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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읽는 단편 교리] 최상의 은총이자 사랑 표현, 순교(殉敎)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의 경축 이동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는 주일 전례가 아닌 대축일 전례로 봉헌됩니다. 오늘은 ‘순교’에 관해 알아봅니다.
순교는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최상 은총의 결과이며, 그분을 향한 최고의 사랑 표현입니다. 순교는 그리스어로 [마르튀리온] (μαρτύριον), 라틴어로는 [마르티리움] (martyrium)이라고 하는데, ‘증언’ 혹은 ‘증거’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박해로 자기 목숨을 내놓는 이들의 행위를 가리키는 그리스도교 용어로 채택되면서 ‘순교’라는 의미도 얻게 되었습니다.
순교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육신 생명의 희생 곧 진짜 죽음이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교에 대한 직접적 반대인 박해로 인한 것이어야 합니다. 셋째, 하느님과 그분 진리를 위해 스스로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조건들이 반드시 엄격하고 정확하게 적용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아기 예수님을 대신해서 살해된 아기들(마태 2,16-18)에게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이란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이나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그리스도교의 덕행을 방어하려다 목숨을 잃었고,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성 토마스 베켓은 교회의 질서와 규율을 지키려다 희생된 경우입니다.
순교는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① 그리스도를 본받음: 이미 순교 기록과 교부들의 저서에 나타난 순교의 첫 번째 의미는 스승이며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음’입니다. 순교가 주님과 가장 일치하는 방법임을 알았던 사도들은 직접 그 길을 걸었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를 권하였습니다.
② 그리스도의 현존: 순교는 자기 의지나 영웅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함께해 주심으로써 가능합니다. 박해자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알려주시는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마태 10,19-20),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강한 용기와 천상의 평화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③ 애덕의 완성: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순교는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사랑 표현입니다. 폴리카르포는 순교자들을 “참된 애덕의 원형들”(「필리피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1)이라 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순교를 “애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④ 순교의 열매: 순교는 순교자 본인에게 은총을 가져다주면서 교회와 세상의 유익을 위한 희생 제사도 됩니다. 곧 두려움에 빠진 형제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테르툴리아노는 박해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대들에게 잡혀갈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그 씨앗이다.”(「호교론」 50,13)라고 말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과 긴밀한 일치를 이루며 그분 안에서 완덕에 이른 성인들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면서 특별히 이 땅에 살았던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품었던 신앙이 우리 안에서도 자리할 수 있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29) 교회의 위계 조직, 「교회헌장」 제3장
「교회헌장」 제3장은 “교회의 위계 조직, 특히 주교직”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위계 조직”입니다. ‘위계’의 라틴어 [히에라르키아] (hierarchia)는 그리스어로 ‘거룩하다’의 [히에로스] (hieros)과 ‘통치’의 [아르케] (arche)의 합성어인 [히에라르케스] (hierarches)에서 나온 말입니다. 곧 ‘위계’는 어원적으로 ‘거룩한 통치’란 뜻을 갖습니다. ‘위계’란 표현은 제1장 8항의 ‘가시적이고 영적인 교회’에서 이미 언급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교회를 가시적 구조로 세우셨으며, 그 교회는 ‘위계적 조직’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교회에 ‘구조’와 ‘조직’이란 단어가 적용되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사회적 제도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의회가 「교회헌장」 제2장에서 교회를 구성하는 전체로서의 하느님 백성의 특징과 사명에 대해서 언급했다면, 제3장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안에 제도화된 성직자에 관해 설명합니다. 하지만 공의회 이전의 교회론에서 볼 수 있는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배우는 교회’(Ecclesia discens)의 이원론적 구조는 혁신적인 변화를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공의회의 교부들이 제시한 제3장 ‘교계 제도’에 대한 주석은 제2장 ‘하느님 백성’과의 연계성 차원에서 교회 안에서의 부르심이나 역할 혹은 신분의 차이보다 세례받은 모든 사람의 동등한 존엄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3장에 나타난 “교회의 위계 조직”에 대한 항목들은 모두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 직무’라는 바탕 아래에서 이해됩니다. 먼저 도입에 해당하는 18항은 봉사 직무의 의미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발자취를 따라 교황 수위권과 주교직에 대한 가르침을 계승합니다. 이어서 19항은 직무에 대한 성경의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부르고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심을 언급하고, 20항은 초기 교회에서 그 직무의 발전으로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주교들이 세워졌음을 설명합니다.
