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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서재(白雲書齋) 착량교(鑿梁橋) 착량묘(鑿梁廟)> 고영화(高永和)
1) 통영시 백운서재(白雲書齋)
백운서재(白雲書齋)는 문화재자료 제9호, 통영시 도천동 854번지에 위치한 백운서재는 고시완(高時完) 선생이 가난한 집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던 서당(書堂)이다. 선생의 자(字)는 문언(文彦), 호(號)는 백운암(白雲菴)으로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선생은 고대관(高大觀)을 아버지로 해주 오씨(海州吳氏)를 어머니로 하여 정조 7년(1783) 2월 22일에 태어났다. 형(兄) 시양(時瀁)과는 어릴 적부터 우애가 지극했을 뿐 아니라 면학에도 함께 열중하여 형제가 나란히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선생은 두뇌가 명석하고 성품이 호방하여 학문에만 전념할 뿐 출세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실학(實學)의 연구에 몰두하여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고 이(理)와 기(氣)의 흐름을 밝히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일찍이 천암산(天 山) 기슭에 두어 칸의 집을 짓고 강당(講堂)을 여니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항상 바른 몸가짐으로 성의껏 가르치고 재물을 탐하거나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바위틈에서 샘물을 끌어다가 앞뜰에 조그만 못을 만들고 주위에 꽃과 나무를 심어 아담한 정원을 만들었다. 못 속에서 노니는 고기와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즐기면서 때로는 거문고로 산과 바다에 화답하고 혹은 붓을 들어 풍월을 노래하니 그 고아한 자태는 진실로 세속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이러기를 여러 해 하던 어느 날 밤, 꿈 속에서 대인(大人)이 홀연히 나타나 반석에 걸터앉아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 성(誠)을 되돌려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시냇물 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뜨면서 깨달으니 이것이 진리대각(眞理大覺)의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다시 책을 끌어당겨 학문 탐구에 매진하니 고금의 경서 연구에 걸림이 없고 진리의 근원을 밝히는 데에 막힘이 없었다. 이에 「역대상도해(易大象圖解), 상·하권과 「중용성명도(中庸性命圖), 「몽대인기(夢大人記), 「혹인문답(惑人問答) 등 여러 편을 저술하였고, 수상문(隨想文)파 사실기록문(事實記錄文)도 여러 편이 있는데 모두 성리학(性理學)을 바탕으로 한 우주의 본체와 인성(人性)을 논한 역작이었다.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시던 전생이 헌종 7년(1841) 12월 21일 향년 59세로 타계하시니 제자들이 태평동(현 인평동) 국재(局峙) 언덕에 유택을 마련하고 장례를 치렀다. 부인은 인동 장씨(仁同張氏) 동추(同樞) 지희(志禧)의 따님인데 선생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요절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강당 뒤 북쪽에 사우(祠宇)를 세워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니 옛날 향선생(鄕先生)이 돌아가시면 사(社)에서 제사 지내던 것을 본뜬 것이다. 선생의 문집이 여러 번 화재를 입어 몇 편밖에 전해지지 않아 애석하다. 지금도 서재의 뜰에는 못과 대나무 등 옛 모습이 일부 남아 있고, 유림에서 매년 음력 8월의 하정일(下丁日)에 채례(采禮)를 모시고 있다. 백운 선생에 대한 일화는 많다. 그런데 역(易)에 달통했던 고인들의 일화가 대개 그렇듯 신비적으로 채색되어 전설화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통제영에서 군점행사를 벌이고 있던 어느 날, 서당의 학동들이 강구 안과 앞 바다에서 펼쳐지는 수조(水操)를 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백운선생은 학동들을 불러 앞뜰의 못 주위에 앉혀놓고 못 가의 계수나무 잎사귀를 손으로 훑어 못에 뿌리니 잎사귀 하나하나가 전선(戰船)으로 변하더니 대오를 지어 수조를 취하는 것이 일사불란하였다" 한다.
① 백운 서제(書齊) / 오횡묵(吳宖默) 통영잡영10절(統營雜詠十截) 中.
東堂峰下水彎弓 산 아래 관사는 바다가 굽어 돌아 흐르고
野樹陰陰壇杏紅 그늘진 들판의 나무 터에는 살구가 붉네.
莫道此營徒用武 이 진영엔 무예가 말할 필요 없이 쓸 만한데
數間猶有讀書宮 두서너 칸 서재는 오히려 글을 읽기에 대궐이로다.
