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풋볼뉴스(Football News) 원문보기 글쓴이: 블루문
:: A대표팀의 유일한 블루워커 한국영의 축구인생
평범한 선수가 끝없이 노력하면 어디까지 닿을까? 재능은 노력을 만나야 완성이 된다. 현 세계 최고의 선수인 리오넬 메시는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결코 재능에만 기대지 않았다. 하지만 재능 면에서 모두가 메시와 같은 출발선에 설 수는 없다. 그보다 뒤 떨어져 출발한 선수는 격차를 좁히기 위해 더욱 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고된 시간을 견딘 이에게는 세계 정상의 선수를 상대할 수 있는 자격과 기회가 주어진다.
한국영. 만 25세. 현재 카타르 스타리그의 카타르SC 소속인 축구국가대표팀(A대표팀)의 미드필더다. 런던올림픽 예선을 통해 본격적으로 부각된 이 선수는 2013년 6월 레바논과의 월드컵 최종예선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2년이 지난 지금 한국영은 26회의 A매치에 나선 선수가 됐다. 지난 2년 간 가장 꾸준히 A대표팀 멤버로 소집됐고, 가장 근면한 모습으로 경기에 나섰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영은 ‘축구를 잘하는 선수’가 아니다. 그는 대중의 인식 속에 기성용, 구자철 등 재능 있고, 세련된 기술을 지닌 선수들의 뒤를 뒷받침하는 수비적인 성향의 미드필더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영하면 떠오르는 것은 꽤 정확한 태클이다. 어떻게 하면 더 예쁘고 창조적으로, 테크니컬한 축구를 할 것인가의 집착에 사로 잡혀 있는 한국 축구에서 태클이 장기인 선수는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영은 홍명보 전 감독에 이어, 현재 A대표팀을 이끄는 울리 슈틸리케 감독에게 이르기까지 지도자가 가장 아끼는 선수라는 확고한 내부 평가가 있다. 실제로 슈틸리케 감독은 한 강연에서 “대표팀 선수 중 한국영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지도자들이 한국영을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헌신과 희생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의 가장 큰 장점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희미해지고 있는 그 장점을 지닌 선수가 한국영이다. 가히 현 대표팀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몸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블루워커라 할 만 하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영이 불과 5년 전만 해도 지도자들 사이에서 높은 인정을 받던 공격형 미드필더였다는 사실이다. 공격적인 선수로서 인정을 받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고, 만 20세의 나이로 J리그까지 진출했던 그는 현재 그와는 정반대의 태클과 몸싸움을 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변신해 있다. 지네딘 지단을 꿈꾸던 소년 한국영은 이제 세르히오 부스케츠를 롤모델로 삼는 청년이 됐다. 이런 극단적인 변화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그 변화를 위해 한국영이 기울어야 했던 노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왜 그는 경기가 끝난 뒤 흙으로 더러워진 유니폼을 보고서야 기뻐할까? 그 이야기를 안다면, 왜 한국영이 저렇게까지 몸을 날리며 처절한 태클을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였다. 축구를 뒤늦게 시작했고, 너무 어린 나이에 자신의 재능이 비범한 선수들을 쫓기엔 부족하다는 걸 안 한국영은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UAE와의 평가전, 미얀마와의 러시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첫 경기를 마치고 온 한국영을 6월의 어느 오후 만났다.
Q. 브라질 월드컵을 아쉬움 속에 마치고, 러시아 월드컵을 향한 새로운 출발대에 선 소감은 어때요?
브라질 월드컵은 나가고 싶다는 간절함이 강해서 굉장히 준비를 많이 했어요. 월드컵을 위한 이적을 할 정도로 준비를 했는데 이것저것 맞아 떨어지지 않았죠. 준비 과정부터 삐걱거렸고 그게 안 좋은 결과로 나왔어요. 그렇게 많은 비판을 받은 것도 처음이어서 낯설었지만 그래도 느낀 게 많았어요. 러시아 월드컵은 아직 먼 이야기지만 나가게 된다면 이제는 처음과는 다를 거 같아요. 더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Q. 이번 2연전은 어떻게 평가를 하나요? 일각에선 다득점을 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는데요.
