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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允泳 傳
고찰(考察)해 보자면 아무래도 후한(後漢) 선제(先帝)때의 일이 아닌가 싶다. - 이설(異說)로눈 송(宋)나라가 망하고 십국(十國) 분열기, 혹은 문왕조(文王朝)시기, 또는 반도(半島)의 후삼국(後三國) 백제때의 일이라 말하는이도 있다.
선제(先帝)가 역적 동탁을 참수하고 ‘십칠국(十七國)의 난(亂)’을 평정하니 천하가 다시 평온해졌다. 난이 평정된뒤 황제는 순행을 종종 떠나곤 했는데 한번은 날씨문제로 인해 연기되었다. 칠무장군(七武將軍)중 삼서열(三序列) 조운(趙運)장군이 대신 황도 인근 동남부 지역을 순시중이었는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독화살이 하나 날아들었다. 부장들이 바로 보호하여 위기를 모면했고 범인을 잡고보니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벗겨보니 놀랍게도 나이어린 여자였다. 추궁하여 경위를 물으니 여인은 이와같이 답했다.
‘나는 마윤영(馬允泳)으로 올해 나이 18세요 서량자사요 복파장군을 지낸 마등(馬登)장군의
막내딸이다. 역적 현덕(賢德)이 무도하게도 서량땅을 짓밟고 우리 마씨(馬氏)일족 70여인을
해치고 서량백성들을 능욕하였으니 그 원한이 뼈속까지 사무쳐있다. 내 아버님과 네분의 오
라버니 그리고 70여 일족과 서량백성을 대신해 대역적 유비를 척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대신 태자나 황후를 노리려 했으나 역시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서량땅을 짓밟을 때 가장
앞장섰던 조자룡이란 늙은이의 간을 씹어먹으려 했는데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도다. 더 할말
없으니 어서 죽여라’ 고 했다.
선제가 보고를 받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마등이 ’십칠국의 난(十七國)의 난(亂)‘에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역적 동탁의 전횡을 보면서
도 외면하고 있었고 십칠국의 난때도 황제를 돕지 않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 천하의
뜻을 대신하여 응징하였을뿐이다. 헌데 어찌 한낱 어린 계집이 아무리 세상이치를 모르기
로 그와같은 요망한 말을 이제와서 지껄인단말이냐.’
하고는 법도대로 윤영을 목베라 지시헀다. 헌데 조운이 황급히 말리며 ‘차라리 제게 주시라’고 했다. 선제가 의아하고 한편으론 황망하기도 하여 ‘자신을 시해하려한 이를 첩실로 삼는다는 말은 요순이래로 들어본바가 없소이다. 대체 장군은 무슨 까닭이오 ?’ 하니 조운은 뜻은 밝히지 않은채 거듭 애원만 하여 결국 조운에게 넘겼다.
측근장수 태사자와 전예 또한 의아하여 말하기를 ‘그 옛날 거기장군(車驥將軍) 동승이 본부인과의 사이에 딸이 여덟 있었으나 아들이 없다가 나이 70에 나이어린 첩실을 들여 비로소 자손(子孫)을 보니 그로인해 가문의 제사가 끊으지 않은 이치는 있으나 장군께선 이미 아들이 둘인데 굳이 나이어린 첩실을 그것도 장군을 시해하려한 아이를 들이는 까닭이 무엇이오이까’ 하였다. 조운이 말하기를 ‘첫째는 앞날이 아직 창창한 어린 소녀에게 삶의 기회를 다시한번 주기 위함이요 둘째로는 서량에서 거칠게 자라나서 부도(婦道)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 어린 여자에게 참된 ’여인의 길‘을 깨우쳐주기 위함이며 셋째로는 나를 시해하려한 죄인을 사랑으로 품어 감화(感化)시키고자 함일세’ 하였다. 태사자와 전예가 그제애야 감복하여 ‘장군의 높고도 깊은뜻을 이제사 알겠소이다’ 하였다
이때 조운에겐 아들로 조통(趙統)과 조광(趙光)이 있었는데 나이 이미 40에 이르렀고 조통은 슬하에 1남1녀, 조광은 2남1녀를 들였다. 조운이 절은 후실을 들이며 아들,손자에게 인사시키려 하였으나 윤영이 받지 않았다. 또한 공이 직접 신경써서 맞춰준 고급지고 아름다운 혼례복을 내려주었으나 윤영은 두 번이나 찢어버렸다. 조운이 그런 윤영을 타이르며 말하기를 ‘적당히 까불고 천하대세를 따르도록 하라. 네 죽을목숨을 살려준 것 아니냐’ 하였다.
