚신에 대지팡이 끌고 천리길 떠돌며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이 못되어
해마다 해가 저물면 슬픈 회포만 가슴에 남았노라.
어려서는 이른바 복(福)된 집에서 태어나
한강 북녘 이름있는 고향에서 자라났노라.
조상은 구슬 갓끈 늘인 부귀한 사람들이었고
호화로운 가문은 장안에서도 명망이 높았다.
이웃 사람들도 귀공자 태어났다 축하해 주며
장차 이름을 떨치리라 기대했었다.
어린 머리칼 차츰 자라면서 운명이 기박해져
화를 입은 집안은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로 변했다.
의지할 친척없고 인심도 각박한데
부모마저 돌아가셔 집안은 망했도다.
새벽 종소리 들으며 방랑길에 오르니
생소한 객지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마음은 고향그리는 떠돌이 여호같고
신세는 궁지에 몰린 양 같은 나로다.
남쪽 지방은 자고로 과객이 많은 곳
부평초처럼 떠돌아 다니기 몇몇 해던고.
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요
먹고 살아가기 위해 버릇이 되었도다.
그런 중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
삼각산 푸른 모습 생각수록 아득하네.
떠돌며 구걸한 집 수없이 많았으나
풍월 읊은 행장(行裝)은 언제나 비었도다.
큰 부자 작은 부자 고루 찾아다니며
후하고 박한 가풍(家風) 모조리 맛보았노라.
신세가 기구해 남의 눈총만 받다 보니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돌아가자니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려워
얼마나 긴 세월 길가에서 헤매야 하는가.
.. .........................................
지리산에는 예나 지금이나 기인이 많다.
김삿갓은 역사상 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
세조의 왕위 찬탈에 세상을 등지고 산 김시습,
선조때 예조정랑 벼슬까지 지냈던 임제
당파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남은 여생 동안 풍류를 즐기며 보낸 인물.
순조때 풍자와 해학으로 일생을 보낸 김삿갓
서민적인 이미지을 풍긴 대중적인 방랑 시인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炳淵)이다.
삿갓을 쓰고 다녔기에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
그의 할아버지는 익순(益淳)이고, 아버지는 안근(安根)
그는 안근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난 안동김씨 세도가문
그의 가문은 19세기 조정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안동 김씨
그가 태어날 적에 그의 집안은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 익순은 그가 5살 때 평안도 선천(宣川)부사
그런데,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며
세도정치 가문 안동 김씨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국가 경제가 무너지며 농민들은 유민 또는 노동자로 전락.
이때 서북인 양반 홍경래는 난을 일으켜 안동 김씨를 타도.
홍경래 농민군은 10일 만에 가산, 곽산, 정주, 선천을 점령
가산 군수 정시(鄭蓍)는 맞서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었는데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몸을 재빨리 피했기에 구사일생.
그후 김익순은 농민군에게 잡혀 그들에게서 직함을 받았고
또 농민군의 참모 김창시 목을 천냥에 사서 조정에 바쳤다.
이렇게 공을 위장했던 김익순은 모반대역죄로 참형을 당했다.
그 뒤 정시는 만고의 충신이 된 반면
김익순은 비열한 인물로서 회자되었다.
하여, 김삿갓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역적의 자손이라 노비가 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들의 비호를 받아
모반대역죄는 김익순에게만 묻게되어.
그의 자손들은 노비가 신세를 면하였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보호하기 위해
큰아들 병하와 작은 아들 병연에게 종을 딸려
황해도 곡산으로 들어가서 남몰래 숨어살게 하고,
자신은 막내아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 농촌에 살았다.
자식들에게 집안 내력을 숨겼던 김삿갓 어머니
둘째 아들 병연은 서당에서도 남달리 영민했다.
스무살이 되자 병연은 지방 향시(鄕試)에 응시.
시제(詩題)는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는 것을 탄식”
병연은 자신있게 시를 써내려 갔다.
시의 끝구절은 다음 같이 매듭지었다.
“임금을 잃은 이날 또 어버이를 잃었으니
한 번만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네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일을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리”
그는 장원급제를 했고 어머니에게 자랑한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옛일을 더 감출 수 없었다.
그 옛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은 병연은 방황한다.
어머니는 그 마음을 가라앉히려 22세에 장가를 들게한다.
그러나 병연은 결혼 후 아들을 낳고도 마음을 잡지 못한다.
결국 그는 가족과 헤어져 삿갓쓰고 팔도유람하며 세상을 풍자
병연은 집을 나온 뒤 삿갓을 쓰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삿갓을 쓰고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에 김삿갓으로 통했다.
그는 형 병하가 세상을 떠나자 방랑 2년만에 집에 들렀다.
잠시 집에 머무르는 동안 둘째 아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머니와 아내와의 마지막 이별.
그후 발걸음이 닿는 대로 전국을 떠돌았기 때문
북으로는 강계, 평양, 금강산 아래로 여산,
지리산 자락까지 방랑하면서 시를 쏟아냈다.