생각보다 일찍 시즌이 끝나서(※한국영은 팀 일정을 모두 마치고 5월 중순 귀국했다) 대표팀 소집까지 시간이 많이 비었어요. 혼자서 운동을 했는데, 확실히 차이를 느꼈죠. 다른 선수들에 비해 경기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고, 팀의 수준에 따라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어요. 그래도 혼자서 열심히 했기 때문인지 썩 잘하진 않았어도 2경기 다 90분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2연전, 특히 미얀마와의 예선전은 확실히 어려움이 있었다. 수준 차는 있다 해도 같이 맞받아치지 않고 내려서서 하는 팀은 쉽지 않아요. 모두가 그렇게 느꼈어요. 초반에 골이 터지지 않으니까 조급해졌고, 혹시 비기거나 잘못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죠. 쉽지 않았지만 결과를 가져왔다는 건 긍정적이라고 봐요. 특히 무실점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Q. 경기 외적인 요소들, 더운 날씨나 잔디가 경기력에 영향은 주지 않았나요?
기후랑 잔디 문제에 적응하는 게 분명 어려웠지만 그건 변명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같은 무더위라도 동남아시아가 카타르보다 훨씬 습하니까 차이는 있지만 팀이 뭉친다면 다 이겨낼 수 있는 문제입니다.
Q. 한국영의 축구 인생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초등학교 6학년에 선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다른 친구들보다는 늦게 출발을 했죠. 그 전부터 축구를 너무 하고 싶었어요. 친형이 축구를 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에 시작해 2년 만에 끝났어요. 아버지가 군인이시다 보니 근무를 위한 이동이 잦아서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당연히 제가 한다고 할 때도 강력하게 반대했어요. 그렇게 설득하는 데만 4년이 걸렸고, 그래서 시작한 게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포천 일동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는데, 당시 아버지는 철원에서 근무했어요. 축구부 생활을 위해 합숙을 시작한 뒤로는 부모님과 떨어진 삶이 익숙해졌죠. 중학교도 포천에 있는 포천중학교로 동기들과 그대로 진학했어요. 부모님은 축구를 하는 걸 허락하면서도 제가 기초가 약하니까 다른 동기들을 따라가지 못해 금방 그만둘 거라 예상했대요. 또 아버지가 학업 성적이 떨어지면 바로 그만둬야 한다는 조건도 걸었죠. 그래서 중학교 3학년까지는 공부도 악착같이 했어요. 반에서는 상위권이었고, 수업에도 계속 들어갔어요. 대회에 참가하느라 수업에 못 들어가면 따로 문제집을 갖고 다니며 풀 정도였어요.
Q. 부모님이 예상한 기본기의 문제는 없었나요? 아무 학업 성적이 좋아도 결국 축구를 못 따라가면 그만뒀을 텐데?
당연히 그 문제가 있었죠. 리프팅을 하는 데 다른 선수들이 1000개를 할 때 저는 100개도 못 했어요.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니까 그때부터 일찍 철이 들었다고 할까? 친구들이 PC방 갈 때 저는 리프팅을 잘 하려는 노력에 집중했어요. 사실 저도 PC방 좋아했는데 참았어요. 축구를 너무 잘하고 싶고, 이걸로 성공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죠. 부족한 걸 남보다 더 해서 채우는 것. 그렇게 시작하니까 조금씩 따라가는 걸 느꼈어요. 경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동기들에게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에 기뻤고요.
Q. 용인축구센터 소속인 신갈고로 진학한 걸 보면 중학교 때 어느 정도 인정은 받았나 봐요?
신갈고에 갔는데 선수들이 너무 잘하는 거에요. 멤버들이 어마어마했거든요. 한 학년 위에 김보경, 박준태, 이승렬, 김다빈, 센터백에는 김주영, 골키퍼는 이범영. 형들 하는 것만 봐도 완전 기에 눌렸죠. 하지만 정말 잘 간 거죠. 솔직히 신갈고로 가기 힘들었거든요. 어머니의 강력한 바람 덕에 가능했어요. 못해도 큰 데서 경험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이었죠. 친구들이랑 같이 진학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중학교 때는 대회에 나가면 지는 게 다반사였거든요. 그래서 부모님이 뭐가 되든 일단 큰물에 보낸 거 같아요. 1학년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은 고마운 분들이지만 당시 감독님 님과 코치님이 처음엔 인사도 안 받아줬어요. 훈련 때는 혼나기 일쑤고, 터치라인 밖에서 기본기 훈련만 해야 했고. 인정을 못 받는다는 것에 속상했죠.