윤영이 혼례를 치르고도 백일이 지나도록 조운과의 동침(同寢)을 거부했다. 조운이 이에 약간의 꾀를 내어 하인을 시켜 약간의 술을 윤영에게 먹이게 한후 잠든틈을 타서 짐소에 들이게 했다. 허나 조운이 윤영을 품에 안으려하자 윤영은 숨겨둔 비수로 조운을 찌르려했다. 조운의 무공이 워낙 뛰어나 위기는 넘겼으나 윤영을 거듭 타이르며 ‘다시는 이런 장난을 치지말라’ 하였다.
한달뒤 윤영은 몰래 밤을 틈타 집안의 말을 훔쳐 달아나려 했으나 역시 얼마못가 붙잡히고 말았다. 도로 붙잡혀온 윤영을 보며 조운은 ‘한번만 더 이런일을 발이면 발에 족쇄를 채우겠다’ 하였다. 진심으로 노기를 띤 모습이었다.
윤영이 거듭 조운을 거부하자 조통과 조광 두 아들이 아비가 출타한 틈을 타서 집을 방문하여 ‘이 버르장머리없는 계집의 버릇을 고쳐놓겠노라’ 한뒤 윤영을 마당에 끌어내어 옷을 벗긴뒤 마당 버드나무에 거꾸로 매달고 채찍으로 마구 때렸다. 조운이 뒤늦게 돌아와서는 놀라 ‘새어머니께 그 무슨 무례한 짓이냐 ?’며 아들들을 꾸짖고 윤영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는 ‘이 자리에서 진실로 모자(母子)의 맹약을 맺기 바란다’ 하였다. 조통과 조광이 마지못해 절은 올렸으나 윤영이 받지 않았다.
무안국(武安國)이라는 이가 있었다. 본래 북해태수 공융의 수장(首將)이었는데 공융이 십칠국의 난에 가담했다 패망하뒤 선제에게 투항하였다. 신료들은 각기 상주(上奏)하여 말하기를 ‘공융이 십칠국의 난에 가담한 역적으로 처단되었는데 그 수하를 거둠은 옳지 않소이다. 마땅히 같은죄를 물으셔야 합니다’ 하였다. 선제가 말하기를 ‘그의 용맹과 충의가 아까워 살려둔것일뿐이니 더난 거론치 말라’ 하였다. 하루는 안국이 조운의 집을 방문했을 때 윤영을 만났는데 말하기를 ‘나는 옛 주군을 죽인 원수를 어쩔수없이 섬기고 있고 부인께선 아비를 죽인 원흉(元兇)을 지아비로 삼게 되었으니 같은 처지라 할수 있소이다. 항차의 일을 어찌 하겠소이까.’ 하니 윤영이 답하기를 ‘이년의 팔자가 그러하니 어찌하곘소이가. 한낱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어찌 천하대세를 거스르리오’ 하곤 빙긋이 웃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관우가 하루는 안국을 초빙해 말하기를 ‘그대가 옛 공융의 신하로써 충의를 다하려 함은 이해하나 공융은 이미 역적의 무리에 가담하여 처단되었는데 그를 여전히 기림은 같은 역적이 되는것이나 다름없소. 선제께서 특별히 은혜를 베푸시어 귀공을 살려주셨고 이제 귀공이 이 나라의 벼슬을 하고 있으니 함께 충의를 다해 선제를 보필하도록 합시다’ 하니 ‘나는 한번 공융의 신하였으니 죽어도 북해의 귀신이 될것이요, 역적 현덕이 찬역한 땅 그 어느곳의 곡식도 먹지 않을것이외다’ 하였다. 장비가 노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승상 허준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충신에게 너무 굴복을 권하는것도 예가 아니오 한번 섬기기로 한 주인을 끝내 배신하지 않음은 본받을 일이니 함부로 다루지 말기 바라오.’ 하였다.
무안국이 끝내 투항을 거부하고 달아나려 했다. 관우가 놀라 무안국을 막으려 했으나 무안국은 다섯관문을 지나 여섯장수를 베며 남동쪽 바닷가로 달아났다. 바다를 건너 백제에 투항하니 훗날 백제 무안씨(武安氏)의 시조가 되었다. 훗날 어떤 시인이 탄식하여 시조를 지어 말하기를 ‘중원의 곡식은 역적이라 먹지 않겠다는이가 오히려 반도로 투항하여 시조가 되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로다’ 하였다.