21항은 주교직의 본질과 성사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22항은 주교단의 단체성과 그 단장인 교황의 수위권에 관해 말하고, 23항은 주교단과 그 안의 주교들에 대한 것으로 개별 주교가 개별 교회 및 보편 교회와 맺는 관계, 주교회의와 교황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24항은 주교들의 봉사 직무와 그에 따르는 의무에 대해서 언급하고, 25항에서 27항까지는 주교들의 가르치는 임무(교도권)와 거룩하게 하는 임무(성화권) 그리고 다스리는 임무(통치권)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끝으로 28항은 신부들, 29항은 부제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가시적 요소로서의 위계 제도가 하느님 백성 안에서 그분 몸의 어떤 지체로 살아가야 하는지 들어보겠습니다.
[교회의 언어] Μάρτυς (마르튀스, 증거자)
순교자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을 의미합니다. 순교자를 가리키는 용어는 그리스어 μάρτυς(마르튀스)에서 유래합니다. ‘마르튀스’는 어원적으로 볼 때, 역사적 증거이든, 법률적 증거이든, 혹은 종교적 증거이든 간에 ‘증거자’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에는 ‘목숨을 바치다’ 혹은 ‘피를 흘리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르튀스가 순교자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역사적인 변화의 과정은 차치하고서라도, 충성으로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순교’가 바로 ‘증거’하는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튀스에 가장 어울리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맡긴 사명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충성을 다해 증거한 ‘순교자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이사 53,11; 요한 18,37; 묵시 1,5; 3,14 참조) 역사 안에서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본받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증거와 구원 계획에 완전하게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삶 안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가톨릭 신학] 광야로 돌아가는 이유(호세아서)
호세아서는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는 시기(기원전 722년경)를 배경으로 하며, 하느님과 북이스라엘의 관계를 혼인에 비유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남편 혹은 신랑’으로, 이스라엘은 ‘아내이며 신부’로 묘사됩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호세 2,21) 호세아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유를 그들이 하느님을 멀리하고 바알 등을 향한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으로 보았고, 따라서 호세아서에서 북이스라엘은 남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아내로 묘사됩니다. “그 여자는 바알들에게 분향하고 … 그러면서 나를 잊어버렸다.”(호세 2,15) 하느님께서는 불충한 이스라엘을 벌하실 것을 호세아의 삶을 통해 백성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아내인 북이스라엘이 남편인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던 것처럼, 호세아도 남편에게 충실하지 못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게 되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로 루하마’와 ‘로 암미’라고 짓게 하셨고, 그 뜻은 글자 그대로 각각 ‘자비가 없다.’와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호세아 자녀들의 이름을 통해 더 이상 북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며, 그들이 더 이상 당신 백성이 아니게 될 것임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엄하게 꾸짖으시지만, 멸망이나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다시 돌아와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마음은 다음 구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나가서 다정히 말하리라.”(호세 2,16)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을 ‘광야’로 데리고 나간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거룩한 장소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광야가 바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특별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탈출 후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 물이 없어 목마르다고 불평하면서 하느님을 시험하기도 했고,(탈출 17,1-7 참조)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하느님 대신 숭배하기도 했습니다.(탈출 32,1-6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몇 번이고 이스라엘의 잘못을 용서하시며,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호세아서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데리고 가신다는 표현의 의미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던 특별한 순간들이 있으신가요? 하느님 앞에서 나약해지거나 신앙이 흔들릴 때, 그 순간들을 기억하며 하느님을 향한 더욱 굳센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교회의 축복 예식,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복을 기원합니다. 가족이 건강하게 지내기를, 하는 일이 모두 잘 되기를, 돈도 잘 벌게 해주시기를 청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모든 바람을 모아 하느님께 청하고, 교회는 제정된 축복 예식을 통해 하느님의 복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요? ‘내가 청하니 꼭 주셔야만 하는 복’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이 시간, 교회의 축복 예식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온갖 복의 원천과 기원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좋게 창조하시고, 언제나 당신의 복을 내려주십니다. 또한 때가 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많은 이들에게 강복하시며,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 기도를 바치셨고, 마침내 성령의 선물을 부어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된 이들 가운데 들게 하셨습니다.