② 백운서재, 현판의 시운(詩韻)에 받들어 화답하다[奉和板上韻] / 자하노초(紫下老樵), 기축년 음력2월 상순(上旬)[己丑仲春上浣]
雲白山靑祠瑟鳴 구름 희고 뫼 푸른 사당엔 거문고 소리 울리니
乾坤別有畵中明 별유천지(別有天地) 세상이 그림처럼 명료하네.
詩尊以外渾無事 시와 술 이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없이
我愛幽人不世情 은자(隱者)로서 즐기니 세상 정(情)도 간 데 없네.
③ 위와 같은 분들이 나를 데리고 백운서재에 다시 돌아와 밤술을 마시다(同人携余 復至白雲齋 夜飮) / 강위(姜瑋,1820년~1884년),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登臨天海共靑蒼 올라서니 하늘과 바다 모두 짙푸르고
遙夜無塵月有光 긴긴 밤 티끌 없어 달이 빛나구나.
戍鼓殘時來鴈影 시간이 다된 때 수루 북소리 울리니 기러기 그림자 돌아오고
島雲深處潑龍香 섬 구름 깊숙한 곳에서 용향(龍香)이 솟아난다.
重游塞上烟霞變 다시 노니는 변방엔 안개와 노을이 바뀌고
此去湖南道路長 이제 떠나려는 호남은 갈 길이 멀다.
十載與君尋舊夢 10년 동안 그대와 묵은 꿈을 꾸었는데
天涯一醉是名鄕 먼 변방에서 한번 취하니 여기가 이름난 고을이네.
海岳優游頌聖恩 유유자적한 바다와 산, 임금의 은혜를 칭송하고
烟花千里到轅門 연화(烟花)는 천리에 걸쳐 원문에 이르네.
遲日參差脩竹影 봄날 물위엔 수죽의 그림자 들쑥날쑥,
滿山磊砢老松根 온 산엔 노송(老松)의 뿌리 장대하다.
花間群燕爭留影 꽃밭의 제비들은 다투어 그림자 드리우는데
水面孤鴻亦印痕 물 위의 외기러기는 흔적뿐이네.
安得中州諸好事 어찌 바닷가에 여러 좋은 일이 있지 않으랴.
卷中海客共琴尊 책속에는 바다 찾은 길손이 거문고와 술을 함께한다지.
[주1] 용향(龍香) : 좋은 먹 이름이다. 용향위가보(龍香韋家寶)삼국(三國) 시절에 위탄(韋誕)이 좋은 먹을 만들었다고 함.
[주2] 연화(烟花) : 태평세월 속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꽃이 핀 민가의 광경을 말한다.
④ <통영 산천재(山泉齋) 모화문(募化文)>
백운서재(白雲書齋)는 경남문화재자료 제9호로, 통영시 도천동 854번지에 위치하며, 본관 제주, 자(字)는 문언(文彦), 호(號)는 백운암(白雲菴)인 고시완(高時完 1783~1841) 선생이 가난한 집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던 서당(書堂)이다. 두어 칸의 집을 짓고 강당(講堂)을 여니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실학(實學)의 연구에 몰두하고 이(理)와 기(氣)의 흐름을 밝히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역대상도해(易大像圖解)’ 상·하권, ‘중용성명도(中庸性命圖)’, ‘혹인문답(惑人問答)’ 등 여러편을 저술, ‘수상문(隨想文)’과 ‘사실기록문(事實記錄文)’ 모두 성리학(性理學)을 바탕으로 한 우주의 본체와 인성(人性)을 논한 역작을 남겼다.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던 선생은 1841년 12월 21일 향년 59세로 타계한 후,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8월 하정일(下丁日)에 도천동주민자치위원회 주관으로 석채례(釋菜禮)를 봉행해 오고 있다.
◯ 통영시 서호동 서교리(서데레)에 사숙(私塾, 글방) '산천재(白雲書齋)'가 있었다. 조선말기 한학자이자 개화사상가인, 강위(姜瑋) 선생께서 이 학당을 둘러본 후, "통영서교리숙산천재모화문(統營西橋里塾山泉齋募化文)"을 전하고 있다. 강위 선생이 당부하길, “모범적인 스승, 경문(經文)의 스승, 계몽 교육하는 스승, 내 집 아이 아끼듯이 남의 집 아이도 아껴라.!!”고 당부한다.