요화(搖化)라는 이가 있었다. 본래 황건 잔당출신이었으나 선제가 십칠국의 난을 평정할 때 투항하여 장수가 되었다. 이후 천하가 평정된뒤에도 계속 중용하려 하였으나 그의 출신(出身)과 전력(前歷)을 들어 시기,질투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한번은 밤중에 누군가가 요화의 자택 근처 땅속에 병장기를 묻으려하다 적발되었다. 요화가 이를 알고 탄식하여 ‘이는 젊은 계모가 의붓아들을 유혹한뒤 오히려 자신을 범하려 했다고 하는것과 무엇이 다른가. 자작극을 벌여 나를 모함하려 드는구나’ 하였다.
또 한번은 어떤이가 편지를 조작하여 요화가 도적의 무리와 내통하여 난(亂)을 일으키려 하는것처럼 일을 꾸몄다. 역시 적발되어 모함하려던 이가 처벌받기는 했으나 요화가 더는 견딜수가 없어 선제께 찾아가 무릎을 꿇고 통곡하여 아뢰었다. ‘소인을 시기,질투하는 이들이 많아 제가 더는 폐하를 충의로 섬길수 없을듯합니다. 이에 떠나고자 하니 윤허하여주소서’ 하였다. 선제가 그런 요화의 두 손을 부여잡으며 ‘짐이 천하를 얻는데 공의 세운 공로 또한 혁혁하고 막중한데 이제 고생의 시절이 지나고 부귀와 평안의 시대만이 남았을뿐인데 떠난다니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인가. 경은 과인의 곁에서 충성을 다하도록 하라.’ 하며 만류하였다.
하루는 관우를 찾아가 역시 비슷한 고민을 토로하였는데 관우가 역시 만류하며 말했다. ‘이전에 공융의 수하였던 무안국이란 장수가 끝내 폐하를 저버리고 떠나버려 폐하의 상심이 이만저만 아니었소. 이제 공(公)마저 떠나면 폐하께서 자신의 부덕(不德)을 탓하시며 상심이 커져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것이 염려되는바 부디 공은 폐하의 곁에 남아주시오’ 하였다. 이때 정랑(正郎)벼슬을 하는 어떤이가 관우의 집 근처를 지나가다 술에 많이 취해 ‘한다하는 벼슬아치도 관공(關公)을 쉬이 뵙지 못하는데 일개 도적놈 출신이 시도때도 없이 대인(大人)의 집을 드나드는구나’ 하였다. 요화가 이 광경을 보고는 더더욱 ‘제가 폐하의 곁에 머무를수 없는 까닭이 이와 같소이다’ 하였다.
요화가 조운의 집을 방문했을 때 부인(婦人)을 만나본적이 있는데 요화가 묻기를 ‘부인이 애초에 장군을 시해하려 했는데 오히려 장군께서 부인을 첩으로 거두었고 부인은 또 여기에 순응하며 살고 있으니 실로 그 까닭을 알수 없소이다’ 하였다. 부인이 대답하기를 ‘내 비록 연약한 아녀자의 몸이라고는 하나 어찌 대세에 순응한 하며 살으리오. 내게 아무리 부귀공명과 재물을 준다해도 본심(本心)이 변하는일은 없을것이오이다’ 하였다. 요화가 부인의 뜻을 알 수 없어 두려워하였다.
요화가 핍박을 더는 견딜수 없어 마침내 선제의 곁을 떠나려하니 이제 관우,장비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밤중에 중원을 떠나 구려(句麗)에 투항하니 훗날 반도(半島) 요씨(搖氏)의 시조가 되었다.
