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거기에 소모한 비용이 수입을 훨씬 초과하는 사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염세주의자의 삶이란 수입보다 지출이 더 큰 적자투성이에 불과할는지도 모르지만, 낙천주의자의 삶이란 수입과 지출의 규모가 똑같은 것이며, 어느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는 돈과 명예와 권력 등이 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눈이 먼 두더지, 땅속의 구멍만을 파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만 있는 두더지----, 그러나 이 두더지가 ‘밤의 동물’이라고 해서, 적자투성이의 생명이고 불행한 동물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두더지에게는 두더지만의 삶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병명病名은 염세주의이며, 그 병세는 끊임없이 이 세상을 비방하고 혐오하며 헐뜯어 대는 독설가의 그것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예컨대 지칠 줄 모르는 동물인 두더지의 경우를 살펴보라. 몸에 비해 엄청나게 커다란 삽의 역할을 하는 앞발로 열심히 구멍을 파는 것만이 두더지의 전 생애의 활동이다. 두더지의 주위는 언제나 밤이 둘러싸고 있다. 미니어처와 같은 눈을 갖고 있지만, 이것은 다만 빛을 피하기 위해서다. 두더지만이 참된 ‘밤의 동물’이다. 밤에도 시력이 있는 고양이, 박쥐, 올빼미들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데 두더지가 이렇게 해서 즐거움을 등지고 애써 살아간 결과, 얻는 것은 무엇일까? 먹고 교미하는 것뿐이다. 즉, 새로운 개체 속에서 똑같이 쓸쓸한 일생의 길을 계속해 나가는 수단을 얻을 뿐이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반경환 {쇼펜하우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