<통영 서교리(서호동 서데레) 숙(서당, 글방) '산천재' 모화문(統營西橋里塾山泉齋募化文)> 강위(姜瑋,1820~1884).
삼가 무지몽매한 어린아이에게 거룩한 공적을 가르치기 위한, 계획에는 소학이 급하지 않다. 뭇사람들의 힘에 의지해 외관이 갖추어지니 실로 어진사람들의 기대가 컸다. 즐거운 도움을 모아서 함께 만들었다. 아마도 쓰일 재목(인재)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이것이 정치의 근본인지라, 이에 인재를 양성하는 까닭이다. 옛 현인께서 예기 소의(少儀)편에 "힘써 배우고 익혀라" 봄에는 예를 배우고 여름에는 시를 외우면서 공부가 점점 더 진보하고 잘 가르치면, 태평한 시대에는 반드시 시골 학교가 들어선다. 마을의 학교인 당상(黨庠), 집안의 학교인 가숙(家塾)에 따라 그 법을 갖추니 당연히 번창 할만하다. 반드시 유용하게 쓰일 인재가 날것이다. 부모형제의 충고도 함께 주어진다. 이루지 못할 그릇이 없다. 생각건대, 나는 서교리(다리 서편) 어진 이의 집에는 옛날에 저술한 남쪽 변방의 문단(문학계)으로 정원에 책 묶는 띠가 생겨나고 길상문자(행복 기쁨 운수에 관한 짧은 글월)가 얼마나 많은지. 문 앞에 붉은 장막(길상문자를 적은 장막)을 늘어뜨리니 신선의 부귀(富貴)가 절로 갖추어졌다. 그 공적에 제사를 지낼만하다.
백운은 놓친 실마리를 깊이 찾아 영광(영화)을 분별 예견한다.(고백운은 역학에 정통했다.) 학교는 높고, 맑은 가을 하늘, 사이좋은 이웃과 근접해 있다.(두 성씨의 진사 모두 서교리에 거주한다) 요사이 생활이 빈궁하여 초췌해지고 수행의 진전에 부끄러움이 있으니 옛 거주지에는 풀이 우거지게 되었고 의지할 수가 없어 자제가 있어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 근심을 이기고자해도 다 없어진 곳이니 어찌 궁벽함이 없으랴만, 이로 인해 걱정이 적지 않았다. 이로써 정성을 이루고자 외람되게 조급해져 경모하며 고상한 마음으로 찾아보았다. 무릇 여기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 마땅히 모두가 이와 같은 생각인지라 이에 보통은, 물결치는 옛 땅(통영)으로 쫓아왔다. 돌아가서, 산이 있는 새 샘물에서 서로 둘이 뜻이 맞아 구멍을 차근차근 채우듯이 (백운서재를 )닦아 나갔다. 눈앞은 끝없는 대양이 펼쳐지니 그 모습에 덕성이 저절로 길러진다. 물결소리 우러러 나오고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몇 집안의 영재들이 모였을까? 모두 등잔불을 가까이 하고 한 마을의 높이 확 트인 땅에 의지해 있다. 가히 시문을 쓰기에 편안하다. 다만 인연의 힘을 물리치니 배움이 가득하다. 일을 성취시킬 수 있을 것이다(可以集事) 마침내 재물의 즐거움을 버리고 아름다움을 성취했다. 이러한 구비된 공로가 쌓이게 되었으니 삼가 생각건대, 점잖은 여러분이 여섯 가지 과목을 공부하여 언제나 배움을 끝까지 깨우쳐라. 세분의 스승이 맡은 예로써, 모범적인 스승, 경문(經文)의 스승, 계몽 교육하는 스승!!이다. 어리석은 아이들을 깨우치고자 같은 길을 가며 서로 의지하는데 나무에 스치는 바람도 우리 마을의 올바른 도리일 것이다. 내 집 아이 아끼듯이 남의 집 아이도 아껴라. 후대에 큰 공로로 미칠 것이다. 조심스럽게 나의 두서없는 말(글)을 올린다. 