선제가 하루는 크게 연회를 베풀어 천하를 평정하는데 크게 공을 세운 공신과 장수 내외를 모두 초청해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조운은 윤영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였다. 선제가 중원을 평정하자 동오왕(東吳王) 손정활은 막내딸을 후비로 바쳐 복속을 청하였는데 이로서 손씨(孫氏)가 선제의 후비가 되었다. 연회에서 후비가 윤영을 보고는 말하기를 ‘나는 동오의 여인으로 선제의 후비가 되었고, 낭자께선 서량인으로 조장군의 아내가 되었으니 처지가 같다 할수 있겠소이다. 타향살이가 쉽지 않을터인데 부디 마음가짐을 평안히 하소서’ 위로하려 하였는데 윤영이 되려 비웃었다. ‘서량의 법도는 동오와 달라 하나같이 성정이 강직하고 용맹하기 짝이없다. 동오는 따뜻한 남쪽나라라 성질이 유약하여 한낱 어린 계집을 바쳐 노비의 신분으로나마 생령을 보존케하려 할지 모르곘으나 서량인은 그렇게 쉬이 죽지 않는다. 반드시 부흥할테니 그리알도록 하라’ 하였다. 황후가 당황하여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데 조운이 황급이 부인을 데리고 궁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데려와 꾸짖으며 말하기를 ‘거기가 어떤 자리라고 그것도 황후마마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는가. 그래도 내가 그대를 정실(正室)로 대우하고자 그런 자리에 데리고 간것인데 이와같은 언동을 하면 내가 그대를 데리고 쉬이 황궁에 드나들수가 없다. 앞으로 언동에[ 조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영은 다만 대꾸없이 고개만 숙이고 말이 없었다.
하루는 조운이 다시 윤영을 데리고 입궁하였는데 태자 유선(劉禪)을 만나게 되었다. 유선이 이제 17세였는데 공손히 조운의 부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조운이 공신이요 나라 무장서열 3위니 그 부인에게도 합당한 예를 올린 것이다. 허나 윤영이 유선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듯 하더니 말하기를 ‘내가 서량예 있을 때 옛 스승으로부터 관상을 좀 배워 볼줄을 아는데 그대의 상은 과히 길(吉)하지가 못하도다. 그대가 천자의 대업을 능히 물려받을수 있을지 심히 염려되도다. 물려받기도 쉽지 않을것이거니와 혹여 그리된다 하더라도 그 치세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조운이 다시 당황하여 부인을 끌고 나와서는 ‘어찌 황궁에 들어갈때마다 말을 함부로 하여 나를 당황하게 하였는가. 본래 황실과 공신을 시해하려한 죄인으로 죽은 목숨을 내가 겨우 황제께 아뢰어 살려준것인데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내가 그대를 귀히 대접해줄수 없도다. 앞으로 언행에 각별히 유의토록 하라’ 하였다.
윤영이 끝내 조운을 시해(弑害)할 뜻을 거두지 않았다. 이번엔 몇몇 동네 건달들에게 약간의 금전을 준뒤 ‘모월모일 조운이 출타하였다 돌아오는길에 동네 길목을 막아 강둑으로 유인해라. 그 뒤에 강에 조자룡을 빠트려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동네건달들은 대개 오래전부터 조운을 흠모하고 존경해온 자들인지라 이중 몇몇이 이내 곧 조운에게 고하고 말았다. 조운이 노하여 윤영에게 경고히기를 ‘네 장난이 갈수록 지나치구나. 죽을 목숨을 살려주었으면 그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지아비를 평생동안 하늘처럼 떠받들어도 부족함이 있거늘 두 번다시 이런일을 벌이면 그땐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였다. 윤영이 끝내 한을 풀지 못하고 이번엔 은밀히 의원(醫員)을 시켜 독살을 시도했다. ‘연로한 장군을 위해 준비한 탕약’이라 속인뒤 약에 소량의 독약을 타서 살해할 생각이었다. 허나 이 역시 의원의 고변으로 발각나고 말았다. 조운이 극도로 노하여 윤영의 목을 조르며 ‘어린 계집의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장난질을 언제까지 귀엽게 봐줄줄 알았느냐 ? 계속해서 서툰짓을 도모할시에는 이전의 대역(大逆)의 죄를 함께 물을테니 그리 알도록하라’ 하였다.
윤영이 끝내 뜻을 저버리지 못하고 이번엔 조운대신 그 두아들을 독살하려 하였다. 조통과 조광이 정기적으로 부친께 인사드리러 오는날 대접할 다과에 소량의 독을 탔다. 헌데 조통이 먹지 않고 어린 두 아들이 그만 과자를 먹어 죽고 말았다. 진상이 발각나니 조운이 극도로 노했다. ‘철없는 어린 계집의 장난을 여러차례 눈감아주었더니만 이제 도저히 봐줄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나를 시해하려한 죄, 폐하나 황태자를 살해하려한 죄는 너그러이 용서해줄수 있을지라도 죄없는 내 자손을 그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손자를 독살한죄는 도저히 용서할수 없도다’ 하여 급기야 하인들을 시켜 윤영을 끌어내게 한뒤 온 몸에 기름을 뿌리게 했다. 그리고 윤영을 불에태워 죽이니 윤영의 반란은 이렇게 끝이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