결국 복을 빈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복은 하느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보호하시는 사람들을 향하며, 마침내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교회는 이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여러 축복 예식을 마련했고, 축복식의 거행을 통해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 백성의 영적 이익을 증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축복 예식〉 총지침 12항은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때에 따라 교회는 인간 활동이나 전례 생활이나 신심에 관계되는 물건과 장소를 축복하면서, 언제나 그 물건을 쓰고 그 장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온갖 선한 것을 바라시고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이야말로 하느님 지혜를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인간은 피조물을 사용하면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한 분이신 하느님을 충실히 섬긴다는 사실을 축복 예식으로 고백한다.”
가정 · 병자 · 선교사 · 여행자 · 순례자 등 ‘모든 사람들에 대한 축복 예식’, 집 · 사무실 · 건물 · 논밭 · 동물 · 생업 기기 등 ‘신자들의 다양한 생활과 건물에 관한 축복 예식’, 세례대 · 독서대 · 감실 · 십자가의 길 등 ‘전례와 신심을 위한 성당 기물 축복 예식’, 묵주 · 스카폴라 · 성물 등 ‘그리스도인의 신심 증진을 위한 물건 축복 예식’, 그 밖의 ‘여러 가지 축복 예식’ 등 교회는 하느님 창조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축복을 통해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의 선익을 위해, 우리의 환경과 일을 당신의 거룩함으로 변화시키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축복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저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여러분 모두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 1,3)
[저는 믿나이다] (43)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
예수의 신성 · 인성 결합과 삼위일체 교리 제시
3세기 그리스도교는 로마 황제의 조직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지역 교회 주교들을 중심으로 교계제도가 든든히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비 신자 교육 기간도 3년으로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또 2세기 때부터 활발히 진행되었던 성경 정경 목록 작업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처럼 3세기 교회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면서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느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신앙 규범을 확정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 시기 성경 정경과 사도들의 전승에 기초해 삼위일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규범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한 두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호교 교부들인 서방의 테르툴리아누스와 동방의 오리게네스입니다.
최초의 서방 호교 교부인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155~230?/240?)는 그리스도론에 있어 서방이 동방보다 몇 세기 앞서는 큰 신학 업적을 남깁니다. 그는 삼위일체 하느님에게 ‘성삼’(Trinitas), ‘위격’(persona)이라는 신학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라틴 교부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 다음으로 뛰어난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평신도였던 그는 안타깝게도 몬타누스주의 이단에 빠졌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윤리 생활과 지나친 엄격주의를 강조해 배우자 사별 후 재혼하는 것도 간음이며, 박해를 피해 숨는 것도 배교이며, 배교·살인·간음 등 대죄는 교회도 사해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보편 사제직을 강조해 반 교계제도를 주장했습니다. 교회는 이를 ‘테르툴리아누스주의’라 부르며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하지만 몬타누스주의 이단에 빠지기 전 초기 그는 신학 저술을 통해 교회의 신앙 규범 틀 안에서, 유일하신 하느님의 본질 안에서 아버지·아들·영이라는 고유한 실재가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오직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며 모든 것에 앞서서 발하신 그분의 말씀으로, 무에서 만물을 만드신, 세상의 창조주 외에는 다른 하느님이 없다고 믿어진다. 이 말씀은 그분의 아들로 불리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에 의해 여러 모습으로 보여졌으며, 예언자들 안에서 항상 그 말씀이 들렸고, 마지막 날에 하느님 아버지의 영과 권능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내려오셨으며, 그분의 태중에서 육이 되셨고, 그분께 잉태되어 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으며, 그 다음에 새로운 율법과 하늘나라에 대한 새로운 약속을 설교하시고 기적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믿는 이들을 움직이시는 대리자 성령의 힘을 보내셨고,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성인들은 영원한 생명과 천상 약속의 열매를 누리도록 받아들이고 불경한 이들은 영원한 불로 단죄하시기 위함이며, 육의 회복과 함께 영혼과 육 둘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진다.”(테르툴리아누스, 「이단자들의 규정」 13, ‘신앙의 규범’, 황치헌 신부 역, 「고대 교회사 사료 편람」 289쪽)
아울러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항구하게 결합하여 실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육이 영이 되거나 영이 육이 되지 않는다. 물론 육과 영은 온전히 하나의 주체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들로부터 예수가, 육으로부터 인간이, 영으로부터 하느님이 존재한다.”(테르툴리아누스, 「프락세아스 반박」 27.; 「교부들의 그리스도론」 460쪽)
이러한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451년 칼체돈 공의회의 교의 선포에 기초를 제공합니다.