바라건대 베푸신 은혜 감사드리면서.. [伏以蒙養爲聖功 計無急於小學 觀成藉衆力 寔有朢於群賢 有同而求樂爲之助 盖聞需材 是致治之本 敎幼 乃作人之端 前修勉習少儀 工漸進於春絃夏誦 昭代必建鄕學 法寢備於家塾黨庠 矧値昌明之辰 生才必用 共任父兄之責 無器不成 惟我西橋仁廬 舊著南徼文囿 庭生書帶 幾占文字吉祥 門垂絳帷 自具神仙富貴 功擬祭社 白雲 (高白雲邃於易學) 之墜緖遠尋榮睹 登庠高秋 (兩姓進士皆居西橋) 之芳隣近接 比因蕉萃於生理 有愧進修 以致鞠茂於舊居 無所依止 有子弟而不敎 其憂可勝 旣乎處遐僻而無聞 玆故誠非細也 是以猥暴鄙悃 仰探高懷 凡居是鄕 宜均此念 是庸就觀瀾古地 復相得在山新泉 進猶盈科 前臨浩浩無漄之澤 象叶育德 仰出混混不舍之流 要集幾家英才 共親燈火 賴有一邨爽塏 可安鉛槧 第緣力絀而學贏 無以集事 須資樂捨而成美 聚此僝功 伏惟僉君子 游六藝之林 常警末學 處三師 (經師人師蒙師) 之列 欲牖群蒙 同道相謀 樹風義於吾黨 及人之幼 延功業於後生 恭陳蕪辭 冀邀嘉惠]
[주1] 강유(絳帷) : 후한(後漢)의 명유(名儒) 마융(馬融)이 늘 높은 마루에 앉아 붉은 사장막[絳紗帳]을 내리고 생도들을 교수했는데 뒤에 여악(女樂)들이 늘어섰었음을 말한다.
[주2] 관란(觀瀾) : 맹자의 관수유술(觀水有術) 필관기란(必觀其瀾)을 줄이면 관란(觀瀾)이 된다. 물을 바라보는 데는 그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치는 지점을 보아야 한다.
[주3] 영과(盈科) : 영과이후진(盈科而後進), 구멍을 가득 채운 뒤에 나간다는 뜻으로, 물이 흐를 때는 조금이라도 오목한 데가 있으면 우선(于先) 그곳을 가득 채우고 아래로 흘러간다는 말. 곧 사람의 배움의 길도 속성(速成)으로 하려 하지 말고 차근차근 닦아 나가야 한다는 말.
[주3] 육예(六藝) : 중국 주대(周代)에 행해지던 교육과목.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 6종류의 기술이다. 예는 예용(禮容), 악은 음악, 사는 궁술(弓術), 어(御)는 마술(馬術), 서는 서도(書道), 수는 수학.
[주4] 급인지유(及人之幼) : 내집 어른을 받들듯이 남의집 어른을 받들고 내 집 아이 아끼듯이 남의 집 아이를 아끼자"(老吾老以及人之老, 幼吾幼以及人之幼)는 등의 전통사상 특히 유가사상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2) 통영 착량교(鑿梁橋)
착량교(鑿梁橋)는 폰데다리, 굴량교(掘梁橋) 등으로불린다. 옛날 이곳은 육지와 미륵도가 연결된 가늘고 작은 목으로, 그 후 배가 지나다닐 수 있게 파낸 곳이라 하여 「판데(목)」또는 「폰데(목)」으로 불렸으며, 옛 문헌에는 굴포(掘浦) ·굴량(掘梁) ·착포량(鑿浦梁) ·착량(鑿梁) 등으로 칭했다. 영조33년(1757) 이곳에 나무다리를 세우고 「굴량교(掘梁橋)」라 이름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철거와 재건을 되풀이 하다가 1915년 김삼주(金三柱)가 사재를 들여 이곳에 돌다리를 세우고 다시 「착량교(鑿梁橋·폰데돌다리)」라 하였다. 그후 이 돌다리를 헐고 1932년 이곳에 통영운하와 해저터널을 준공하였으며, 1967년 이 해협 위로 「충무교(忠武橋)」를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① 착량교(鑿梁橋) 통영 서문밖에 다리가 있다.橋在統營西門外 왜군이 충무공의 추격을 피하고자 倭爲忠武所迫 야밤에 이 다리에 굴을 뚫어 밀물 타고 도망갔다.夜穴此橋 乘潮而逃 / 김창숙(金昌淑) 심산유고(心山遺稿).
天設雄關地盡頭 하늘이 세운 웅장한 관문이 땅 끝 지점에 있는데
龍蛇往刼怒潮流 용과 뱀이 으르다 가듯 성난 물결 흐른다.
