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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제3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
말씀 / 잠언 5-7장
요절 / 잠언 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우리는 지난 주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삶인지 배웠습니다. 또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사람이 윤택하고 평안하고 참 생명과 하늘 영광의 기업을 얻게 됨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가는 인생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가며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는 인생길에서 만나는 유혹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인생길에서 만나게 될 유혹에 대해 훈계합니다. 대표적인 유혹이 음녀의 유혹입니다. 잠언에는 여러 주옥같은 말씀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전체 내용의 10%에 해당하는 부분이 음행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넘어지기 쉬운 죄가 음행이고 심각한 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여러 말씀이 있지만 음행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음행의 유혹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 훈계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과 약속은 무엇일까요?
아버지는 자상하게 아들을 권면합니다.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5:1,2).” 여기에도 나오고 잠언에서 반복되는 지혜, 지식, 명철, 근신은 세부적으론 조금씩 다를지라도 지혜라는 큰 범주에 속하는 말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하여금 지혜로 중무장시킵니다. 아버지가 이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음녀의 유혹 때문입니다. 음녀의 정체가 뭘까요? 잠언에서 음녀는 창녀의 모습으로도 그려지고 ‘이방 계집’, 즉 ‘낯선 여자’라는 말로도 나타납니다. 또 남편이 있는 여자, 유부녀로도 묘사됩니다. 음녀는 성적으로 유혹해 넘어뜨리고 파멸시키는 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결혼한 아내를 배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음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명예를 잃게 하고 수명을 단축시키고 재물을 빼앗아 파멸시키는 존재입니다. 여기 나오는 아들은 젊어서 결혼한 아내가 있는 아들입니다. 이 아들을 유혹해 파멸시킬 수 있는 자가 바로 음녀입니다.
음녀가 아들을 어떻게 파멸시킵니까? 음녀의 무기는 입술입니다.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럽습니다. 음녀는 말을 아주 달콤하게 합니다. 그 말은 미끄러워서 들으면 빠져들고 빠져들면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6장 25절에 보면, 음녀는 외모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녀의 달콤한 말이 나중에는 쑥같이 쓰며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워서 아들을 해칠 것입니다. 여기 ‘쑥’으로 번역된 용어는 독성이 매우 강한 풀입니다. 이 풀을 잘못 먹게 나면 온몸이 몸서리친다고 합니다. 정욕의 결과가 그만큼 고통스럽습니다. 또 두 날 가진 칼처럼 날카롭다고 했습니다. 병원 수술실에서 쓰는 칼은 한쪽 날만 있는데도 주의하지 않으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 칼에 베여 크게 다치게 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음녀는 두 날 가진 칼이니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정욕, 불륜으로 인한 상처는 당사자들도 당사자들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크나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자녀들, 그리고 가족 전체가 상처받고 평생 고통당하게 됩니다. 또 그의 발은 사지로, 그의 걸음은 스올로, 즉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5:5). 이처럼 정욕을 즐길 때의 쾌락은 잠시뿐이고 그 대가는 매우 고통스럽고 절망적입니다. 이런 음녀의 유혹에서 아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지혜의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녀에게서 멀리하고 음녀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5:7,8). 처음부터 단호하게 유혹을 물리치고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호기심 가지고 어슬렁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잠시 잠깐 정욕의 쾌락을 즐기고 빠져나오고자 합니다. 그러나 정욕의 쾌락은 뇌에 강한 기억을 남겨 더 자극적인 것들을 찾게 만듭니다. 나중에는 중독되어 쉽사리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분명하게 끊어내야 합니다. 정욕이라는 달콤한 사탕 속에 숨겨진 무서운 독초, 또 두 날 가진 칼날을 직시하고 처음부터 유혹을 단호히 대처하고 분명하게 끊어내야겠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음녀를 가까이 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들은 그동안 쌓아왔던 자신의 명예와 신망, 인품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정욕의 죄로 고통스러워하다가 건강도 잃고 수고하여 모은 재물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동안 쌓아 올렸던 나의 모든 삶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리고 한탄하며 후회만 남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큰 악에 빠지게 되었노라(5:12-14).”
또 6장 26절을 보면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했습니다. 음란의 유혹은 삶을 망가뜨리고 망하게 합니다. 소중한 생명까지 잃게 합니다. 우리는 잠시 잠깐의 쾌락을 위해 생명을 담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자극적인 쾌락일지라도 생명을 포기하고 내줄 수는 없습니다. 6장 27,28절을 읽겠습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음란은 불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불씨에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우리를 통째로 태워 버립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 4장 8절에서 “지혜의 말씀을 품으면 그가 영화롭게 한다” 했습니다. 지혜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되새기며 살면 그 사람은 점점 영화롭고 존귀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몰래 그 마음에 음욕을 품고 살면 어느 순간 정욕 죄의 폭탄이 터져 비참하게 되고 맙니다. 숯불을 밟고도 데이지 않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불나방들이 불빛을 가까이하다가 뜨거운 불빛에 데이지만 그럼에도 자꾸 뜨거운 불빛 주위를 맴돌다 결국 데어 죽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위험한 불장난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음욕에 넘어가 남의 아내와 간통한 자도 벌을 면하지 못하게 됩니다(6:29,32).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합니다. 능욕과 수치를 씻을 수 없게 됩니다. 간통한 여자의 배우자의 눈이 뒤집히는 분노와 투기로 용서받지 못하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6:33,34).