양반의 허세, 벼슬아치들의 탐학,
굶주라는 농민, 정이 그리운 기생
위선에 찬 현실과 고단한 삶을 표현.
그는 그러한 현실을 풍자와 해학으로 일삼았다.
술만 보면 실컷 마시고 거침없이 시를 지었던 그.
누가 따뜻하게 재워주고 먹여주고 솜옷을 지어주면
마다않고 입었다가 헐벗은 사람을 만나면 벗어준 김삿갓.
남루한 겹옷 차림으로 57세때 전라도 이름없는 곳에서 운명.
그의 둘째 아들이 시신을 거두어 태백산 기슭 영월에 묻었다.
'그의 삶 자체가 풍류이고 시였던 김삿갓.'
그는 위선에 찬 양반세계를 해학으로 풍자하며
양반의 형식적이고 음풍농월식의 시를 거부했다.
그의 시에는 더럽고, 뒤틀리고, 아니꼬운 속내들
김삿갓과 관련한 일화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온다.
그가 개성 어느 집 문앞에서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자,
집주인은 문을 닫아걸고 나무가 없어 못재워 준다고 했다.
이때 그가 지은 시는 이러했다.
“고을 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며,(邑名開城何閉門)
산이름은 송악인데 어찌 나무가 없다 하느냐.(山名松岳豈無薪)”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고 민중과 벗하며,
한시를 우리나라 말로 쉽게 풀어쓴 시인.
민중과 함께 숨을 쉬며 탈속한.. 민중시인.
김삿갓에 얽힌 에피소드는 참 많다.
그중 제일 유명한 처녀뱃사공 일화.
<처녀 뱃사공.>
옛날 옛적에 김삿갓이 전국 유랑 다닐 적에
처녀 뱃사공이 노젓는 배에 올라타서 하는 말.
"여보,마누라.."
"어째, 내가 댁의 마누라란 말이요."
"당신 배에 올라탔으니, 내 마누라지."
"......................"
처녀뱃사공은 묵묵히 노를 젓다가
이윽고, 배가 강 건너에 도착하자
처녀 뱃사공이 김삿갓에게 한마디.
"아들아. 잘 가거라."
"내가 어찌 처녀의 아들인가?"
"내 뱃속에서 나갔으니까,내 아들 아닌감~~~"
"허허허~~맞는 말일세 그려~~~"
......................................
詩 : 바람이여..- 서 정 윤.
......................................
바람이고 싶어라
그저 지나가버리는,
이름을 정하지도 않고
슬픈 뒷모습도 없이
휙하니 지나가버리는 바람.
아무나 만나면
그냥 손잡아 반갑고
잠시 같은 길을 가다가도
갈림길에서
눈짓으로 헤어질 수 있는
바람처럼 살고 싶어라.
선유락(船遊樂) -배따라기.
진주목사 박원 정현석이 지은 교방가요.
14 정재무 중 하나 ‘선락(船樂)’- 배따라기.
뱃놀이 춤으로 궁중에서 이어져온 향악정재(鄕樂呈才).
향악정재는 고려에서 계승된 중국 당악정재와 다른 무용.
궁중 무용(정재)은 신하가 임금에게 재주를 바치는 것을 의미.
즉 선유락은 임금이나 대비를 위한 잔치때 올려졌던 궁중 무용.
중국사신(귀향살이) 떠날 때 이별 애환을 담은 대아악 배따라기곡
.............‘배타라기곡(排打羅其曲)’ 연행 모습 -기록.............
“자리 위에 그림 배를 놓고 어린 기녀 한쌍을 뽑아서 죄인을 잡는 사령으로 분장하여 붉은 옷를 입히고 붉은 칠한 모자(朱笠), 패영에 호수와 흰 깃을 단 화살을 꽂고, 왼손에는 활시위를 잡고 오른손에는 채찍을 쥔다. 먼저 군례를 마치고 첫 곡조를 부르면 곧 뜰 가운데서 북과 나팔이 울리고 배 좌우의 여러 기녀들이 모두 채색 비단에 수놓은 치마를 입은 채 어부사를 제창한다. 음악이 반주되고 이어서 둘째 곡조, 셋째 곡조를 부르되 처음 격식과 같이 한 뒤에 또 어린 기녀를 죄인을 잡는 사령으로 꾸며 배 위에 서서 발선하는 포를 놓으라고 노래를 부른다. 이내 닻을 거두고 돛을 올리는데 여러 기녀들이 일제히 축복의 노래를 부른다.
"닻 들자 배 떠난다.
이제가면 언제 오리
만경창파에 가는 듯 돌아오소.
이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눈물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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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목사 정현석의 선유락에 대한 기록.
錦帆高掛採船輕.......비단돛 높이 거니 아름다운 배 가볍네
擧정砲聲鼓角鳴...... 닻 올리자 포성 나고 북 나팔 울리고
系知此去何時返...... 이제가면 언제 돌아오나
洽是朝天駕海行...... 황제께 조회하러 바닷길 오르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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