誰知困蹙垓心賊 전쟁 중, 적이 급박한 곤경에 처할 줄 누가 알았으랴.
一夜潜逃負壑舟 하룻밤 사이 도랑을 파고 배로 도망갔다네.
[주1] 지진두(地盡頭) : 더하여 볼 나위 없이 된 판, 어떤 기회(機會)로 되는 때가 절박(切迫)하게 이른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중앙(中央)에서 멀리 떨어져 바다와 연접하여 끝을 이룬 땅.
[주2] 해심(垓心) : 벗어나기 어렵게 포위(包圍)된 한가운데. 싸움터 한가운데, 전장의 중심.
[주3] 학주(壑舟) : 도적을 겁내어 배를 골짜기에 숨겨 두었더니 어떤 힘센 사람이 밤중에 배를 둘러메고 도망가 버렸다는 장자에 나오는 우화. 골짜기의 배가 내닫듯이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을 비유함.
[주4] 김창숙(金昌淑, 1879.7.10∼1962.5.10) : 독립운동가·유학자·교육자.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로 8·15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아버지는 호림(頀林)이며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이다. 본관은 의성.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翁). 한때 우(愚)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② 착량교(鑿梁橋) 통영잡영10절(統營雜詠十截) 中에서 / 오횡묵(吳宖默)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년).
通津南望鑿梁橋 나루를 통해 착량교가 남쪽에 보이는데
未霽何虹半出腰 비 갠 것도 아닌데 웬 반쪽 무지개가 기슭에 나타날까?
烈士有靈忠憤激 열사의 영령이 있으니 충의의 분한마음 격하여
空敎白馬齧寒潮 속절없이 백마 찬 물결만 되씹는구나.
③ 착량교(鑿梁橋) / 늘샘 탁상수(卓相洙,1896년~1943년), 시·시가(詩·詩歌) 1927년4월27일.
착량교(鑿梁橋) 돌다리가 그 무엇이 고읍간대
서산(西山)에 넘는 달이 예서 쉬고 잇단말가
밤中에 길나선손도 갈곳몰나 뛰노라
착량교(鑿梁橋) 다리밋헤 또한다리 노엿는데
천상(天上)의 은하교(銀河橋)인가 용궁(龍宮)에 산호교(珊瑚橋)인가
고기가 떼지어 와서 별과 함께 놀더라.
[주] 늘샘 탁상수 선생은 1896년 경남 통영 항남동 67번지에서 부(父) 탁성택과 모(母) 김복돈 사이 4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1943년 통영에서 마산가는 뱃길 항로에서 여객선 전복으로 사망했다. 근세 최초의 시조동인지 '참새'를 창간했으며, 1925년 조선문단을 통해 항일 성향의 시와 시조를 널리 발표 했다. 현재 총 120여 편을 발굴하여 '경남지역문학연구지'에 널리 홍보 되고 있다. 근세 통영 1호 시인이다.
④ 통영(統營) 미륵산(彌勒山) / 늘샘 탁상수(卓相洙,1896년~1943년) 1926년 6월 26일.
彌勒山(미륵산) 놉흔峯(봉)에 아리랭이 까여잇고
山(산)허리 녯庵子(암자)엔 百花滿發(백화만발) 하얏고나
두어라 三春佳景(삼춘가경)이니 놀고갈까 하노라
龍華寺(용화사) 바라보고 동구(洞口)에 들어가니
산수(山水)도 좃커니와 신립(楓葉) 더좃커늘
이우에 양풍명월(凉風明月)이야 일너무삼 하리요.
3) 통영 착량묘(鑿梁廟)
착량묘(鑿梁廟)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33년(1599)에 해상의 군인과 인근 주민들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절을 못 잊고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착량 언덕 (통영시 당동 8번지) 우거진 숲 속에 초옥(草屋)을 지어 충무공의 초상을 모시고 삭망(朔望)에 분향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냈는데, 장삿배들은 가고 올적마다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고종 15년(1878)에 충무공의 10세손인 제198대 통제사 이규석(李奎奭)이 부임하여 사당을 참배하고 무척 감격하여 다시 위패를 새로 다듬어 모시고 자그마한 초가 한 칸이 숲 속에 쓸쓸히 서 있어 개탄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뒤 제204대 통제사 민경호(閔敬鎬)가 여기 와서 참배할 때에 부관으로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金春榮)이 수행하여 참배를 마치고 불현듯 감격한 마음이 치솟아 보수비를 내놓아 초가지붕을 걷고 기와로 바꾸었으며, 단청도 다시 빛나게 하였으니 사당 모습이 장엄하면서도 공덕이 더욱 드러나는 듯하였다. 1979년 동제, 1980년 고직사(庫直舍)를 신축했다. 착량묘는 충무공 사당으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년 음력 11월 19일 공이 순국하신 날에 기신제(忌辰祭)를 모셔 오고 있다. 1974년 2월 16일 지방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착량묘(鑿梁廟)> 통영잡영10절(統營雜詠十截) 中에서 / 오횡묵(吳宖默)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년).