Q. 경쟁에서 도태되면 포기하게 되는 데, 1학년 때는 경기에 나가기 어려우니 그런 마음도 있지 않았나요?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참을 수 있었죠. 작은 것부터 하나씩 이뤄갔어요. 처음엔 여기서 경기를 뛰어야지, 그 다음은 인정을 받아서 꾸준히 나가야지, 그렇게 하면 다음에 더 큰 무언가가 기다리더라고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세웠어요. 하나씩 이뤄갔고요. 처음엔 저를 외면하던 지도자 선생님들도 시간이 지나니까 인정을 해주더라고요. 신갈고 1학년 때 저희를 가르치던 유재영 감독님과 서영석 코치님이 새로 창단된 강릉 문성고 축구부로 가면서 저를 1순위로 데리고 가고 싶다고 해서 따라갔어요. 신생팀이라서 위험한 결정일 수도 있었지만 오직 선생님들 지도력을 보고 따라갔어요. 다른 시, 도로 전학을 가면 1년간 대회에서 뛸 수 없는 조항이 있어서 일단은 유학을 갔어요.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의 17세 유스팀에서 또 다른 경험을 했죠. 축구 그 자체보다는 축구를 위해 이뤄진 환경을 보면서,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이런 곳에서 꼭 축구를 하고 싶다는 욕심을 처음 느꼈어요. 중간에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어요. 2007년 한국에서 열린 U-17 월드컵을 위해 박경훈 감독님이 대표팀에 불러줬어요. 그때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는데 뿌듯하고 감사했죠.
Q. 그 뒤에는 숭실대로 진학을 했고 1학년을 마치고 2010년에 바로 J리그로 갔네요.
그래도 고등학교 때는 공 좀 찬다고 봐준 거 같아요. 축구 명문인 숭실대로 갈 수 있었죠. 그때 동기들이 고무열, 배천석, 김영근이었어요. 1학년을 마친 뒤 J리그의 쇼난 벨마레에서 제의가 왔는데 큰 고민 없이 가겠다고 했어요.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미드필더라면 J리그를 경험해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거란 얘길 해줬고 그때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봤어요. 한번 도전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스무살에 해외 생활, 그것도 생존 여부가 달린 프로 선수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니 당연히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진짜 힘들었어요. 일본 특유의 텃세가 너무 심했고요. 너무 어린 나이에 늘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외국인 선수로 들어갔으니까 더 힘들었죠. 어리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저 선수보단 잘하는데 쟨 18인 엔트리에 들어가고 저는 못 들어가는 상황이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어요. 훈련 중에는 소리마치 야스하루 감독님으로부터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얘기도 들었고, 생각 없이 움직인다고 몽유병 환자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런 힘든 시기가 많이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첫 시즌엔 쇼난 벨마레가 1부 리그에 있었는데 7라운드가 될 때까지 아예 엔트리에도 들지 못했어요. 그런데 팀이 워낙 부진하니까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엔트리 구성을 대거 바꿀 때 선발 투입됐고 팀이 승리를 했어요. 그 뒤로는 주전으로 뛰는 것 같다가도 훈련 중에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면 빠지는, 확실한 주전은 아닌 상태였어요.
Q. 그럼 어떻게 주전 자리를 쟁취했나요? 이번에도 또 노력이었나요?
살 길은 훈련 밖에 없다 싶었죠. 인정 받으려면 잘해야 하는데 다른 선수에 비해 뭔가 부족하다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녁만 먹으면 공원으로 나갔어요. 처음엔 클럽하우스 근처에서 훈련을 하다가 소리마치 감독님에게 적발됐어요. 한국은 팀 훈련 외의 시간에 개인 훈련을 하면 칭찬을 받지만 일본은 자기 임의대로 훈련을 더 하는 걸 좋게 보지 않아요. 팀이 진행하는 훈련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거죠. 소리마치 감독님도 왜 훈련 외의 시간에 마음대로 훈련을 하냐며 혼을 냈어요. 그래서 그 뒤로는 몰래 자전거를 타고 인근 공원으로 가서 매일 빠짐 없이 개인 훈련을 했어요. 결국은 그런 개인 훈련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인정을 받았어요. 사람이 더 의욕적으로 변하더라고요. 그게 경기장에서 결과로 나왔고, 그 다음 시즌인 2011년부터는 팀이 J2로 떨어지긴 했어도 확실한 주전이 됐죠.