서방 라틴 교회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활동하던 시기 동방에서는 오리게네스(185~253)가 호교 교부로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 레오니데스가 순교하자 그 역시 순교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과 철학 등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고신 극기에 힘썼습니다. 자주 단식하고, 맨바닥에서 자고, 두 벌의 옷을 갖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금욕 생활을 위해 스스로 거세를 했습니다. 이 일로 그의 사제품은 무효가 되고, 파문까지 받아 교회에서 내쫓기게 됩니다. 그는 로마 데치우스 황제 박해 때 체포돼 모진 고문을 겪고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의 200여 편 저술 가운데 가장 대표하는 책이 「원리론」입니다. 하느님, 세상, 인간, 성경 등 네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가장 오래된 신학 교과서로 고대 교회 「신학대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신학의 중심은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영이며 빛이며 절대적 원리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다스리는 분이시며, 성부의 선하신 형상인 ‘둘째 하느님’이신 성자는 성령과 함께 성부와 피조물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또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로고스인 ‘신성’과 예수의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된 ‘인성’이 결합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밀접하게 결합해 있기에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을 서로 교환해 적용할 수 있다는 ‘신인 속성 교환’ 이론을 새롭게 제시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신인 속성 교환 이론에 따라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인간 예수를 낳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이 한 위격 안에서 서로 교환되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고 합니다.
[생활교리] 세상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
1. 창조주 하느님? 우리는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는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화가와 감독을 떠올리며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사계절의 흐름 속에 펼쳐지는 놀랍고도 아름다운 자연과 생명의 신비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을까?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세상의 기원이나 구체적 탄생 과정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창조 신앙의 “단 하나의 결정적인 결론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베네딕토 16세)는 점이다. 곧 하느님은 당신 이외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영원하고 유일한 ‘전능하신 분’으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교리서』 290 참조).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을 특정한 대상이나 지역의 신이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을 가능케 하신 “천지의 창조주”(사도신경),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로 고백한다.
2. 창조는 왜 이루어졌는가?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교리서』 293).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피조물로부터 찬미와 감사를 받기 위해 세상을 지으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체로 완전하시기에 무엇을 채우실 필요가 없으시다. 성 보나벤뚜라가 말하듯, 창조는 “당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영광을 드러내고 나누시기 위[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영광’은 단순한 찬미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 사랑이 충만히 드러나고 나누어지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결코 자기 자신 안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밖으로 흘러넘치는 법이다. 창조는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이 세상에 베풀어진 ‘첫 선물’과도 같다. 더욱이 창조는 필연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묵시 4,11), 그분의 선하고 자유로운 의지로 이루어진 놀라운 사건이다(『교리서』 295 참조).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어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어찌 그분께 감사와 영광으로 응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 창조는 끝났는가? 부모의 사랑이 자녀 출생으로 끝나지 않듯, 하느님의 창조도 어느 한 시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정해주신 질서에 따라 피조물이 존재하고, 지탱하며 그리고 성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주신다(『찬미 받으소서』 80 참조). 특히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 없이는 다시 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지혜 11,25 참조). 왜냐면, 인간은 본래 ‘흙’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지만, 하느님의 ‘숨’을 받아 생명을 얻어 ‘사랑의 대상’이자 ‘거룩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에페 1,4-5 참조). 그렇다면 하느님에게서 와서,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할 ‘여행자’로서 우리의 몫은 분명하다. 마치 어머니 태 안에서 완전히 의존하며 자라났듯이, 어떤 상황에도 하느님의 손길과 돌보심에 ‘끝까지’ 의탁하며, 이 삶을 온 마음 다해 – 때로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 행복하게 살아내는 일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