神鴉昏集樹南枝 신령스런 까마귀 떼 저물녘 남쪽 나뭇가지에 모이는데
古廟荒凉不記時 황량한 옛 사당은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구나.
桑海浪淘當日事 상전벽해, 당시의 일은 물결에 씻기었고
居人說是鑿梁祠 주민들은 이곳을 착량사라 말하네.
4) 착량묘(鑿梁廟) 호상재(湖上齊) 김삿갓(蘭皐) 설화. [옮긴 글]
착량묘(鑿梁廟)는 이충무공을 모신 사당인데, 조선후기 그 앞뜰에 호상재(湖上齊)라는 작은 초당을 지어 동리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한편, 때로는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기도 하던 곳이었다. 약 150년 전 어느 봄날, 통영의 선비들이 호상재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있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고 점차 시흥이 무르익자, 누군가가 7언 절구를 읊었다.
登樓不覺晩春還 루(樓)에 올라서도 봄이 완연한 줄 모르는 가운데
人在落花流水間 사람들이 자연을 벗 삼아 여기에 모였구나.
何處笙茄暄白日 한 낮에 시끄럽게 울리는 풍악 소리 그 어디더냐?
興來杉袖拂靑山 흥취가 오르니 적삼 소매로 푸른 산을 흔드는구나.
그 때 삿갓을 쓴 초라한 행색의 사람이 대문 안을 기웃거리며 들어오는지라, 이를 본 한 선비가 “아, 여보게! 여기는 선비들이 모여 앉아 시를 짓는 곳이니, 목동은 올 장소가 아니라네!” 하며 나무라자, 그 길손이 이르기를, “목동은 분명 소 먹이는 아이를 일컫는 말이 아니오. 나도 세상께나 살아 본 사람이니 아이 동(童)자는 빼시구려! 그저 길 가는 과객이 배가 고프던 차에 술향(酒香)과 화전(花煎) 붙이는 냄새가 나서 염치 불구하고 잠시 들른 것뿐이니 너무 탓하지 마시오.” “그렇지만 여기는 글을 지어야만 술 석 잔에 ‘참꽃 찌짐‘ 하나를 먹을 수 있다오.” “나는 글을 잘 모르니 말로써 해도 되겠소?” “아,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해보시오.” “자, 읊을 테니 받아 적어 보시구려.”하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작은 시냇가에 솥관을 세워 놓고, 흰 가루 푸른 기름으로 두견을 익히도다. 두 젓가락으로 집어 드니 향기가 입안에 가득, 한해의 봄빛이 뱃속에 퍼지네.”하고 읊는 것이었다. 손님의 즉흥시를 한문으로 받아 적던 선비가 붓을 놓고 읽어 보니 천하의 명시였다.
鼎冠撑立小溪邊 작은 시내 가에서 솥 관을 세워 놓고
白粉靑油煮杜鵑 흰 가루 푸른 기름으로 참꽃화전을 익히도다.
雙著俠來香滿口 두 젓가락으로 집어 드니 향기가 입안에 가득 하고
一年春色腹中傳 한 해의 봄빛이 뱃속에서 퍼지네.
모두들 깜짝 놀라며, “실례지만 선생은 어디에서 오신 누구십니까?” 하고 정중히 물으니, “뜬구름 같은 세상에 이름 따위는 뭐 하러 지니고 다니겠소.”하며 삽시간에 술 석 잔과 큼지막한 화전 하나를 먹어 치우고는 자기가 쓰고 있는 삿갓을 가리키며, “바로 이게 내 이름이오.” 라는 말을 남기고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제야 선비들은 “아이고, 난고(蘭皐, 김삿갓) 선생이 아니십니까?” 하며 모두 공손히 엎드려 절을 하고는 고개를 들어 보니, 그의 뒷모습은 이미 대문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