Q. 대학 시절까지 공격형 미드필더를 주로 봤죠?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수비형 미드필더로 변신했는데, 어떤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J리그에 갈 때만 해도 태클을 할 줄 몰랐어요. 공을 잡고서는 뭔가를 하고 싶어했던 미드필더였죠. 수비라인까지 내려가서 공을 잡은 뒤 풀어 보려는 욕심이 있는 선수. 믿으시질 모르지만 공격형 미드필더를 넘어 섀도우 스트라이커에 가까운 역할을 했었어요. 롤모델이 지단이었거든요. 프랑스월드컵을 보면서 지단 때문에 축구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지니게 됐으니까요. 처음엔 경기를 못 뛰니까 열이 받아서 훈련 때 몸으로 부딪히고 적극적으로 태클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구단에서 한국영은 의욕적인 선수라는 이미지를 갖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니까 소리마치 감독님이 자기는 그걸 원했다고 얘기해줬어요. 처음부터 제게서 수비형 미드필더의 가능성을 보고 그렇게 변하길 생각하고 있었더라고요. 결정적인 원인은 올림픽 대표팀에 들어가면서였어요. 올림픽 대표팀에는 저보다 공 잘 차는 미드필더는 많았어요. 그들과 똑같이 하면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때마침 홍명보 감독님과 팀이 가장 원하는 타입의 선수는 적극적으로 수비를 하고, 헌신하는 선수였어요. 그러니까 바뀔 수 밖에 없었죠. 소집이 끝나면 그 다음 소집에 뽑히고 싶었으니까요. 제 색깔을 버려야만 살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저도 무서웠어요. 이 상태로는 이도 저도 아닌 선수가 돼 버리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지금에서야 스타일을 바꾸길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Q. 그런 한국영의 히스토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국영을 수비만 할 줄 아는 반쪽짜리 선수라고 평가합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저도 그랬고요.
저는요… 반쪽짜리 선수가 아니에요. 팀을 위해 반쪽짜리가 된 거죠. 축구를 잘하고 싶었고, 축구를 잘하는 선수로 인식되고 싶었어요. 누구보다 돋보이고 싶었죠. 제 안에도 그 마음은 있어요. 하지만 선수는 보스(감독님)가 원하는 그 임무를 잘해야 해요. 감독님이 원하면 거기 맞춰서 바꿔야 하는 게 저같이 평범한 선수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A대표팀 소집에도 슈틸리케 감독님이 개별 면담을 하면서 바르셀로나 경기를 보여줬어요. 세르히오 부스케츠가 공을 잡았는데 메시가 오니까 물건 건네듯 공을 주는 걸 세 번 스톱해 보여준 뒤 “부스케츠도 능력이 있고 경기를 운영할 수 있는 미드필더다. 하지만 메시가 더 운영을 잘하고 풀어가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 임무는 넘기고 부스케츠는 또 다른 임무를 위해 뒤로 갔다. 선수는 다 자기만의 임무가 있다”는 얘기를 해줬어요. 저는 그 얘기에 크게 공감했어요. 저도 가끔은 앞으로 나가고 싶어요. 미얀마랑 할 때 그랬고, 득점도 해 보고 싶고요. 지금 소속팀에서도 공격에 가담해 제법 골을 넣거든요. 그런데 저의 개인적인 욕심을 버려야 팀이 산다고 생각해요.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돌발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팀을 위해서 한국영이란 선수가 존재해야 하는 걸 이젠 받아들여요. 그런 선수가 팀에는 반드시 필요하고요. 그걸 위해서라면 사람들이 말하는 반쪽짜리 선수, 공격적인 능력이 없는 선수라는 인식에 대해서도 화는 나지 않아요.
Q. 그래도 가끔은 그 공격에 대한 본능이 나오는 것 같아요. 아시안컵 결승전 때 동점골 장면을 보면 공을 뺏어서 적극적으로 치고 들어가 기성용에게 연결해줬고, 올 시즌에도 카타르에서 7골을 넣었잖아요.
아시안컵 결승전은 팀이 지고 있을 때 제가 투입됐어요. 결승전이었고, 0-1로 지든 0-5로 지든 이대로면 준우승이었어요. 저 또한 다른 동료들처럼 이기고 싶었으니까 시간도 없는 상황에서 골을 넣어야 한다는 목표를 위해 계속 앞으로 앞으로 갔던 것 같아요. 카타르에서 그런 성적이 나온 건, 아무래도 거긴 용병 싸움이거든요. 외국인 선수가 많은 걸 해야만 하는 곳이에요. 아니다 싶으면 시즌 중간에라도 내치는 게 그들의 문화기 때문에 대표팀처럼 수비적인 것만 해서는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대신 제 입장에선 많은 걸 시도도 해 볼 수 있어서 공격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어요.