7장 7절을 보십시오. 이제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말합니다. 그 젊은이가 음녀의 유혹을 따라갔다가 비참하게 되는 모습을 상세히 말해줍니다.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하여 그의 집 쪽으로 갑니다.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여인이 나와 그를 맞이합니다. 그 여인이 그를 붙잡고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합니다.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7:14,15).”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머뭇거리는 어리석은 젊은이를 안심시킵니다. 자기가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께 제사했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영적인 체 하니까 더욱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탄은 이렇게 머리가 좋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최신 담요와 값비싼 애굽 이불이 깔려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 등 향료로 잘 꾸며진 향기 나는 침실로 들어가자고 합니다. 여인의 남편에 대해 염려하는 어리석은 젊은이에게 남편이 있지만 먼 길을 떠났고 보름 후나 집에 돌아올 것이니 안심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아무도 모릅니다. 남편도 오래도록 안 돌아옵니다. 밤새 즐기는 것만 남았습니다.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7:18).”
여러분! 이게 사랑일까요? 이것은 엄연히 정욕의 죄악입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둔갑한 왜곡된 성문화가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로 많이 등장합니다. 미화시킵니다. 건전한 사랑, 건강한 가정을 주제 삼으면 흥행이 잘 안 됩니다. 인기가 없습니다. 돈벌이가 안 됩니다. 드라마 앞뒤의 광고료도 떨어집니다. 그러나 왜곡된 성문화와 둔갑한 사랑을 포장해 영화로 내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네플렉스에서 1억 뷰를 찍었다며 자랑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랑 한번 해봐야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처음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5:1,2).” 주님의 지혜의 말씀을 잘 듣고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7장 22,23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젊은이는 어떻게 합니까? 과연 그는 어떻게 될까요? 젊은이는 곧 음녀를 따라나섭니다. 이는 마치 소가 도축을 기다리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 화살이 간을 뚫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지만 생명을 잃어버릴 줄 알지 못함과도 같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쾌락은 잠시이고 죄악된 쾌락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젊은이에게 음녀의 집은 쾌락의 방, 생명의 방처럼 보이지만 그의 방은 죽음의 방입니다. 음녀의 유혹 때문에 엎드러지고 죽고 망한 자가 허다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 이런 음녀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주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6장 20-22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그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 줍니다. 우리 삶을 인도합니다. 6장 23,24절을 읽겠습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어둠을 몰아내는 등불이고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강력한 빛으로 역사해 내 안에 있는 어두운 죄의 욕구를 몰아내 줍니다. 하나님의 훈계의 말씀이 우리를 살려주는 생명의 길입니다. “OO야, 정신 차려! OO야, 거기 가지 마! OO야, 그러면 죽어! 이렇게 해야 살아. 이렇게 할 때 복된 길, 생명의 길로 갈 수 있어.” 이처럼 하나님의 훈계의 말씀은 마치 기차 선로에서의 경고음과도 같습니다. 열차를 기다리면서 생각 없이 선로에 가까이 가면 사이렌이 울리면서 경고 방송이 나옵니다. “위험하오니 뒤로 물러서시기 바랍니다.” 깜짝 놀라기는 하지만 그래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를 살리는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훈계가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훈계의 말씀이 우리를 위험한 음녀의 유혹으로부터 구해줍니다.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그가 어떻게 음란한 삶을 청산하고 빛으로 나올 수 있었는지 진솔하게 기록합니다. “어리석고 어리석으며 헛되고 헛되며 아무런 가치도 없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나의 낡은 옛 시절의 아가씨들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아니했습니다. 내 옷을 벗기고 부드러운 침상에 누이고 내게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버리고 갈 수 있나요? 당신 없이 우리가 얼마나 외롭게 지내야 할지를 당신은 모르세요?’ 하나님! 그들이 들추어낸 것이 무엇입니까? 그 더럽고 추잡한 음욕을 당신의 종의 영혼으로부터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얼마나 더러운 것과 부끄러운 것을 들추어냈습니까? 그들은 슬며시 다가와 창녀와 같이 내게 한눈을 팔도록 유혹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처럼 정욕의 유혹을 받을 때 너무나 괴로워 폭우처럼 눈물을 쏟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노랫소리 비슷했는데 그 소리는 어거스틴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성이었습니다. 그가 즉시 집에 들어가 성경을 펴 들고 제일 먼저 눈길이 닿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로마서 13장 13,14절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때 느낀 감정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말씀이 광명한 확신의 빛으로 내 마음을 비추어 내 속에 있던 모든 의심의 어둠을 물리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나를 변화시켰고 나의 희망은 여인이나 세상적인 음욕이 아니었습니다. 