祭祀는 朝鮮初 太祖 6年 1397年 부터 지내기 시작하여 630년 내려온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60%~70%가 아직
지내고 있으며 심지어 改新敎를 믿는 집들도 40%는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傳統을 바꾸는것이 쉽지않다.
1392년 고려때 까지 1,000년 넘도록 불교 국가로 結婚은 男子가 女子네 집으로 장가를 가는 것이라 하나 우리
韓山李氏의 來歷을 보면 先祖 牧隱 先生 祖母님 遼陽縣君 三韓國大夫人 興禮李氏가 또 어머니 咸昌郡夫人咸昌
金氏가 또 貞愼宅主 安東權氏가 시집오셨으며 그 아들 種學의 婦人 郡夫人 陽城李氏 등 子婦와 孫婦등이 시집을
온것을 보면 역사 기록도 완전히 믿을것이 못된다고 보며 우리집안도 불교를 믿었던 기록이 나오는데 아마도
주로 유교를믿고 불교는 공부하러 다니 셨든것으로 보여진다. 고려때도 장가를 가는사람 시집을 가는사람 형편
대로 했던것이 아닌가 생각도 되어진다. 그러나 고려때는 제사는 고위 관리들만 절에 가서 지냈다고 보여진다.
조선조에 들어와 풍속이 유교식으로 바뀌어 여자들이 시집가는 유교식으로 각 가정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고려시대까지는 모계중심 사회로 경제권이 여자가 갖고 있었다. 조선으로 와서 유교로 바뀌면 모든것이 바귄다.
1397년(太祖 6年) 에 家廟 또는 祀堂을 設置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가정 제사를 강제하기 시작한것이다.
1401년(太宗1年)12.5 家廟制 실시를 강제하고 1406 병술년 6.9일 祀堂짓기를 권장하며 그래도 사당을 안짓는다.
1413년(太宗13年) 5.10 祀堂을 안지으니 강제로 짓도록 한다.
1000년 넘도록 절에서 제사를 절에서 지냈으니 가정에서 지내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며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을 것이며 사당을 짓는 법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을 것이다.
1432. 2. 2 왕조실록 기록. 1432(壬子)년 세종25년 11월 11일에도 사당은 많이 세워지지 아니 한듯하다.
조선 개국후 100여년이 지난 9대 成宗때에 朱子 性理學이 導入되면서 祀堂도 짓고 祭祀도 지내다 보니 氏族
共同體가 생겨나고 農耕社會라 集姓村이 형성되어 생활하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씨족의 구성내역표가 필요하여
族譜또는 譜牒의 필요성이 있게 되었다. 親戚뿐 아니라 姻戚의 관계도 알 필요가 발생했다. 보첩 또는 족보는
15, 16, 17世紀에 각 姓氏들이 發刊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처음 族譜가 1476년 成宗때에 發刊한 安東權氏 成化譜로 그 序文을 大文章家 四佳 徐居正이 지어 譜牒의 원리를 잘 밝혀놓아 가치를 더욱높이고 있다.
韓山李氏는 1643(癸未)년에 江原 觀察使 怡愉堂 李德洙가 發行하였다. 그 發刊 板刻이 文獻書院 藏版閣에
잘 保管되어 傳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100년전 까지만 하여도 姓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1910(庚申)년 庚戌 國恥 후에 侵略者 日本에 의하여 강제로 모두 姓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高麗때는 郡縣制 朝鮮때에는 洞里制로 지내다가 日帝侵略時 1917년 지적측량에 의하여 地番에
살게 되었다. 集姓村은 農耕社會에서 필요 했으나 工業, 情報化 時代에는 自然的으로 사라지게 되어 지금은
特別한 集姓村은 모두 사라지고 그사라지는 마지막 골목에 약간의 墓域管理등에 必要하여 長子들이 조금
지키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새로운 傳統文化가 다시 정립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