Q. 그렇다면 감독이 한국영 선수에게 공격적인 걸 주문한다면 그런 방향으로 또 자신의 스타일을 바꿀 건가요?
만일 지금 소속팀과 대표팀에 새 감독님이 와서 저 보고 공격적으로 하라고 하면 그렇게 맞춰야죠.(웃음) 슈틸리케 감독님은 빌드업을 강조하는 분이에요. 골키퍼도 공을 잘 차야 한다고 얘기 할 정도거든요. 그래서 ‘나도 조금씩 변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해서 공격적인 걸 갖추겠다고 의식했는데 감독님이 제 자리만큼은 수비적인 걸 원하더라고요. 제가 서 있는 곳이 제가 해야 하는 곳이니까 거기에 맞춰가야죠.
Q. 최근에 슈틸리케 감독이 한 강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한국영이라고 얘길 했어요.
제가 언론에 너무 안 나가서 불쌍하니까 해준 얘기 같은데요.(웃음) 대표팀에서 경기를 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이죠. 대표팀 유니폼을 언제까지 입을 수 있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댓글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일부러 댓글을 봐요. 저를 향한 비판 중에 옳은 것이 있다면 자극을 받으려고 해요. 가끔은 이런 말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지만, 나중에는 내가 다른 걸로 보여줘야겠다는 오기도 생기고요. 중요한 건 저를 비판하는 분들을 위해서 제가 축구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기용하는 감독님이 추구하는 축구를 위해 노력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Q. 한국영이 가장 비판을 많이 받았던 시기는 런던올림픽 직전이 아닌가 싶네요. 부상을 숨긴, 이기적인 선수라는 혹평도 받았었죠.
돌이켜보면 그러면 안됐죠. 팀에 피해를 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 입장에선 부러질 거란 생각은 안 했어요. 100%는 아니어도 참고 해낼 수 있다고 믿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올림픽만 바라보면 준비했던 그 시간들이 물거품이 되는 게 싫어서 현실을 부정했던 거죠. 결국 중도에 나오고 혼자 귀국을 해서 한국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는데 얼굴 보기가 싫더라고요. 아버지가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며 괜찮다고 하는데 저는 도리어 화를 냈어요. “아버지가 내 대신 축구를 한 거 아니잖냐? 아버지 인생 아니지 않냐?”고. 지금은 그렇게 상처 준 거 후회해요. 나보다 아버지가 더 아파했죠. 그게 아직도 마음에 남아요. 그 정도로 속상했어요. 지금은 전역했지만 아버지는 전형적인 군인이에요. 아직도 어려워요. 어머니한테는 반말을 하는데 아버지한테는 죽어도 못하겠더라고요. 지나 보니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어요.
Q. 이제 한국영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태클이에요. 태클이 한국영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가요?
태클을 하면 아프거든요. 살이 쓸리며 다치는 게 싫었어요. 어렸을 때는 태클을 안 했어요. 누가 태클해 오는 것도 싫었어요. 그런데 요령은 생기더라고요. 무기라고 생각은 안 해요. 태클을 하는 건 저 공을 뺏고 싶다는 집념이에요. 그래야 우리가 공을 뺏고 공격을 할 수 있으니까. 절대 상대를 향한 보복이나 그런 거 아니에요. 제 태클은 사람을 향하는 게 아니라 오직 공을 향해요. 솔직히 전 축구 선수로서 최고가 되기 위한 재능은 부족해요. 그걸 중학교 1학년 때 느꼈어요. 축구부에서 휴가를 줘서 하루 이틀 집에 다녀오면 그 다음엔 감각적으로, 마음대로 공을 못 다뤘어요. 다른 친구들은 잘만 하는데… 그때 내게 재능은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 간격을 메우려면 노력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재능의 차이를 커버하려면 늘 훈련한 것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훈련이 필요했어요. 그게 저 같은 평범한 선수가 (기)성용이 형 같은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Q. 월드컵 러시아전을 앞두고 했던 “내 유니폼이 가장 더러워야 한다”는 말이 너무 멋졌던 것 같습니다. 몇몇 선수들을 만나면 그 얘기가 너무 가슴에 와 닿아서 격언으로 삼는다고 하더라고요.