수년 전에 주님이 어머니에게 환상을 통해 보여주신 것과 같이 이제 나는 믿음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어머니께서 소원하셨던 그 이상으로 풍성히 축복하셨고 내 육체에서 태어난 손자 보기를 바라던 어머니에게 그 기쁨보다도 더욱 순결한 기쁨을 주셨습니다.” 어거스틴을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건져준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요절 말씀처럼 훈계가 생명의 길입니다. 로마서 말씀의 훈계를 영접하고 순종했기 때문에 탕자 어거스틴이 성자 어거스틴으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훈계의 말씀이 생명의 길입니다. 7장 3,4절도 보십시오.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우리는 말씀을 손가락에도 매고 책상에도 붙여놓고 벽에도 매달아 놓고 우리 마음 판에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지혜의 말씀을 누이라 말하며 친족 또는 친구로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큰 누님이 집안일을 많이 거들면서 동생들을 잘 챙겼습니다. 동생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야단을 치기도 하고 차 조심도 시키고 칭찬도 해주고 섬세하게 이런저런 상황들을 돕고 섬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 또한 이와 같습니다.
또 유대인들에게 있어 누이라 부른다는 것은 청혼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아가서).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라는 것은 지혜와 결혼하라는 의미입니다. 결혼하게 되면 부부가 얼마나 친밀합니까?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것들을 부부는 속속들이 잘 알고 친밀한 교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과 결혼하라는 것은 그만큼 말씀을 사모하고 친밀한 교감 가운데 말씀을 가까이하라는 것입니다. 또 말씀을 친구처럼 여겨 친밀한 관계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지혜의 말씀, 훈계의 말씀이 우리를 음녀에게 빠지지 않게 지켜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매주 말씀을 공부하고 메시지를 듣고 소감을 쓰고 일용할 양식을 먹고 나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를 통해 말씀이 우리의 어두운 내면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수시로 죄의 유혹을 받아 넘어지는 우리를 훈계하고 책망해서 빨리 죄에서 빠져나와 생명의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생명의 길로 여기고 굳게 붙들어야겠습니다. 세상은 꿀을 떨어뜨리는 음녀의 유혹을 따라 살지라도 우리는 꿀송이보다 더 달디단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세워주신 가정 안에서 배우자와 함께 충분한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5장 15-18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녀의 집을 기웃거리지 말고 네 우물과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고 말합니다. 아들에게 그의 우물과 그의 샘이 있습니다. 결혼한 아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배우자와 더불어 건강한 행복을 누리도록 결혼이라는 제도를 세워주셨습니다. 배우자를 사랑하며, 배우자로 인하여, 배우자와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입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5:19).” 우리 결혼하신 형제들은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은 아내가 옆에 있습니다. 언제라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사랑하며 기쁨과 안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음녀를 찾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복 되고 좋은 샘은 내버려두고 타인의 우물, 타인의 샘을 기웃거리고 몰래 마시는 것입니다. 사랑스럽고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은 복된 우물과 샘이 있는데 왜 그걸 내버려두고 다른 우물과 샘을 기웃거리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내 우물과 샘을 귀하게 여기고 복 되게 해야 합니다. 익숙해졌다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함부로 말하지 말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스럽게 안아주어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고 기뻐해야 합니다. 존중하고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나의 우물과 샘은 더욱 복 되게 될 것이며 그 복은 나와 더불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우물과 샘은 현재 나의 배우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배우자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입니다(창2:23). 배우자가 곧 ‘나’라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소중하고 복된 배우자를 놔두고 한눈 팔면 안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포도원을 허물고자 하는 여우 같은 음녀를 주의하고 반드시 쫓아내야만 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복된 가정을 이루어갈 때 그 가정에서 사랑스러운 믿음의 자녀들이 태어나고 그들 또한 앞으로 올바르고 사랑스럽게 성장해 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혹 많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빠져도 빠져나와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 앞에서(5:21) 살고자 노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정욕의 유혹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 우물과 샘을 복되게 하고 그 샘에서 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계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어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일평생 말씀을 내 누이, 내 친구라 하며 가까이하고 내게 허락하신 우물과 샘인 배우자를 최고로 여기고 사랑하면서 가정의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로써 세상 유혹, 특히 음욕의 유혹에서 벗어나 존귀와 영광의 축복을 누리고 참된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