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산림문학상 심사평
한시와 견문의 구조결합, 창덕궁의 정취와 문향
- 김범중 수필에 대하여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무시불성’,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무엇이든 처음 시도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지만 문인은 랭보의 ‘견자’가 되어야 하고, 또 문인은 견자로서 사물의 깊이와 넓이와 질량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데 충실해야 한다. 이것은 문인으로서 숙명적인 일이며, 또 숙명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평자는 김범중이 왜 이런 한시가 있는 산문집을 내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창경궁 재직 시 양궁의 연계문인 함양문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창덕궁에 익숙했다. 이번 단행본에서는 전각 부분을 제1집 <춘당사계>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주로 후원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고, 이것은 앞으로 경복궁에 관한 글도 염두에 둔 까닭이라고 한다. 그는 2022년 창경궁 이야기를 담은 <춘당사계>를 펴내고, 이번에는 창덕궁과 후원의 빼어난 비경에 매료되어 후원에 얽힌 이야기나 계곡과 연못에 숨겨진 비경과 수려한 풍광에 대한 견문에다가 한시를 곁들여 쓰는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어 오늘의 영광을 안았다.
Ⅱ.
김범중의<창덕궁 후원에 매화꽃 피고 지고>는 창덕궁 후원의 자연이 만들어낸 빼어난 경관과 함께, 정각이나 연못의 유래에 관한 임금님의 유교적인 사유, 정각에 대해 지은 어제시, 정자의 기둥에 새겨진 주련에서 풍겨오는 문향 등이 배어 있다. 특히 부용정이나 청의정, 소요정을 통해 임금의 정치관이나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다. 방지도원형 연못은 천원지방이라는 동양 고래의 우주관 내지 자연관이 녹아 있다.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의미로, 이는 우주 만물의 존재와 운행의 원리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로써, 김범중은 연못의 조성에 자연의 섭리를 적용한 듯하다고 풀이한다. 한 가지 사물을 사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보여주는 정취 속에서 자연의 외경을 느끼며, 자연이 신의 섭리를 따르고 있음을 파악한 작가의 자연 순응적 사상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궁에서 근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수필의 메시지가 하나 같이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고향이고, 또 인간이 돌아가야 할 최후의 안식처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작가가 이런 자연관을 보이는 것은 인생에 대한 연륜과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집의 수필은 복합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수필에서의 복합구성은 주제와 관련된 두 개 이상의 이야기를 합쳐서 쓰는 수필을 말한다. 김범중은 소주제에 따른 제재 관련 한시도 곁들여서 운치를 더했다. <정전으로 가는 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돈화문’ ‘금천과 금천교’ ‘진선문’ ‘인정문’ 등 토막토막의 생각을 엮어 토막의 마지막은 한시로 꾸며 한 편의 수필로 구성하였다. 창덕궁이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했던 만큼 인조반정 등 큼직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으며, 허망하게 나라가 일제에 넘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전각들의 모습의 처연함이 글마디마디 보인다. 특히 그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대조전에서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었던 순정효왕후를 대조전에 피어난 한 떨기 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 이름이 뜻하는 바와 정반대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정략결혼을 하며 굴욕적인 생활을 해야 했던 덕혜옹주, 낙선재의 이방자 여사 등 그는 조선 마지막 왕실 가족의 아픈 사연도 오려내고 있다.
<주요 전각>이란 글을 보면, 제일 먼저 ‘인정전’에 관한 기술이 나오고, 중간에 ‘품계석’이란 자신의 한시와 숙종의 ‘인정전 외연시’를 소개하고, 자신의 한시 ‘인정전에서’를 선보인다. ‘선정전’과 ‘희정당’ 토막 글에도 ‘희정당 벽화’라는 한시를 첨가하고, 희정단 앞의 화단에는 노송이 우거져 늘 푸른 기상으로 전각을 굽어보고 있는데, 이 또한 한시로 풀어내었다. 이 수필의 마지막 토막은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1910년 경술국치의 가슴 아픈 일화가 전해진다. 수필의 결미는 ‘대조전에 피어난 꽃 한 송이’란 한시로 마무리했다. 그는 한시의 사료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문화재청 발간 자료 등을 참고하였다. 책을 완성하면서 봄에 꽃이 피고 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옥류천 설경을 촬영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도 담았다. 궁에서 근무했던 기억 저편의 모습을,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을 드러내는 여러 일들을 서정어린 그림처럼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 김범중 수필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이라 하겠다.
Ⅲ.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구원이며, 자기성찰이며, 자기반성이다. 이것은 다시 역사로 귀결되고, 민족의 구원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글을 쓰는 일이 민족의 구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주의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결국 자신이 도에 이르러야 한다. 산업사회의 고도화로 인하여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역할에도 서슴없이 나서야 한다. 문인은 한발 앞서가는 사유로 새로운 세계를 생성하는 데 조금도 망설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창덕궁 후원과 같은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김범중의 다음에 나올 작품집, 경복궁 이야기에 더 기대를 거는 이유다. 수필 속에 하나같이 자신의 궁궐 체험을 끌어들여서 핍진성을 높인다든지, 반성적인 성찰을 담아 수필로서의 가치를 유감없이 발휘한다든지, 한시를 써서 문학적 성취를 구축하는 등 궁궐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안고 있어 감동을 준다.
자연의 정취와 정각에 얽혀있는 사연, 주련에 배어있는 문향이 한시와 어우러져 한국적 수필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걸음과 기억과 사료를 들춰내었을까. 토막 토막의 글을 복합적 구성으로 해서 그 제재를 경험과 상상력, 지식과 사료로 녹여서 이만한 맵시를 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절실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사적 소명을 안고 보람되게 살고자 하는 자세다. “나름대로 조그만 성취를 느껴보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유구한 사연이 배어있는 후원과 전각에 대해 자신의 지식과 감성이 부족함을 느낀다”는 대목에서 김범중 씨의 수필가적인 자질이 넘쳐난다. 이 산문이 수필일 수 있는 근접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10여 년 간 문화재청 관리소에 근무한 경력에 더하여 한국한시협회 회원으로서의 자질이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한국적 수필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쪼록 한시가 있는 수필집이 산림문학상 수상작에 선정되었다는 것을 계기로 해서 더 좋은 작품을 써내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