사실은 월드컵을 앞두고 너무 두려웠어요. 러시아전 이틀 전부터 경기가 두려웠어요. 잠을 못 이뤘어요. 하루 3시간 밖에 못 잤어요. 대체 경기장 나가서 어떻게 하고, 뭘 해야 하나 계속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온 결론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몸을 던지는 것뿐이다. 공을 잘 차서 상대를 이길 수 없으니 나중에 손을 들고 나오더라도 유니폼이 다 더러워진다고 생각하고 구르자. 그 생각으로 러시아전에 들어갔거든요. 그 두려움으로부터 저를 방어할 수 있는 무언가가 그 얘기였던 것 같아요. 저도 성용이 형처럼 축구 잘하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몸이 고생 안할텐데. 그런데 여러 분류의 선수가 있으니까 저는 지금의 제가 해야 할 축구에 만족해요.
Q. 월드컵이 끝나고 중동으로 간 데 대한 불만의 시선들도 있는 것 같아요.
월드컵을 앞두고 유럽으로 갈 기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 당시엔 경기에 계속 뛰었어야 했고 섣불리 유럽에 갔다가 경기에 뛰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월드컵에 가지 못하니까 그때는 J리그 내에서 이적(쇼난 벨마레->가시와 레이솔)하는 걸로 마무리 했어요. 중동으로 간 건 현실적인 선택이 맞아요. 군문제가 해결된다면 중동으로 가지 않았을 거에요. 군대 때문에 1년 뒤에는 K리그로 와야 해요. K리그도 경험하고픈 무대이기 때문에 반드시 뛸 거에요. 중동으로 간 게 처음엔 후회가 됐는데 있다 보니까 후회는 사라지더라고요. 만일 일본이나 다른 무대에 있었다면 제가 팀 플레이를 주도하고, 외국인 선수로서 무너가 보여줄 수 잇는 그런 경험을 할 확률은 적었겠죠. 그것만큼은 중동으로 갔기 때문에 얻은 소중한 경험이에요. 그 역시도 발전의 계기가 됐죠. 뛰다 보니까 더 공격적인 축구도 하고 있어요. 제일 중요한 건 제 마음과 각오에요. 어디서 뛰느냐보다 어떻게 뛰느냐가 중요한 거죠. 선수라면 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게 크다고 봐요.
Q. 다음 한국영의 축구 인생이 어떤 항로를 가게 될 지 기대가 되네요.
카타르에서의 첫 시즌을 마쳤는데, 제가 생각한 것보다 시즌이 너무 빨리 끝났어요. 5월 15일에 시즌이 끝났거든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을 하나 잡고 1대1로 훈련을 하고 있어요. 몸 상태라도 유지해야겠다는 싶어서요. 평소에 메모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번 A매치 2연전을 마치고 돌아오며 느낀 걸 또 메모했어요. 그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제게 다음 목표는 다음 대표팀 소집에 부름을 받는 겁니다. 중동에서 뛰니까 동아시안컵엔 못 나가니 9월 소집에 들어가는 게 목표죠. 그러기 위해선 항상 발전을 향한 노력을 계속 해야죠. 발전이라는 게 축구 실력도 그렇지만, 신체, 지능, 모든 부분에서 지금보다 더 올라서야 해요. 은퇴하면 푹 쉴 수 있으니까, 그날까진 매일 조금이라도 더 발전해야죠. 밖에 있는 남들은 모르지만 안에 있는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저는 그런 선수가 되고 싶어요.
“이제 목표는 다음 대표팀에 소집되는 것입니다.” 한국영의 그 말은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반가웠다. 그는 유럽 진출을 하겠다, 올 시즌 몇 골을 넣겠다가 아니라 다음 대표팀 소집에 오고 싶다는 간절함을 지닌 선수였다. 적어도 한국영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에서는 기성용, 손흥민 등 대표팀의 그 어떤 선수보다 더 위에 있다.
한국영은 엉망진창이었던 자신의 첫 번째 A매치를 회상했다. 당시 김남일과 함께 중원을 책임졌던 한국영은 부진한 플레이로 혹평을 받았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최악이었죠. 경기가 끝나고 다시는 A대표팀에 못 오겠구나 싶었어요”그러나 불과 몇 달 그는 브라질전에서 네이마르를 상대했다. 1년 뒤에는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에 나서 대표팀의 중원을 지켰다. 이제는 대표팀 감독이 가장 아끼는 선수가 됐다.
이제 다음의 한국영은 어디에 있을까?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또 다른 목표를 던지고 끝없이 노력하는 평범하지만 강한 선수. 그는 반쪽짜리 선수가 아니라, 대표팀이 잃어가는 반쪽을 지탱하는 유일한 선수다. 혼신을 다하는 그의 태클과 수비에는 그렇게 고비를 넘어 온 인생과 축구가 담겨 있다. 그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지지한다.
인터뷰=서호정
사진=대한축구협회, 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