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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복음(갈 2:19-21)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새도록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온 밤을 새우시며 이마에 땀이 핏방울이 되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음이 매우 고민되어 죽게 될 정도로 힘드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십자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십자가에 대한 기도입니다.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시기에 만일 할수 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심각한 갈등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분명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비록 십자가의 길이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길을 가시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 결단했습니다. 이 기도를 드리신 후에 군사들에 의해 끌려가 가야바 법정, 빌라도 법정, 헤롯왕 법정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형을 받아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음으로 온몸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그런 몸으로 70kg이 넘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시다가 3번이나 넘어지고 쓰러지셨습니다. 그때마다 로마 병정이 내려치는 채찍에 맞아 다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게 되자 저 아프리카에서 온 구레네 시몬을 억지로 붙잡아 십자가를 대신 지게했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골고다언덕에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오후 3시,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커다란 고통을 겪으시다가 숨을 거두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번 주간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일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고난주간에 우리 자신도 다시한번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를 말합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 기름부은 자는 세 부류 사람입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만왕의 왕으로, 말씀 자체이신 선지자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로 친히 성소에 들어가신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으시거나 죽으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런 분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정죄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처절하게 절규하셨습니다. 엘리엘리 라마나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목마르다 하시며 무려 6시간의 고통 끝에 운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때문이요 예수님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속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죄인된 내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죄를 다 대신 짊어지시고, 또 내 질병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유월절의 어린 양처럼 속죄양이 되신 것입니다.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사하시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 모두에게 복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인이었던 우리의 죄를 소멸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원수되었던 우리를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합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형벌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거룩하신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위해 친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자기 목숨조차 내어놓으시고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적으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십자가임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결코 구원의 복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나를 위한 구원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누구를 위한 십자가입니까? 나를 위한 십자가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위해 내 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2.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십자가앞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그 십자가에서 자기도 죽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몸으로 죽을 수는 없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들임으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나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식속에 담겨있는 영적 의미입니다.
예수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죄악의 더러움을 처절하게 느끼고 다 고백함으로 주님께 전가한 것입니다. 마치 구약의 제사때에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전가시킨 것처럼 내죄를 다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이 내 죽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롬 6:5-7)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예수와 함께 죽었더니 예수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죄인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더니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살아났습니다.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죽어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겜버스’라는 사람은 “모든 일은 십자가 위에 있다. 매일 십자가에서 죽지 아니하고는 생명과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그 속에 생명과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죽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힘은 옛사람이 못 박힌 것이며, 세상에 대하여 못 박혔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려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죽어야 할 것이 죽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죽지 못하는 모습은 미완성된 모습입니다. 죽지 못한 모습은 수치와 추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죽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지 못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앞에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버리고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는, 죄인인 나, 옛사람의 성품, 육신의 정욕과 탐심과 함께 나쁜 감정의 노예로 있는 나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죽지 못하지만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 능력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나는 벌써 죽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성령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을 주십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새롭게 죽음을 확인합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받아서 좀 더 깊은 말씀을 합니다. “매일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율법에서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매일 같이, 날마다 새롭게 세례를 받는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이겨보려고 했습니까?
가끔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비우세요." 비운다는 말을 쓰기도 하고 "자기와의 싸움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마음을 비웠다고 큰소리치지만은 남보고 비우라고 하지 정작 자기는 비우지 못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이기는 일이 나로 가능하냐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서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내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사에 유명한 초대교회 목사가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예수믿기 전에는 북한 황해도 신천장의 유명한 깡패입니다. 아주 소문난 깡패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이제 전도사가 되어서 아직 목사가 되기 전에 너무 불같이 열심히 끓어올라서 매일같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 저 사람 얼마 전까지 깡패였는데" 그러면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이러고 다녔단 말이에요.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아주머니가 '김익두 죽었나 살았나 한번 시험을 해보자.' 문 앞에 와서 "예수를 믿으세요" 하는 걸 설거지물을 갖다가 얼굴에다 확 뿌려버렸어요. “죽었나 살았나 보자"했더니 김익두 전도사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죽었으니 당신이 살았쟎느냐" 했답니다. 그렇지요?
내가 죽었으니 당신이 살았지 내가 만일에 옛날 사람이라면 당신은 벌써 죽었어, 오늘이 장례식 날이지. 안 그렇습니까? 나는 이미 죽었어요. 누가 뭐라고 하던 말던 상관이 없어요. 나는 벌써 죽었어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어요.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여러분,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 율법 앞에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하나는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 것입니다만은 그건 이론이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누가 율법 앞에 의인이 있습니까? 작으나 크나 죄인은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 자유할 수 있는 심령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으면 끝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은 죄인이라도 감옥 안에서 죽으면 그 시체는 감옥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율법은 살아있는 자는 정죄하지만 죽은 자는 어찌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율법 앞에서 완전히 죽어질 때, 내 영혼이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봅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쳐다볼 때 나는 죽었습니다. 이미 죽은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그 신비로운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나를 발견하고,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안에 예수님이 사신 것입니다. 본문 20절 중간을 보시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죽음으로 내 안에 예수가 사셨습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한 알의 밀알처럼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내안에 생명의 싹이 나오면서 그 생명이 자라갑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죄의 몸은 죽었습니다. 내안에 새로운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골 3:4절에서 예수님을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새 생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의 의미요, 성찬식의 의미인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내가 먹음으로 내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내가 힘쓰고 애쓰면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와 사시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롬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제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이기에 주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인이 바로 주님이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주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고 내가 원하는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 거리로 나아가서 이렇게 설교하셨습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는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하나 나의 주가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와 살아계신 것을 믿는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20절 하반절에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산다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곧 내가 이제 믿음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 그 사랑을 깨닫고 그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입니까?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를 죄에서 구속하신 예수, 내속에 들어와 내 생명의 되신 예수, 그레서 나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면 이제는 내 뜻대로 살면 안됩니다. 언제나 주의 뜻을 주목하고 주의 마음을 품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의 뜻이 담긴 성경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절박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했습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명령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는 무엇이 함께 들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증거했던 사도바울처럼 오늘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일 5:4,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그러므로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요, 나아가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음을 믿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내 안에 살아계셔서 나의 주가 되시고 나의 그리스도 되심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내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하나님의 사랑의 현장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나도 거기서 죽었습니다. 나의 옛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제 내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셔서 나의 주가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안에 지금도 살아계셔서 영원히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는 생명의 그 큰 은혜를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